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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5일, 서민 교수님의 글을 읽고 쓴 글입니다.

 

 

  서민 교수님이 살짝 곤경을 치르고 있다. 6월19일에 올린 "연아야, 미안해”란 글 때문이다. 민감한 시사 문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돌파하는 평소 교수님의 글은 그 스타일 탓인지, 서민적인 너무나 서민적인 생김새 탓인지, 우호적인 댓글들로 훈훈한 편인데, 이번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매우 비판적인 독자와 한 치도 비껴 설 의사가 없는 교수님 간의 팽팽한 댓글 논쟁이 붙었다. 물론 서민 교수님의 글은 황상민 교수의 소위 “김연아 교생 실습 쇼, 발언”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목으로 짐작하겠지만, 서민 교수님은 시쳇말로 김연아 편이다. 본문 자체의 내용은 단순하다. 길지 않은 글의 반 이상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우리 김연아에 대한 추억과 헌사다. 나머지 반은 감히 그런 김연아를 비판하는 몰염치한 자들에 대한 개탄이다. 단순화시키면, 염치가 있는 사람이면 김연아가 뭘 하건 예쁘게 봐줘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금메달을 땀으로써 국민들이 원하는 걸 다 해 줬기 때문이다.

  서민 교수님은 댓글에 답글 달기를 좋아한다. 심지어는 자작 댓글을 만들어 답글다는 놀이도 즐긴다. 이 글에 실망했다거나, 황교수의 문제제기를 오해하고 있다거나 하는 댓글에도 일일이 답글을 달았는데, 논쟁의 와중에 교수님은 살짝 방향을 틀어서, 김연아를 까는 것은 자유이나 “사실 관계를 확인”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까는 것에 대해 자신은 김연아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런 형식적 논리 보다는 ‘배은망덕하게도 우리 연아를...’에 가깝다. 심지어는 김연아가 열심히 공부하는 대신 금메달을 못 땄으면 어떻게 되었겠냐는 협박성 발언도 한다. 약간 흥분하셨는지, 어떤 답글에서는 대학 수업 자체가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만큼 훌륭하거나 유익한 것도 아니란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 발짝 더 나간 것 같아 위험스럽기도 하다.

  나는 김연아를 별스럽게 좋아하지 않는다. 김연아 보다는 서민 교수님을 훨씬 좋아한다. 물론 그의 글, 콕 집어 말하면, ‘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에 올라오는 의뭉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글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 번도 교수님이 좋아하는 댓글 놀이에 동참한 적도 없으면서, 다분히 흥분 상태에서 쓴 듯한 글을 물고 늘어진다면 참으로 ‘염치’가 없는 짓일 것이다. 사실 교수님의 글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수고롭게 반대할 만큼 김연아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김연아를 보면 왠지 불편한 최근의 마음이 김연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여러 가지 현상과 얽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그걸 좀 정리해 보고 싶었다.

 

 

한동안 뜸했던 김연아 CF가 평창 동계올림픽 선정 이후에 다시 TV를 점령한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라도 한 편 보려면 김연아 광고 몇 편을 연속해서 보아야 할 때도 있다.(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계약이 끝난 걸까..) 처음엔 살짝 짜증이 났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나오는데, 머리 돌아가는 광고주라면 왜 거액을 들일까 싶었다. 정작 제품은 보이지도 않고, ‘또 김연아네’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뭐 그건 오지랖 넓은 참견질이고, 보는 입장에서는 똑 같은 얼굴을 되풀이 보는 것이 지겹다. 천하의 장동건이라 해도 한꺼번에 이 드라마 저 드라마에서 바람둥이로 나왔다가 도망자로 나왔다가 경찰로 나왔다가 그러면 헷갈려서라도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다. 혼자 다 헤쳐 먹어라! 는 욕설도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서민교수님 글에 달린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연아가 공격당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인데 ‘은퇴와 CF’ 다. 나도 나름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로 김연아를 편드는 사람들은, CF에 대한 반감을 단순히,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심보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근거 없는 상상이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대한 일종의 사례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평창의 땅 값과 개발권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 의하면, 올림픽이 유치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기업들이 있다. 올림픽 유치 활동의 핵심인물인 김연아는 그들에게 당연히 매우 고마운 존재다. 인지상정이든 뭐든 갑자기 쏟아진 김연아 광고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나도 Product Manager란 명목으로 광고 작업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데, 내가 광고주라면 김연아는 그다지 매력적인 모델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광고에 마구잡이로 나오는 모델이라면, 광고를 통해 판촉 되는 것이 제품이라기보다는 김연아 자신의 명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기업들이 모두 모델 선호도 조사 따위, 제한된 통계 값에 눈멀었다면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말이다.

