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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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역사에는 골방이 존재한다. 누군가로부터 헤아림의 빛이 단 하나도 들지 않았던 곳이 말이다. 거기에 은둔하는 자들이 있다. 그 어떤 기록에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마냥 잊혀져버린 존재들이. 영국의 작가 세라 워터스는 그러한 골방의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다. 손전등을 그 안에 비추는 사람이다. 가려졌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잊혀졌던 그들의 삶을 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빅토리아 시대에 쉽게 무시되었던 남장한 여성 배우의 삶을 훑었고(벨벳 애무하기) 금기시 되었던 레즈비언의 삶을 세밀히 복원하였다.(핑거스미스)


 이번에 나온 ‘나이트 워치’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41년과 44년 그리고 47년의 일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해롤드 핀터의 희곡인 ‘배신(Betrayal)’처럼 말이다. 우리는 주요한 등장인물인 케이와 헬렌 그리고 비브와 덩컨의 미래를 먼저 보고 나중에 그들의 과거를 본다. 이건 케이의 말로 시작되는 첫문장인 ‘결국. 이런 인간이 되었단 말이지.’의 연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케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했던 말, “영화 중간쯤에 들어가 후반부를 먼저 볼 때도 있고. 뒤를 먼저 보는 편이 더 좋더라. 보통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잖아.(p. 145)”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란 전쟁을 다루지만 우리가 다른 전쟁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은 이 소설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라 워터스는 이전에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잘 시선을 던지지 않았던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사회가 죄악시 하는 탓에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로. 그리하여 우리는 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동성애자 케이와 헬렌을 만나고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비브와 남자라면 누구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당시 상황 속에서 병역을 거부한 덩컨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골방의 존재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쟁 상황에서 예외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 중심에 있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성향과 신념에서 촉발된 오직 자신만의 전쟁을 말이다. 정녕 그건 전쟁이었다. 언제든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타인의 시선은 날아오는 총탄과 똑같았으며 그 비밀이 밝혀질 경우 타인의 돌변으로 인간 관계가 깡그리 깨어지는 것은 갑자기 터지는 폭탄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피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더 혹독하게 전쟁을 치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기에 빅토리아 3부작을 끝낸 세라 워터스가 돌연 2차 세계 대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 그들이 움트고 있었던 골방의 문을 열어젖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골방은 고립의 장소다. 사회가 찍은 낙인 때문에 자신의 성향과 신념을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사람은 무연의 고립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단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느껴서는 안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같은 거야.’(p. 568)



 비밀이 드러났을 경우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연히 타인의 시선과 소리에 예민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인물들도 자기 주위의 상황과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들은 늘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고 지금 어쩌고 있는지 소리를 통해 추정한다. 


 그런 면에서 야간 순찰을 뜻하는 제목인 ‘나이트 워치’는 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야간 순찰을 하는 자는 주위를 꼼꼼히 주시하고 들려오는 모든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자기가 아니라 그 외부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는 존재다. 그만큼 바깥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자이기도 하다. 야간 순찰은 자신이 정주하는 곳을 지키기 위하여 도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내보여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을 만들거나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찰만 돌다보면 그런 곳을 마련할 여지가 없다. 타인이 가져올 잠재적인 위협에 불안하여 늘 그것만 살피다간 언제까지나 맴돌기만 할 뿐인 것이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1947년의 케이와 헬렌, 비브와 덩컨 모두가 그와 같았다.


 골방에 있다는 건 그들이 '온전한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이 일하는 라벤더 힐의 방 하나를 빌려 지내고 있으며 과거 케이의 연인이었던 헬렌은 지금은 줄리아와 셋방에서 지내고 있다. 이 방들은 모두 방음이 전혀 안되어 옆방의 소리를 훤히 들을 수 있는 장소다. 그러므로 이쪽에서도 당연히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만드는 소리라면 더더욱. 방이 방이 아닌 것이다.


 비브는 집에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모습이란 마치 집이 아예 없는 듯,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게 대부분이다. 


