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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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출판사는 번역서의 제목을 원제와 달리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걸까? 내가 읽은 알랭 드 보통의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의 우리말 제목은 『프루스트를 좋아 하세요』이다. 뭘 알아야 좋아하든 말든 하지. 프루스트가 김수현도 아니고-.- 여하튼 새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이다. 번역자도 달라서 목차도 조금씩 표현이 바뀌었다.

“일상성의 발명가” 알랭 드 보통의 진정한 자기 계발서. 이 새로운 번역본에 대한 ‘출판사 제공 책 소개’다. 아마 이 소개 문구를 먼저 보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기 계발서를 아주 싫어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싫고, 세상을 그렇게 똑똑 부러지게 살 수 있다는 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몇 달 전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처음 읽었을 때, 이 책이 자기 계발서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발제를 위해서 다시 읽으며 저 문구를 되새겨 보니, 자기 계발서가 맞는 것 같다. 책 구성도 아예 아홉 개의 ‘~하는 법’으로 되어 있다. ‘4, 성공적으로 고통 받는 방법’에는 실제 삶에서 프루스트 자신과 소설 속 프루스트의 인물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고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놓았다. ‘진정한’ 자기 계발서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나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첫 째는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기와 평론의 형식을 갖고 있다. (고 한다) 모든 이야기와 교훈은 프루스트로부터 비롯된다. 프루스트의 편지, 프루스트에 관한 지인들의 평가, 프루스트 자신의 삶과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작중 인물들로만 이 자기 계발서는 채워져 있다. 알랭 드 보통이 한 것은 일종의 짜깁기, 취사선택이고 편집이다. 이것만으로 멋진 책이 되었다니 놀랍지만 사실이 그렇다. 알랭 드 보통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남의 간섭 싫어하는 까다로운 독자마저도 능숙하게 다루어 낸다. 두 째는 자기 계발서 하면 떠오르는 성공신화, 유용성, 자기수양 같은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없지는 않지만, 눈에 띄게 속물적이거나 혹은 현실감 전혀 없는 무념무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계발서라는 책 소개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상업성이 불가피하다 해도 프루스트-『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알랭 드 보통으로 연상될 수밖에 없는 이 책을 꼭 자기 계발서라고 해야 하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만큼 자기계발서와 거리가 먼 책이 있을까? 물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를 겨우 100여 쪽 읽은 처지로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이미지로나 겨우 100쪽의 그 표현하기 힘든 느낌으로나 자기 계발서를 갖다 대기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을 ‘상품성’ 으로만 다루어야 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자기계발서,『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걸까? 내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이다. 프랑스에는 일리에-콩브레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도시인데, 관광객들이 복닥거린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또 다른 손에는 마들렌 봉지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그냥 일리에 였다. 그런데 푸르스트가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냈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가상 도시인 콩브레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당국은 미련 없이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관광 안내소의 소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우리나라도 대체로 이런 모양새다. 누구누구 문학기행 같은 것들. 이런 방법은 관광산업에는 유익하다. 마들렌을 구워내느라 정신없는 일리에 콩브레의 빵집들은 북적댄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전혀 유익하지 않다. 일리에-콩브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그저 그런 맛의 마들렌뿐이다. 프루스트에게 일리에는 특별하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독자에게 일리에는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 프루스트 자신은 어떤 번역서의 서문에, 그가 보았다면 일리에-콩브레의 관광산업을 우스꽝스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할만한 글을 남겨 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

 

그림의 미는 그 안에 그려진 것들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에, 천재의 눈으로 포착한 인상에 있다. 그 장소들은 우연히 선택된 곳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곳이든 <봄>의 풍경이 될 수 있고, 콩브레가 될 수 있다. 일리에-콩브레를 방문해 마들렌을 먹는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화자가 느꼈던 강렬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대한다면, 책에 대한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것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면, 책을 내려놓고 작가에게서 배운 눈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책이란 저자에게는 ‘종결’이지만, 독자에게는 ‘자극’이 되어야 한다. 저자가 떠나버린 곳에서 자신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것을, 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망을 부여하는 것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가 우리 삶의 답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저자를 신탁의 전달자로 맹신하는 것과 같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충고했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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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 스완 댁 쪽으로, 특별한정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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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

스완댁 쪽으로

 

 

마르셀 프루스트

1913~1927 (전 7권)

 

펭귄 클래식 2013

옮긴이 이 형식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약 15년간에 걸쳐, 총 7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참고로 1권이 700쪽이 넘습니다. 깁스를 한다거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거나 심심해서 죽어버릴 지경이 된다면, 우리는 과연 이 책을 읽어보게 될까요? SNS라는 강력한 매체가 우리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비유는 그 자체가 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아무튼 그만큼 읽기 힘든 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책이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소설’ 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끊임없이 인용되며 우리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2005년 방송되었던 <내이름은 김삼순>에도 나왔었죠. 물론 삼순이 역시 프랑스 과자의 대명사라 할 마들렌이 나온다는 말에 파티시에로서 당당히 책을 펴들었다가 곧바로 던져버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는 사실 책 이름만 잠깐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관점에 따라 그 드라마의 주제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 마들렌과 콩브레가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들렌’ 하면 이 책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프랑스에서도 그런다니 다만 우리의 논술지향 독서 교육이 가진 문제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엄두는 못 낸다고 해도, 적어도 마들렌과 꽁브레가 나오는 대목만은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독서회의 이번 주 선정 책인,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을 발제하면서 드디어 미루어만 두었던 것을 하게 되네요. 다행히 그 부분은 1권 앞쪽에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게까지 지루하거나 읽기 힘들지는 않습니다. 취향에 맞으면 한번 도전해 볼만합니다. 우리 회원들도 마들렌과 꽁브레과 나오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 옮겨 적습니다.

