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며, 이런 문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놓여 있음 -내 생각으로는- 을 보여준다. 그 전체 의미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thinking)에 한계를 긋는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사고(thoughts)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이 한계의 양면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한계는 언어 내에서만 그어질 수 있고, 한계의 바깥쪽에 있는 것은 그저 무의미(nonsense)하다. p29」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 논고≫ 서문에 쓴 말이다. 이 유명한 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서문과 마지막에 두 번 등장한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다. 입 닥쳐? 싸가지 없게 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의 입을 봉함으로써,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자신의 입도 닫았다. ≪논리-철학 논고≫가 철학에 대한 최종 결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한 6년 후에야 그는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철학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철학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가?

 

「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견해가 명제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철학자들이 던진 물음 그 자체가 바로 그런 오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철학적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물음에 답하려는 유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물음을 던지려는 유혹 자체가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혼돈에서 발생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생각될 수 없는 것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질 것이며, 전통적으로 구상되어온 철학 전체는 그 선의 바깥쪽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거대한 일반화’ 는 오류가 아니라 무의미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p32」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는 윤리학, 미학, 종교, 삶의 의미, 논리학과 철학이 있다. 이것들은 “정말로 표현 불가능한 것” 이다. 표현 불가능하다고 해서 진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모든 분야에는 진리가 있다. 다만 이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 질 수만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한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자, 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을 당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을 제외하면 논리적 명제에 관한 모든 사항이 그저 주석에 불과합니다. 주요 요점은 명제로, 즉 언어로 무엇이 표현될 수 없고 보여 질 수만 있는가 하는 이론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생각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동일하며, 저는 이것이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p35」

 

비트겐슈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이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 또는 철학과 아무 관계없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뭔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 그에게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 사람에게는 불만을 안겨주겠지만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한수 가르친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 그것만이 엄밀하게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p44」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따라서 침묵해야 한다.” 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인가? 그 역시 이발사의 역설과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제도 무의미하다고 단언했다.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명의 역할을 한다. 나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은 자신이 그것들을 딛고 올라서서 넘어가기 위해 그것들을 -계단으로- 사용한 뒤에는 그것들이 무의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말하자면 다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명제를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는 세계를 정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p34」

 

모순을 피해가는 훌륭한 답변으로도 보이지만, 궁색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무의미한 것을 바탕으로 무의미를 제거해야 하다니...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와는 별개로, 비록 그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보면 모든 논리가 그렇다. 수학의 공리처럼 무조건 전제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논리에도 법은 법이다의 막다른 지점이 있다.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사다리를 던져버린다 해도, 그것이 논리 체계의 불완전성을 은폐하지는 못한다. 구멍 없는 체계는 없다. 그 구멍이야 말로 체계의 주춧돌이 놓이는 자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고, 뒤적인 책이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2장이다. 시인인지, 사진작가인지, 여행전문가인지, 아니면 이 모두를 다 합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병률의 책에는 셋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 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 생각났다. 시인으로서의 이병률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말하려 애쓰고, 여행전문가로서의 이병률은 어떤 것도 명료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진이 그의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정말로 시와 같은 형태로만 씌어져야 한다. p46”고 쓴 적이 있다. 시를 철학처럼 쓰려고 하는 것은 어떨까? 비트겐슈타인은 울트란의 “에버하르트 백작의 산사나무” 라는 시를 이렇게 평하며, 찬미했다. “거의 다른 모든 시들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애쓴다. 여기서는 그런 노력이 시도 되지 않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과업을 달성하고 있다. p43” "정말로 굉장하다. (…) 왜 그런지, 이유는 이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야만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진 것 속에 -말로 할 수 없이- 담겨 있게 될 것이다! p44“ 이병률의 시는 혹은 산문은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 함으로써, 그의 사진이 보여줄 더 많은 것을 상실한다.

 

재미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 된지 90년이 지났음에도,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논리학자에게는 너무 신비적이고, 신비가에게는 너무 기술적이고, 철학자에게는 너무 시적이며, 시인에게는 너무 철학적 p50” 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의 페이지는 모두, 레이 몽크의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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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조유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올겨울은 팟 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들으며 보내고 있다. 팟 캐스트 <빨간 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빨간 책방>은 듣지 않게 되었다.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이라는데, 방송은 90회 정도 되지 않나 싶다.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본편이 50 여회 정도, 나머지는 외전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본편은 50대 네 남자가 참여하는데, 저자 박시백, 사학과 교수 신병주, 인문학자 남경태,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이다. 박시백은 <비정상회담>의 타일러 같이 똘똘한 느낌을 주고, 신병주는 학문적 깊이 보다는 대중 친화력이 높다. 가끔 아니 조금 더 자주, 조선왕조실록에 관한한 교수 신병주 보다 만화가 박시백이 더 박학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경태는 활력가득 기운을 불어넣지만 서구 중심주의적이라는 의심을 살만하고, 김학원은 진행자로서 ‘어떤’, ‘뭔가’ 따위의 불필요한 단어를 남발하여 마이크를 빼앗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완벽한 조합은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훌륭해 겨울 내내 듣고 또 다시 듣고 있다.

 

외전은 휴머니스트에서 출판한 몇 가지 역사관련 책으로 진행되는데, 그 중 하나가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다. 이 책은 1997년 조유식이 <말>지 기자시절에 초판이 간행되었고, 개정판은 2014년에 출간되었다. 조유식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의 성공한 CEO로,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대표이다. 팟 캐스트는 조유식과 박시백 그리고 김학원이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듯 나의 정도전에 대한 관심은 딱 1년 전의 드라마 <정도전>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우파로 낙인찍힌 조재현을 비롯해 박영규, 유동근 등의 면면과 ‘국민의 방송 KBS'의 사극이라는 점에서 전혀 볼 생각이 없었던 드라마다. 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극의 진행과 함께 날아든 ’입소문‘에 흘깃흘깃하다 금방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사극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역사 왜곡의 문제에서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가진 것에 반해, <정도전>은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극적 재미와 긴장이 어떤 팩션 사극보다 더 팽팽했다. 이인임 같은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낸 작가의 힘도 컸겠지만 무엇보다 정도전, 이성계, 정몽주라는 당대의 거물들 그대로의 힘과 매력, 그들의 가치관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 마음속에 들어온 정도전이 팟캐스트로 되살아났고, 나는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자야말로 내가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의 첫 인상은 이것이 드라마 <정도전>의 원작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줄거리는 물론 이인임을 제외하면 주요 인물들의 성격까지 거의 비슷하다. 드라마에 원작이 있다는 말이 없는 걸로 보아, 책 자체가 원작은 아닐 것임에도 이렇게 유사할 수 있는 것은 책도 드라마도 모두 역사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시대의 역사야말로 드라마 이상의 드라마이고, 그 시대를 만들어간 인물들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작가가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작가 김유식의 작품이고, 드라마 <정도전>은 정현민 작가와 강병택 연출자 등의 합작품이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7년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정도전을 이상적 혁명가로 재조명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작가의 가치관을 말해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조선의 개국을 단순히 왕조교체에 의한 지배 권력의 이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본사상’이라는 근본적 이념에 기반한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 이상이요, 그가 세운 나라 이상이었다. 고조선 이래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온 귀족 중심 체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한 모반자이자, 이미 600년 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천한 합리주의자였다. 또한 열강들 사이의 일시적 권력 공백을 파고들어 만주 수복을 도모한 야심만만한 국제 전략가였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 이론가인가하면 군사 지휘자였다. 수학과 의학, 불교에 두루 밝았고, 직접 악기를 제작할 줄도 알았다. 조선의 문물제도, 경복궁과 태평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의 기본 설계, 사대문과 사소문,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건국의 공으로 치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 대명사였으니, 역사를 주재하는 신은 그에게 너무 각박했던 게 아닐까. p6~7 」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計民授田계민수전,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준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주장한 민본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정치의 일차적 목표는 백성이 잘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토대도 그렇고, 정치가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서민 경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도전은 실제로 모든 땅을 거두어 국유화한 다음 백성의 수대로 나누어 주려했던 반면, ‘서민경제’를 외치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부자 감세와 서민 증세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놀랐던 것은 정몽주이다. 정몽주의 丹心단심은 백면서생의 박제된 이상이 아니었다. 그는 정도전만큼이나 치열한 실천적 정치가이자 지략적인 개혁가였다. 다만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을 뿐이다. 더욱이 정몽주와 정도전의 우정은 믿기지 않을 만큼 깊고 애달파서 당연히 극적 효과를 노린 작가의 상상이려니 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정도전을 가르치고 이끌고 보살피고 정도전과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 꿈꾸었던 자가 정몽주였다. 그런 정몽주가 마지막 순간에 정도전을 제거하려 칼을 뽑았다. 정도전 역시 정몽주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정씨의 격돌만으로도 고려 말의 역사는 드라마였다. 세 번째 놀란 것은 이성계라는 인물의 성격이었다. 유동근이 연기하는 저 정 많고 눈물 많고 답답할 만큼 결단이 더딘 사람이 어떻게 한 왕조의 창시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도 작가가 만든 성격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진짜로 ‘떠밀려 올라가기’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무엇을 쟁취한 적이 없이 남들이 밀어주고 추대하면 못 이기는 척 하나하나 이루어나가다가 마침내 왕좌까지 올랐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폐위되고도, 이성계가 임금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닷새 동안이나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성계는 떠밀려가 아니라 떠밀린 척하며 올라가기의 귀재였을 것이다.