 비브는 그게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스러웠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아 더 의식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레지와는 이렇게 어딜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에 가본 적도 없고 그저 외진 곳만 줄기차게 찾아다녔다.(p. 181)



 덩컨은 병역 거부로 인해 교도소에 있었을 때, 가장 친절한 교도관이었던 먼디의 집에 얹혀 살고 있다. 세라 워터스는 이들에게 왜 이런 상황을 가져다 주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헬렌의 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동성애 때문에 사랑으로 인한 고민과 상처를 늘 숨기고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 하는 헬렌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는 순간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마치 전처와 후처 사이처럼 한 사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런 얘기는 그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었다. 케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옛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아니면 케이에 관해서는 비밀로 했다.’(p. 362)



 소설에서 이란 바로 그런 장소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타내는. 일종의 해방구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이도, 비브도, 덩컨도 그걸 바란다. 그들은 그걸 찾기 위해 야간 순찰을 계속 하지만 케이의 이 말 그대로 현실은 부정적인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47년의 케이가 여성을 유혹할 때마다 거부를 당하는 것처럼.


 “무너지는 중이야.” 케이가 말했다. “진짜로 바람이 세게 분다 싶으면 집이 흔들리는 게 느껴져. 집이 신음하는 소리도 들리고. 곡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 그게 용케도 버티고 서 있는 건 전적으로 선생 덕분이야. 순전히 정신력으로 그 집을 떠받치고 있는 거지.”(p. 146 ~ 147)



 그들은 모두 집을 잃었다. 44년의 케이가 구급대원으로 가장 많이 목격했던 것도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린 집의 잔해였다. 사회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간다운 연민과 진솔한 유대를 나눌 수 있는 장소들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하필이면 44년의 줄리아와 헬렌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거기서 줄리아는 아버지와 함께 이제는 더이상 집이 될 수 없는, 그저 잔영에 불과한 빈집들을 살피러 돌아다니고 헬렌은 집이 무너져 살 곳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그들이 삶을 다소나마 복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 줄리아의 일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줄리아는 오히려 가득한 허무와 통렬한 슬픔을 확인할 뿐이다.


 나는 이 전쟁이 아름다움 보다는 야만성에 대한 애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대변되는 그 정신은 희미해졌어요. 이젠 금박처럼 다 들떠서 벗어져나간 거죠. 지난번 전쟁에서 세인트폴이 우릴 지켜주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도 우릴 지켜주지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우리가 성당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싸워야 한다면 이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져야 하는 거죠?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얼마나 크게 자리해야 하는 건데요?(p. 473)


 헬렌 역시 집을 잃은 이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일이었으나, 상담하러왔던 여성의 이 말처럼 헬렌이 하고 있는 일은 사실 그들을 늘 여기저기로 떠도는 불쏘시개로 만들 뿐이다.


  그래도 여자는 자기 손에 든 서류 쪼가리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난 불쏘시개인가봐요.” 여자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냥 불쏘시개 같아서.”(p. 372)


 이 둘이 치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건 모두 자기 내부에 구원할만한 힘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헬렌의 이와 같은 고백처럼.


 첫 대공습 때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주려 애썼다. 어떨 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을 무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약한 자들을 돕는 영웅이라도 된 양 일에 덤벼들었는데, 하고 헬렌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p. 472)


 나중에 이 둘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가 많은 교회(지켜야 할 성스런 가치의 상징으로써)가 무너진 폐허이며 빛이 거의 없는 어둔 장소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줄리아는 거기서 자신들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 내부에 상황을 개선할 아무 동력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신들에게 참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케이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줄리아와 헬렌은 전쟁을 핑계로 점점 자기가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걸 정당화했지만 케이는 전쟁을 핑계대지 않았다. 줄리아와 헬렌은 바깥의 작은 소음에도 긴장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바짝 죽였지만 오히려 케이는 바깥의 소란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냥 집에 들어앉아 소란을 듣는 것보다 이렇게 그 소란통에 나와 있는 게 더 편할 뿐이에요.(p. 655)


 결정적으로 케이는 레지조차 버리고 달아났던 비브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레지라는 거짓의 집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던 그녀에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 때의 케이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발전기를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헬렌의 생일날 헬렌에게 선물했던 진줏빛 새틴 잠옷은 그것의 총화라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헬렌 또한 그 잠옷에서 비로소 집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47년의 헬렌이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줄리아 때문에 번민할 때 그것이 문득 자신이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잠옷으로 떠올랐던 것을 보면.


