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평점 :
거의 2년 전에 줌파 라히리의 에세이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을 읽었고 소설로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단편 소설의 대가라는 줌파 라히리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집이며 두 번째 이탈리아어 소설이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이 작가는 자신이 부여받은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그 언어로 소설을 쓰는 등 자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한 나라의 언어를 온전히 배우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공부한 언어로 소설을 쓰다니 정말 놀랍다. 이 소설집에는 「경계」,「재회」,「P의 파티」,「밝은 집」,「계단」,「택배 수취」,「행렬」,「쪽지」,「단테 알리기에리」아홉 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흔히 소설집 제목은 단편 소설 중 하나를 채택하여 짓는데 여기에는 ‘로마 이야기’라는 소설은 없다. 작가가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면서 경험하고 관찰한 다양한 군상의 모습을 소설로 쓴 것 같다. 1954년에 나온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단편집 제목과도 같다고 한다. 이 중 몇 가지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리뷰를 해 보겠다.
첫 번째 작품 「경계」는 화자인 열다섯 살 소녀가 부모님을 도우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읽다 보면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매주 토요일이면 휴가를 오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데 소녀는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침실을 정리 정돈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미리 갖춰 놓는다. 집안일에 열중하면서 손님들이 눈치채지 않게 그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어린 나이지만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도 있고 부모님을 위해 돕는 것을 기꺼이 즐기는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이 나라를 싫어하고 시골에서 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소녀와 아빠는 엄마가 불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먼 나라에서 온 ‘나’의 가족들과 달리 이 손님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즐겁게 놀기도 한다.
한때 도시에서 꽃 장수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아빠는 청년들에게 맞아서 이빨이 부러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빠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치아가 없어서 웃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입을 열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동물들과 같이 살면서 땅을 경작하는 것을 좋아했고 야생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에 적응했다.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어왔지만, 로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에 경계심을 품고 살아가는 외곽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상처 난 삶을 묘사하고 있다.
「밝은 집」도 마찬가지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설움과 고통을 묘사한 이야기다. 어렵사리 마련한 햇볕 잘 드는 집에 이사를 와 다섯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이사한 기쁨도 잠시 못된 이웃들에게 갖은 괴롭힘을 받다 견디지 못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남편은 혼자 남아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가족을 그리워한다. 복식이 다르거나 피부가 까맣거나 언어가 다를 때 사람들은 경계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중산층 시민, 불법체류자, 이주민, 유학생, 관광객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공존하는 로마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경멸과 조롱을 받는 교수 이야기「재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거부당하고 떠나라는 협박 쪽지를 받고 상심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쪽지」등의 작품은 하나같이 이민자들의 팍팍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국경을 넘어선 이민자들은 이제 흔하게 우리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왜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게 인간의 본성인 것일까. 소설 속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들이 우리 자신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