 

조선은 士大夫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란 士와 大夫 곧 선비와 정치가를 하나로 보는 표현이다. 유가에서는 정치가 곧 선비의 책무이다. 修身齊家수신제가 했으면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를 하는 것이 도리다. 公子曰, 孟子曰을 예절이나 가르치는 케케묵은 빈말로 경시하는 풍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공자 사상의 핵심은 정치다. 예란 제상을 앞에 두고 사과와 배를 어디에 놓을지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禮의 큰 의미는 제도다. 어떤 시스템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꾸리고, 자기 자신을 닦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유교 이상으로 무장하고 고려 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는 책방 문사가 아니라, 실천적 지식인이자 유가적 관료 정치가였다. 공자와 비슷한 시기의 희랍 철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비슷한 유형의 정치를 주장한다. 플라톤의 ≪국가≫에 이상적 정체로 나오는 철인국가의 통치자는 거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스타일이다. 동시대의 동서양 모두 비슷한 생각을, 지금으로 봐도 너무 훌륭한 이념을 가졌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먼저 국가는 출생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음악, 체육, 계산, 수학, 변증법 등과 더불어 고통과 긴장과 결핍을 견뎌내는 훈련을 실시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위직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10년간의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선발 과정을 거친다. 통과한 사람은 5년 동안 철학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이제 관념의 세계에서 냉혹한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생존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남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세계 철학사』

 

정도전의 전제 개혁안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는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자였을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썼다. 민본사상의 바탕에 땅이 있는 것이다. 고려 말에 전제개혁을 주장 했던 사람들은 정도전 외에도 여럿 있었으나 정도전만큼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던 사람은 없다. 정도전의 계민수전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땅을 분배하는 것이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인데, 토지 사유를 인정할 경우 토지가 부의 축적 수단이 되어, 한편에서는 지주 한 사람이 토지를 독점하고 한편에서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농민들이 유리걸식하는, 부익부빈익빈의 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600여 년 전에도 깨달을 수 있었던 사상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 아래, 집값에 전세 값까지 폭등시키고 있다. 집을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점점 가지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이른바 ‘따끈한 국수’ 다. 청문회에 나오는 모든 고위공직자 후보들은 예외 없이 투기를 일삼고도 ‘sorry' 한마디면 끝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고 시행하는 정책들은 또 다시 부익부빈익빈을 가속화한다. 퉁퉁 불어터진 국수든 따끈한 국수든 국수는 국수다. 먹고 나면 금방 꺼지는 것이 국수다.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따라서 천하의 백성은 누구나 다 토지를 받았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부 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그 토지세도 다 나라에 수납되었으므로 나라 또한 부유했다. 《조선경국전》 p192 」

 

그러나 실제로 제기된 개혁안은 정도전의 원안에 비하면 매우 타협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1390년에 실제 실시된 전제개혁안은 이것보다 더 후퇴한 내용이었다. 국역을 지는 백성들과 백정들에 대한 토지 분배가 제외되었다. 다만 군역을 지는 군인들에게는 군전을 지급하였다. 그럼에도 조세 부담 면에서는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완화되었다. 고려 말 일반적이던 1/2 혹은 1/4의 과중한 부담에서 1/10에 가까운 세금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농민의 경작권을 지주가 임의로 빼앗지 못하게 했다. 정도전은 자기의 원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해 크게 한탄했지만, 고려 시대보다는 낫다는 평을 남겼다. 쌀밥을 이밥이라 부른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이성계가 준 밥이라 해서 백성들이 붙인 이름이 李밥이었다. 정도전의 계민수전 원안이 좌절된 것은 물론 기득권 세력의 극렬한 반발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마지막 전쟁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 혁명 세력들 사이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더욱 비극적이다. 정도전은 패하여 만고의 역적이 되었고, 이방원은 태종으로 후세에 기록되었다. 정도전은 왜 이방원과 함께 할 수 없었을까? 이방원의 카리스마와 정도전의 국정 능력이 손잡았다면 조선은 더욱 찬란하게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보통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으로 본다. 두 세력 간의 다툼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정치 체제를 결정짓는 이념 투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역사의 도정에서 정도전이 가야할 길과 이방원이 가야 할 길은 달랐다.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 유배당한 하륜을 최측근으로 삼은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방원은 보수·안정 지향적인 정치가였다. 이방원이 귀족적이었다면 정도전은 평민적이었고, 이방원이 우파라면 정도전은 좌파였다. 정도전이 이방원을 적극적으로 세자로 밀지 못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은, 자질이 일정치 않은 세습 군주가 전권을 행사하는 왕권 중심주의보다는 천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의 중심이 되는 재상중심주의가 왕조 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믿었다. 즉 군주는 상징적인 전제권을 가지고, 정치의 대강은 정승이 장악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유가에는 군왕보다 지식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공자와 맹자도 임금에게 무조건 맹종하는 기능적 지식인 이 아니라, 임금의 잘못을 깨우쳐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철인 정치가였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주의는 이러한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p279~80」

 

왕권중심주의냐, 재상중심주의냐? 제도상으로 절대적인 우위가 있는 것일까? 정도전의 사상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실현된 신권 중심의 정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당파정치라는 인식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조선정치를 바라보게 만든 최초의(?) 대중적 작품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다. 왕권을 회복하려는 정조와 신권을 지키려는 노론 영수 심환지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추리역사물이다. 이 책의 독자는 보통 정조의 왕권을 강력 옹호하게 된다. 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이루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그리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저절로 든다.

 

사실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닐 것이다. 역사적 국면과 시대적 소명에 따라 제도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승리하여, 재상중심주의가 기틀을 마련했다면, 조선 500년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도전의 사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정도전의 죽음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재상중심주의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의 민본 정신이다. 정도전의 《경제문감》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다.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남을 책임져야 하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근심을 품어야 한다.” 남의 음식을 먹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바로 사대부다.

 

드라마 <정도전>의 마지막 장면은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약간은 간지럽기도 하다. 정도전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외친다.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와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 600년을 훌쩍 뛰어, 오늘의 시청자에게 직접 던지는 메시지다. 그러나 IS와 사토리, 증오와 토닭토닭이 뒤얽힌 시대에, ‘불가능한 꿈’에의 주문은 또 하나의 허망한 청춘담론은 아닌가? 옴짝달싹할 수 없이 계층화된 사회에 맨 주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불가능한 것은 그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캉은 성구분 공식이라는,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수학공식을 제시한다. 여성 공식은, ‘모든 x가 남근 함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근 함수에 속하지 않는 어떤 x도 없다.’ 이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 모순 같지만 이것이 라캉의 여성 공식이다. 다른 말로 하면 , not-all 혹은 not-whole 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예외도 없다. 남성 공식은 ‘모든 x가 남근 함수에 속한다. 단, 남근 함수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하나 있다.’ 이다. 남성 공식은 예외에 기반 한 총체다. 법의 경우와 비슷한데, 모든 것은 법을 따라야 한다, 단 법 자신은 예외다. 법의 최종 근거는 법에 있지 않다. 주권자의 자의적 결단에 있다. 남성, 아버지의 이름, 법은 예외를 바탕으로 닫힌 구조이다. 여성은 예외도 없지만, 전부도 아니다. 닫혀 지지 않은 원이다.

