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겨울 2022 소설 보다
김채원.성혜령.현호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평점 :
절판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요즘 이 계절에 어울리는 소설을 읽었다. 블로그 친구 희선 님으로부터 받은 책 선물인데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서 올해 안에 읽어야지 다짐하고 읽기 시작했다. 작고 얇은 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소설 보다시리즈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라고 한다. 각 작품 뒤에는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있다.

 



<빛 가운데 걷기>(김채원)는 어린아이와 함께 사는 노인 이야기다. 아이의 할아버지인 노인은 주기율표를 외우고 수업 노트를 복기한다. 예전에 교사였던 듯하다. 그 정도의 지식인이라면 아이와 친밀한 대화도 할 수 있고 공부도 봐 줄 수 있을 텐데. 아이는 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언어 치료를 받고 있다. 노인은 아이의 엄마였던 딸이 죽은 것에 대해 괴로워한다. 아니 괴로워하기보다는 죽은 게 싫다. 자세한 얘기는 없지만 아마 자살한 것 같다. 딸이 힘들어했을 때 좀 더 마음을 써서 도와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도 한다. 온갖 상념들은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기만 한다. 햇빛을 받으면 몰라보게 건강해진다고 했던 옆집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걷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혹시나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되면 아이 혼자 남겨지는 걸 상상하면서 걱정하기도 한다. 노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하고 불안해 보인다. 무얼 해야 하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 어쨌든 살아 있고 또 남은 삶을 이어가야 하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슬프고 아픈 기억, 복잡한 마음은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햇빛을 받으며 자주 걸을 것. 그러면 조금씩 견딜만한 나날도 오지 않을까.

 



<버섯 농장>(성혜령)은 고등학교 동창 기진과 진화의 이야기다. 진화는 10년째 인터넷 쇼핑몰에 다니고 있는데, 금수저인 나이 어린 사장을 저주하고 욕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한다. 기진은 그런 진화의 푸념이나 불평을 늘 참고 들어주었다. 기진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셨지만 남겨진 재산이 있어서 직장을 열심히 구하지도 않았고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진화가 기진에게 전화를 걸어와 휴대폰 개통 사기를 당해서 빚 독촉을 받고 있다는 사정을 털어놓으며 요양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한다. 기진이는 진화의 부탁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

 


 

기진과 함께 요양 병원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은 휴대폰 개통 사기를 친 남자의 아버지였는데 자신의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다면서 아들과 연락도 안 된다. 나는 어머니 병원에 모시기 위해 집까지 판 사람이다. 자신은 아들에게 효도를 받지 못한다. 내가 자식에게 줄 때는 지났다면서 하소연을 하고는 가버린다. 피해자인 진화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기진과 진화는 그 남자 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보고 뒤쫓아 간다. 참외를 먹으며 대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듯했고, 기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니 남자는 죽어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진화는 그 남자를 땅에 묻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진은 겁이 나면서도 진화를 돕는다. 어쩌다 보니 사기를 당하는 흔한 이야기인 듯한데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는 게 뜬금없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왜 기진은 옳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진화가 하자는 대로 행동했을까.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공유한 적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어디에 매이지 않고 사는 자신과 달리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진화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그랬을까. 버섯 농장에서 일어난 이 이야기는 흔하게 발생하는 끔찍한 죽음의 사건도 우발적인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연필 샌드위치>(현호정)는 작가가 꾼 꿈 이야기를 모티브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꿈 받아쓰기를 한 셈이다. 왠지 멋지게 느껴졌다. 꿈에 나온 규칙은 식빵 두 장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샌드위치를 만든다. 양상추와 마요네즈 소스, 토마토 등을 자유롭게 활용해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꿈이고 소설이니까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는 있겠지. 꿈속의 공간 복돼지 문구점에서 연필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는 고통은 문구점 아주머니의 감시를 받으며 이어진다.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몸부림치지만 빠져나올 구원의 손길은 없다. 꿈에서도 꿈과 현실 사이를 느끼며 이야기를 쓰는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화자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거식증 이야기까지 상기한다. 건강했던 할머니가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 식사를 거부한다. 엄마는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밥을 많이 먹었지만 할머니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건강해지는 쪽은 엄마 쪽이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 밥을 열심히 먹었던 때처럼 몸이 건강해지지는 않고 오히려 말라만 갔다. 모녀간에 서로 영적인 탯줄로 이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환타지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희선 님은 이 책을 얇은 책이고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기도 해서 본다고 했다.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소설이 한 편이라도 있기를 바란다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한다면 첫 번째 단편 <빛 가운데 걷기>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멋진데 내용과 좀 동떨어진 건 아닌가 생각하다가 거듭해서 읽어 보니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되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 딸을 잃은 노인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불안하고 복잡하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삶, 그 노인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스스로 이해(인정)하고 그러려면 시간과 풍경이 필요하고 그래서 주인공을 걷게 한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와서다. 전혀 몰랐던 소설 보다시리즈와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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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12-12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얇아도 바로 읽지 않기도 하는 책이군요 소설이 세편이어서 부담은 덜 되지만... 어떤 때는 괜찮기도 하고 어떤 때는 뭐가 뭔지 모르기도 하네요 겨울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면 좋을 텐데, 햇빛이 덜 받아서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겠습니다 사람은 어떻든 살아 가기도 하네요


희선

모나리자 2025-12-12 20:10   좋아요 0 | URL
네, 오래 묵혀 두었다 읽게 되었네요. 덕분에 잘 읽었어요. 희선님.^^
이 시리즈가 꾸준히 나오고 있더군요. 삶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닮은 점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말에 눈이 많이 온다네요. 감기조심하시고 따뜻하게 잘 지내세요. 희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