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0_
윤리적인 것의 정치적 정지
드디어 마지막이다. 작년 8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7개월 정도 걸렸다. 작년 말에 끝내려 했지만, 이것도 일이라고 너무 지쳐서 두어 달 책을 덮어 버렸다. 여하튼 끝을 보게 되니 혼자라도 뿌듯하다. 사실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아마 이 어지럽고 의심스런 리뷰를 꾸준히 읽어주셨던 듯하다. <공감>란에 달린 1 혹은 2란 숫자가 참 따뜻한 힘이 되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부디 이 글이 지젝에 이르는 길에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젝의 결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아직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너무 급진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반대로 너무 낡은 유물로의 복귀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마지막 장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한나절이면 술술 넘겨볼 수 있으니, 직접 읽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지젝의 1988년 데뷔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꾸준히 비판해온 대상은 냉소주의자이다. 라캉의 사위인 자크 알랭 밀러 역시 이 무리에 속한다.
「주체는 상징적 상블랑들 (이상들, 주인-시니피앙, 이것 없이는 어떤 사회도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상블랑들이며 유일한 실재는 육체적 주이상스의 실재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과 멀리서 관계를 맺는다는 밀레의 냉소적·쾌락주의적 생각에 맞서 우리는 “향유하고 다른 사람들도 향유하도록 하자”는 그러한 태도는 진정한 특이성들을 위한 장을 열어줄 새로운 공산주의적 질서에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p1697」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에 대한 밀레의 독법과 지젝의 독법은 완전히 반대이다. 밀레에 따르면 가치들, 이상들, 규칙들 따위는 단지 상블랑들일 뿐이지만 그것을 훼손하면 사회의 구조가 해체되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이 실재인 양 행동해야 한다는 냉소적 격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본래 라캉적 관점은 정반대이다.
「즉 진짜 환상은 상징적 상블랑들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를 실체화하는 것에, 실재를 실체적인 즉자 존재로 받아들이고 상징적인 것을 상블랑들의 단순한 텍스처로 환원시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길을 잃는 사람은 정확히 상징적 텍스처를 단순한 상블랑들로 기각하며 그것의 효력은, 상징적인 것이 실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우리가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보지 못하는 냉소주의자들이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이상스의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상징적 상블랑들의 네트워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데올로기는 주이상스의 실재와 관련해 그러한 상블랑들을 ‘단순한 상블랑들’로 냉소적으로 기각하는 데 있다. p1699~70」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언이 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전지구적 곤경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파국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을 거부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이다. 금융 붕괴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집단적 이데올로기는 애써 무시하려는 직접적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의지를 포함해 시치미 떼기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받고 있는 인간 사회들에서의 일반적인 행동 유형은 그러한 일이 닥치면 위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눈을 가리는 것이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p1744」
금융 위기 이후 일어난 영국 교외에서의 폭동은 이처럼 진행 중인 위기에 대한 0-수준의 반응이었다. 이 폭동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반동적이며, 무력한 분노이자 힘의 과시로 가려진 절망, 득의 만연한 카니발로 가려진 질투였다. 그렇다면 이런 폭력적인 반응으로부터 어떻게 사회적 삶의 총체성의 재조직화로 나갈 수 있을까?
여기서 지젝은 놀랍게도 새로운 4인방을 제시한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고 그에 필요한 가혹함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민 - 운동 - 당 - 지도자라는 4인방이다. 지젝은 이 4인방을 통해 공산주의를 불러 온다. 인민, 운동, 당은 그렇다 치고, 지도자까지.
그렇지만 인민은 더 이상 의지를 구현해야 할 신화적인 주권적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질서로 적극적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은 인민의 능력 밖이다. 진정한 보통 사람을 추어올리려는 모든 시도와 반대로 우리는 그들이 정치적 행위자들로 변형되는 과정은 더없이 폭력적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인민은 정치적 과정의 수동적 배경이다.
언뜻 동의하기는 힘들다. 인민주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지젝은 영화를 통해 논리를 펴려하지만 잘 모르겠다.
「운동 속에서 직접 ‘자신을 조직’하려고 할 때 인민이 창조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발언자들이 복권 추첨처럼 선택되며, 모든 사람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평등한 논쟁 공간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항의 운동은 행동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마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 이 지점에서 당과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해진다. 심지어는 급진적인 저항운동에서도 인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새로운 주인에게 그것을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만약 인민이 모른다면 당은 알까?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민을 지도하는 당이라는 통상적인 주제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p1748~9」
그러나 당의 역할은 당이 어떤 특권적 지식에 접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당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오류가 일어나는 지식의 열린 장이다. 이들이 인민을 대변한 이유는 정치적 동역학에서 이들이 동원하는 역할을 한 것에 달려 있다. 당은 조직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와 관련된 새로운 유형의 지식의 권위이다.