 

혁명이 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꿈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사회 구조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구조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불완전성이 주체를 출현시키는 것이 아닐까? 필요한 것은 목숨을 건 도약, 신념의 도약이다. 혁명은 무수한 도약의 실패를 딛고, 기적적으로 성공한 도약이다. 우리의 도약은 거의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성공한 도약은 개천에서 승천한 용이 아니다. 용만 날아가고, 개천은 여전히 개천이지만, 혁명은 사회구조 자체를 바꾼다. 삶을 옥죄이던 구조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구조를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더 좋은 사회가 될까? 폐허의 심연을 견디어 낼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다만, 그 불확실성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어떤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와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이 고답적인 외침을 21세기에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관 세대가 될 것인가, 증오 세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한 꿈을 품을 것인가. 선택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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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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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일의 재앙에 철학의 공동 책임은 존재하는가? 하이데거, 겔렌, 슈미트 : 결의성과 강력한 제도 그리고 정치의 본질로서 적의 제거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장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별로다. 나치즘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뽑아놓은 저 세 명의 철학자들이 그 철학의 핵심에서 어떻게 나치즘을 추동했는지 선명하지가 않다. 회슬레가 생각하는 독일정신의 정점은 칸트와 헤겔이다. 그 이후의 독일철학은 일종의 퇴보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지만, 그들이 분명 철학사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만 위대할 뿐 저마다의 한계에 갇혀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로 넘어 올수록 서술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장황하게 설명은 많은데 핵심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1장에서, 세부사항과 정확성을 버리고 일반 독자에게 큰 그림을 보여주겠다던 그의 호기로운 말에 비추어, 대중의 입장에서 조금 실망스럽다. (어쩌면 독자로서의 나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13장의 도입부는 시대의 밑그림을 잘 그리고 있다.

 

 

독일 정신사를 다루는 사람은 누구나, 어째서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이 그토록 빠르게 이웃 민족들에게 대량 학살자와 그 공범자가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사회주의의 공포는 바로 바이마르공화국이 성취한 그 문화에 의해 담지 되었던 까닭에 너무도 수수께끼 같다. 매우 많은 최고의 독일 학자와 예술가 그리고 철학자들이 20세기의 처음 30년간을 압도했다. 바로 그것이 이른바 ‘독일 정신’이 국가사회주의의 부상에 기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비록 파시즘이 독일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사회주의는 파시즘의 다른 형식과는 아주 판이하다. 악에 대한 철저성과 독일적 특징, 철학적 특징도 그것에 속한다, 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왜 그토록 많은 독일인이 히틀러를 따랐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할 때는 세 가지 차원의 그룹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 첫 째, 국가사회주의적 절멸 정치를 확신을 가지고 지지한 아주 적은 수의 독일인이다. 둘 째, 대량학살을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잔인성을 가질 수도 있는 정권에 기꺼이 권력을 위임하고자 한 커다란 집단이다. 공산주의의 위험을 막아주고, 프랑스에 대해 패배의 빚을 갚아주고, 영국의 헤게모니를 분쇄해 주고, 그리하여 독일을 다시 강력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는 소망을 히틀러 정권에 투영한 사람들이다. 셋 째, 히틀러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정권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한 반대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복종한 많은 사람들이다.

 

이 세 번째 집단은 루터와 칸트의 오랜 독일 전통을 따랐다. 독일 철학에서는 그럴듯한 저항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집단은 슈펭글러나 슈미트처럼 권력 정치에 매혹 당했다. 법치 국가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계몽주의적 이상의 몰락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극단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 이성의 파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보편주의적 이상은 니체와 반민주주의적 우파에 의해 서서히 훼손되었다. 윤리학에 대한 폄하도 한 몫을 담당했다. 정치적 좌파에 속하는 논리실증주의의 학설은 윤리학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라고 역설하며 윤리적 질서에 대한 의무를 약화시켰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안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무엇보다 우선 대화에 대한 무능력으로 몰락했다. 첫 번째 집단에 대해 말하자면, 니체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살해를 정당화 했다. 도덕적 냉소주의에 니체의 기여는 컸다. 그는 냉소주의를 지적으로나 문체적으로 품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탈그리스도교를 가속화했다. 전체주의적 권력 국가는 이것이 만들어 낸 의미 공백을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보면 국가사회주의 국가도 엄청난 문명의 붕괴도 니체 없이는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나치즘과 관련된 철학들은, 도덕적 비겁함과 비열함 그리고 부분적인 지적 기만까지도 위대한 정신적 성취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콘라트 로렌츠와 마르틴 하이데거를 여기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대표작은 미완성 작인 《존재와 시간》 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첫 눈에 보아 아주 상이한 다섯 가지 경향을 하나의 통일적인 구상 속에 통합한다. 첫째,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고자 한다. 존재론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그는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에 반대한다. 둘째, 존재에 대한 접근은 인간적 현존재의 분석에 의해 가능해야 한다. 인간적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셋째, 현존재의 시간성 이론을 고대 이래로 가사성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대결을 위해 이용한다. 넷째, 시간성으로부터 역사성에로 이어지는 다리를 형성한다. 《존재와 시간》이 마치 하나의 폭탄처럼 여겨진 것은 단지 사유 방향의 이런 독창성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음은 아주 현재적인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철학은 문학과 달리 죽음을 무시했다. 시간성과 역사성의 결합은 세계사적 변혁의 증인이라는 시대의 감정에 적합했다. 전적으로 독일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새롭게 조어된 독특한 언어와 결의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인에 대한 이 책의 반항은 전선 세대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책의 음흉한 점은 양심이나 죄 같은 개념을 고쳐 정의함으로써 전통적인 도덕적 의미를 전복시키고, 무엇을 위한 것이든 결의성이 유일한 관건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데 있다. 《존재와 시간》이 단지 존재론의 역사를 파괴하려 했다고 해도 이것은 못지않게 윤리학을 파괴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계-내-존재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흔하지만 몇 줄 요약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여기서는 결의성이라는 개념이 눈에 뜨인다. 하이데거는 자기 저서의 윤리학적 핵심을 결의성 개념과 더불어 전개한다. 신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양심 개념을 어떻게 완전히 형식화하고 주관화하는 가는 매우 흥미롭다. 양심은 외치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함의 양태로 말한다. 하이데거는 죄와 책임 개념을 재해석하는데, 재해석의 본질은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가 자기 자신의 근거는 아니며, 실존적 기투에서 스스로를 불가피하게 몇 가지 가능성에 내맡기는 것에 있다. 하이데거의 결의성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르지만 그 공허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결의성은 오로지 결의로서만 그 자신을 확신한다.” 물론 이것이 필연적으로 국가사회주의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거기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도 차단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하이데거의 결의성은 비합리적 확신의 극단화를 초래한다.

 

하이데거 후기의 작업은 “기술적 세계에 대한 동시적인 긍정과 부정”으로서 “사물에 대한 내맡김”이라는 정적주의적 윤리학으로 특징지어 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중립적인 것이라는 테제를 비판한다. 기술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에는 세계관계의 방식이 현현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것이 그것에게는 부품이고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인, 근대 기술을 “몰아-세움” 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기술의 위험은 인간적 본질의 변화에 있다. 그에게 대량 학살의 국가사회주의적 기술이 기계화한 농업과 동일한 본질로 여겨진다. 전회 후에도 하이데거는 도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확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범주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확실히 하이데거는 근세적 주관성과 고삐 풀린 기술에 대한 불편함을 최초로 개념화한 사람들 중 하나다. 비록 처방을 위한 어떤 윤리학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에 관한 훨씬 흥미로운 해석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3장의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걸까> 이다. 지젝은 헤겔과 라캉 이전에 하이데거주의자로 출발했다. 지젝의 핵심은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과는 관계없이 정치적 오류를 저지른 것이거나 처음부터 잘못된 철학을 가졌기 때문에 히틀러를 지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나치즘 연루는 그의 철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고수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철학에서 스스로 한 발짝 물러섬에 의해 접어든 샛길이라는 것이다. 인정하든 아니든 이 책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직접적인 분석이다.

 

 

독일의 재앙에 공동 책임이 있다고 보는 두 번째의 철학자는 아르놀트 겔렌(1904~1976)이다. 나에게는 무명이므로 그냥 넘어간다. 세 번째는 카를 슈미트(1888~1985)이다. 슈미트는 넘어갈 수 없는데, 세 사람의 국가사회주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도덕적으로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비열함과 위대한 정신적 성취가 함께할 수 있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꼭 들어맞게도, 슈미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상가요, 바이마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법철학자였다. 슈미트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정치신학》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다. 슈미트는 법학적 개념은 신학적 개념의 변형이라는 설득력 있는 법률사적 테제를 주장한다. 그는 특히 주권개념에 매혹 당했다. 예외 상태에 대해 결단하는 자는 주권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예외적 상황에서 정치적 제도 및 결단의 이론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근거지어지지 않고 근거 지을 수도 없는 결단이 법의 최종적 근거다. 결단에는 거의 신학적인 존엄이 주어진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치적인 것을 공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향한 경계설정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편 국가의 이념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슈미트는 권력 투쟁을 실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으로 간주하는 정치가를 정당화 한다. 국가의 절대적 주권과 예외 상태, 독재와 전쟁에 대한 그의 매혹은 단지 독일이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아가는 것에 날개를 달아 준 것만이 아니다. 2001년 9.11 이후 슈미트의 이론은 미국에서도 “영감을 불어 넣으며” 작용해 왔다.