 그 진줏빛 새틴 잠옷이 떠올랐다. 줄리아의 옆에서 손가락 하나 닿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누워 돌이켜보니, 그게 지금까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잠옷이었다.(p. 213)



 이런 대비는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덩컨과 프레이저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둘은 서로가 속한 계층도 하류와 상류로 전혀 다르고 하루를 보내는 모습 또한 아주 차이가 난다. 덩컨은 말없이 한 곳에 우두커니 정지해 있을 때가 많지만 프레이저는 끊임없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회 측에서 보자면 보통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류계급(교도관들도 그가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어 한다.)에다 많이 말하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을 존재감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덩컨은 아무래도 존재감이 엷다고 여긴다. 교도소의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덩컨은 겁이 많고 허약하다고. 하지만 독일이 교도소를 폭격했을 때, 사실 겁이 많고 존재감이 약했던 것은 프레이저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 신념을 믿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한심한 겁쟁이일까?

 하지만 병역거부자들도 알아. 피어스 우리도 두려움을 느껴… 한 편에는 씩씩하게 싸우러 나가는 제일 흔한 타입의 남자들이 있지. 그들이 바보라서 덜 용감한 건 아니잖아? 전쟁이 끝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그런 사내들 덕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 (p. 575)


 누구보다 약해 보였던 덩컨은 오히려 아무런 동요 없이 프레이저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덩컨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자신을 얽매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묵묵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비웃는 프레이저에게 자신이 열심히 변호한, 30년 째 같은 자리를 지키며 똑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교도관 먼디처럼.


 그렇게 케이와 덩컨은 자기 안에서 지탱할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이들만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와 같은 집에 살게 한 설정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과 덩컨은 먼디와 함께 산다. 레너드와 먼디 모두 바깥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키며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케이는 레너드만이 다 무너진 집을 유일하게 지탱하고 있다고 말하며 별 건 없지만서도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장 집 다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오직 먼디 뿐이다. 그런 레너드는 헬렌을 잃은 뒤, 자신이 가진 내부의 힘을 상실하고 좌절의 야간 순찰을 계속하고 있는 케이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제가 보기에 랭그리시 양도 그런 영혼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찾는 중이지만, 아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건 당신이 눈을 내리깔고 찾기 때문입니다. 흙먼지밖에 안 보이잖아요. 눈을 들어야 합니다. 이내 사라질 것들로부터 눈을 들어 멀리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p. 228)



 이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현혹되어 비관하거나 주눅들지 말고 언제나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과거의 케이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 먼디 또한 상황에 대해 똑같은 조언을 한다.


 어떠한 생각도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생각이 당신을 잠식하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장애는 존재하지 않아요. 조화의 힘이 당신과 당신의 모든 장기에 퍼져 있다고 단언합니다.(p. 23)

 

 상황에 굴하지 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마주하여 스스로 한없이 무력해보여도 그것에 널 쉽게 휩쓸리게 해선 안된다. 내가 보기에 레너드와 먼디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는 케이와 덩컨 모두에게 과거의 자신을 회복시키는 주문과 같았다. 그랬기에 케이는 불현듯 비브가 넣어 준 반지를 통해 이처럼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지는 어스레하게 반짝거렸다. 담뱃재 틈에서도 자꾸 시선을 끄는 통에, 얼마 안 있어 케이는 다시 반지를 잿더미에서 꺼내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앙상한 손가락에 끼운 뒤 빠지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p. 229)


 덩컨 또한 어느새 사회에 길들어져 타인의 시선에 휩쓸려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바라는 쪽을 선택하는 결단을 순식간에 내릴 수 있었다. 그 밤의 산책을 통해 덩컨은 '보여지는 자'에서 '보는 자'로 나아간다. 그러자 오로지 위협적인 것만 가득했던 세상이 어느새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차(p. 221) 있는 것을 보게 되며 드디어 프레이저가 암막을 걷고 열어준 창문을 통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마치 덩컨이 비로소 집을 찾았다는 듯이 여기서 그들을 찍는 카메라를 멈춘다. 이와 같이 자신을 자꾸만 불안한 야간 순찰꾼으로 만드는 상황을 타개할 힘은 나의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내부에 있다.