 

 

1부 꽁브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밤중에 깨어나 꽁브레를 회상할 때면, 나는 그것 중, 희미한 암흑 한가운데에서 오려낸 듯 두드러진 일종의 반짝이는 조각 하나밖에 보지 못하였고, 그 조각은, 다른 나머지 부분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건물 벽에 오색 꽃불의 섬광이나 전기 조명이 구획지어 놓은 조각들과 유사했다. 그 조각의 상당히 넓은 하단부에는, 작은 거실, 식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슬픔의 장본인이 되곤 하던 스완씨가 도착하던 오솔길의 초입, 올라가기에 그토록 가혹했고 그 자체로 불규칙한 피라미드의 몹시 좁은 동체를 구성하던 층계의 첫 계단을 향하여 내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던 현관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각의 상단부에는, 엄마가 들어오시던, 유리 끼운 문이 있는 작은 복도와 나의 침실이 보였다. 한마디로, 항상 같은 시각에만 보이고, 그 주위에 있을 수 있었을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었으며, 스스로 분리되어 어둠 위에 홀로 떠 있는, 내가 잠자리에 드는 비극에만 필요한 최소한의 치장물이었다. 그리하여 꽁브레가 마치 가느다란 층계로 이어진 두 층으로 구성되었고, 그곳에는 오직 저녁 일곱 시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나에게 물었다면, 꽁브레가 그것 이외에도 다른 것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다른 시각에도 존재하였노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 내가 꽁브레에 관해 뇌리에 떠올렸을 것은 오직 의식적 기억, 즉 지성의 기억에 의해 제공되었을 것인데, 의식적 기억이 과거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은 기실 과거의 그 무엇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지라, 나는 그 나머지 꽁브레에 대해 생각할 욕구를 영영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나에게는 죽은 것들이었다.

영영 죽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 p83~4 」

 

이 책의 화자는 불면증이 있습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면 자주 어린 시절에 살았던 꽁브레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화자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꽁브레는 늘 딱 하나뿐입니다. 혼자 보내야만 하는 침실에서 불안에 떨며 밤을 기다리는데, 단 하나의 위안이 엄마가 해주는 굿나잇 키스입니다. 화자는 오후부터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거나 만찬이 있는 날이면 엄마가 오시지를 않고 화자는 절망적인 밤을 보냅니다. 하루는 불안을 견디다 못한 화자가 밤늦게 손님을 배웅하고 자러 가는 엄마의 앞을 막아서서 굿나잇 키스를 요구합니다. 화자의 심신을 굳건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엄격함을 고집하던 엄마에게는 비난을 살 일이며, 굿나잇 키스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날 일이지요.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자의 곁에서 자라고 하십니다. 아이가 몹시 슬퍼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요. 엄마는 화자의 옆에서 책을 읽어주시며 함께 밤을 보냅니다. 그런데 화자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내가 당연히 행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고통스러웠을 최초의 양보를 엄마가 이제 막 나에게 하신 것 같았고, 나를 위하여 품으셨던 이상 앞에서 엄마가 보이신 최초의 체념 같았으며, 그리하여, 그토록 꿋꿋하신 엄마가 당신께서 꺾이셨음을 처음으로 시인하신 것처럼 여겨졌다.” “나의 유년시절에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던 그 느닷없는 부드러움보다는 엄마의 노기가 나에게는 덜 슬펐을 것이다. 또한 그 순간 내가 불경스럽고 은밀한 손으로 엄마의 영혼에 최초의 주름을 그었고 그 속에 최초의 백발 한 가닥을 솟게 한 것 같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품었던 기대를 체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으로 이 기억은 화자에게 항상 따라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화자가 여태껏 꽁브레에 대해 가진 기억의 모든 것이었지요. 물론 다른 기억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의식적으로 기억해 내어야만 하는 것들이고, 그렇게 떠올려진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자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잠자리에 드는 비극’ 외에는 정말 꽁브레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불면의 밤에 늘 떠오르는 꽁브레의 추억과도 다르고, 아무 의미 없이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기억되는 과거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꽁브레가 출현합니다. 마들렌과자와 함께!

 

 

「꽁브레 중 내 잠자리의 비극과 그 무대가 아니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난 어느 겨울날, 내가 집에서 돌아오자,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그것이 내 습관이 아니건만, 차를 조금 들어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처음 싫다고 하였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가리비 조개껍질처럼 가는 홈들이 패인 판에 찍어낸 듯한, 작은 마들렌느라고들 부르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게 하셨다. 그리고 이내, 흘려보낸 음울한 하루와 서글픈 다음날에 짓눌린 채,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늘렌느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애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아니, 그 진수가 내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나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보잘것없고 우발적 산물이며 필멸의 존재라고 느끼기를 멈추었다. 그 강력한 희열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희열이 차와 과자의 맛에 연관되어 있으되 그것을 까마득히 능가하며, 그것들과 같은 본질일 수 없음을 막연히 감지하였다. 그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을 어디에서 포착하여 인지한단 말인가? p85~6」

 

 

 

마들렌도 아니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 화자는 경이로운 희열을 느낍니다. 그런데 충만으로 가득한 그 경이로운 희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화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차를 두 모금, 세 모금 째 마셔 보지만 알 수 없습니다. 분명 마들렌 부스러기 차와 연관이 있기는 한데, 그 희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언가 잡힐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달아나 버립니다. 화자는 자신의 오성에게 좀 더 노력하여 도망치는 느낌을 붙잡아 오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 따위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의 근심거리와 내일의 욕망에 대해서나 생각하면서 차를 마시라는 비겁한 목소리를 쫒아내며, 오성을 닦달합니다.