 

 

 

14 서유럽의 규범성에 대한 연방공화국의 적응 : 가다머와 두 개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한스 요나스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독일 문화의 특수한 지위도 파괴되었다. 첫째, 비판적 유대계 지식인들을 살해하고 추방함으로써 독일은 지적인 사혈을 체험했다. 대부분 앵글로색슨 나라로 도피한 유대계 지식인들은 그 나라들의 특히 미국의 학문적 발전을 엄청나게 촉진했고, 독일은 오늘날까지도 빌빌대고 있다. 둘째, 독일어 자체가 위축되었다. 종종 학문적 공용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중부 유럽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이 영어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셋째, 강력한 여파로 인해 특수하게 ‘독일적인’ 철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독일적 정신’ 이라는 것이 금기시 되지 않았을까 싶다.

 

1950년대는 하이데거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순수하게 철학적인 면에서 하이데거주의가 낳은 부담 중 하나는 철학의 핵심 분과인 인식론과 윤리학을 오랫동안 경시했다는 점이다. 신칸트주의 및 후설의 현상학 전통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고, 가장 재능 있는 하이데거의 제자들도 망명한 상태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외국에서 계속 전개되었다. 독일인들이 몰두한 것은 체계적 야심을 억제한 철학사학이었다.

 

유별난 것은 새로운 철학적 돌파가 해석학과 미학이라는 오랜 독일적 분과에서, 그것도 하이데거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1900~2002) 이다. 예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분석의 섬세함 및 정신과학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재구성은 그의 대표작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개요》에 고전적 지위를 보장한다. 그럼에도 올바른 이해를 어떻게 잘못된 이해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설정을 폐기함으로써 정신과학에 혼란을 가중 시켰다. 정신과학의 학문성은 단연코 이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십년간의 정신과학에 대한 해체주의적 파괴 전체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때 다르게 이해한다.”는 가다머에 의해 부추겨졌다.

 

첫 번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의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책은 축소된 이성 개념의 개선 행렬을 묘사하는데, 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 보존에 봉사하지만 외적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또한 내적 자연도 훼손한다. 그러나 현대의 결정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그 진단에서 세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류의 타락을 서구 문화의 시작에서부터 본다. 이미 신화가 계몽의 산물인 것인데, 이는 계몽이 신화로 전화되는 것을 조장한다. “계몽은 철저해진 신화적 두려움이다.” 그 결과 산업시대의 특수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둘째, 귀족주의적 문화 이해에 근거하여 문화 산업을 대중 기만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뛰어난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맥락을 교란한다. 문화 산업의 천박성은 나치의 근본적인 악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들의 비판에는 어떠한 명확한 규범적 기초도 결여되어 있다. 뛰어난 도덕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적-논리적 근거가 지어지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첫 번째 비판 이론은 이렇게 규범적 기초의 부재로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이 규범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위르겐 하버마스(1929~)의 주된 관심사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프랑크푸르트 동료이자 함께 담론 윤리학을 다듬은 카를-오토 아펠(1922~)과의 공동 작업이다. 두 번째 프랑크푸르트학파도 한 쌍의 친구가 대표하는 셈이다. 현대철학의 대립하는 두 주요 흐름, 즉 과학주의적 논리실증주의와 실존철학이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이라는 아펠의 인식은 결정적이다. 이러한 흐름은 둘 다 이성 개념을 기술적-자연과학적 이성으로 축소하고 가치에 오직 주관적 지위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담론윤리학은 합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환원된다. 한편으로 이웃 간의 혹은 가정 내의 갈등을 당사자에게 맡기는 것은 확실히 옳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갈등을 오로지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는 망상적이다. 아무런 실질적 원리 없이 어떻게 합의를 달성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담론윤리학자들은 그런 원리도 대화에 의해 확증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원리로는 어떤 구체적인 윤리학적 인식도 획득할 수 없다. 담론윤리학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추정된 다수의 의사로부터 얻어내고, 합의가 최종적인 진리 기준인 까닭에 이러한 것을 더 이상 기회주의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려된다. 의식사적으로 담론윤리학은 객관적 가치 질서의 사상을 자유 열정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며, 동시에 윤리적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시대에 적합할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하기 위해 합리적 윤리학의 가능성을 믿으려 하지만, 그 윤리학이 엄격한 구속력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만큼 그토록 몇십 년 동안 사회적 논의를 전 세계적으로 각인해낸 연방공화국의 공적 지식인은 없다. 그는 저널리즘적인 표현 형식을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들의 성과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요약, 현대의 문제에 대한 재빠른 적응, 공론장의 통합할 수 없는 입장 사이의 타협 및 동시에 동맹자와 적대자 간의 날카로운 경계 긋기가 속한다. 하버마스는 한편으로는 시대감각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정신의 민주화를 연구하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촉진했다. 하버마스와 과거의 위대한 독일 철학자들을 비교하면, 그의 학문은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적 개념에 대해, 가령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의 날카로운 분리에 대한 부정이나 형이상학에 대해 총체적인 거부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에 반해 형이상학은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

 

하버마스의 가장 주요한 저작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유일한 타당성 원천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행위다. 근대 체계는 생활 세계의 식민화를 추진할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행위에 함축된 타당성 요구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고 또 종교적으로 근거지어진 그 오구의 근원적 통일을 분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를 부정적으로, 후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독일 철학사』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철학자는 나는 처음 들어보는 한스 요나스다. 그가 쓴 《책임의 원리 : 기술 문명을 위한 윤리학의 시도》는 근대 환경철학의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독일을 떠나 영어로 글을 써다가 노년에 모국어로 돌아와 쓴 이 책은 독일에 빠르게 수용되어, 독일을 오늘날 가장 환경 의식적인 산업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저자 회슬레는 요나스를 굉장히, 내가 보기에는 현대 독일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긍정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요나스와 관련해 하이데거의 한 제자가 실제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독일 관념론의 자연철학과 칸트의 윤리학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고전 독일 철학의 중심적인 이념들을 약 200년의 철학적 발전 이후에도 시대에 적합하게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요나스가 미국인으로서 뉴로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독일어로 된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유가 더 이상 독일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역사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멘델스존 이래로 독일 문화의 부상에 그토록 본질적인 기여를 수행한 유럽의 유대인을 광범위하게 말살한 데 따른 형벌을 목격할 수 있다. p410~1

 

결국은 독일 관념론의 부활 가능성이다. 회슬레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객관적 관념론’의 부흥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회슬레의 철학적 태도를 조금 살펴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철학자들에 대한 회슬레의 평가 기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같다.

 

일반적으로 비토리오 회슬레는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서 ‘객관적 관념론’의 부흥을 시도하고, 그로부터 현대의 시급한 과제에 부응하는 실천철학의 가능성을 근거 짓고자 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객관적 관념론이란 논리적-이념적인 것의 절대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현실적-절대적인 원리로서 고찰해야 한다는 철학적 견해, 다시 말하면 논리적-이념적인 것이 주관적 관념론에서처럼 한갓 주관적인 사유 원리일 수만은 없고, 이를테면 플라톤적이고 헤겔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그 자체의 존재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며, 나아가 그와 같이 객관적 성격을 지니는 이념적인 것을 동시에 자연과 주관 정신 및 객관 정신 같은 실재적인 존재를 근거 짓는 원리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견해다. p422

 

 

15 왜 계속해서 독일 철학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가?

 

이 물음은 독일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철학이 처한 세계적 환경과 관계가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 분업은 전문화를 강요하고, 전문화는 철학의 이념과 관련해서는 치명적이다. 종교적 동기의 고갈은 철학에서 본질적인 힘의 원천을 빼앗았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거부 반응은 공적인 지식인에 대한 욕구를 다소 제거했다. 오늘날의 대중철학자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의 문예란에, 이를테면 좀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대중철학의 교양은 학문적 철학이 좀 더 기술적으로 변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분석철학에 의해 촉진된 이런 과정은 부분적으로는 필요한 것이었다. 논리학의 변형에 힘입어 획득한 논증 분석의 정밀함을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밀화가 결코 언제나 유용한 것은 아니며 종종 유해하기도 하다. 그것과 결부된 비용은 좀 더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불행한 이원론은 독일 철학에 손해를 끼쳤다. 독일 철학은 좀 더 앵글로색슨적인 분석철학과 좀 더 프랑스적인 대륙철학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철학의 몰락을 그것에로 환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몰락은 오히려 세계사적 상황과 독일 정신의 종언 그리고 독일 대학들의 특수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첫째는 언어다. 지구화는 국제적인 공용어를 필요로 하며, 현재 그것은 영어다. 미래에는 중국적 사유의 영향이 점점 더 커질 수 있고, 따라서 독일어의 입지가 더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독일 정신이다.