 41년의 비브를 보라. 그 때의 비브 또한 케이, 덩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을 만들 수 있는 힘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지를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아주 좁은 화장실이었지만 그조차 사랑을 나누는 집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물론 그 즉흥적이며 사소한 결정이 훗날 자신의 삶을 여지없이 칭칭 얽어매긴 했지만. 


 아무튼 좁은 화장실과 둘이 열정적으로 나누는 사랑의 대비는 마치 원효 대사의 '일체유심조'처럼 상황이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리 강하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누나와는 반대로 알렉이라는 집을 잃게 되는 덩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은 덩컨의 집에서 일어났다. 덩컨의 가족만이 사는 온전한 집이다. 하지만 그 일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덩컨이 집을 잃었던 이유와 비브가 찾았던 집이 훗날 변질된 이유는 많이 다르지 않다. 모두 상대에게 자신을 너무 매여두고 있었던 탓이다. 영원히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늘 불안한 헬렌이 그러하듯. 


 그 어떤 상황에 있다고 하여도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말고 나를 위한 그가 아니라 그를 위한 나를 더 많이 보도록 하는 것. 내게 '나이트 워치'는 바로 이 말을 우리 심장 깊이 새겨두기 위한 여정으로 보인다. 사실 인간은 그리 강하지 않기에 환경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자주 우리는 자신의 힘을 넘어선 상황을 핑계대며 무력한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남들은 다 하고 있는데,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표가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옳은 선택을 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스스로 얼마나 많이 잡아왔던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이트 워치'가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지가 가져다 주는 한계로 날 정당화하며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안전 확보를 도모하면 할수록 우리는 정주할 집을 얻기는 커녕 한없이 계속되는 불안한 야간 순찰 속에서 스스로를 더욱 좁디 좁은 골방으로 내몰 뿐이다. 세라 워터스는 우리가 자신을 골방 속에 가두는 존재가 아니라 케이처럼 골방에 갇혀 있는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자신이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이것이 오직 소설의 인물들처럼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때로는 남에게 뒤쳐질까 혹은 나도 모르게 조직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어느 정도는 야간 순찰을 하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면 그 사슬을 끊는 시작을 '나이트 워치'로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느새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마저 광장으로 이끌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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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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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오르는 일은 자주 삶에 비유되어 왔다. 아마도 그 여정이 인생만큼 힘들고 정상이라는 종착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백'으로 유명한 미나토 가나에의 새 소설을 만났다. 제목이 '여자들의 등산일기'다. 갑자기 그녀의 소설 '백설공주 살인사건'이 생각난 건, 혹시 이 소설도 그 소설처럼 인터넷 네트워크가 무대가 벌어지는 살인극이 아닐까 생각되어서였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내게는 미나토 가나에와 살인을 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살인은 나오지 않았다. 소설은 제목처럼 정말 여자들이 등산하는 이야기였다. 제목의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일본에서 등산 붐이 일어나자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등산 정보들을 공유하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하나 생겨났는데, 그 이름이 바로 '여자들의 등산일기'였다. 소설은 모두 8장에 걸쳐 각각 다른 사람의 등산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일본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주로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하는 산 중의 하나가 무대로 때로 그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장소로도 유명한 뉴질랜드의 '통가리로'까지 확장된다. 이 쪽이 꽤 유명한 트래킹 장소이기도 해서 나도 꽤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산들은 이렇게 목차에 지도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의 무대가 되는 산의 위치를 확인하고 읽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시작을 여는 것은 묘코 산을 올라가는 에토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백화점 매장 일을 하는데 하루는 그 백화점에서 최근 거세게 일어난 등산 붐을 노리고 주최한 '아웃도어 페어'에서 '대너 등산화'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 등산화로 인해 생전 처음 등산까지 감행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직장 동료이자 해마다 한 번은 산에 오른다는 마키노의 권유로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묘코 산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등산은 본의 아니게 가장 짝을 이루고 싶지 않은 직장 동료 유미와 단 둘이 가게 됨으로써 먹구름이 일어난다. 에토가 유미를 꺼리는 이유는 그녀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 역시 지금 남자 친구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고민이 깊다. 그녀는 지금 누리는 삶의 모습을 결혼으로 그다지 바꾸고 싶지 않은데 남자 친구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 보니 아무래도 많은 변화가 초래될 것 같은 것이다. 첫 단편은 앞으로 '여자들의 등산일기'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단편들 역시 이 단편처럼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깊은 고민이 함께 엮여져 나오는 것이다. 


