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왜 그랬을까? 일곱 난장이들이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왜 백설공주는 문을 열어 주고 말았을까? 저자의 답은 간단했지만, 책을 넘겨보기까지 머리 굳은 나는 그럴듯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책에는 15개의 동화가 나오고, 양치기 소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는지, 라푼젤은 누구를 위해 머리를 길렀는지 따위의 질문이 쏟아진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목차를 들여다보며 굳은 머리를 살살 풀어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이 동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독자 또한 이제는 동화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맞을 것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세계다. 나무인형이 사람이 되고, 늑대가 말을 하고, 왕자님이 수시로 우리를 구하러 달려오는 세상은 아직은 꿈꿀 수 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이 순수한 동화의 세계를 들이미는 것일까?

 

동화는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 어린 시절 읽었다는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만큼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재하고 있다. 명심보감은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과 명구를 편집하여 만든 책’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마디로 선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깊이 새겨야 된다는 말이다. 동화는 이 직설적인 ‘금언’에 상상과 꿈을 덧입혀 화려한 치장을 해놓았다. 그 알록달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푹 빠져들 때, 아이들이 진정 빠져들어 가는 곳은 어른들의 가치관이 촘촘히 짜놓은 기성 세계의 법칙 속이다. 아이들은 동화와 함께 어른들의 세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빨간 모자 소녀>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 가는 길에 엄마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엄마가 금지한 샛길은 온통 궁금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누구도 다니지 않아, 온전히 피어 있는 꽃들과 갖가지 작은 생명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지 못해 더 궁금한 굽어진 길들. 소녀는 그 끌림을 뿌리치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다가 죽을 고생을 한다. 교훈은? 엄마 말씀 잘 듣고 남들이 다니는 큰 길로만 다녀야 안전하다. 그럼 엄마 말씀은 어떤 것?

 

<피노키오> 의 ‘엄마’ 요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병이야. 어렸을 때 빨리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고칠 수가 없단다.~ 학교가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던 피노키오는 첫 등굣길에 책을 팔아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한다. 납치되고 팔려가고 죽도록 일하고. 집나가서 갖은 개고생을 겪은 끝에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된다. 학교에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든, 그게 싫거나 안 되면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든,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교훈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말 잘 듣고 부지런히 일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칸트는 교육이란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단체로 앉혀 놓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그렇게 규율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각에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p41」

 

이 책의 저자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동화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까발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을 그리고 우리 어른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너무 많이 들어서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답이 없어 더욱 외면하고 싶은 질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을 도대체 어쩌라고 자꾸 이런 지적질 인가 짜증도 난다. 근대 교육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 잘 듣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우리나라의 교육은 가히 1%를 위해 99%가 죽어나가는 미친 시스템 이다. 시스템 앞에 선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다. 그런데 왜 자기만 안다는 듯이 잘난 척인가 싶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시스템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바라는 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외면이다. 그것이 무지이든 체념이든 냉소이든 결과는 동일하다. 시스템의 작은 틈도 가느다란 균열도 막아주는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외면이다. 북한산 인수봉의 바위도 가느다란 틈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얼었다 녹으면서 결국 깨져 떨어졌다. 인명이 다친 불행한 사고이지만, 하루에도 수만의 발길을 받아내고도 끄떡없던 바위도 작은 틈과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갈라졌다. 모든 시스템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 책이 번연한 소리를 지겹게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 나도 이렇게 길들여졌구나 새삼 깨닫게도 되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아이, 죽어라고 치마 길이를 줄이는 아이, 거울만 쳐다보이는 아이들이 우리 교육의 부산물이 아니라 필연적 산물임을 아프게 느끼게도 된다. 선생님 저자는 매일 부딪히는 학교의 현실을 동화에 빗대어 불같이 토해낸다. 다혈질에 직설적인 성격일 것 같은 저자의 문장도 꾸밈없고 거침없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이라는 부제답게 교육 현장 그리고 사회 곳곳의 문제를 입바르게 지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렇게 매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동화는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다. 그러다보니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동화 해석도 있지만, 무리하게 꿰맞춰 어색한 해석도 있고, 왜곡이다 싶을 만큼 편향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조금 거슬리는 몇 편을 못 본 척 눈감아 주면, 무릎을 딱 치며 얻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있다.

 

그런데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책장을 넘기기 전에 각자의 해답을 찾아 보시길 권유드린다.

 

 

 

 

 

 

<칸트의 '훈육' 부분, 5월 13일 추기>

** 어디서 읽었던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어제밤 누워 희미한 기억을 따라 이 책, 저 책 넘기다, 딱 마주쳤다. 찾았다! 기억과는 다르게 칸트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저자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p66~67

 

  인간이 동물적 충동들 때문에 자신의 정해진 목표인 인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바로 훈육이다. 예컨대 훈육은 인간이 야생적이고도 무분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훈육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며, 그것의 작용은 인간의 자연적 제어불능을 막아내는 것이다. 교육의 긍정적 부분은 가르침이다.