 

무엇이 독일 철학을 다른 유럽의 전통과 구별시켜주는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미 중세에 개인의 영혼을 신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이성주의적 종교철학이 나타났다. 권위로부터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는 신의 본질에 관한 숙고는 독일 정신의 가장 웅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의지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의 이성으로부터, 따라서 선험적으로 세계의 일정한 특징을 이해하고자 시도해야만 했다. 경험주의에 대한 독일의 거부는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신학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선험주의는 고대의 행복주의와 영국의 도덕 감정의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칸트의 윤리학을 산출했다. 그리고 새로운 윤리학은 독일인에게 독일의 공무원 국가를 가능케 한 유일무이한 윤리적 진지함뿐만 아니라 비상함 비굴함을 새겨 넣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세계의 역사성을 발견했을 때, 갱신된 루터교는 소박한 계시 신앙으로부터 인간 문화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신학에로의 목숨을 건 도약을 이루어냈다. 독일 관념론 체계에서 마무리된 그 결과는 철학적으로는 웅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매우 높은 수준의 역사학적 반성은 19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를 광범위하게 부식시켰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위기에서 너무도 혐오스러운 세계관으로 응축된 보편적 상대주의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독일 상대주의의 도전은 후설부터 아펠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화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근거 짓기 노력을 구상케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다른 문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개관하는 한 독일 정신의 이러한 본질적 특징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도 독일적인 근본성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그 잔여물에서는 심지어 철학적 체계학에 대한 독일적 감각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그토록 뚜렷하게 가령 미국과 구별해주었던 철학적 형식의 종교성은 사라져버렸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저주받은 12년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이 과거의 정신적 보물을 자기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위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p415~6

 

셋째, 독일 학문 제도의 상태는 좋지 않다. 제도적으로 보면 독일 철학의 위대한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여기서 다룬 저작들은 여전히 철학적 사상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든 철학은 만약 라이프니츠와 칸트 그리고 헤겔의 결정적 이념이 오늘날의 문제의식의 높이로 올라서지 못한다면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입문은 고전의 독해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했다. 저자로서는 (…) 문화의 방주가 저 사상들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구원의 물가로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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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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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전으로서 정밀과학과 분석철학의 부상 : 프레게, 빈학파와 베를린학파, 비트겐슈타인

 

인간 영혼의 심연을 측정하고자 한 니체의 소망에 대립하여 고틀로프 프레게(1848~1925)는 추론 형식에 절대적 명확성을 가져오고자 했다.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 산수적인 것에 따라 형성된 순수 사유의 형식 언어》 이후로 논리학은 연역학적 학문일 뿐 아니라 형식화한 분과학문 이기도 하다. 개념 표기법의 논리적 언어에 의해 진술논리학을 위해서 뿐 아니라 술어논리학을 위해서 제시한 것과 같은 논리 계산이 가능해졌다. 복합명제의 진리치는 요소명제의 진리치의 함수다.

 

물론 프레게의 논리주의 프로그램의 구체적 실행은 러셀이 고전적 집합론에서 구성할 수 있는 이율배반을 알렸을 때 실패했다. 프레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언어철학은 고전적 지위를 보유한다. 프레게는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같은 대상을 지시하지만 같은 뜻을 지니지는 않는다며, 뜻과 지시체를 구별했다. 프레게는 개념을 함수에 비교한다. 둘 다 텅 빈 자리일 뿐이고 고유명사에 의해 채워질 때에야 비로소 완결된 뜻을 갖기 때문이다.

 

프레게는 논리학과 수학철학 및 언어철학 외에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특히 그의 정치적 일기는 그가 반유대주의적 극우파임을 드러내 준다. 개념 표기법적인 명민함이 윤리적-정치적 기만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 20세기 철학을 비추고 있다.

 

 

프레게의 논리적 혁명은 분석철학을 낳았다. 분석철학은 오늘날 특히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지배적이지만, 그 기원에서 영국적인만큼이나 독일-오스트리아적이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주창자들이 1933년 이후 앵글로색슨 나라들로 이주한 것이 사실이므로, 이 책에서는 분석철학의 후기 저작들을 다루지 않는다.

 

분석철학의 최초 형태는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였다. 논리실증주의의 중심지는 베를린과 특히 빈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의 철학에 대한 일등급 저작들은 논리경험주의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적 물음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넘어설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철학보다 놀랄 만큼 그 수준이 떨어진다. 물론 논리경험주의는 과학적 철학으로 사변적 철학을 영구히 극복했다고 믿었지만 말이다.

 

논리실증주의의 목표는 통일과학이다. 논리실증주의가 추구하는 구성 체계는 자기의 심리적 성질로부터 물리적 대상에, 이 물리적 대상으로부터 낯선 심리적 대상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과학의 대상에 다다르고자 한다. 낯선 심리적 대상과 관련해서는 정신적인 것을 행동으로 환원하는 행태주의가 과학적 세계 파악으로서 간주된다. 이런 새로운 파악의 적수는 형이상학이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진술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하나의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 단어를 포함한 명제를 검증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모든 명제는 프로토콜 명제로 환원 가능해야만 한다. 형이상학적 신 개념은 그 타당성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이런 개별 분석으로부터 모든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형이상학의 판단들은 분석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음악이나 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감정의 표현이다. 형이상학자는 “음악적 능력이 없는 음악가” 이다.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것 자체의 역설이다. ‘오로지 경험에 의해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나 분석적 진술만이 의미 있다’는, 진술 자체, 이 판단 자체의 지위는 무엇인가? 이 진술 역시 경험적이지도 분석적이지도 않다. 이 진술은 본성상 규범적이다. 결국 이 이론은 자기모순의 딜레마에 빠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 혹은 이발사의 역설이다. 나는 이것들을 그냥 러셀의 역설의 생활 버전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프레게의 실패를 끌어낸, 러셀의 고전적 집합론에서의 이율배반이라는 것도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지만 책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내 생각이므로 틀릴 지도 모른다.) 괴델에 따르면 완전하면서 동시에 무모순적인 체계는 없다. 그리고 무모순의 공리계라해도 그 공리계 자신의 무모순성은 증명할 수 없다. 즉 그 공리계에는 논증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는 명제가 최소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다.’ 는 참, 거짓을 논증할 수 없는 명제다. 논리실증주의를 근거 짓는 공리, 즉 ‘오로지 경험에 의해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나 분석적 진술만이 의미 있다’ 는 명제 역시 경험으로 증명 불가능하다.

 

 

물론 논리실증주의는 한 사람의 철학적 천재를 탄생시켰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독일 철학자 인가? 《처음 읽는 영미 현대 철학》 을 읽을 때, 비트겐슈타인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때는 비트겐슈타인이 영미 철학자인가?, 의아했다. 20세기 불세출의 천재인데다, 언어철학의 태두인 셈이니 서로 욕심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스트리아 철강 갑부 집안의 이 천재는 1929년 최종적으로 케임브리지로 옮겨 갔지만, 독일어에 충실했다고 한다. 저자 회슬레는 처음부터 언어를 기준으로 독일철학을 규정한다고 했으니, 보통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로 정의되는 비트겐슈타인을 독일 철학자에 포함시킨다 해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저서는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다. 30대 초반에 《논리-철학 논고》를 출판하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한 그의 오만(?)은 유명하다. 그러나 오만한 만큼 깔끔하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새로운 사유에 매달린 끝에 30여년의 간격을 두고 《철학적 탐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비록 사후에 출판되기는 했지만.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을 보통 그림이론이라고 부른다. 명제와 그림은 일대일 대응해야 한다. 이런 상응은 세계와 그림에 공통적인 논리적 형식 덕분에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이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반성성의 금지다. 어떠한 명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자연과학의 총체다. 윤리학의 명제들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논리-철학 논고》 자체의 명제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의 무의미한 본성을 인정한다. 그것들은 세계를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 타고 올라가는 사다리로서, 올라간 다음에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이 현실에 대해 가치중립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신이 더 이상 세계 속에 현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계의 실존에는 무언가 신비적인 것이 드러난다. 다만 그에 관해 이론화할 수 없을 뿐이다. 실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일상 언어의 이해를 위한 암묵적 협약은 엄청나게 복잡하다.” 《논리-철학 논고》의 이 명제는 일상 언어를 그것이 논리적 이상 언어와 어느 정도까지 다른가 하는 판단에 종속 시키는 대신 그것의 미묘한 적응 능력을 추적하고자 하는 《철학적 탐구》의 프로그램을 가장 일찍이 미리 보여준다. p307

 