 두번 째 단편에서 히우치 산을 맞선 파티에서 만난 남자, 간자키와 함께 오르는 미쓰코 역시 그러하다.

 하고 다니는 스타일 때문에 자주 '거품 경제의 잔재'란 말을 듣는 그녀는 사실 거품 경제가 한창일 때 대형 증권 회사에 근무하여 그 거품의 혜택을 누린 바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회사가 원하는 모습에 맞춰 진짜 자기 자신을 잃어야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자기 외모에 아직 남아 있는 과거의 자신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에 빠진다. 


 세번 째 산인 야리다타케를 오르는 건,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에게 등산을 권유한 마키노다.

 그녀는 등산 취미를 가진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등산을 해 왔고 지금도 꽤 중요한 취미가 되어 있다. 그런 그녀에게 늘 남는 아쉬움이 있으니 그게 바로 야리가타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일이다. 지금까지 두 번 도전했는데, 번번이 타인 때문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내려와야했다. 때문에 더욱 혼자만의 산행을 제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는데 모처럼 일어난 등산붐을 타고 그녀는 다시 세번 째로 정상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타인들이 발목을 붙잡으려 하는데, 과연 그녀는 다시 한 번 혼자만의 산행을 최고로 여기게 될까?


 네번 째는 성격이랑 사고 방식이 자신과 정반대인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을 오르는 노조미가 주인공이다. 가족 이벤트를 열 때마다 늘 비가와서 '비를 부르는 일가'에 속한 그들답게 이번 산행 역시 비가 온다. 우천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등산에서 노조미와 언니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내면의 진심은 어떠한지를 서서히 산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노조미는 의사 아내로서 자기 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던 언니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된다. 형부가 이혼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는 그 언니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이번엔 딸 나나코까지 가세하여 시로우마다케를 오르는 등산에서 언니는 어떻게 이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온전히 깨닫게 된다.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자기 곁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네번 째 마지막의 문장들 그대로...


 "맑은 날은 누구랑 함께 있어도 즐겁지. 하지만..."

 끝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비가 내려도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p. 189)


 여섯번 째, 긴토키 산은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와 함께 오르기로 해놓고 개인 사정으로 빠져 버린 리쓰코가 주인공이다.

 원래 그녀는 우수한 배구 선수로 일본 제일을 노렸지만 발목 부상으로 그 꿈을 접어야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삶을 게임의 미션을 치르듯 영위하면서 늘 자신의 삶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버렸고 그건 산마저 일본 제일을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왜 에토와 유미가 일본 제일인 후지산을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리쓰코는 남자 친구 다이스케에 의해 삶은 정상을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누리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곱번 째는 드디어 뉴질랜드 통가리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네번 째 단편에서 노조미가 자기 친구라고 언급했던 유즈키가 주인공인데, 거기서 잠깐 언급되었던 여행사를 다니다 갑자기 관두고 모자 만드는 일을 하게 된 연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이번 통가리아 트래킹은 두번 째인데, 처음엔 남자 친구와 같이 왔었다. 삶이 선사하는 예측 불허의 상황을 한껏 껴안고 변화를 즐겼던 그가 끝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접어야 했던 상황과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된 그녀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그러면서 두번 째에 등장했던 미쓰코와 간자키, 세번 째 등장했던 마키노 또한 같이 출연하여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통해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는 산의 풍경과도 같은 삶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은 다시 노조미가 등장한다. 늘 누군가와 함께 등산했던 그녀는 이번에는 혼자 가라페스에 오른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얼마든지 혼자 잘 지낼 수 있다고 선언했던 그녀가 사실은 혼자 잘 있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앞에 놓인 외로운 길은 앞으로 가게 될 고독하고 불안한 미래의 삶이었고 그런 그녀의 산행은 우려와 고민을 곱씹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행을 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들이 나눠주는 '맑음' 속에서 삶은 결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순간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기르는 양파 밭처럼, 늘 새롭게 일구어가는 것이라는 걸 체감한다.


