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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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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이 그랬을 것처럼 나도 이 딱딱한 제목의 책을 '빨간책방'을 통해 알게 되었다. 빨간책방은 집안일 할때의 배경음으로 좋지만, 사실 독서에는 방해가 된다. 두 시간여의 사전 수다를 듣고 읽는 책은 그 책 고유의 빛을 반 이상이나 죽여버린다. 김빠진 맥주라는 상투어가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것이다. 그럼에도 듣고 나면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긴다. 안도현의 『백석평전』이 그랬다.

 

처음에 나는 백석의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白石은 당연히 호같은 무엇이리라 생각했다. 백석, 백석하면서도 정작 시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백석은 몇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성이 백씨이고, 필명으로는 백석만을 고집했으니, 우리가 알아야 할 이름은 백석 하나면 족하다.

 

 『백석평전』을 다 읽고 나는 후회했다. 반만 읽을 것을, 아니 6.25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만 읽을 것을, 아니 백석이 '삼수갑산'의 그 삼수의 집단농장으로 쫒겨나기 전까지만 읽을 것을, 후회했다. '학령전 아동문학 논쟁' 에서 밀려나 붓대신 낫을 들어야 했던 장년의 그 시인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 낫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배반해야 했던 그 자신의 시 때문에, 온통 수령과 혁명과 원수와 붉은 깃발로 점철된 그 구호들이 백석의 시일리가 없다고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백석은 방황과 절망의 쓴 맛을 보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승에서 보낸 시간을 결코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백석은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 것은 아닐까?"

 

작가 안도현의 말처럼 북한에서 인생의 후반기를 보낸 백석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석의 시가 온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가 써내야  했던 '자기 배신'의 시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이상, 그의 자유로움을 자유로움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들다.

 

 

사실 나는 예술적 감수성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그것이 미술이건 음악이건, 시이건 그렇다.  자연히 시를 그다지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백석평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제 강점기에서 남북분단 이후를 살아야 했던 한 시인의 삶이 워낙 극적이고 무엇보다 시대의 첨단을 걷던 모던  보이라는 사실이  '백석' 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예술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녹두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의 바다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모습이 참으로 궁금했다. 순식간에 주위를 몽파르나스로 만든다는 그 모던 보이가.  

 

 

백석의 시는 읽기에도 힘들만큼 평안도 사투리가 심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닥 어렵지도 않다.  『토지』나  『태백산맥』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백석의 시도 힘들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투리가 아무리 심하다 한들 바다 건너 제주도도 아니고 그래봤자 우리말이다. 백석의 사투리는 그냥 사투리가 아니다. 그 사투리야말로 백석 시의 맛이다. 그 사투리들을 표준말로 옮겨 놓으면 백석의 시는, 과장해서, 카페인 없는 커피가 될 것이다. 특히 우리 남쪽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것이 이제는 TV나 영화 밖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금지된 언어이기 때문에 그의 쓸쓸함은 더욱 쓸쓸하고 그의 외로움은 더욱 외롭게 느껴진다. 백석 자신에게도 사투리는 그냥 고향의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즉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고향의 방언에 착안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니까 백석의 평안도 방언 사용은 향토주의에 매몰된 결과가 아니라 준비된 창작방법론이며 의도된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p99"

 

 

 『백석평전』에만도 여러 편의 시가 나온다. 그 중에서 아마도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나는 이것도 좋지만 <흰 바람벽이 있어>와<'남신의주 유동 박씨 봉방>이 좋다.  그리고 그의 짧은 명태에 관한 시인 <멧새소리>도.

 

처마끝에 명태明太를 말린다

명태明太는 꽁꽁 얼었다

명태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明太다

문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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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빨간책방을 종종 듣는 편인데 말씀처럼 책을 읽기전에 들으면 어느정도 선입견을 갖게되는 점도 있지만, 이렇게 좋은 책들을 알게되는 행운을 얻게되서 무시할 수 없더라구요. 요즘 안도현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웃님들 글에서 자주 접해서 그런지 안도현 시인이 참 궁금해지고, 이 책 역시 궁금하네요^^

말리 2015-01-05 10:3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저도 끊지 못합니다 ^^ 읽고 싶은 책은 가능한 안듣고 안 읽을 것 같은 책은 맘 놓고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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