1929년 케임브리지로 옮겨 간 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눈길은 변화했다. 그는 또 다시 새로운 경향을 창조했다. 이상 언어의 철학을 일상 언어의 철학이 뒤따랐다. 결정적인 것은 플라톤적이고 데카르트적인 의미 이론과의 단절을 나타내는 언어놀이 개념이다. 그림이론에서 놀이 개념으로 언어관이 바뀐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오래된 도시로 간주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골목길과 광장, 낡은 집과 새 집 그리고 서로 다른 시대에 증축된 것들을 갖는 집들의 미로다. 그리고 이것은 반듯하고 규칙적인 도로와 단조로운 주택이 있는 다수의 새로운 교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되돌아오는 주제는 본질주의에 대한 그의 반박이다. 가령 언어 놀이의 공통된 본질을 추구하는 대신 비트게슈타인은 연속적인 중간 형식에 의해 심지어 아주 상이한 대상마저도 결합하는 가족 유사성을 지시한다. 그의 언어 놀이 개념의 상대주의적 귀결은 곧바로 사회과학으로부터 학문 이론에 이르는 많은 분과에서 끌어내졌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하는 새로운 철학 개념이다. 철학의 성과는 “지성이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쳐서 감염된 종기들” 이며, 자기의 목표는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보여주는”거라는 것이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계속해서 문제되는 게 결국 반성의 고된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명백한 일이지만 철학에서 불행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을 헤겔보다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자율을 견지하고 개인이 그를 길들이는 사회적 세계에 반대해 옳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전적 사상가에게 손을 내밀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이론보다는 후설의 그것을 택하라는 좋은 충고를 할 수 있다. p310

 

 

 

12 신칸트주의와 딜타이에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근거 짓기 시도 및 후설에서 의식의 해명

 

20세기 전반부의 또 다른 커다란 운동을 살펴보기 전에 비록 신칸트주의가 실증주의나 현상학 같은 독창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먼저 언급해야만 한다. 독일 관념론의 종언과 세계관적 유물론의 부상 이후 수긍이 가는 중간노선은 칸트로 돌아가 숙고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숙고는 초월론적 사상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그럼에 있어 특히 철학사학과 과학사학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p311

 

신칸트주의의 대표적 분파는 마르부르크학파와 바덴학파다. 바덴학파의 대표자인 빈델반트와 리케르트는 칸트가 비워둔 주제, 즉 자연과학과의 경계를 설정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적 근거 짓기를 다뤘다. 게오르크 짐멜, 막스 베버 등에 의해 이론적 사회학이 엄청나게 진보하던 시기에 이러한 주제는 특히 시급했다.

 

막스 베버(1864~1920)는 오늘날까지 가장 포괄적인 사회학적 범주론을 사회적 현상에 대한 풍부한 영속적인 정의들과 함께 내놓았다. 그는 경제와 국가의 발전에 대한 종교의 기여를 탐구하는 동시에 가치중립성에 대한 근대적 요구를 분명히 표현했다. 그는 1919년의 강연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가에 대해 심정 윤리 대신 책임 윤리를 요구하고 근대의 합리화 및 관료화 과정에 함께 시작되는 의미 및 자유의 상실을 묘사했다. 개념 형성의 정밀함, 다양한 문화의 수많은 원전에 대한 숙달, 근대의 실존적 고통은 베버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회과학자로 만들었다.

 

베버는 사회학자이지만, 신칸트주의에 대해서 정리할 것이 마땅하지 않아, 익숙한 베버를 짧게 요약하고 또 하나의 생소한 이름 딜타이로 넘어간다.

 

 

빌헬름 딜타이(1833~1911)는 이미 신칸트주의 이전에 ‘역사 이성 비판’ 즉 정신과학의 정초를 이해심리학의 입장에서 시도했다. 그는 정신과학을 자연과학으로부터도 형이상학으로부터도 경계 긋고자 한다. 독일 관념론과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항해 이중의 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딜타이의 발상이 갖는 최종 결과는 역사주의적 상대주의였다. 정신적 세계에서 존재한 적이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이 정신적 형성물에서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거나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확실히 딜타이는 이 결과에 괴로워하며 상대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정신과학은 삶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심적인 에너지를 추체험하는 것이 그 자신에게도 동일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표상된 의지와 현실적 의지 사이에서보다 더 강렬한 심연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일찍부터 전통적인 이성 개념에 신실하게 머무른 사람은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이었다.

 

그의 작업의 사태 관련성과 명확성, 항상 본질적인 구별, 정신의 내적 삶에 대한 수학적으로 정밀한 측정, 철학에 대한 믿음의 파토스, 플라톤주의의 하나의 형식과 최종적 심급으로서 네오데카르트주의적인 주관성 이론을 결합하는 독창성 및 인격의 통합성은 그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는 판단을 정당화해준다. p323

 

드디어 후설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철학자들 중 나는 후설이 가장 힘들다. 심지어는 헤겔조차도 여기저기 찔끔찔끔이나마 보아온 것들이 있어, 대충 어림짐작이나마 하는데, 후설의 현상학은 전혀 깜깜하다. 언젠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넘겨보다가 집어 던졌다. 그때 본 내용과 회슬레가 말하는 후설은 많이 달라 보인다. 현상학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후설의 논리학을 심리학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많다. 글 자체로는 그다지 읽기 힘들지 않다. 그런데도 요약하기는 힘들다. 뭐가 더 중요한지, 어떤 부분을 뽑으면 말이 이어질 수 있는지 감을 잡기 힘들다.(지금까지 죽 그래왔지만 ;;) 워낙 기본지식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 입문서이자 후설의 첫 번째 걸작 《논리 연구》에 대한 설명을 이것저것 짜깁기 했다. : 순수논리학은 동시에 존재론이자 초월적 학문론인데, 이 점은 헤겔의 경우와 많이 다르지 않지만 신학적 야망을 지니지는 않는다. 후설은 세계관 철학이 아니라 학문적 철학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여섯 가지 연구는 순수 논리학을 오로지 인식 비판적으로만 준비하고 이를 위해 언어철학적인 주제도 논의하고자 한다. 후설은 표현과 의미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그는 유의미한 표현과 가리켜 보이는 기호를 구별한다. 개념과 판단 그리고 추론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그와 같은 종류의 이념적 통일체다. 이념적인 것은 영국 경험주의에서 그러하듯 심리학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영국 경험주의의 혼동을 비판한다. 《논고》의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하게 후설은 의미 양상에서의 합법칙성을 추구한다. 합법칙성에 모순되는 것은 무의미하다. 후설은 경험적 언어학과 더불어 선험적 언어학을 요구한다. 인식은 의미 지향이 충전적 직관에 의해 충족될 때 존재한다. 결정적인 것은 감성적 직관뿐만 아니라 범주적 직관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후설이 칸트와 함께 그리고 헤겔에 반대해 모든 범주적인 것은 감성적 직관 안에 있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헤겔과 함께 그리고 칸트에 반대해 범주가 대상을 변조한다는 이론을 비판한다. 원리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설을 칸트 및 헤겔과 떼어놓는 것은 그에게는 범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낯설다는 점이다. 범주는 그 원천을 직관에서 지닌다. 그 점은 최종적 타당성 기준으로서 명증성에 대한 호소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만족스럽다.

 

후설의 두 번째 걸작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이념들》에는 그 유명한 노에시스와 노에마가 등장하는 것 같다. 이 새로운 학문은 사실학이 아니라 본질학이며, 그것의 현상은 이전 저작에서와 달리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구별된다. 후설은 공동으로 현상학적 환원을 이루는 형상적 또는 초월론적 환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환원은 플라톤을 계승하는데, 물론 최종적 토대로 간주되는 의식에 대한 근세적인 집중 아래서 그리한다. 의식 내용의 실재적 실존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른바 에포케(판단중지)에 의해 ‘괄호에 넣어’진다. 하지만 의식 내용은 그 자체로서 그것이 물적인 것에 관계되는지 아니면 심적인 것에 관계되는지의 물음과는 독립적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주어져 있다. 아킬레스건은 사태의, 가령 의식 작용의 본질을 그것이 더 이상 동일한 본질을 갖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가상적으로 ‘변경’함으로써 파악하고자 하는 후설의 방법이다. - 이러한 방도는 불가피하게 순환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본질에 대한 선이해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험주의와 회의주의에 반대해 본질에 대한 인식을 견지하는 것은 그 기획에 대해 결정적이다. p331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이전의 형식 특히 버클리와 흄의 그것에 비해 중요한 진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 작용과 사유 대상의 혼동에 토대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들은 《이념들》에서 서로 상관적인 서로 상관적인 노에시스와 노에마로서 모범적으로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p332

 

후설의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세분화는 대가답다. 하지만 범주를 지니지 않는 직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개념 형성 방법의 결여는 여전히 현상학을 괴롭히는 결함이다.