 

그러다 문득 추억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맛은, 꽁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숙모님의 침실로 아침 문안을 가면, 숙모님께서 홍차나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곤 하던 작은 마들렌느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8」

 

그리고, 숙모님께서 보리수 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그 추억이 나에게 왜 그토록 큰 행복감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또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은 훨씬 훗날로 미루었지만),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때까지 유일하게 내가 다시 보곤 하던 그 오려낸 듯 한 조각이다.) 그리고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 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도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또한 일본인들이, 서로 분별되지 않는 미세한 종이 부스러기들을 물 가득 채운 도자기 그릇에 담근 다음, 그것들이 즉시 기지개 켜듯 늘어나고, 형체를 이루고, 색채를 띠고, 분화되어, 꽃들과 건물들, 견실하여 식별할 수 있는 인물들로 변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그 놀이에서처럼,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작은 집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p89」

 

화자는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마구 닦달한 끝에 드디어, 엄마가 주신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에서 꽁브레에 살던 시절 레오니 숙모님이 일요일 아침마다 주던 마들렌과자의 맛을 알아채게 됩니다. 그리고 숙모님의 마들렌 과자 맛으로부터 꽁브레 전체가 견고하게 살아납니다. 마치 일본인들의 종이놀이처럼, 엄마가 주신 찻잔 속에서 꽁브레가 활짝 피어납니다. 이렇게 되찾는 시절은 자발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자신의 오성을 강제하여 끌어낸 비자발적인 기억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오성을 강제하였던 것일까요?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어떻게 화자의 오성을 닦달하여 꽁브레 전체를 기억에서 살려내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왜 화자는 차 한 모금에서 그토록 강력한 희열을 느꼈던 걸까요? 화자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그 원인을 밝히는 일을 훗날로 미루었습니다. 그 훗날의 이야기는 마지막권인 7권 <되찾은 시절>에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7권은 구경조차 못한 저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제목으로 보아,『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7권까지의 긴 여정 끝에, 화자는 마침내 그 시절을 되찾고 그 원인을 밝혀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궁금하다면 아마도 이 고난에 찬 독서의 행군을 시작하여야겠지요. 물론 편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들뢰즈는 프랑스 철학자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듣는 ‘유목, 탈주, 차이와 반복’ 따위의 개념들이 들뢰즈의 것입니다. 제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읽은 때가,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방송가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여하튼 그 때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딱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삼식이가 옛 사랑 희진을 버리고 삼순이를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책이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거지요. 그 때 드라마 감상문도 썼는데, 이제는 사라진 사이트여서 그 글이 공중으로 흩어졌는지 넷 상을 유령처럼 떠도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도 제가 뭐라고 아는 척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읽으면 부끄럽겠지만 말입니다.

 

 

 

 

「본질 자체는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로도 환원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은 애인으로도,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덧없는 상태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07> 」

 

이 문장에 꽂혔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콩깍지가 씌었다느니, 벗겨졌다느니 하는 말들로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대상인 애인으로도, 우리 자신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호’라는 말이 나오지요 : 기호를 지니고 있는 대상, 기호를 체험하는 주체. 기호란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기호’라고 합니다. 특히 7권에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은 없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 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23> 」

 

마들렌 부스러기 차는 화자에게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했던 것입니다. 희진이나 삼순 역시 기호를 방출한 것이지요, 삼식을 매혹시킨 기호를 말입니다. 프루스트의 책은 수많은 대상들이 방출하는 여러 유형의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배움의 과정이지요. 이 배움을 통해 프루스트는 진리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서 본질적인 것은 기억과 시간이 아니라 기호와 진실이라고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화자에게 소중한 인물들은 해독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물들에게서 더 이상 기호가 방출되지 않을 때, 그들은 잊히고 죽은 사람이 됩니다. 돌아온 희진에게 더 이상 삼식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렇습니다. 삼식이 해석해야 할 기호를 방출하는 대상은 이제 삼순입니다. 희진에게는 해독해야 할 기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과거의 희진와 돌아온 희진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의 희진은 삼식에게 강렬한 희열을 주는 기호를 방출했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는 아무것도 방출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 특유의 통찰이 있다. 이 통찰은 우선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가공되지 않은 물질도 아니고 자발적인 정신도 아니다. 물리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철학은 참을 원하는 정신의 소산인 직접적 언표, 명백한 의미를 전제한다. 물리학은 실재의 제약들에 순응하는, 애매성이 없는 객관적 물질을 전제한다. 사실들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기호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진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해석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호란 항상 불분명하고 함축적이며 내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어떤 꽃의 냄새와 어떤 살롱의 광경을 연결시키는 것, 마들렌의 맛과 사랑의 감정을 연결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기호이며, 배움이란 이 기호를 배우는 것이다. 기호로서의 꽃의 향기는 물질의 법칙들과 정신의 범주들을 동시에 뛰어 넘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p137~8> 」