   제어불능은 법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는 것이다. 훈육에 의해 인간은 인류의 법에 종속되며 법의 제약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성취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일단 자유에 익숙하게 성장하게 되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자연적 사랑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인 거친 상태를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본능이 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Kant and Education, London : Kegan Paul, French, Trubner & Co, 1899, pp 3~5) 

 

  한편으로 칸트는 훈육이 인간 동물을 자유롭게 만들고 자연적 본능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훈육의 표적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인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과도한 사랑, 천성적 ‘제어불능’임이 분명한데, 이는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즉 이 제어불능 속에서, 고유하게 예지적인 또 하나의 차원이, 즉 인간이 자연적 인과율의 현상적 연결망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중지시키는 차원이, 폭력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성의 이야기는 자연 대 문화라는, 즉 도덕 법칙이 우리의 자연적 ‘정념적’ 쾌락 추구 성벽을 제약한다는 표준적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투쟁은 도덕법칙과 비자연적인 난폭한 제어불능간에 있는 것이며, 이 투쟁에서 인간의 자연적 성벽들은 오히려 인간의 안녕을 위협하는 제어불능의 과잉에 대항하여 도덕법칙의 편에 서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는 어른이 아이를 위해 쓰고 남긴 것이 아니라 저자가 아이들의 견해를 궁금해 한 나머지 자 ~너희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하고 던져놓은 미끼 같단 생각을 저는 가끔 해요.
어릴때도 그랬고 커서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던 동화 ㅡ
왜일까요? 늘 어른은 아이들에게 이래야만 뭔가 얻을 수있다 ㅡ라는 식. 이라서 ..저는 순수하게 안본 것 같아요. 거래로 봤지.. 교육은 훈육이란 ㅡ말그대로 거래인셈이죠. 사회와 부합하기위한 ..그게 인격형성에 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수없지만, 착한 아이표가 되는 것 만큼은 그리 썩 달가운 건 아니에요. 한번쯤 스스로 틀리다 말한 길도 가보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걸
아이들은 아는 데 ..어른들이 편하자고 막는 걸 수도 있단 ㅡ심각한 문제적 시선도 ..한번 가져보는 중예요. 인간은 자연인여야하는데..자꾸 규격화 시키는 힘 ㅡ 이게 뭘까 ..하고요. 기성세대ㅡ의 잣대로 만든 교육론이 아닌가 ㅡ하고 말이죠.
순 ㅡ얼토당토 인 엉망 진창 이야기라는거 아는데..
그냥 그럴 수도있지않냐 ..하는거죠.
아이들은 그리 순수하지도 못말리게 천사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어른보다 현명하기까지 하죠.
자꾸 틀에만 가두는 이 시대의 교육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많은 공부는 어른이 더 필요하단 생각예요.
동화도 역시 어른에게 필요하죠.
순수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처럼.
왜...삐딱하지...!? (저 동화 좋아해요!^^)

왜 문을 열어주느냐...그거야말로 백설이 자신의 의지가
원하니까 ㅡ아닐까요?
그 어릴적에 버려는 졌어도 숲은 그녀에게 관대했다면 관대했어요. 그러니 그녀는 그리 꺼리낄 만한 것이 없는
셈 ㅡ이고요.딱히 트라우마가 숲 이나 문 자체엔 없기에..
(뭐래니, ㅎㅎ)
문열면 안된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런 의식˝을 아예 하지도 않았을텐데. ..안그런가요?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다음주 독서회 책. 잘 쓴 책. 그런데 하 많은 작가들이 다룬 시대라 다들 어디선가 읽은듯한 인물들. 수필형식이라 소설임에도 태백산맥 같이 인물들이 극적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음. 오히려 박완서와 가까운 듯.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을 표현만 살짝살짝 바꿔 사기 출간한 책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놀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00자평 쓰는 김에 줄리아 스튜어트의 또 다른 책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올해 독서회의 첫 번째 책. 회원들 반응은 신통치 않음.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잡다한 이야기들로 집중이 안된다고. 나는 좋았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씁쓸하나마 웃음을 찾아가는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리고르의 중매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리뷰를 쓰려고 앉으니 생각이 막힌다. 그래도 뭔가는 남기고 싶고, 처음 해보는 100자평을 눌렀다. 남미의 마르케스나 이사벨 아옌데 혹은 이탈노 칼비노의 `마술적(?)` 기법이 떠오르는데, 그렇게 본격적은 아니고 드레싱처럼 살짝 뿌려놓은 것 같다. 유쾌하고 따뜻하고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출판사는 번역서의 제목을 원제와 달리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걸까? 내가 읽은 알랭 드 보통의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의 우리말 제목은 『프루스트를 좋아 하세요』이다. 뭘 알아야 좋아하든 말든 하지. 프루스트가 김수현도 아니고-.- 여하튼 새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이다. 번역자도 달라서 목차도 조금씩 표현이 바뀌었다.

