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일본어공부를 하고 있지만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어서 알아두는 것도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에 읽게 되었다. 일본의 지성이라는 시라이 사토시와 우치다 다쓰루의 대담집이다. 주로 현대 일본의 국가 문제를 이야기하며 애국또는 우국의 심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대화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무겁고 부끄러운 주제의 이야기도 돌려 말하지 않고 과감하고 시원스럽게 꼬집는 화법이 위트와 함께 몰입하게 하는 힘인 것 같다.


 시라이 사토시는 이전에는 레닌을 연구했는데 20113월 동일본 대지진과 그 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애국이나 우국을 말하는 내셔널리스틱한 상황을 직시하기로 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원래 프랑스 문학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정치적 사상보다는 문체의 리듬이나 신선한 수사에 마음을 끌리는 편인데 시라이 사토시의 화제의 책 영속패전론을 접했던 감동과 놀라움의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쩌면 서로 성향이 다르고 거의 한 세대 정도의 연배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 잘 통하는 조화로운 대담이 놀라웠다.


 1장은 왜 지금 전후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이야기한다. 시라이 사토시가 영속패전론를 쓰게 된 계기는 동일본 대지진, 특히 원전 사고였다고 한다. 전부터 자국에 대해 대단히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빈틈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던 만큼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외교 전문가도 아니고 일본 전후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보자는 결심으로 밀어붙인 이야기다.


 이 대담 내용의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철학의 세계에서 말하는 애국주의애국심으로 번역되는 말, 즉 패트리어티즘(patriotism)과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정의를 확실히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전자는 자연적인 것’, 후자는 조작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간단히 말하면 패트리어티즘은 선하고, 내셔널리즘은 악하다는 것이다. ‘애국심은 불량배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유명한 경구처럼 두 번째 의미의 애국에 해당한다. 아베 총리부터 혐오 발언을 일삼는 극우 성향의 시민 활동가, 향토에는 조금도 애착이 없으면서 유치한 전쟁을 취미로 타 국민을 향한 공격성만을 드러내는 악성 내셔널리스트들이 판을 치는, 이른 바 불량배들의 애국주의가 끝을 모르고 창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대화에서는 애국주의를 분명하게 내세우기로 했단다.


우치다: 뒤틀렸지요. 어디에서나 패전국의 내셔널리즘은 뒤틀리게 마련입니다. 원리적으로 깔끔한 내셔널리즘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패전국 국민은 좀처럼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시작했고, 온갖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며, 끝내 패한 나라의 모습을 긍정하는 데에 심리적 저항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이 성립하려면 자국이 벌인 부끄러워해야 할 범죄든 인류사에 자랑할 만한 공헌이든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가가 한 모든 일을 내 일처럼받아들이는 국민만이 깔끔한 내셔널리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고 변변찮은 일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식으로 반응해서는 제대로 된 내셔널리즘이 성립하지 않습니다.(P33)

 

시라이: 그런데 아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올림픽을 무사히 개최하기 위해서는 2020년까지 중국, 한국,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영토 문제를 몰아붙일 정치적 선택지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가 보이콧하면 그것만으로도 모스크바올림픽의 재판(再版)이 되는 셈이니까요. 아베 정권은 영토 분쟁의 긴장을 고조시켜 지지율을 높여온 측면이 있는데, 계속 긴장감을 높이려고 시도했다가는 더 이상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지난번 아베 총리는 미국 네오콘 계열 싱크탱크로부터 허먼 칸 상을 받고 크게 기뻐했지만, 정작 유엔 총회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이쯤 되면 보수 미디어는 노발대발하며 예의 미일동맹의 위기를 외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영속패전 체제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눈에 막이 씌었는지 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P86~87)