 

프루스트는 아무것도 해석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것들, 철학과 물리학은 좋아하지 않는 듯합니다. 기호들은 불분명하고 함축적입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는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해독해야 할 것입니다. 배움이란 이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기호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적 기호.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는 것은 예술입니다. 예술에서만 기호와 의미가 일치하여, 본질이 표현되고 포착됩니다. 그러나 하위의 다른 기호들을 해독하는 과정이 헛되기만 한 시간은 아닙니다. 그 실패가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프루스트가 그토록 지루하게 인물들을 관찰하고 소묘하고 온갖 잡다한 것들의 인상을 그려내는 것은, 그것들이 기호를 해석하는 소중한 단서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루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아마도 그 배움의 과정을 함께 밟아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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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3-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주만에 <읽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권을 다 읽었다. 결론은 깁스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 수십줄 혹은 몇 페이지에 걸친 묘사를 읽다보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잊어버리기 일수이지만, 사랑과 거짓말, 질투와 의심에 관한 그 섬세한 묘사는 어떤 소설에서도 보지 못했던 매력을 갖고 있다. 꽁브레와 마들렌 차가 문제가 아니라, 스완이 오데뜨에게 빠져 들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퍼득이는 그 참혹한 심정에 관한 묘사가 압권.
 

다 읽고 나니, 책이 이렇게 되었다.

 

 

열심히 읽고 정리했다. 그런데 얼마나 이해했을까?

철학책은 내게 늘 그렇다.

약간의 뿌듯함 뒤엔 독해에 대한 불안감이 차오른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라 했는데.

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하나요,

배운 것을 학우들과 토론하는 것이 둘이라 했다.

그러니 혼자 읽는 것을 學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學이 있어도 스스로 사유하지 않으면

스승이나 벗들의 말에만 솔깃해져 학문이 그물에 갇힌듯 어둡다 했다...

뭐, 讀書百遍 義自見 이라고도 했으니...

지젝은 많은 책을 썼지만 거의 다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사례들을 덧보태고 영역을 확장하는 면은 있지만

기본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부분 들어 있다.

그러니 한권을 백번 보나, 백권을 한번씩 보나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든다.

지젝의 책이 백권이 있다는 말은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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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0_

윤리적인 것의 정치적 정지 

 

 

 

드디어 마지막이다. 작년 8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7개월 정도 걸렸다. 작년 말에 끝내려 했지만, 이것도 일이라고 너무 지쳐서 두어 달 책을 덮어 버렸다. 여하튼 끝을 보게 되니 혼자라도 뿌듯하다. 사실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마 이 어지럽고 의심스런 리뷰를 꾸준히 읽어주셨던 듯하다. <공감>란에 달린 1 혹은 2란 숫자가 참 따뜻한 힘이 되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부디 이 글이 지젝에 이르는 길에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젝의 결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아직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너무 급진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반대로 너무 낡은 유물로의 복귀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마지막 장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한나절이면 술술 넘겨볼 수 있으니, 직접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지젝의 1988년 데뷔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꾸준히 비판해온 대상은 냉소주의자이다. 라캉의 사위인 자크 알랭 밀러 역시 이 무리에 속한다.

 

「주체는 상징적 상블랑들 (이상들, 주인-시니피앙, 이것 없이는 어떤 사회도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상블랑들이며 유일한 실재는 육체적 주이상스의 실재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과 멀리서 관계를 맺는다는 밀레의 냉소적·쾌락주의적 생각에 맞서 우리는 “향유하고 다른 사람들도 향유하도록 하자”는 그러한 태도는 진정한 특이성들을 위한 장을 열어줄 새로운 공산주의적 질서에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p1697」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에 대한 밀레의 독법과 지젝의 독법은 완전히 반대이다. 밀레에 따르면 가치들, 이상들, 규칙들 따위는 단지 상블랑들일 뿐이지만 그것을 훼손하면 사회의 구조가 해체되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이 실재인 양 행동해야 한다는 냉소적 격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본래 라캉적 관점은 정반대이다.

 

「즉 진짜 환상은 상징적 상블랑들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실체화하는 것에, 실재를 실체적인 즉자 존재로 받아들이고 상징적인 것을 상블랑들의 단순한 텍스처로 환원시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길을 잃는 사람은 정확히 상징적 텍스처를 단순한 상블랑들로 기각하며 그것의 효력은, 상징적인 것이 실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우리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보지 못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이상스의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상징적 상블랑들의 네트워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데올로기는 주이상스의 실재와 관련해 그러한 상블랑들을 ‘단순한 상블랑들’로 냉소적으로 기각하는 데 있다. p1699~70」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언이 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전지구적 곤경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파국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을 거부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금융 붕괴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집단적 이데올로기는 애써 무시하려는 직접적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의지를 포함해 시치미 떼기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받고 있는 인간 사회들에서의 일반적인 행동 유형은 그러한 일이 닥치면 위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눈을 가리는 것이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p1744」

 

금융 위기 이후 일어난 영국 교외에서의 폭동은 이처럼 진행 중인 위기에 대한 0-수준의 반응이었다. 이 폭동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반동적이며, 무력한 분노이자 힘의 과시로 가려진 절망, 득의 만연한 카니발로 가려진 질투였다. 그렇다면 이런 폭력적인 반응으로부터 어떻게 사회적 삶의 총체성의 재조직화로 나갈 수 있을까?