 

1929년 파리 강연인 《데카르트적 성찰》은 현상학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다. 무엇보다 나를 사유하는 실체로 사물화함으로써 상실해버린 데카르트에 대한 후설 자신의 갱신을 강조한다. 결정적인 마지막 성찰은 초월론적 유아론을 모나드론적 상호주관성에 의해 대체하고자 한다.

 

후설의 타당성 이론에 충실하게 머문 현상학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는 막스 셸러(1874~1928)다. 그는 또한 탁월한 사회학자, 특히 지식사회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도전을 일찍부터 받아들여 그들의 심리학적 통찰을 도덕적 실재론으로 통합하는 일을 해냈다. 그의 주저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윤리학》은 최소한, 독일어로 된 20세기의 가장 풍부한 가치론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 저작의 목표는 칸트의 현식주의를 그의 선험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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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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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반란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카를 마르크스

 

저자 회슬레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확실히 그는 마르크스를 얕보는데, 막 말하자면 마르크스를 철학적으로 매우 무식한 놈 취급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독일 철학은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직접적으로 가장 강력한 역사적 힘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회슬레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재능 있는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인식론적 물음과 형이상학적 물음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종교 비판은 많은 경우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종교성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으며, 무신론적인 권력 의지가 오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순진할 만큼 무지했다. 마르크스의 지적인 태만은 전체주의의 부상을 방조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서 무수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1장에서 회슬레 자신이 미리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독일정신의 흐름에 대한 커다란 노선을 보여주려는 목적 아래 정확한 지식도 복잡한 기술적 논증도 포기했다. 그러므로 일단 회슬레가 보여주려는 ‘커다란 노선’ 혹은 ‘항공뷰’에서 마르크스가 어떤 지표석이 되고 있는지를 지켜보자.

 

헤겔 철학의 완성은 그를 뛰어넘고자 하는 제자들의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었는데, 유럽의 의식 역사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헤겔 좌파였다. 1848년 3월 혁명 이전 시기의 억압적인 정치적 상황과 구체제의 부활 그리고 더 이상 시대에 적합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리스도교가 헤겔 비판을 촉진했다. 헤겔 좌파의 저작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다.

 

포이어바흐는 진지하게 신학을 공부했지만, 그 후 헤겔 밑에서 철학으로 향하며 어느 정도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얻었다. 헤겔의 종교철학이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표상을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대체하는 데 반해, 포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그 구체적 표상들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적인 것뿐이며, 종교는 “인간 정신의 꿈”, “인류의 어린이 같은 본질”이라고 말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있어 종교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좀 더 정확하게는 다른 본질로서 자기의 본질에 대한 태도다. 종교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정신의 특성을 대상화하며, 그 특성을 외적인 힘에서 특히 가치 충만한 것으로서 경험한다. “무한자의 의식은 의식의 무한성에 관한 의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사는 인간 정신의 진화에 대한 중심적인 지표일 것이다. p235

 

스스로를 인간이 되는 신으로 창조하는 것은 그 자체에서 신적인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당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의 신격화, 즉 나-너-관계의 삼위일체론이다. 형상에서의 성인 숭배는 성스러운 것으로서의 형상 숭배다. 그리고 기적의 힘은 상상력의 힘을 현시한다. 신의 인격성에 대한 반성에서 사람들은 “다른 본질의 비밀들을 엿본다고 하는 망상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유한다. 특히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격화한 자기 욕망” 이다.p236

 

비판의 날카로움에도 불구하고 포이어바흐를 그리스도교의 적대자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칭호는 니체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가 비철학적인 이유는 자기 고유의 세계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전제를 전혀 해명하지 않는 것에 있다. 라이프니츠 또는 칸트의 형이상학적이고 메타윤리학적인 섬세함과 비교하면 포이어바흐는 원시적이다. 물론 이 점이 그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것에 기여하기는 했다. 포이어바흐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에 가입했지만 그는 정치적 선동가가 아니었다. 그 역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주어졌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세계를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기를 원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대해, 이념으로부터 출발해 본래적인 현실을 놓친다고 비판했다. 인식의 정적에 빠져들고 정신으로서 오만하게 대중을 내려다보는 순수한 비판은 공허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가 이에 대립하는데, 필요한 것은 관념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념은 아무것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헤겔 좌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저술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인과 영국인보다 열등한 독일인의 관념론에 대한 논박이다. 독일 관념론이 헤겔에 의해 완성되자마자, 그에 대한 반란이 터져 나온 셈이다. 첫 번째가 쇼펜하우어, 두 번째로 마르크스, 그리고 다음에 나올 니체가 세 번째이다.

 

종교와 개념의 힘에 대한 믿음에 대해 “정치적인 주요 행위와 국가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의 자연적인 기초, 특히 그의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이해하는 역사 서술이 강령적으로 대립된다. 다양한 생산 관계, 예를 들어 소유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에 달려 있었다. 정신적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의 함수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 정반대로 여기서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 이리하여 도덕, 종교, 형이상학, 그리고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것들에 상응하는 의식 형식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외부적으로 설명되어야만 하지 자기로부터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독일의 역사학은 “각각의 모든 시기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고 상상하는 것을 믿는다.” 언어적으로 매개된 것으로서 의식은 언제나 사회적 산물이다. 중심적인 것은 계급 형성이다. 계급투쟁은 생산력과 교통 형태 간의 모순으로부터 발원하며 역사의 추동력이다. 근대 국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지배 계급의 기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지배 계급의 사상은 한 시기의 지배적인 사상이다. p243~4

 

9장의 마르크스 부분이 상대적으로 매우 쉽게 읽히는 것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도 있고, 저자 회슬레의 서술이 명확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강조하는 까닭에 매우 직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악명 높은 《자본》 은 예외로 해야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해서, 계급과 소외, 공산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등, 이어지는 설명은 뭐 특별하달 것은 없다.

 

마르크스의 가장 유명한 책은 《자본》이겠지만, 가장 많이 읽힌 책은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논증적인 텍스트라기보다는 정치적 팸플릿이다. 나도 읽어 보았는데, 힘이 넘치면서도 화려한 그 문장들은 가히 선동적이었다. 짧은 글 속에 부르주아의 탄생과 성취 및 예견된 몰락이 웅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수많은 정치 저술 가운데 저자 회슬레가 최고로 꼽는 것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이 책 역시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재미있다. 특히 박정희의 딸이란 이름밖에 가진 것이 없는 박근혜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가 단지 보나파르트라는 이름 하나로 권력을 거머쥐는 과정을 통해 고찰해 볼 수 있다. 마르크스의 가장 유명한 책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명성에 타격을 입은 책이 바로 《자본》이다. 비록 《자본》의 여러 가지 이론들이 현실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해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상품물신’ 개념의 탁월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품 물신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별을 이용한 것은 천재적이다. 교환가치는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감각적 대상인 상품 속에서 사라지며, 이를테면 대상화한다. “그러므로 상품 형태의 신비함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점에 존립한다. 요컨대 그것이 인간에게 그들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 생산물 자체의 대상적 성격으로서, 즉 이 사물들의 사회적인 자연 속성들로서 나타내 보이며, 따라서 또한 총 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그들 외부에 실존하는 대상들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상품에 대한 욕망은 그들이 빚지고 있는 복잡한 과정에 대해 눈멀게 만든다. 그리고 사회적 세계는 외적 대상의 모델에 따라 구상되며, 그러므로 죄르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이래로 그렇게 여겨지듯 “사물화” 한다. p250

 

마르크스는 화폐물신과 상품물신을 비슷하게 본다. 사실 화폐야말로 최고의 상품이다. 원래 상품의 교환 수단에 불과했던 화폐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서, 상품-화폐-상품의 과정은 자본주의에서 화폐-상품-화폐 과정으로 역전되었다. 상품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금융 자본주의에 와서는 수단으로서의 상품마저 생략된 채, 화폐-화폐 과정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주식시장을 보라!