 이처럼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삶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등산을 소재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등산하는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하는 것 같은 형식이라서 이야기에 더욱 몰입토록 만든다. 거기다 현장 취재를 세밀히 하는 미나토 가나에답게 산의 묘사 또한 디테일하게 잘 살아나 있어 마치 주인공 곁에서 함께 등산하는 기분도 맛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 등산이 하고 싶어질 것이다. 마침 바깥 나들이 하기 딱 좋다는 5월이 아닌가. 읽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책을 덮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거나 당장 거기로 발길을 옮길지 모른다.


 솔직히 등산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박 3일에 걸쳐 지리산을 종주했던 기억은 각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도 나오던데, 진짜 등산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능선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 종주할  때가 딱 그랬다. 하루 종일 발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며 걷는 건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8월인데도 너무나 추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올려다 보았던 세석 밤하늘의 별들도. 어쩌면 그러한, 일상에서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낯선 풍경의 파노라마가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조미와 언니를 하나되게 했던 그 풍경처럼.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도 나 역시 마키노처럼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 나 역시 마키노처럼 그걸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삶의 변화를 앞두고 고민 중인 분들에게 이 소설을 기꺼이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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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탄두리
에르네스트 판 데르 크바스트 지음, 지명숙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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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고 싶어한다. 

 무대 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지 그 바깥 어둠에 가려진 채로 조용히 박수만 치는 관객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네델란드 작가 에른스트 환데르 크봐스트의 소설, '마마 탄두리'는 이런 존재감에 대한 소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마마 탄두리'는 작가의 엄마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실제 엄마를 그대로 형상화한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인도 사람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간호사로 네델란드에 왔다가 작가의 아빠가 첫 눈에 반하여 오랫동안 구애를 한 끝에 결혼하여 네델란드에 머무르게 되었다. 보통 이방인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이보다 더 타인에 대해 신경쓰며 그 사회에 잘 섞여들기 위해 가급적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우리의 마마 탄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고향 땅이나 다름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치 확성기를 입에 대고 부는 것처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다. 주로 인도 전통 요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화덕을 가리키는 '탄두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작 두 개의 여행 가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네델란드로 왔으면서도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탄두라 화덕에 닭고기를 구워대는 게 바로 그녀인 것이다. 소설은 아들인 작가가 듣거나 보았던, 엄마가 자신의 존재감을 남들에겐 민폐가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한껏 발산하는 모습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담아낸다. 실제로 만난다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것이지만 소설이 가져다 주는 적당한 거리가 유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마마 탄두리는 그런 식으로 평생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없이 나타내며 살아왔다.

 네델란드인 아버지는 전립선 암의 권위자로 저명한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 꼼짝 못하며 거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감 강한 엄마와 별로 없는 아빠 사이에 있었다. 이건 지적 장애 탓으로 어디로 가든 엄마와 똑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큰 형, 아쉬르바트와 얌전하여 아빠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그닥 드러내지 않는 둘째 형 요한 사이이기도 했다. 작가는 원래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래고래 울부짖어 인도 가족들이 '투투 베이비'라는 별명마저 지어줄 만큼. 그렇게 그 또한 원래는 엄마의 궤도 위에 있을 존재였으나 두 사람을 통해 점점 거기서 이탈해 나간다. 하나는 볼리우드 배우인 샤르마 이모부고 다른 하나는 헤르버르트 삼촌이다. 샤르마 이모부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 배후에 있더라도 누구보다 더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굳이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그렇게 누군가의 등 뒤에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감을 보란듯이 내세우는 사람 이상으로 크게 나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아빠를 다시 보게 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엄마에 가려 한없이 작은 존재감을 가진 아빠였지만 사실 엄마가 일으킨 모든 소동과 분란의 뒷감당을 중재하고 해결한 사람은 정작 아빠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테오에게 임금을 계산해주었다. 그동안 많은 인부들에게 그렇게 뒷손질을 해온 것처럼. 그는 노상 어머니와 칠공들, 배관공들, 목수들 그리고 청부업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곤 했다. 법정 소송으로까지 끌고 간 사건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립선암 연구의 많은 시간을 이런 일들에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p. 250 ~ 251)