 

여기서 지젝은 놀랍게도 새로운 4인방을 제시한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그에 필요한 가혹함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민 - 운동 - 당 - 지도자라는 4인방이다. 지젝은 이 4인방을 통해 공산주의를 불러 온다. 인민, 운동, 당은 그렇다 치고, 지도자까지.

 

그렇지만 인민은 더 이상 의지를 구현해야 할 신화적인 주권적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질서로 적극적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은 인민의 능력 밖이다. 진정한 보통 사람을 추어올리려는 모든 시도와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정치적 행위자들로 변형되는 과정은 더없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인민은 정치적 과정의 수동적 배경이다.

 

언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인민주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젝은 영화를 통해 논리를 펴려하지만 잘 모르겠다.

 

「운동 속에서 직접 ‘자신을 조직’하려고 할 때 인민이 창조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발언자들이 복권 추첨처럼 선택되며, 모든 사람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평등한 논쟁 공간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항의 운동은 행동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마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 이 지점에서 당과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해진다. 심지어는 급진적인 저항운동에서도 인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새로운 주인에게 그것을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만약 인민이 모른다면 당은 알까?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민을 지도하는 당이라는 통상적인 주제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p1748~9」

 

그러나 당의 역할은 당이 어떤 특권적 지식에 접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당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오류가 일어나는 지식의 열린 장이다. 이들이 인민을 대변한 이유는 정치적 동역학에서 이들이 동원하는 역할을 한 것에 달려 있다. 당은 조직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와 관련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의 권위이다.

 

하지만 인민들 자체를 정치적 주체화의 조직화된 형태들과 분리시키는 간극은 어쨌든 극복되어야 한다. 인민과 당 사이를 긴밀하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지도자’ 이다. 지도자는 헤겔이 옹호하는 군주제의 절대군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탈린주의적 지도자의 문제는 과도한 개인숭배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는 주인으로 충분했던 것이 아니라 관료적인 당-지식의 일부, 전형적인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실업자는 노동예비군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넘어 새로운 범주를 갖는다. 일시적 실업자부터 더 이상 고용이 불가능해진 영구 실업자를 거쳐 슬럼가나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게토에 사는 사람들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과정으로부터 배제된 지역, 인구들, 국가들에 이른다. 실업은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축적과 팽창의 동력학과 구조적으로 분리 불가능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처럼 새로운 구조적 실업을 착취의 한 형태로 특징짓는다. 이 피착취자들은 라노비치의 농담을 통해 묘사할 수 있듯 이중의 착취 속에 있다. “왜 착취당한다고 생각해?” “두 가지 이유에서지. 내가 일할 때 너희 자본가들이 나의 잉여가치를 가져가지.” “하지만 너는 실업자잖아.”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지.” 구조적 실업은 착취의 또 다른 형태이다.

 

「착취에 대한 이러한 강조의 중요성은 그것을 지배와, 즉 다양한 버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권력의 미시정치학’이 선호하는 주제인 지배와 대립시켰을 때 분명해진다. 간단히 말해 푸코와 아감벤의 이론은 불충분하다. 지배의 규율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두 사람의 모든 상세한 정교화들, 배제된 자들,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같은 모든 풍부한 개념들은 착취의 중심성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참조 없이 지배에 맞선 투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또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며, 그러한 생산양식 자체의 변혁이 아니라 간헐적인 반란과 저항 행위로 그치고 말 것이다.” - 그러한 권력의 이데올로기들의 적극적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이런저런 유형의 ‘직접’ 민주주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지배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인 반면 착취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이다. p1754~5」

 

지배 개념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착취가 자연화 된다는 것, 경제가 기능하는 방식 속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상호 인정된 자유와 평등의 관계인 것처럼 나타난다. 지배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구현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게 된다.

 

「현대의 좌파들이 반복하는 이야기 중에 보편적인 열정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나 당은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 준다는 것이다. (만델라, 룰라 등) 하지만 그런 다음 조만간 통상 몇 년 후에 그들은 핵심적인 딜레마에 봉착한다. 즉 과감히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메스를 들이대느냐 그저 ‘시늉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메커니즘을 교란시키면 거의 즉각 시장의 동요, 경제적 혼란에 의해 ‘처벌 받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반자본주의가 정치적 행동의 직접적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에서 우리는 익명의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에 반대한다- 우리는 여기서 목표와 목적을 구분하는 라캉의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즉 반자본주의는 해방정치의 즉각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궁극적 목적이, 모든 행위의 지평이 되어야 한다. p1757」

 

그렇다면 어떻게 탈정치적인 탈-역사화의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운동은 진실로 하나의 진공을 창조했다.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장 속에서 말이다. 이 진공을 적절한 방식으로 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먼 길이 놓여 있으며, 곧 진정 어려운 질문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이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유형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원하는가? 통제와 억압을 포함해 어떠한 종류의 기관을 원하는가? 20세기의 대안들은 분명히 먹히지 않는다. ‘수평적 조직화’의, 평등주의적 연대와 아무런 제한도 없는 열린 토론을 벌이는 시위 군중의 즐거움들을 즐기는 것은 황홀하나 그러한 토론들은 몇몇 새로운 주인-시니피앙들 주위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낡은 레닌주의적 질문에 대한 구체적 대답 속에서 합쳐져야 한다. p1761」

 

지젝은 우리에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열려진 공간 속에, 시간을 가지고 질문을 던질 것을 제안한다. 우리에게는 매우 당혹스럽게도, 근대적 패러다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당황스럽게도, 이미 인민은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에 이르는 적절한 질문이다.