 

9장을 시작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회슬레가 마지막에 다루는 것도 역시 마르크스의 철학적 약점이다. 첫째, 무엇이 경험적이고 무엇이 선험적으로 근거 지어져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한마디로 철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경제적인 것의 우위에 대한 마르크스의 강조는 일면적이다. 인간정신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은 마르크스와 함께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다. “자신의 철학적 진리 요구를 회복하는 중심 과제에서의 경솔함은 쇼펜하우어와 함께 시작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로 다음 단계를 나타내며, 물론 니체는 이를 훨씬 더 뛰어 넘는다 p252.” 회슬레가 8장, 9장, 10장의 제목을 공통으로 ‘~에 대한 반란’으로 표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셋째는 서구의 윤리적 전통과의 경악할만한 단절이다. 이전까지 독일정신이 다듬어낸 견고한 윤리적 기초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전무하다. 혁명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넷째, 역사의 공산주의적 최종 상태에 대한 예측은 경쟁 없는 경제가 정체한다는 경험과 모순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위기·공황이 내재적이라고 한 게 옳다고 하더라도,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규범적 권력 분립론을 다듬어내길 거부한 것은 치명적이다. 우리가 값비싼 역사적 경험으로 알아낸 것처럼, 그 사회에도 모든 지배가 남겨질 것이고, 엄청난 권력 남용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정신에 대한 두 번째 반란도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10 보편주의 도덕에 대한 반란 :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라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자신의 말처럼, 그는 실제로 다이너마이트였다. 다른 어떤 사상가도 이 철학적 테러리스트만큼 많은 것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니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때려 부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그가 반대했던 것이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71년의 정치적 통일 이후 독일 문화의 공허함을 개념화했다. 그의 시대비판이 여전히 현실적인 것은 그가 부수려했던 많은 것이 점점 더 확대되었고, 고급문화의 표준이 계속해서 붕괴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비극은 현상학적 힘과 빛나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질의 결여가 문화의 쇠퇴를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이 그를 즐겨 읽었지만, 저널리즘과 문화는 그것에 의해 더 나아지지 않았다.

 

저자 회슬레는 쇼펜하우어와 마르크스에 이어 니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한마디로 이들에 의해 고급스러웠던 독일 정신이 천박해졌다는 것인데, 니체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에 못지않은 격한 반론이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들뢰즈 붐에 힘입어 니체가 굉장한 조명을 받았다. 또한 철학과 관계없이 니체의 잠언들은 지금도 금과옥조로 회자되고 있다. 여하튼 회슬레가 그려 보이는 ‘독일정신’의 역사에서 니체의 이 숭고한 반란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따라가 보자.

 

니체는, 그리스도교 가치 질서의 붕괴와 (살기에 가득 찬) 대안적 가치 체계의 창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1989년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에 실망한 자들이 대거 투신한 상대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에 대해서도, 주요한 책임이 있다. 중반 이후의 니체 자신으로서는 독일 내셔널리즘과 당대의 반유대주의를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학적 민감성과 심리학적 명민함 그리고 문헌학적-역사학적 지식이 논리적 지성과 일관된 형이상학에 대한 감수성을 동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유용하기보다 해롭다. 위대한 덕과 몇 가지 약점의 결합은 종종, 오히려 모든 악이 뒤섞이는 것 보다 더 위험하다.

 

니체의 사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와 사회적 사유에 대해서는 일생 동안 일관되게 혐오했다. 니체는 첫 시기에 자신의 두 영웅인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맹목적으로 숭상했다. 두 번째 시기에서는 좀 더 미묘한 심리학에 근거해 그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세 번째 시기에서는 자기 자신을 천재로서 구축했다.

 

니체의 중기는 철학적으로 가장 결실이 풍부했다. 그의 거의 모든 중요한 철학을 학문에 대한 신뢰 속에서 분명히 표현했고, 독일 철학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그 자신과 정신적으로 동일한 아포리즘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은 체계에 대한 반대 형식이다. 그것은 핵심을 찌르고 역설적인 표현을 하면서도, 이런 개별적인 통찰이 일관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포리즘에 승리를 보장한 것은 윤리학에서 자율성을 향한 칸트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객관적 도덕에 대한 믿음을 지니지 않은 이 모럴리스트, 니체의 역설은 그의 도덕적 민감성이 오히려 아포리즘이라는 장르 자체를 해친다는데 있다. 세 개의 아포리즘 모음집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 ≫, ≪아침놀. 도덕적 선입견들에 대한 사상≫, ≪즐거운 학문≫ 이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도덕의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거부하는 데 반해 인간 사회가 강자와 약자로 분열되는 역사 과정에서 도덕적 표상과 가치의 성립은 그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여기서 니체는 마르크스와 달리 더 강한 자를 선택한다. 강제와 폭력으로부터의 도덕적 이념의 발생과 마법으로부터의 종교의 발생에 대한 그의 인과적 설명은 항상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며 종종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역사학적 접근이 타당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다. 심리학과 역사학은 제일철학과 윤리학에 대한 대체물이 아니다. 오로지 발생과 타당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만이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저 성립에 대한 통찰과 함께 저 믿음도 사라진다.” p268

 

도덕에 대한 비판은 종교 비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한다. 니체는 금욕을 권력의지에 근거해 설명한다. 다른 이들을 지배할 수 없는 자가 자신의 지배욕을 자기 자신에게 행사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종교 그리고 도덕과 결별한 후 니체가 지닌 유일한 가치는 문화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좀 더 고차적인 문화 촉진만이 문제가 된다. 물론 니체는 고차적인 문화가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행복주의자가 아니라 완벽주의자였다.

 

니체는 근대국가를 경멸하고, 사회주의의 정의 가치를 비웃었으며, 혈통을 동경하고, 전쟁의 긍정적 영향에 경탄했다. 독일 교양의 허위와 학자들을 비판하고, 그리스인을 찬양하며, 사회주의와 금권 정치를 동시에 논박했다. 그는 “오직 정신을 가진 자 만이 소유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니체는 열광적으로 보편주의적 도덕을 논박한다. -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그 속에서 화해되는 인류는 절멸될 가치가 있으며, 정의의 나라는 “가장 심오한 평균화”의 하나로서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것 없이는 그리스를 생각할 수 없는 노예제의 새로운 형식에 대해서는 분명 숙고할 만하다는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조언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의 위대함에로 되돌아가지는 못했다. 오로지 긍정을 말하는 자이고자 시도한 니체는 자신이 인간 증오로부터 자유롭다고 알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경멸은 여전히 증오와 통합되기에는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p277

 

인간적 자기기만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 지겨워졌을 때쯤 니체는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세워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증하지는 않았다. 니체 자신의 인식에 따르면 논증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논증 대신 문학을 선택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새로운 윤리학을 고지하는 자를 서술한다. 그가 니체의 초인이다. 회슬레는 이 책이 너무도 키치적이라는 점에서 강력 비판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은 수다스럽고 주제넘고, 그의 성격은 심리학적으로 단순하다. 고독한 천재는 현실의 상호 주관성이라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내용도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것들이다. 회슬레가 새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초인론과 영원회귀에 관한 교설이다.

 

새로운 것은 다윈의 진화론을 미래로 연장하는 초인론이다. - 이러한 미래주의적 정당화 확보는 마르크스주의를 연상케 한다. 권력에의 의지에 관한 교설은 모든 가치 정립의 원리로서 그리고 지상에 충실하게 머물라는, 다시 말하면 세계를 위한 초월을 거부하라는 요구로서 강화된다. 특히 새로운 것은 《즐거운 학문》에서 단지 암시했을 뿐인 영원 회귀에 관한 교설이다. 그것은 분명 고대의 모범으로 소급되며, 그리스도교의 역사신학 및 진보의 낙관주의적 역사철학에 반대한다. 그것을 위한 사태적인 논증을 니체는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다하는 의지의 가장 극단적 표현이다. - 요컨대 역사의 가장 끔찍한 범죄도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이며, 이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p278

 

니체에 대한 회슬레의 평가는 가혹하다. 니체는 여전히 20세기의 수많은 철학적 몰취미의 원천으로서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 개념을 포기하고, 호객 상인처럼 ‘악의와 위험성’을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고유함으로 강조했다. 망치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적-민주주의적 유럽을 분쇄하고 가치의 전환을 도입할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그의 허풍선은, 역설적이게도 니체가 경멸했던 의지 박약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그런 대중에게 지지를 받는 것이 천박하다는 것을 니체 자신도 알았다. 니체를 국가사회주의와 바로 엮는 것은 엄청난 해석학적 노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확실히 국가사회주의와 니체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독일 역사에서는 어떤 집단적 실험이 분명히 존재했다.

 

공격적-반유대주의적 내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니체의 반그리스도교적 권력 숭배와 바그너의 고대 게르만 신화의 부활을 종합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 아래 독일 민족이 시도한 집단적 실험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념사적 결과로 인해 니체가 우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철학적 과제의 해결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정신이 우리가 아는 한 몇몇 유기체에서만 뒤늦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신의 진리 요구의 더 이상 그 뒤로 물러 설 수 없음과 함께 사유할 수 있는가? 그리고 보편주의적 윤리의 무제약적 타당성은 어떻게 우리의 도덕적 감각에 거의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는 역사 및 현실과 매개될 수 있는가?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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