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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14_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
0.
물질의 세계 속에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유는 어떻게 물질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가?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정확히 나의 몸이 아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론으로부터 주체성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을까?
1. 존재론적 문제
EBS에서 <빛의 물리학>이란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까지, 물리학의 역사를 꿰뚫는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특히 코펜하겐학파,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중 슬릿 실험 따위가 나오는 양자 역학은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14장에 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지젝이 이전에는 살짝살짝만 인용하던 양자 물리학을 아예 통째로 한 장에 걸쳐 들고 나온 것이다. 양자 역학이 과학자들에게도 어렵다는데 지젝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살짝 의심을 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가려낼 재주는 없다. 여하튼 그런 의미로 이 장을 요약하지 말고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이제껏 정리해 온 것이 아까워 조금만 해볼까 한다. 하긴 언제는 제대로 이해해서 요약했었나...
오늘날 철학적 재사유를 요구하는 과학적 발견은 양자 물리학이다. 양자 물리학과 우주론은 철학적 함의를 갖고 있으며, 철학에 도전을 재기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양자 공식들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현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분명히 우리의 일상현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이 현상들은 과학자의 상상력이나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정신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등등의 이와 유사한 사변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양자 물리학의 명제들은 오직 복잡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상식적인 존재론과 이 물리학의 역설적 함의들(공시성, 뒤로 흐르는 시간 등)을 상식적인 존재론을 갖고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그러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를 무시하면 뉴에이지의 신비주의로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p1604 」
이 작업에는 피해야 할 지뢰도 만만치 않다. 여하튼 우리의 얄팍한 상식으로 양자 물리학과 철학을 엮으려다간 엉뚱하게 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일단 새기고 시작하자.
2. 실재 속의 지식
상징적 현실과 양자적 원-현실에는 유사성이 있다. 일종의 누빔점이 그것이다. 누빔점 비유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데, 지젝은 보어를 옹호하며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상자의 문을 열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으며, 관찰자의 개입과 동시에 파 기능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 누빔점을 통해 양자적 원-현실은 보통의 현실로 이행된다.
「상징적 현실의 기본적인 특징은 존재론적 불완전성, 비전체에 있다. 그것은 아무런 내재적 정합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부유하는 시니피앙들’의 다수성으로, 그것은 오직 주인-시니피앙의 개입을 통해서만 안정될 수 있다. - 어떠한 상징적 개입 없이도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적 현실과는 분명히 반대로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 -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양자적 원-현실 또한 자신을 안정화시켜 일상적 대상들과 시간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보통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동적인 ‘누빔점(여기서는 파 기능의 붕괴라고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야말로 양자 물리학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결과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한 비정합적 원-현실과 그것을 완전한 현실로 구성하는 그것의 등록의 탈중심화된 작인 사이의 (시간적) 간극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현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다. 그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등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p1615」
「개시 또는 은폐의 구조, 사물들은 항상 배경의 일부가 잘려나간, 결코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공백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사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유한한 지각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구조이자 사실이다. 아마 바로 거기에 양자 물리학의 궁극적인 철학적 결론이 있을 것이다. 양자 물리학의 가장 탁월하고 대담한 실험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현실 묘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며, 불확정적임을 입증하고 있다. -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의 결과로 간주되는 결여는 현실 자체의 일부인 셈이다. p1621~2」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주장한 비전체, 빗금친 대타자 같은 것들이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사유된다는 말이다.
「 다시 한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이데거와 관련해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칸트적 초월론의 역사적으로 발본화된 버전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의 역사는 인간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존재의 의미의 시대적 개시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궁극적인 한계이다. -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미 역사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개시를 전제하고 그것 내에서 움직이며, 단지 일어날 뿐인 이러한 개시들의 심연 같은 놀이가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적 함의는 우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 더 앞으로 나아가 현실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 의해 설정된 한계는 즉자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공백으로부터, 즉 '무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다수의 존재자로 그득한 것으로서의 없음(무)이라는 양자적 개념의 기저에 깔린 함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현실-그-자체는 없음, 공백이며, 이 공백으로부터 부분적인, 즉 아직 완전히 구성되지 않은 현실의 정황들이 출현한다. 이 정황들은 결코 '전체'가 아니며, 마치 특정한 제한된 관점으로부터만 보일 수 있는(존재하고 있는)듯이 항상 존재론적으로 일부가 잘려나가 있다. 오직 일부가 잘려나간 다수의 우주만 존재할 뿐이다.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백만이 있을 뿐이다. 또는 과감하게 단순화해 정식화해보자면,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한정적인 우주는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p1622 」
지젝이 선호하는 양자 물리의 이론을 한 번 들여다보자.