 

「대답을 가진 것은 인민이며, 이들은 단지 답을 가진 것에 대한 질문을 알지 못할 뿐이다. p1763」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지식인들은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상황과 같다. 환자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증상이 바로 답이다,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는 모른다. 분석가는 이 질문들을 정식화해야 한다. 오직 그처럼 인내심 있는 작업을 통해서만 강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들 다수는 아직 제기되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벽들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려면 진실처럼 들리는 말과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들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들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들과 함께 그러한 질문들은 곧 제기될 것이다. 역사는 정확히 바로 그렇게 질문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라고? 한 세대 안에. p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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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14_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

 

 

0.  

 

   물질의 세계 속에서 사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유는 어떻게 물질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가?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정확히 나의 몸이 아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론으로부터 주체성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을까?

 

 

1. 존재론적 문제   

 

   EBS에서 <빛의 물리학>이란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까지, 물리학의 역사를 꿰뚫는 대단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특히 코펜하겐학파,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중 슬릿 실험 따위가 나오는 양자 역학은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14장에 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지젝이 이전에는 살짝살짝만 인용하던 양자 물리학을 아예 통째로 한 장에 걸쳐 들고 나온 것이다. 양자 역학이 과학자들에게도 어렵다는데 지젝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살짝 의심을 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가려낼 재주는 없다. 여하튼 그런 의미로 이 장을 요약하지 말고 넘어갈까 하다가 그래도 이제껏 정리해 온 것이 아까워 조금만 해볼까 한다. 하긴 언제는 제대로 이해해서 요약했었나...

 

   오늘날 철학적 재사유를 요구하는 과학적 발견은 양자 물리학이다. 양자 물리학과 우주론은 철학적 함의를 갖고 있으며, 철학에 도전을 재기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양자 공식들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현상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분명히 우리의 일상현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이 현상들은 과학자의 상상력이나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정신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등등의 이와 유사한 사변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양자 물리학의 명제들은 오직 복잡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상식적인 존재론과 이 물리학의 역설적 함의들(공시성, 뒤로 흐르는 시간 등)을 상식적인 존재론을 갖고 직접적으로 대결하면서 그러한 수학적 형식화의 장치를 무시하면 뉴에이지의 신비주의로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p1604 」

 

   이 작업에는 피해야 할 지뢰도 만만치 않다. 여하튼 우리의 얄팍한 상식으로 양자 물리학과 철학을 엮으려다간 엉뚱하게 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일단 새기고 시작하자.

 

 

2. 실재 속의 지식   

 

   상징적 현실과 양자적 원-현실에는 유사성이 있다. 일종의 누빔점이 그것이다. 누빔점 비유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연상시키는데, 지젝은 보어를 옹호하며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상자의 문을 열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으며, 관찰자의 개입과 동시에 파 기능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 누빔점을 통해 양자적 원-현실은 보통의 현실로 이행된다.

 

   「상징적 현실의 기본적인 특징은 존재론적 불완전성, 비전체에 있다. 그것은 아무런 내재적 정합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부유하는 시니피앙들’의 다수성으로, 그것은 오직 주인-시니피앙의 개입을 통해서만 안정될 수 있다. - 어떠한 상징적 개입 없이도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적 현실과는 분명히 반대로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 -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양자적 원-현실 또한 자신을 안정화시켜 일상적 대상들과 시간적 과정들로 이루어진 보통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동적인 ‘누빔점(여기서는 파 기능의 붕괴라고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야말로 양자 물리학의 핵심적인 존재론적 결과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또한 비정합적 원-현실과 그것을 완전한 현실로 구성하는 그것의 등록의 탈중심화된 작인 사이의 (시간적) 간극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도 또한 현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과 관련해 탈중심화되어 있다. 그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등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p1615」

 

   「개시 또는 은폐의 구조, 사물들은 항상 배경의 일부가 잘려나간, 결코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공백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사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유한한 지각만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구조이자 사실이다. 아마 바로 거기에 양자 물리학의 궁극적인 철학적 결론이 있을 것이다. 양자 물리학의 가장 탁월하고 대담한 실험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현실 묘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하며, 불확정적임을 입증하고 있다. -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의 결과로 간주되는 결여는 현실 자체의 일부인 셈이다. p1621~2」

 

   지젝이 라캉과 헤겔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주장한 비전체, 빗금친 대타자 같은 것들이 양자 물리학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사유된다는 말이다.

