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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 10년 전이었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란 책을 읽고 정말 문학의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신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못지않은 감동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람과 자신의 장애에 관한 글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 B 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거라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람에 대해 쓰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 썼다. 특히 화가 고 김전선에 대해 쓴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든다.
이뿐인가? 저자는 언젠가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미국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영화 <슈퍼맨> 출연 이후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쳤고 전신마비 중중 장애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고 중인데 그것을 매스컴이 너무 크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 되었다’고. 그때 리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무척 언짢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슈퍼맨이라면 그래요, 전 슈퍼맨이지요. 그러나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의 슈퍼맨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지요.”
이렇게 말하던 크리스토퍼 리브도 고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학생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저자의 친구 김윤을 회상했고 그 친구 역시 고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글은 2001년도에 쓴 것으로 참 새삼스럽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진짜 슈퍼맨’이 되기 위해서,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을 계속한다(147p)고 했다. 그렇게 말하던 저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저 글을 썼을 때만해도 저자는 꽤나 비장했던 것 같다. 장애자의 몸으로 대학 교수로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암 치료를 끝낸 직후였다. 그러니 얼마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랐을까.
또한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듯도 하지만 저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측은지심 내지는 이상한 눈초리로 많이 봤을 것이다. 사실 저자 보다 좀 뒷 세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살아생전 모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전에 자신이 거의 암 투병 환자로 많이 알려진 게 부담스러워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에 초점을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받았는데 심히 불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로 나왔기 때문이다.
‘천형 같은 삶’이라니. 누가 함부로 천형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봐도 불쾌하다 못해 무례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한 삶은 비장애인의 특권이고 불행은 장애인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런 이상한 이중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소치다. 그러자 저자는 즉각 해명에 들어간다. 저자는 자신의 장애는 천형이 아니라 축복이라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힌다.
첫째로 자신은 인간이라며 짐승이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또한 주위에 늘 좋은 사람만 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나는 10살 때 갑자기 오른쪽 팔 다리에 마비가 와 한 학기를 쉬고 전학한 뒤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때 은근 걱정했던 게 내가 장애가 있다고 아이들이 나와 안 놀아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또한 덧붙여 얘기하자면 나도 싫은 사람 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수평적 이해관계만 있을 뿐 장애인이어서 소외돼 본적은 없다. 그리고 세상엔 나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못지않게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세 번째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서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박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금은 좀 주춤하긴 하지만)나는 대본을 쓴 덕에 배우와 뛰어난 자질을 가진 연출을 만나고 그들과 웃고 떠들며 공연을 했다. 그것은 지금도 나의 자부심이다. 솔직히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누구는 잘난 척 한다고 하겠지만. (반면 속 썩는 것도 많다.ㅠ) 그리고 끝으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 중에서).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는 천운을 설명했는데 4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50가지, 100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인간관계 훈련 프로그램을 주도한 적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의 자랑 50가지’를 쓰는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처음에 “50가지나요?” 하며 한숨을 쉬지만 하다보면 정말 50가지 이상으로도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참, 이건 장영희 교수가 글 말미에 가르쳐 준 건데 나도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렸다. “책은 아무나 내는 줄 아나? 이렇게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있어 책을 낼 수 있고 간간히 날 알아보는 독자가 “선생님 책을 읽고 힘을 업었어요. 말해주는(182p)” 아직 그 경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책을 냈다. 그러므로 나도 저자와 똑같이 말하고 싶다.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저자는 무한긍정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난 새해 벽두에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행운 같이 느껴진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2019년 새해가 밝았고 어느 덧 첫 달이 지나간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무사히 살아지기를 바라며 조금은 불안하게 새해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불안은 나이가 들어도 안 없어지는 것 같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꼭 징크스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 온 패턴을 보면 안 좋은 일은 홀 수년에 일어났다. 올해가 홀수 해이다. 그래서 올해는 조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다. 저자가 대학교 2학년 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이란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보면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저자는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라고. (아, 이 얼마나 무한긍정인가!)
그도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살아보니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나쁜 일을 만날까 봐, 나쁜 일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조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저자처럼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평소, 뼈만 추스르면 산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암이 재발했고 또 어느 날엔가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죽기엔 아까운 나이였지만 그래도 조심하며 살지 않고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았으니 여한은 없지 않을까.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나 아버지 장왕록 박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 같다.
문득 천국은 어떤 곳일까를 생각해 본다. 저자는 천국에 있으니 벌써 오래 전에 목발과 다리보조기는 벗어던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여전히 목발을 짚고 저자의 표현대로 여전히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조차 아무런 이물 없이 사는 곳 아닐까?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