「양자 혁명은 여기서 파와 입자라는, 본래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원성 내에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개적으로) 파에 특권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파를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입자들을 파들의 상호작용에서의 결절점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에서 파는 입자(또는 입자에 일어나는 것)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보어가 양자물리학은 현상들의 ‘배후에서’ 실질적 토대로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상들을 다룬다(측정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물’의 물로서의, 실체적인 존재자로서의 출현 자체가 지각을 통한 파 기능의 붕괴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상식적인 관계는 뒤집힌다. 즉 ‘객관적’ 사물이라는 개념은 지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것인 반면 파의 동요가 지각에 앞서며, 그리하여 보다 ‘객관적’인 셈이다. p1628」
3. 행위자적 실재론
‘행위자적 실재론’은 ‘바라드’라는 철학자(?)의 논리이며, 바라드는 보어의 물리학을 체계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세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절에서 보어는 바라드를 통해, 바라드는 지젝을 통해 내게 읽히는 셈이니,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보어가 얼마만큼 보어에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보어의 교훈은 현실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인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보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과 같다.
「보어는 그러한 입장의 관념론적 전제를 폭로한다. 즉 만약 현실이 ‘저기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에 무한대로 접근한다면 -최소한 함축적으로는- 관찰자인 우리는 이 현실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외부 어딘가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의 뒤엉킨 통일(성) 내에는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인 명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현상의 통일(성) 내에서의 우연적인 행위자적 절단에, 단지 ‘주관적’인 정신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되며’, 행위자에 의해 구현되며, 물질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절단에 달려 있다. p1634」
「우주를 전체로 측정하기 위해 측정하는 행위자들이 가야 할 우주의 바깥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우주에 바깥은 없기 때문에 체계 전체를 서술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서술은 항상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세계의 한 부분만이 따로따로 자신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은 자신과 구별해야 하는 부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1636」
바라드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녀가 순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만드는 단락의 원-버전을 양자의 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양자적 우주 자체가 내재적으로 파 기능의 붕괴를 요구하는 것일까? 측정 행위에서 파 기능의 붕괴 문제는 양자적 용어가 아니라 고전적 용어로 정식화 되어야 한다.
「파 기능의 붕괴가 양자역학에서 이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관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요구되지만 양자 이론에 의해 예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가적 가정으로, 양자역학이 정합적인 것이 되려면 그렇게 가정되어야 한다. p1644」
양자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은 전체적인 불안정성이 국소적 안정의 토대라는 것이다. 즉 우주 안의 존재자들은 안정적인 규칙들에 따라야 하며, 인과관계의 연쇄의 일부이지만 우연적인 것이 이 연쇄의 총체성 자체이다.
연결도 안 되는 문장들을 몇 가지 나열해 봤다. 말이 되게 이 절을 요약하기에는 바라스, 보어, 파 기능의 붕괴, 힉스장 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4. 두 진공
2013년에 힉스입자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힉스 입자는 뭐지? 검색하다가 좋은 글을 발견했다. 물론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힉스 입자 혹은 힉스장이 궁금하면 여기를 먼저 읽어보자. 그리고 지젝이 설명하는 힉스장과 두 진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다고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은 아니다.