 

   「 다시 한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이데거와 관련해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이행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칸트적 초월론의 역사적으로 발본화된 버전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의 역사는 인간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존재의 의미의 시대적 개시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궁극적인 한계이다. -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미 역사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개시를 전제하고 그것 내에서 움직이며, 단지 일어날 뿐인 이러한 개시들의 심연 같은 놀이가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양자 물리학의 존재론적 함의는 우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 더 앞으로 나아가 현실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에 의해 설정된 한계는 즉자 존재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공백으로부터, 즉 '무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다수의 존재자로 그득한 것으로서의 없음(무)이라는 양자적 개념의 기저에 깔린 함의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현실-그-자체는 없음, 공백이며, 이 공백으로부터 부분적인, 즉 아직 완전히 구성되지 않은 현실의 정황들이 출현한다. 이 정황들은 결코 '전체'가 아니며, 마치 특정한 제한된 관점으로부터만 보일 수 있는(존재하고 있는)듯이 항상 존재론적으로 일부가 잘려나가 있다. 오직 일부가 잘려나간 다수의 우주만 존재할 뿐이다.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백만이 있을 뿐이다. 또는 과감하게 단순화해 정식화해보자면,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한정적인 우주는 제한된 관점에서 볼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p1622 」

 

   지젝이 선호하는 양자 물리의 이론을 한 번 들여다보자.

 

   「양자 혁명은 여기서 파와 입자라는, 본래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원성 내에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개적으로) 파에 특권을 부여한다. 예를 들면 파를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입자들을 파들의 상호작용에서의 결절점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 물리학에서 파는 입자(또는 입자에 일어나는 것)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보어가 양자물리학은 현상들의 ‘배후에서’ 실질적 토대로 ‘숨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상들을 다룬다(측정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 ‘물’의 물로서의, 실체적인 존재자로서의 출현 자체가 지각을 통한 파 기능의 붕괴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상식적인 관계는 뒤집힌다. 즉 ‘객관적’ 사물이라는 개념은 지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것인 반면 파의 동요가 지각에 앞서며, 그리하여 보다 ‘객관적’인 셈이다. p1628」

 

 

3. 행위자적 실재론

 

   ‘행위자적 실재론’은 ‘바라드’라는 철학자(?)의 논리이며, 바라드는 보어의 물리학을 체계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세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절에서 보어는 바라드를 통해, 바라드는 지젝을 통해 내게 읽히는 셈이니,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보어가 얼마만큼 보어에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보어의 교훈은 현실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주체인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보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과 같다.

 

   「보어는 그러한 입장의 관념론적 전제를 폭로한다. 즉 만약 현실이 ‘저기 바깥에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에 무한대로 접근한다면 -최소한 함축적으로는- 관찰자인 우리는 이 현실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의 외부 어딘가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상의 뒤엉킨 통일(성) 내에는 관찰 주체와 관찰 대상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인 명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현상의 통일(성) 내에서의 우연적인 행위자적 절단에, 단지 ‘주관적’인 정신적 결정이 아니라 ‘구성되며’, 행위자에 의해 구현되며, 물질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 절단에 달려 있다. p1634」

 

   「우주를 전체로 측정하기 위해 측정하는 행위자들이 가야 할 우주의 바깥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우주에 바깥은 없기 때문에 체계 전체를 서술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서술은 항상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세계의 한 부분만이 따로따로 자신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뿐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은 자신과 구별해야 하는 부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1636」

 

   바라드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녀가 순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만드는 단락의 원-버전을 양자의 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양자적 우주 자체가 내재적으로 파 기능의 붕괴를 요구하는 것일까? 측정 행위에서 파 기능의 붕괴 문제는 양자적 용어가 아니라 고전적 용어로 정식화 되어야 한다.

 

   「파 기능의 붕괴가 양자역학에서 이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관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요구되지만 양자 이론에 의해 예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가적 가정으로, 양자역학이 정합적인 것이 되려면 그렇게 가정되어야 한다. p1644」

 

  양자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은 전체적인 불안정성이 국소적 안정의 토대라는 것이다. 즉 우주 안의 존재자들은 안정적인 규칙들에 따라야 하며, 인과관계의 연쇄의 일부이지만 우연적인 것이 이 연쇄의 총체성 자체이다.

 

   연결도 안 되는 문장들을 몇 가지 나열해 봤다. 말이 되게 이 절을 요약하기에는 바라스, 보어, 파 기능의 붕괴, 힉스장 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4. 두 진공

 

   2013년에 힉스입자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힉스 입자는 뭐지? 검색하다가 좋은 글을 발견했다. 물론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힉스 입자 혹은 힉스장이 궁금하면 여기를 먼저 읽어보자. 그리고 지젝이 설명하는 힉스장과 두 진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다고 더 잘 이해된다는 말은 아니다.

 

   「힉스장은 힘과 입자들이 다르게 행동할지 말지를 규정한다. “스위치가 켜지면” 기본 입자들 사이의 균형은 무너지며, 입자들 사이의 차이의 복잡한 패턴이 출현한다. “스위치가 꺼지면” 힘들과 입자들은 서로 구분이 불가능해지며 체계는 진공 상태에 있게 된다. - 입자 과학자들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으며, 종종 그것을 ‘신의 입자’라고까지 언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입자는 라캉이 소문자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이라고 부르는 것, 즉 진공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인, 균형을 깨뜨리고 차이를 도입하는 X와 등가물이다. - 간단히 말해 다름 아니라 바로 무(진공, 순수한 잠재성들의 공백)로부터 어떤 것(현실적으로 차이가 나는 입자와 힘들)으로의 이행의 원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p1653」

 