 

 

  여기엔 또한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얽혀있기도 하다. 나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그다지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6년 아시안 게임이래, 그리고 지자체 시행 이래 우후죽순으로 개최되고 있는 국제 행사는 대부분 지자체에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수 조원 경제 효과라느니, 흑자라느니 예측은 무성했지만 실제로 그런 이익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만 아니어도 감지덕지할 판이다. 그런데도 그런 행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열리고 있는 여수 엑스포도 시작부터 관객이 없다느니, 여수 상권은 더 죽었다느니, 말이 많다. 하지만 대규모 행사가 열리면 반드시 이득을 얻는 집단들이 있다. 땅값이 들썩이고, 개발권이 넘어가고, 하여튼 막대한 행사비용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있고 그들은 그만큼의 이익을 남긴다. 쪽박을 차는 것은 실패한 행사의 후폭풍에 시달려야 하는 지자체와 그 주민들이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모르던 86·88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평창, ‘Korea’ 했다고 해서, 무조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국민이 얼마나 되었을지 미지수다. 속을 대로 속아 봤고, 겪을 만큼 겪어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의 시작이고, 이미 97년 이래 우리 국민들은 양극화와 빈곤화의 위협에 시달려 왔다. 잔치판 벌여 놓고 속없이 좋아할 여유도 없고, 그렇게 어수룩하지도 않다. 여차하면 뒤통수가 까일 판인데,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김연아는 그런 평창 올림픽을 상징한다. 게다가 유치가 끝나자마자 광고를 쏟아내면서 거액을 쓸어갔다. 말하자면 손익이 불확실한 국제 행사에 가장 눈에 띄는 이익을 챙긴 사람이 김연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김연아 CF에 대한 반감에는 이런 맥락이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논거 없는 추론일 뿐이지만, 여론의 움직임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김연아든 어떤 스타든 그들의 거액의 몸값이 논리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사랑과 찬사가 감성적이듯, 가혹한 비난과 질책 역시 다분히 감성적일 수 있다. 스타는 어짜피 감성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다. 예능 프로에 나와서는 먹고, 입고, 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팔면서, 갑자기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징징거리면, 예컨대 상도가 아니다.

  왜 나만 갖고 그러냐는 항변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다들 하필 ‘나’를 갖고 칭찬할 땐 좋아하다가, 하필 ‘나’를 비판하면 억울해 한다. 전두환도 그랬고, 문대성도 그랬다. 그래서 하필 서민교수님이 다른 스포츠 스타들도 다 그런데 왜 하필 김연아만 갖고 그러냐고 할 때 정말 깜짝 놀랐다. 하필 김연아가 아니면, 하필 누구를 갖고 그래야 합리적일까. 그런 논리면 왜 하필 김연아만 광고를 찍는지, 똑 같이 금메달을 딴 다른 선수들도 있는데, 골고루 찍어야 공평하고 논리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유독 김연아에게 더 감동을 받았다, 왜냐고? 대중문화 분석가나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건 논리보다 감성의 영역이다. 사랑은 원래 그렇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평소에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논란이 나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정작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구조이다. 김연아 CF 비판에는 분명히 이런 요소가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나는 배가 아픈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건 승자독식 구조에 대한 우리 정신이 앓는 무의식적 증상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 같다고나 할까. 김연아 뿐 아니라 톱스타들의 광고료, 출연료 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드라마 1회 출연료가 수 천 만원을 가볍게 넘더니 억대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있다. 대신 제작진이나 엑스트라 일당은 알려진 대로 노동착취 수준이다. 이걸 당연한 걸로 보는 것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시각이다. 스타들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물론 돈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이건 당최 주관적이어서 나는 그다지 기쁘지도 않다, 그래도 물건을 살 때마다 나는 이 갑부 스타들에게 돈을 뜯겨야 한다.), 스타들이 천정부지로 몸값을 올리면 올릴수록 최소한의 몫마저 빼앗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타만으로는 절대로 아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승자독식에 대한 승인은 우리사회의 작동 원리기도 하다. 99%의 ‘occupy'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도 우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졸 초봉을 보면 이런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기업들의 대졸 초봉은 연봉 육천에 육박하는 곳부터 시작해서, 20대 상위 기업이 연봉 사천을 넘기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이 시대에 말이다.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우리나라 상위 대기업의 대졸 초봉은 터무니없이 높다고 한다. 반면에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걸 보면서 대기업은 역시 훌륭해 라고 하실 분은 없을 것이다. 자기 직원들에게 퍼다 주는 후한 임금이 결국 협력업체라고 불리는 중소기업들, 하청업체들을 쥐어짜서 챙긴 이익의 일부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리해고, 비정규직, 해외 외주 같은 방법들도 동원된다. 뭐 그렇다고 기술개발도 빼놓지는 말자.