 현실을 꿰뚫고 바라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면서 웃기기도 하고 속이 후련해진다. 또한 뭐든지 세계 제일의 기록을 지향하는 일본인의 알 수 없었던 면이 보여서 흥미로웠다. 패전 후 대미 종속 체제 속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아시아를 향해서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이것을 시라이 사토시는 메이지 이래 제국주의 정책이 성공하고 1945년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전중 세대였던 우치다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오래 머물렀지만 무엇을 경험했는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조차 너희들은 민주주의의 자식이다. 모든 전쟁 책임으로부터 결백한 너희들이 일본의 미래다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들어왔기에 훗날 전쟁 책임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깜짝 놀라곤 했다는 기억을 말한다. 가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억압된 기억은 반드시 증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전후 70년이 지나서야 절절하게 느꼈다고 한다.


 무라카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의 중국 경험은 듣지 못한 채 침묵을 유언처럼 물려받았다. 중국과 관련한 껄끄러운 문제를 다루었다는 중국행 슬로보트를 언급했는데 난 처음 알았다. 아버지 세대의 침묵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문학적 주제로 잡고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이러한 노력들이 있어 다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영속패전이란 어떤 개념일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배 형태로 전쟁이 마무리 되었지만 전후 일본은 그 패배를 속인다. 이것을 시라이 사토시는 패배의 부인으로 부르는데, 왜 패전을 부인해야만 했을까. 전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전후에 다시 지배적 지위에 계속 머물렀던 점을 꼽는다. 비슷한 상황이 떠오른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들이 후에도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우리의 경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패전 사실을 가능한 한 애매모호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미국이 원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대미 종속 구조를 형성한 근본 원인이 된다. 전후 일본이 지켜온 국가 전략의 기본이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이었지만 냉전 구조가 무너졌음에도 자립은커녕 자민당은 미국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영속패전의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해석개헌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아베 정권과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매우 건전하지 못한 동일혈족의 권력 집중이다. 저자는 그보다는 그 혈족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언급한다. 근대 일본의 트라우마는 메이지유신으로부터 15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주제로 떠오르지도 못했고 언어로 표현되지 못했음을 언급한다. 그런 정신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대 일본의 정치인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신랄한 지적이다.


 패전을 부인은 많은 것을 야기했다. 헌법을 소중히 여기자는 내용으로 강연을 했지만 주최 측으로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후원을 거부당한 사례를 들어가며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사안일주의를 지적한다.


‘(중략) ‘윗사람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아리는 잔챙이들이 지금 일본의 정치 기구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 하급 관료들이 멋대로 이렇게 해야 위에서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죠. 자신의 생각이 아니니까 책임질 생각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윗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추측에 기초한 판단이기 때문에 책임은 모조리 윗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러나 위사람은 그런 지시를 내릴 생각이 없었을 터라 당연히 책임 따위는 지지 않습니다. (중략) 오늘날 일본은 견습생 사환이 주인님의 의향을 헤아리고 그것만으로 시스템이 움직이는 구조입니다.’(P126~127)


 어느 나라든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싶다. 윗선에 잘 보이려고 미리 좋아할 만한 것을 연구하고 밀어붙이고 결국 문제가 터지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우치다: (중략) 오키나와 반환 이우 43년 동안 멍하니 손가락을 입에 물고 미국에서 토끼를 풀어주기를 기다리는 일본은 한비자수주대토(守株待兎)’ 일화에 등장하는 농부와 영락없이 닮았습니다. 확실히 일본은 대미 종속의 보상으로 두 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랬었다고 영원토록 대미 종속의 길을 걸으면 좋은 일이 계속 있으리라고 추론하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오류입니다. (중략) 일본은 어느새 대미 종속 전략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고, 대미 종속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국익에 필요한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전술적 우회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P205~207)


 위에서 두 번의 좋은 일이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것과 1972년 오키나와 시정권(施政權)을 돌려받은 것이다. 정치가 돌아가는 현실을 꿰뚫고 있는 지성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바라본다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겠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나온 2000년 무렵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1980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의 흐름은 태평양전쟁 때와 같다고 말했단다.목적도 모른 채 전쟁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이겼다며 기뻐한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전황이 나빠져 큰 어려움에 처하고 만다. 지금(2000년 무렵)이 전시 중이라면 임팔 작전 근처의 시기에 해당한다는 내용이다.