   힉스장 스위치의 on과 off에 따라 두 가지 진공을 설정한다. off 상태가 가짜 진공 즉 모든 힘과 입자들이 구분 없이 순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진공이 가짜인 것은 그 균형을 위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on 상태가 진짜 진공이다. 입자와 힘들은 구분되지만 지출되는 에너지는 0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말하자면 힉스장이야말로 거꾸로 무활동, 절대적 휴면 상태이다. 처음에는 가짜 진공이 있다가, 이것이 방해를 받으면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짜 진공 상태가 된다. 모든 에너지 체계와 마찬가지로 힉스 장 역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너지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모크리토스의 덴이라는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 보다 저렴한 어떤 것’, 무보다 못한 기묘한 전존재론적 ‘어떤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두 개의 무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전존재론적 덴, ‘무 보다 못한 것’의 무와 그 자체로, 직접적 부정으로 상정된 무가 그것이다. - 어떤 것이 출현하려면 전존재론적인 무가 부정되어야 하며, 직접적/명백한 텅 빔으로 상정되어야 하며, 어떤 것은 오직 이러한 텅 빔 내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없는 것 대신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 행위는 공간을 텅 비우는 것, 무를 창조하는 것이다. p1655」

 

   「이것은 이 두 진공은 또한 대칭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양극성이 아니라 쫓겨난 일자를, 말하자면 자신과 관련해 지연되고, 항상 이미 무너진, 항상 이미 균형이 깨진 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진공은 항상 ‘가짜’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미 최소 행위와 방해를 포함함고 있는 ‘진짜’ 진공의 균형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 이 두 진공 간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즉 가짜 진공은 단순히 오직 진짜 진공만을 남기는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그리하여 유일하게 진정한 평화는 부단한 활동, 균형 잡힌 원환적 움직임에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기각될 수는 없다. - 진짜 진공 자체는 영원히 트라우마적 방해로 남아 있을 것이다. p1662」

 

 

5. 덴이 존재한다

 

   ‘덴’은 1장의 <일자에서 덴으로> 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의 개념이다. 실재로서의 無 또는 'less than nothing' 이며, 힉스 입자다. “유물론의 근본적 공리는 공백/없음이 (유일하게 궁극적) 실재라는 것, 즉 존재와 공백은 구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절에서 지젝은 “사유는 생각하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브래지어의 질문을 출발점으로 이 책 전체를 요약하려 한다. 그러니 다 했던 말이란 소리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마치 내가 이미 죽은 것처럼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멸종된 것처럼 나 자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코기토, ‘객관적’ 과학을 지탱하고 있는 분리된 시선의 이러한 0-점이다. 자신을 대상의 일부로,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이처럼 분리된 X, 이 ‘안 죽은’ X가 주체로, 따라서 문제는 정신없이 즉자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 자체의 이 0-점의 ‘대상적’ 지위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주체의 대상적 맞짝, 주체‘인’ 화석이 바로 라캉이 대상a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일하게 진정한 즉자 존재는 이 역설적 대상뿐이다. p1670」

 

   덴은 일자들-보다-못한 것( 무 보다 못한 것)의 전존재론적인 비정합적인 다수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이 즉자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유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후보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물-자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은 이렇다. 즉 오직 이 어떤 것이 무보다 못한 것일 때, 덴의 전존재론적인 원-현실일 때만, 이 원-현실의 내부로부터 일상적인 현실은 ‘객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체의 출현을 통해 나타난다. 일자들의 모든 긍정적 현실은 이미 현상적인 것,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것, 주체와 ‘상호 관련된’ 것이다. p1676」

 

   그렇다면 어떻게 원-현실의 즉자 존재로부터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본래적 의미의 현실로 이행할 것인가?

 

「주체와 객체라는 쌍에서 즉자 존재는 주체 쪽에 있다. 분열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외적 현실의’)(초월론적으로 구성된) 대상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에 선행하는) 주체의 이러한 구성적 분열은 주체‘인’($) 공백과 이 주체의 불가능한-실재적인 대상적 맞짝, 즉 순수하게 잠재적인 대상a 사이의 분열이다. 우리가 (실정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구성적인 장으로) ‘외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빼기를 통해,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부터 제해질 때 나타난다. - 그리고 이 어떤 것이 대상a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객관적 현실) 사이의 상호관계는 그와 동일한 주체-대상이라는 상관항, 불가능한-실재 대상에 의해 유지되며, 이 두 번째 상관관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p1677」

 

   이것은 실제로는 실재의 존재론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의 실정적 질서의 장은 실재를 빼냄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질서와 실재는 상호 배제적이다.

 

   또한 실재는 상징적인 것의 효과이다. 상징화 과정은 내속적으로 좌절되며, 실패할 운명인데, 실재란 상징적인 것의 이러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즉자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닿으려는,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려는 상징적인 것의 실패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패는 상징적인 것이 그 자체로서 실패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라캉에게서 주체 자체가 ‘실재의 대답’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즉 주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원하지만 실패하며 이 실패가 주체이다. - ‘시니피앙’의 주체는 말 그대로 자신이 되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상징적 공간 내에서 결과는 원인에 맞선 반응인 반면 원인은 원인의 소급적 결과이다. 즉 주체는 실패하는 시니피앙을 생산하며, 실재로서의 주체는 이러한 실패의 결과이다. p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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