  그런데 하청업체에 다니는 어떤 친구가 발주업체인 대기업의 신입사원 월급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고 하자. ‘갑’과 ‘을’로 만나서 업무를 함께 하는 사이라면, 같은 또래인 이 친구의 상대적 박탈감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사촌이 땅 사면 배나 아파하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인간으로? 이 친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거나,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드는 초인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뿐인가. 아니면 닥치고 살거나.

  이럴 때 우리는 배가 아파야 한다. 증상이 있어야 병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통증은 일종의 구조신호다. 통증이 심해지기 전까지 우리는 뭔가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그런 상태를 겪기도 한다. 대졸 연봉 5,900만원 기사에 신경질도 나고, 이병헌 회당 출연료 1억에 입이 딱 벌어지기도 하고, 채널을 돌릴 때 마다 김연아가 노래하고 웃는 것이 짜증이 나기도 한다. 부럽기만 한 사람도 있고, 분노가 치솟는 사람도 있고,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대중의 즉자적인 감정에 정연한 논리를 요구한다면 그것이 더 무리한 발상이다. 분석하고 해석하고 논리를 만들고 여론을 이끄는 것은 지식인들, 정치인들, 소위 사회 지도층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서민교수님이 경향신문에 실린 김동률 교수의 에 분노하면서 “이 딴 글을 경향에서 실어줬다는 것...” 이란 답글을 달았는데, 나는 서민교수님의 이번 글도 좀 다른 의미에서 경향이 지면을 할애할 만한 생산적인 글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평소 서민교수님의 핵심을 찌르는 시론時論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지 않은’ 황교수의 발언이 성급했는지는 몰라도, 사실이 놓치거나 심지어는 은폐하는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까놓고 말하면 김연아의 교생 실습은 당연히 쇼다. 고대 재학 자체가 쇼인데, 빠지지 않고 실습을 했건 말건, 크게 보면 그건 쇼다. 고대 측 자체도 ‘보여주기’ 위해 김연아를 입학시켰고, 김연아 역시 자신에게든 대중에게든 ‘보여주기’ 위해 대학교에 이름을 걸었다. 그리고 언론 역시 ‘보여주기’ 위해 굳이 김연아의 교생실습을 대서특필했다. 모든 관계가 ‘보여주기’를 중심으로 엮여 있는데, 그것을 쇼라는 다소 선정적인 언어로 지칭했다고 뭐 그리 대수인지 모르겠다.

  이 논쟁을 단순히 쇼 발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리로만 한정하지 말고, 우리사회의 구조와 관련하여 지지자와 반대자의 관점을 분석하는 쪽으로 확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왕 서민교수님이 뛰어들었다면 말이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는 분이시니까.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런 냉철함을 찾기에는 서민교수님이 김연아를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다. 연아가 예쁜 것도 사실이고, 한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니, 이해해드릴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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