 1980년대 일본은 경제 전쟁이라는 형태로 미국과 치른 전쟁을 치러왔고 그 당시 미국을 박살냈다는 이야기다.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유적 통찰도 감탄스럽다.


사과란 상대에게 이쪽의 사죄 의사가 전달될지 아닐지의 문제이지, 무슨 말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언어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실제로 미안한마음이 있으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같은 국민인 한, 죽은 자들이 저지른 죄를 떠안을 의무가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나 자신이 죽은 자들의 핏줄로 이어졌기에 죽은 자가 저지른 죄나 짊어진 빚은 나의 채무입니다.‘(P229~230)


 잘못된 역사를 사과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다보면 그것이 사실인 양 착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억압된 침묵은 언제가 터지기 마련이고 현재는 국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젊은 층이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치다의 사과에 대한 이 견해가 귀하게 느껴진다.


 우치다가 일본인의 극단적인 성격을 논하는 부분은 섬뜩했다. 이 부분 또한 진실을 왜곡한 채 세월을 보낸 억눌림이 이런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베를 지지한다는 사람들마저도 아베가 실정을 범하여 자민당 내에서 아베 끌어내리기가 시작되고 각 파벌이 모이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면 즐겁게 방송을 본단다. 마치 게임을 보듯이. 분열성 인격 장애가 보인다는 아베를 논하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후텐마 기지를 둘러싼 문제와 관련하여 오키나와현 지사의 양보를 받아내기가 무섭게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든가 집단적 자위권 용인을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직후에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것으로 대미 종속과 대미 자립을 번갈아 들고 나오는 기이한 행동을 언급한다. 참 코미디가 따로 없다.


 자국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춰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움 받을 용기를 무릅쓰고 당당히 주장하는 이런 지성이 있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일 것이다. 정작 정권의 관계당사자에게는 거슬리겠지만. 아무튼 의외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그런 만큼 리뷰로 멋지게 담고 싶었지만 일본의 정치나 사회의 상황을 담아내는 것은 나의 한계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이만큼이나 알게 되어 뿌듯한 마음도 있다.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친절한 그들의 겉모습만이 아닌 일본인의 다른 마음속을 엿볼 수 있게 된 것도 소득이다


 그 나라의 국민성은 그 나라의 역사적 사실과 배경 속에서 형성되어 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조처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에 나선 일본 정부가 앞으로 추가 규제에 나설 수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들린다. 일본의 전후 근현대사를 논하는 두 지성의 냉철한 대담을 통해서 우리의 상황과 비교분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겪은 동북아시아 국가에서도 많이 읽힌다니 다행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의견*

책의 판형이 작고 본문 내지의 두께는 좀 두꺼운 편이었다.

책이 작아서 독서대에도 잘 고정이 안 되고 들떴다.

다 읽고 나서 살펴보니 몇 군데 꿰맨 부분이 뜯어져있었다.

재미있고 유익하고 만족스럽게 읽은 대담집인데

판형이 보통 책처럼 좀 넓고 종이가 약간 얇았다면

그런 점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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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전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영남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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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쟁은 정치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또는 적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군대라는 조직은 유지되고, 변화무쌍한 상황마다 그에 맞는 전술이 필요하다. 오합지졸인 군대보다 모든 것이 정예화 되어 있고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한, 준비된 군대라면 승리를 예측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전술에는 많은 것이 포함된다. 군인의 선발부터 대우문제, 무기, 훈련, 보병과 기병 등 군인의 역할과 전투대형 등 조직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지휘관의 자세라든가 세부사항에 대한 것을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전술론>은 2011년 처음으로 초판이 출간되고, 이번에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의 요청에 의해 기존의 번역 내용을 좀 더 다듬어서 각종 시각 자료를 첨부하여 읽기 쉽도록 재작업을 했다 한다.