하지만 인민들 자체를 정치적 주체화의 조직화된 형태들과 분리시키는 간극은 어쨌든 극복되어야 한다. 인민과 당 사이를 긴밀하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지도자’ 이다. 지도자는 헤겔이 옹호하는 군주제의 절대군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탈린주의적 지도자의 문제는 과도한 개인숭배가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는 주인으로 충분했던 것이 아니라 관료적인 당-지식의 일부, 전형적인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실업자는 노동예비군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넘어 새로운 범주를 갖는다. 일시적 실업자부터 더 이상 고용이 불가능해진 영구 실업자를 거쳐 슬럼가나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게토에 사는 사람들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적 과정으로부터 배제된 지역, 인구들, 국가들에 이른다. 실업은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축적과 팽창의 동력학과 구조적으로 분리 불가능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처럼 새로운 구조적 실업을 착취의 한 형태로 특징짓는다. 이 피착취자들은 라노비치의 농담을 통해 묘사할 수 있듯 이중의 착취 속에 있다. “왜 착취당한다고 생각해?” “두 가지 이유에서지. 내가 일할 때 너희 자본가들이 나의 잉여가치를 가져가지.” “하지만 너는 실업자잖아.”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지.” 구조적 실업은 착취의 또 다른 형태이다.
「착취에 대한 이러한 강조의 중요성은 그것을 지배와, 즉 다양한 버전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권력의 미시정치학’이 선호하는 주제인 지배와 대립시켰을 때 분명해진다. 간단히 말해 푸코와 아감벤의 이론은 불충분하다. 지배의 규율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두 사람의 모든 상세한 정교화들, 배제된 자들,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같은 모든 풍부한 개념들은 착취의 중심성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참조 없이 지배에 맞선 투쟁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또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며, 그러한 생산양식 자체의 변혁이 아니라 간헐적인 반란과 저항 행위로 그치고 말 것이다.” - 그러한 권력의 이데올로기들의 적극적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이런저런 유형의 ‘직접’ 민주주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지배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인 반면 착취에 대한 강조의 결과는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이다. p1754~5」
지배 개념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에서만 착취가 자연화 된다는 것, 경제가 기능하는 방식 속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상호 인정된 자유와 평등의 관계인 것처럼 나타난다. 지배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구현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게 된다.
「현대의 좌파들이 반복하는 이야기 중에 보편적인 열정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나 당은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 준다는 것이다. (만델라, 룰라 등) 하지만 그런 다음 조만간 통상 몇 년 후에 그들은 핵심적인 딜레마에 봉착한다. 즉 과감히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메스를 들이대느냐 그저 ‘시늉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메커니즘을 교란시키면 거의 즉각 시장의 동요, 경제적 혼란에 의해 ‘처벌 받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반자본주의가 정치적 행동의 직접적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에서 우리는 익명의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에 반대한다- 우리는 여기서 목표와 목적을 구분하는 라캉의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즉 반자본주의는 해방정치의 즉각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궁극적 목적이, 모든 행위의 지평이 되어야 한다. p1757」
그렇다면 어떻게 탈정치적인 탈-역사화의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운동은 진실로 하나의 진공을 창조했다.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장 속에서 말이다. 이 진공을 적절한 방식으로 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먼 길이 놓여 있으며, 곧 진정 어려운 질문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이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유형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원하는가? 통제와 억압을 포함해 어떠한 종류의 기관을 원하는가? 20세기의 대안들은 분명히 먹히지 않는다. ‘수평적 조직화’의, 평등주의적 연대와 아무런 제한도 없는 열린 토론을 벌이는 시위 군중의 즐거움들을 즐기는 것은 황홀하나 그러한 토론들은 몇몇 새로운 주인-시니피앙들 주위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낡은 레닌주의적 질문에 대한 구체적 대답 속에서 합쳐져야 한다. p1761」
지젝은 우리에게, 월가를 점령하라 이후 열려진 공간 속에, 시간을 가지고 질문을 던질 것을 제안한다. 우리에게는 매우 당혹스럽게도, 근대적 패러다임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당황스럽게도, 이미 인민은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에 이르는 적절한 질문이다.
「대답을 가진 것은 인민이며, 이들은 단지 답을 가진 것에 대한 질문을 알지 못할 뿐이다. p1763」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지식인들은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상황과 같다. 환자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증상이 바로 답이다, 그것들이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는 모른다. 분석가는 이 질문들을 정식화해야 한다. 오직 그처럼 인내심 있는 작업을 통해서만 강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들 다수는 아직 제기되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 그리고 벽들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려면 진실처럼 들리는 말과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들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들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념들과 함께 그러한 질문들은 곧 제기될 것이다. 역사는 정확히 바로 그렇게 질문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라고? 한 세대 안에. p1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