 존재감은 그렇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과가 아닌 역사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란 걸, 작가는 깨달은 것이다. 헤르버트르 삼촌 또한 존재감은 타인의 인정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나다워질 때 형성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누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 자기 존재감이란 영토는 제국이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 두 사람이 열어준 문을 통해 엄마의 식민지에서 나올 수 있었고 작가라는, 그의 입장에선 독립국 선언이라고 해도 좋을, 정체성을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토록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그 끝에 결국 무엇이 있는지 엄마보다 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스린 이모를 통해 적나라하게 목격한 탓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슬픔이다. 우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의 궁극엔 상대방의 인정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일방적 드러냄을 연결은 커녕 오히려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었다. 고독의 우리에 유폐시켜서 나날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꾸만 줄어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주하게 할 따름이었다. 남는 것은 처량한 기만이었다. 빈 주머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양 더욱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진하게 풍겨 오는...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본다. 눈 아래 거무스름한 반점들, 그녀에게도 있는 솜털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낀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슬픔. 마치 우리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도 자식들도 없는 외톨이 어머니를. 마무리되지 않은 텅 빈 집에서의 고독. 그녀의 무한대에 가까운 자존심이 파놓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누구도 그녀를 위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 속으로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 일.(p. 256)


 작가는 그 애처로움을 확인하고 '마마 탄두리'의 세계에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마 탄두리'는 어쩌면 우리도 늘 하고 있을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사실 '마마 탄두리'와 같은 유혹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SNS가 발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손쉽게 타인에게 노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커져버린 유혹이다. 오죽하면 지금 사회를 과시 사회라고도 부르겠는가. 그런데 바깥에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위계 질서를 가질 수밖에 없고 가장 꼭대기에 있지 않는 이상 늘 상대적으로 불만족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없이 엷어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체득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강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될 뿐이다. 악순환이다. 


 당신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마마 탄두리'는 작가가 몸소 그랬듯, 그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이 책이 정말 권하고자 하는 것은 샤르마 이모부와 헤르버르트 삼촌처럼 존재감에 대한 집착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과시가 아니라 고유한 내면에 충실한 가운데 점차로 다듬어지는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홀로 존재하는 개성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색깔 중 하나로 고요하게 드러나는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마마 탄두리'는 바로 그런 것들에 당신이 군침을 흘리도록 유혹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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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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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그건 작품을 수수께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의 독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 ‘곡성 그러했듯무수한 의혹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두들 자신만이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의미의 숲을 만들어 가더라도 누구도 감히 그것이 틀렸다 단정할  없도록 하는 권위에 굴복시키지 않고지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너도   있어!’ 유혹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난무하는 해석의 전장 속으로 참여할  있게 하는 무대 중앙에서 오직 듣기만 하는 침묵의 관객 앞에서 설파하는 독백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사고로 단단히 무장한 고유한 목소리를 한껏   있는 대화의 광장이 되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창백한 불꽃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일단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고 있다일정한 서사의 흐름이 없다찰스 킨보트가  머리말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시인  프랜시스 셰이드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창백한 불꽃이란 시가 뒤이어 이어진다그리고  시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찰스 킨보트의거의 책의 3분의 2 차지하는  주석이 따라나온다우리는 그래도  책이 소설이긴 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석에서 주로 받는데그것 역시 평범하지 않아서 앞서 나온 시의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락을 이루며 셰이드의 삶과 킨보트가 가지고 있는 셰이드와의 추억 그리고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카를 크사베리의 탈출기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야고프 그라두스의 이야기등 여러 방면으로 종횡무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의 결을 섬세하게 훑지 않으면 지금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내가 처음 읽을  그랬듯이, 멍하니 읽다보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그저 도통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런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부터 들게 되는 것이다.