 전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영원한 고전 <삼국지>나 전쟁영화, 드라마를 통해서 조금씩 접했음을 알게 된다. 예전에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 <주몽>이나 <대조영>등을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주로 적군과 아군이 싸우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여기서도 무슨무슨 진법이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매복술로 적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통쾌하게 이기는 장면은 얼마나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지. 여자들에게 재미없는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 그보다 더 한 것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아들을 둔 부모입장이라면 농담거리로 지나칠 여지가 없다.


 이 책은 파브리지오 콜론나 경을 비롯한 피렌체 지성인들이 코시모의 정원에서 주고받은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키아벨리가 책으로 엮은 것이다. 토론자들의 해박하고 방대한 군사지식과 전쟁사의 예가 막힘없이 술술 논의되는 장면은 참 놀랍다.


 1장과 2장은 시민군에 대한 고찰과 무기, 훈련, 전술을 담고 있다. 그 당시 군인은 시민군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시에는 군인으로 충성을 다하고, 평화시에는 원래의 직업으로 복귀하도록 제도화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적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군사를 키웠지만, 그 군인들이 로마인에게 위협을 가하고 원로원이나 로마제국에게도 유해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황제가 그들에게 살해당하거나 황제를 선임하고 추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하니 아이러니다. 직업군인의 단점을 예로 든다. 전쟁을 계속해야 하고 계속 월급을 지불해야 하며, 왕국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직업군인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들의 일부는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군과 관련된 방위산업의 비리도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이십 대 초반의 청년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지며,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만, 실상은 비리와 불이익한 처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정치권이나 경제계 재벌 등 높은 사람들의 자녀들은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게 있는데, 남자들이 군대에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 사건, 사고 등 어떤 이유가 되었건 간에 꽃 같은 청춘을 피워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제도 철원 군부대에서 K-9자주포 훈련 중 폭발사고로 군인의 사망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전술이라 함은 군대조직을 움직이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도 귀히 여길 줄 아는 마음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 관계자들은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하여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했으면 좋겠다.


 북한뉴스를 통해 군인들의 사열 행진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해서 그렇게 자로 잰 것 같은 광경을 연출하는 것일까. 자신들의 이익과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국제세계의 맹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모한 행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8월 위기설이다 해서 불안하고 시끄러운 상황이다.