“일상성의 발명가” 알랭 드 보통의 진정한 자기 계발서. 이 새로운 번역본에 대한 ‘출판사 제공 책 소개’다. 아마 이 소개 문구를 먼저 보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기 계발서를 아주 싫어한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싫고, 세상을 그렇게 똑똑 부러지게 살 수 있다는 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몇 달 전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처음 읽었을 때, 이 책이 자기 계발서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발제를 위해서 다시 읽으며 저 문구를 되새겨 보니, 자기 계발서가 맞는 것 같다. 책 구성도 아예 아홉 개의 ‘~하는 법’으로 되어 있다. ‘4, 성공적으로 고통 받는 방법’에는 실제 삶에서 프루스트 자신과 소설 속 프루스트의 인물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고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놓았다. ‘진정한’ 자기 계발서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나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첫 째는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기와 평론의 형식을 갖고 있다. (고 한다) 모든 이야기와 교훈은 프루스트로부터 비롯된다. 프루스트의 편지, 프루스트에 관한 지인들의 평가, 프루스트 자신의 삶과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작중 인물들로만 이 자기 계발서는 채워져 있다. 알랭 드 보통이 한 것은 일종의 짜깁기, 취사선택이고 편집이다. 이것만으로 멋진 책이 되었다니 놀랍지만 사실이 그렇다. 알랭 드 보통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남의 간섭 싫어하는 까다로운 독자마저도 능숙하게 다루어 낸다. 두 째는 자기 계발서 하면 떠오르는 성공신화, 유용성, 자기수양 같은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없지는 않지만, 눈에 띄게 속물적이거나 혹은 현실감 전혀 없는 무념무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계발서라는 책 소개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출판사의 상업성이 불가피하다 해도 프루스트-『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알랭 드 보통으로 연상될 수밖에 없는 이 책을 꼭 자기 계발서라고 해야 하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만큼 자기계발서와 거리가 먼 책이 있을까? 물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를 겨우 100여 쪽 읽은 처지로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이미지로나 겨우 100쪽의 그 표현하기 힘든 느낌으로나 자기 계발서를 갖다 대기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을 ‘상품성’ 으로만 다루어야 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자기계발서,『프루스트가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은 어떤 식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걸까? 내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이다. 프랑스에는 일리에-콩브레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소도시인데, 관광객들이 복닥거린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또 다른 손에는 마들렌 봉지를 들고 아미오 아줌마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그냥 일리에 였다. 그런데 푸르스트가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냈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가상 도시인 콩브레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당국은 미련 없이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관광 안내소의 소책자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깊고도 신비한 느낌을 포착하고 싶다면 그 책을 읽기 전에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는 데 하루 전체를 바쳐라. 콩브레의 마법적인 힘은 오직 이 특별한 장소에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우리나라도 대체로 이런 모양새다. 누구누구 문학기행 같은 것들. 이런 방법은 관광산업에는 유익하다. 마들렌을 구워내느라 정신없는 일리에 콩브레의 빵집들은 북적댄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전혀 유익하지 않다. 일리에-콩브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그저 그런 맛의 마들렌뿐이다. 프루스트에게 일리에는 특별하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독자에게 일리에는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 프루스트 자신은 어떤 번역서의 서문에, 그가 보았다면 일리에-콩브레의 관광산업을 우스꽝스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할만한 글을 남겨 놓았다.

 

「우리는 밀레가.... <봄>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굽이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이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위를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

 

그림의 미는 그 안에 그려진 것들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에, 천재의 눈으로 포착한 인상에 있다. 그 장소들은 우연히 선택된 곳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곳이든 <봄>의 풍경이 될 수 있고, 콩브레가 될 수 있다. 일리에-콩브레를 방문해 마들렌을 먹는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의 화자가 느꼈던 강렬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대한다면, 책에 대한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것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면, 책을 내려놓고 작가에게서 배운 눈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책이란 저자에게는 ‘종결’이지만, 독자에게는 ‘자극’이 되어야 한다. 저자가 떠나버린 곳에서 자신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것을, 저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망을 부여하는 것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가 우리 삶의 답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저자를 신탁의 전달자로 맹신하는 것과 같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충고했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