「힉스장은 힘과 입자들이 다르게 행동할지 말지를 규정한다. “스위치가 켜지면” 기본 입자들 사이의 균형은 무너지며, 입자들 사이의 차이의 복잡한 패턴이 출현한다. “스위치가 꺼지면” 힘들과 입자들은 서로 구분이 불가능해지며 체계는 진공 상태에 있게 된다. - 입자 과학자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으며, 종종 그것을 ‘신의 입자’라고까지 언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입자는 라캉이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르는 것, 즉 진공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인, 균형을 깨뜨리고 차이를 도입하는 X와 등가물이다. - 간단히 말해 다름 아니라 바로 무(진공, 순수한 잠재성들의 공백)로부터 어떤 것(현실적으로 차이가 나는 입자와 힘들)으로의 이행의 원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p1653」
힉스장 스위치의 on과 off에 따라 두 가지 진공을 설정한다. off 상태가 가짜 진공 즉 모든 힘과 입자들이 구분 없이 순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진공이 가짜인 것은 그 균형을 위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on 상태가 진짜 진공이다. 입자와 힘들은 구분되지만 지출되는 에너지는 0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말하자면 힉스장이야말로 거꾸로 무활동, 절대적 휴면 상태이다. 처음에는 가짜 진공이 있다가, 이것이 방해를 받으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짜 진공 상태가 된다. 모든 에너지 체계와 마찬가지로 힉스 장 역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모크리토스의 덴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 보다 저렴한 어떤 것’, 무보다 못한 기묘한 전존재론적 ‘어떤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두 개의 무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전존재론적 덴, ‘무 보다 못한 것’의 무와 그 자체로, 직접적 부정으로 상정된 무가 그것이다. - 어떤 것이 출현하려면 전존재론적인 무가 부정되어야 하며, 직접적/명백한 텅 빔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어떤 것은 오직 이러한 텅 빔 내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는 것 대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 행위는 공간을 텅 비우는 것, 무를 창조하는 것이다. p1655」
「이것은 이 두 진공은 또한 대칭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양극성이 아니라 쫓겨난 일자를, 말하자면 자신과 관련해 지연되고, 항상 이미 무너진, 항상 이미 균형이 깨진 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진공은 항상 ‘가짜’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미 최소 행위와 방해를 포함함고 있는 ‘진짜’ 진공의 균형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 이 두 진공 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즉 가짜 진공은 단순히 오직 진짜 진공만을 남기는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하여 유일하게 진정한 평화는 부단한 활동, 균형 잡힌 원환적 움직임에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기각될 수는 없다. - 진짜 진공 자체는 영원히 트라우마적 방해로 남아 있을 것이다. p1662」
5. 덴이 존재한다
‘덴’은 1장의 <일자에서 덴으로> 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의 개념이다. 실재로서의 無 또는 'less than nothing' 이며, 힉스 입자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 지젝은 “사유는 생각하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브래지어의 질문을 출발점으로 이 책 전체를 요약하려 한다. 그러니 다 했던 말이란 소리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마치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멸종된 것처럼 나 자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코기토, ‘객관적’ 과학을 지탱하고 있는 분리된 시선의 이러한 0-점이다. 자신을 대상의 일부로,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이처럼 분리된 X, 이 ‘안 죽은’ X가 주체로, 따라서 문제는 정신없이 즉자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 자체의 이 0-점의 ‘대상적’ 지위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주체의 대상적 맞짝, 주체‘인’ 화석이 바로 라캉이 대상a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일하게 진정한 즉자 존재는 이 역설적 대상뿐이다. p1670」
덴은 일자들-보다-못한 것( 무 보다 못한 것)의 전존재론적인 비정합적인 다수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이 즉자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유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후보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자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은 이렇다. 즉 오직 이 어떤 것이 무보다 못한 것일 때, 덴의 전존재론적인 원-현실일 때만, 이 원-현실의 내부로부터 일상적인 현실은 ‘객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체의 출현을 통해 나타난다. 일자들의 모든 긍정적 현실은 이미 현상적인 것,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 주체와 ‘상호 관련된’ 것이다. p1676」
그렇다면 어떻게 원-현실의 즉자 존재로부터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본래적 의미의 현실로 이행할 것인가?
「주체와 객체라는 쌍에서 즉자 존재는 주체 쪽에 있다. 분열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외적 현실의’)(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대상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 선행하는) 주체의 이러한 구성적 분열은 주체‘인’($) 공백과 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인 대상적 맞짝, 즉 순수하게 잠재적인 대상a 사이의 분열이다. 우리가 (실정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구성적인 장으로) ‘외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빼기를 통해,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제해질 때 나타난다. - 그리고 이 어떤 것이 대상a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객관적 현실) 사이의 상호관계는 그와 동일한 주체-대상이라는 상관항, 불가능한-실재 대상에 의해 유지되며, 이 두 번째 상관관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p1677」
이것은 실제로는 실재의 존재론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실정적 질서의 장은 실재를 빼냄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질서와 실재는 상호 배제적이다.
또한 실재는 상징적인 것의 효과이다. 상징화 과정은 내속적으로 좌절되며, 실패할 운명인데, 실재란 상징적인 것의 이러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즉자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닿으려는,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려는 상징적인 것의 실패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는 상징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실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라캉에게서 주체 자체가 ‘실재의 대답’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주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며 이 실패가 주체이다. - ‘시니피앙’의 주체는 말 그대로 자신이 되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상징적 공간 내에서 결과는 원인에 맞선 반응인 반면 원인은 원인의 소급적 결과이다. 즉 주체는 실패하는 시니피앙을 생산하며, 실재로서의 주체는 이러한 실패의 결과이다. p1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