 오백년 전에 쓰인 이 전술의 내용이 오늘의 군대에 얼마나 적용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는 최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시대이고, 과거에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정복 전쟁이었지만, 지금은 종교의 이념을 비롯한 기타 이유로 변질된 지 오래다. 하지만, 수 천 년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 군대라는 조직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그 기본적인 사항이나 정신은 배울 점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휘관의 자세라든가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독려하는 방법 등은 지금도 유효하리라 생각된다. 마키아벨리도 <로마사 논고>에서 “용기와 준비는 운명을 극복한다.”고 했듯이 조직이든 개인이든 미리 준비하고 나아가는 자는 누구보다 유리하다고 하겠다. 군대 조직을 운영하는 것도 어쩌면 작은 계획의 설계와 점검을 시작으로 실행을 규칙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인간의 삶과 유사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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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의 대결단
소치형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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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현 시국 상황에 적절한 느낌이 들어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 정권의 대통령 탄핵을 놓고 기각이냐 인용이냐는 주장이 분분한 가운데 쓰인 책이다. 국가를 주 대상으로 여러 부분의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의 자질, 경제위기의 극복방안, 공공부문 개혁, 전관예우 척결, 청년고용 문제, 국가 안보,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한 국가는 지도자 혼자만의 나라가 아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많을 때, 그들의 권력의 힘과 야망은 더욱 커진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에서 학습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없었다’ 는 말은 어이없지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저 통치와 복종만 있어왔고, 자치(自治)의 만족감은 없었다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바로 전 정부만 보아도 그렇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사사로운 개인을 보호하고 그들의 농단에 휘둘렸다.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국가는 타살(他殺) 당하지 않’고 내부적 모순으로 인해 자멸한다는 말은 바로 그 시국을 두고 한 말인 것처럼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진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국가의 ‘자살’ 원인은 이기주의와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여 누리기 위해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경쟁적으로 늘어놓은 공약의 대부분은 지켜지지도 않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국민이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칠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충신 지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다산 정약용선생은 말했다고 한다. 이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치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걱정하는 충신 지사는 온데간데없다. 자신의 밥그릇만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뿐이다. ‘대권 주자들이나 정치 지망생들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국민을 상대로 꿀 ’꿈‘이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만일 그 ’꿈‘이 없다면 빨리 정치판을 떠나라!’(P53)는 저자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국민의 수준과 의식’은 한 나라의 역량이기도 하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국민의 힘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인기영합주의에 눈과 귀가 멀면 안 된다. 위기는 천천히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올바른 지도자상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자질은 물론 인간성에 해당하는 도덕성은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한다. 대중은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면서, 겉모습에 홀린다. 옛날의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믿어버린 결과가 얼마나 참담하게 만들었는가. 수많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촛불 민심은 이러한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라는 그리스의 헤라클리투스의 말은 단지 리더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국가의 기본이 되는 구성원인 개인도 마찬가지다.


 요즘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이 제4차 산업혁명이다. 이로 인한 사회 변화 속도는 산업혁명의 10배, 규모는 100배, 임팩트는 3000배라고 한다. 자동화와 로봇의 등장으로 실직자는 늘어날 것이고 경제와 부의 중심이 이동하게 된다. 사회안전망 구축만이 수요 부족 문제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과감히 잘라내어 경제민주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것만이 성장의 길이라고 한다.


 교육 시스템도 미래 지향적으로 혁신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국가 각 부문마다 비리와 부패가 드러나는 사건들을 읽으면서 걱정이 된다. 특히 국가 안보에 가장 중요한 방위산업에 대한 비리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어느 분야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썩었다면 어떻게 후대에 이런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전관예우의 ‘먹이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 먹이사슬이 비리의 온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전관예우의 악습은 더욱 심하다고 한다. 공기업의 부채가 위험 수위를 넘은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과급 잔치를 벌여 챙겨갈 이익은 모두 챙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의 국민의 정서를 해칠 뿐만 아니라, 노동의욕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를 이루는 근간은 누가 뭐라 해도 법 제도일 것이다. OECD에서 드러난 사법제도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도는 27%이며, 조사 대상 42개국 중 밑바닥 수준인 39위라고 한다. 반군 조직과 극우단체의 테러가 난무하고 마약 범죄가 들끓는 콜롬비아(26%)와 비슷하다고 하니 참 허탈하고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막강한 권력은 누리되, 책임과 의무는 뒷전이었던 결과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대결단>은 지도자를 위시한 국민 하나하나 모두가 힘과 뜻을 합쳐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자는 저자의 염원이 함축되어 있는 책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 그 다음 세대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 ‘탈조선’ ‘헬조선’을 붐을 이루어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빠져나간다면 알맹이 없고 패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 후대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개혁하는 일은 하루빨리 구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8장의 내용에 역사속의 ‘아홉 중국인’의 지혜로운 삶은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청년세대, 부모세대 모두 읽어보고 건강한 나라와 사회는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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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국가를 생각하다
토드 부크홀츠 지음, 박세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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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속의 풍부한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풀어간다. 문학, 음악, 영화, 드라마, 오폐라 등 작품에서도 샅샅히 찾아낸 풍부한 재료로 위트 있고 맛깔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는 국가 분열의 원인을, 2부는 리더의 자격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예로부터 한 가문의 번영에 대해 말할 때 자손의 번성을 예를 들었다. 하나의 국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적당한 인구는 부강한 나라의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요즘은 세계 여러 나라들의 출산율이 하락하면서 줄어드는 인구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로 인해 고령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는 문제로 떠들썩할 지경이다.


 국가 분열의 원인의 첫 번째 사례는 국가가 번영할수록 출산율은 하락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부유해질 때 출산율은 떨어진다. ‘대학 학위는 대단히 놀라운 피임약’(P39)이라는 간단한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출산율은 현격히 떨어졌는데, 애완동물을 키우는 인구는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출산과 육아에 드는 시간과 기회비용 대비, 더욱 편하게 살아가려는 인간의 욕망은 전통적이 삶의 모습도 바꾸어 놓는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스파르타의 토지 소유 체제는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나라는 한 번의 공격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인구 감소로 인해 서서히 몰락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P53)

'출산율 하락은 경제적, 정치적 번영으로부터 비롯되며, 이는 장기적인 통치를 추구하는 국가에 새로운 그리고 때로는 극복하기 힘든 도전 과제를 안겨준다는 사실’(P55)을 깨달아야 한다.


 또 ‘국가는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 없이 부를 얻거나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국제적인 교류는 국가의 관습과 전통을 흔들어놓을 것이다.’(P76)라고 하며, 무역이 없으면 국가의 풍요도 없다고 했다. 라구사 공화국이 몰락한 이유는 빈곤 때문이 아니고 ‘지나치게’ 부유한 때문이었다. 앞서 말 한 것처럼 생활수준이 상승하면서 출산율 하락을 겪은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사라진 이유는, 너무 다양한 민족과 관습 그리고 영토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빚은 달콤한 독약이며 민간 부채보다 정부의 부채가 더 위험한 이유를 이야기 한다.


 1600년대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1500년대 중반에 유리 공예와 직물 염색, 가죽 공예의 엄청난 성공으로 경기가 살아났다. 정부는 상인들에게 무거운 관세 부담을 주었고 그로 인해 가격은 두 배로 상승,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게 된다. 자연히 기업과 근로자들은 생산 의욕을 잃어버렸고 생산성과 혁신은 점점 위축되었다. 이렇게 정부의 조세정책에 따라 근로 의지를 잃게 되면 한 나라가 쇠퇴하거나 정체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이민자로 넘친다. 유입되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번영이나,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종교나 문화적인 전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기 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며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나아갈 때 더불어 살 수 있는 국가로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리더의 자격을 이야기하는 사례로 알렉산드로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메이지 유신의 주역격인 사카모토 료마, 코스타리카의 돈 페페와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에 대한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저마다 이 리더들은 부패로 얼룩진 권력자들과 대항하거나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이끌었다. 때가 되면 과감히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리더였음을 알 수 있었다.


 현 정국이 시작되기 전의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 대비되는 지도자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책임지고 물러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르쇠 일색으로 버티며 끝까지 추한 모습을 보인 국가 리더라니. 이 책 제목과 같이 다시, 새삼스럽게 국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국가란 리더 혼자서 휘두르는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성원인 국민과 더불어 공동체 의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며 소통이 중단되지 않는 나라만이 번영을 향해 한 발자국씩 옮길 수 있음을 알았다. 꽤 많은 분량임에도 다양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과 통찰을 엿볼수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점점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국가관이 희미해져가는 요즘 시대에 꼭 읽어볼 만한 교양서, 필독서로 손색없는 책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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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예금통장 - 고백 그리고 고발 다음 이야기
안천식 지음 / 옹두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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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찢어진 예금통장>은 안천식 저자의 <고백 그리고 고발>의 후속편으로 쓰인 책이다. 작년 9월 그 책을 읽고 만인에게 공평하게 다루어야 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분노와 불편한 마음에 휩싸인 적이 있다. 10여 년간 20번의 소송에 번번히 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좀 더 투명하고 솔직해지기를 기대하는, 멈추지 않는 그의 집념에 미미한 힘이나마 보태보려는 마음으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여전히 읽기도 쉽지 않고 반복적인 내용이 되풀이되고 재미도 없다. 심지어 화가 나기까지 한다.


 나도 저자처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전편에서 다루었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김포시 고촌면 향산리에 사는 기노걸이 1997년 9월, 자신 소유의 토지와 건물을 19억 6천만 원에 D건설에 매매하기로 하고 부동산 매매계약을 체결한다. 매매대금의 절반인 9억 8,300만 원을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받은 후, 1998년 IMF 사태로 D건설은 부도가 났고 나머지 잔금은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대기업 H건설은 D건설로부터 부동산 매매계약을 승계 인수받았으며, 1999년 11월 24일 H건설은 기노걸과 새로운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잔금 9억 8,300만 원을 계약 체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지급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H건설이 증거로 제출한 이 사건의 계약서에는 매도인 기노걸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체로 작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기존에 기노걸의 계약서에는 한문 인감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이 사건 계약서에는 한글 막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뀐 계약서가 기노걸이 사망한 후에야 법정에 제출되었다는 사실도 의문점으로 남는다.


 증인 A,B의 거짓 증언, 증인C는 진술을 번복한다. 또 2000년 2월경에 작성된 향산리 주민 4명의 위조된 부동산 매매계약서 4건도 추가로 발견된다. 이것을 추적한 결과 증인A의 필체로 드러났고, 그 관련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이 사건의 최종 승리자는 H건설이었다.


 판결의 주요 내용은 증인 A,B와 사망한 기노걸의 진정한 의사에 의하여 작성되었음이 인정된다는 점, 해지된 농협통장이지만, 병석에 있던 기노걸이 착오로 계좌번호를 불러주었을 가능성, 막도장으로 날인하는 것을 매도인 기노걸이 승낙하였을 가능성, A의 증언 중 기노걸이 건네주는 도장을 이지학이 날인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까지 허위로 단정할 수 없으므로 이 계약서의 진정성립을 인정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점, 증인 C의 증언의 상당 부분이 위증죄의 유죄로 확정되었더라도, 기노걸의 막도장을 누가 날인하였는지 기억에 없다는 부분까지 허위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계약서의 진정성립을 인정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기을호(기노걸의 아들)측에서 증거자료로 제출한 부동산 매매계약서 등 Y건설에서 기노걸에게 보낸 ‘승계계약에 협조해주지 않아 토지수용권을 발동하겠다’는 내용의 통고서, 예금 계약을 해지한 찢어진 예금통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소하기에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 기을호의 대리인으로서 저자는 2006년 12월 12일 제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소송 패소, 2007년 10월 11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 기각, 2008년 1월 17일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1차로 패소 판결이 확정되었다. 대기업 H건설은 승소 판결문으로 기을호의 토지를 빼앗아 갔다. 분명히 약탈이었고, 이러한 허무맹랑한 판결에 도저히 승복할 수 없음이다.


 약자들이 기댈 곳은 법밖에 없다. 그런데 법은 약자를 외면한다. 대형로펌을 오른팔로 이용하여 휘두르는 대기업의 횡포에 약자는 다시 한 번 짓밟혀지는 현실이다. 철저하게 신분을 보장받는 법관에게 재판에 관한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하는 현 구조, ‘전관예우’는 권력의 남용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재판권의 남용은 타 권력보다 우선하여 예방, 견제되어야 할 것이다. 현직 변호사로 일하면서 사법부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쉬운 일 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의 지난한 노력, 집념어린 열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사법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일일까. 단시간에는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서서히 믿을 것은 법밖에 없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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