 

  재독은 필연이었고 목적은 당연히  이유를 찾아내는데 있었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백한 불꽃 해석의 전장터라는  깨달았다셰이드가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과 킨보트가 주석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셰이드가 ‘창백한 불꽃 썼던 것은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부모 곁을 먼저 떠나간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그가 시에서 이렇게 썼던 대로 아이의 존재도인간의 삶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데 있었다

 

 마땅히 확신하건대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p. 91)


 그러나 킨보트에게  시는 자기 혼자만의 과거를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였다현실에선 잃어버린 왕국을 시를 통해 되찾을  있는 그리고 문학이 가진 영원한 생명을 통해 비로소 회복한  성채를 영겁에 걸쳐 보존할  있는기회였다 마디로 그에게 ‘창백한 불꽃 헤이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동시에 많은 추모 평론이 셰이드의 자전적 경험으로 이뤄졌다고 해석했듯셰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창백한 불꽃 킨보트 자신의 것이었다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주석에서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작가의 진짜 의도나 세간의 중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진실은 왕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단언에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p. 36)


 ‘창백한 불꽃 이런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근원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투쟁은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 식의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그러나 셰이드의 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앞서 내가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말했지만 사실 셰이드가  이런 시를 썼는지는 셰이드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과연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로 파악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는  난해한 시인 까닭이다어쩌면 시인조차  이유를 몰랐을 수도 있다왜냐하면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나의  저서(자유시)였다. ‘밤의 파도소리

 다음에 나왔고그후에 ‘헤베의 술잔 눅눅한 사육제의

  마지막 꽃수레가이제 나는

 전부 ‘시집이라 명명하고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명한 무언가는뭔가 달빛 방울 같은

제목이 필요하다도와주시오창백한 불꽃) (p. 90)



 대부분 제목을 자신의 작품을 파악했을 때 만든다는 점에서 시인 자신도 시가 가지는 진짜 의미에 가닿지 못하는 간극을 느낀 것이다거기서 도움을 호소하며 터져 나온 ‘창백한 불꽃 차라리 간구였으며 간극이 나타내는 시의 의미를 하나로 길어낼  없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또한 이는 딸이 죽음과 관련한 시구에서 보듯종결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하지만 킨보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창백한 불꽃 행한다.

 나는 나보코프가 ‘창백한 불꽃이란 제목을 감히 중의적 의미로 달았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앞서 말한,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는  거부하는 걸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킨보트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창백한 불꽃 이미지란 다름아닌소설의 마지막(그러니까 원래 시에는 없는 1000행의 주석 부분) 나오는 셰이드의 삶을 끝장낸 암살자 그라두스의 총탄이 발사된 총구이다바로 거기서 터져나온더이상 스스로 다른 빛과 표정을 짓지 못하는 ‘창백한’ 시신으로 만들어 여지없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해 버린 ‘불꽃’을 '창백한 불꽃'이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셰이드와 킨보트를 완전히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한 쪽에는 문학을 보다 다양한 의미로 널리 타오르게 하려는 불꽃이 있고 다른  쪽엔 자신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으로  하나의 의미만 허용하려는 불꽃이 있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대로 셰이드의 시를 구축하려는 킨보트의 몸짓은 그대로 암살자 그라두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나보코프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라두스의 이야기를 기입했다고 생각한다권위와 지식에 기대어 자기가 파악한 의미를 진리의 권좌에 앉혀 모두가 순종하기를 바라는우리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를 성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말이다킨보트가 셰이드 시에대 하고 있는 것과 그라두스가 카를 크사베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노력하는 것의 동일성은 킨보트와 그라두스가 각각 셰이드와 암살 대상에게 다가가려   겪는 과정 상의 곤란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일면 드러난다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시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복해서 실패하듯이 그와 발맞추어 카를 크사베리를 암살하려는 그라두스의 시도 또한 예기치 않게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런 과정의 닮음과 순서의 비슷한 배치로 그라두스가  다른 킨보트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그라두스에 대해 킨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몸서리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 -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 -  혐오했다 자의 어쩔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p. 18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런 것은 아예 존재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만이 아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타자는 있을 자리가 그의 왕국엔 없다. 그런데 킨보트가 원래 젬블라 왕국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러한 그라두스의 모습은 킨보트를 보다 단순화한 것이라 해석해도 별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우리는 킨보트와 그라두스를 자기 중심주의라는 범주에 같이 놓아둘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셰이드가 있다. 나보코프는 이 대립을 셰이드의 딸 헤이즐을 통하여 더욱 강조한다.

 킨보트의 주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헤이즐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기꺼이 유령과 소통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만큼 헤이즐은 현실의 지배 영역에서 탈주해 있으며 한껏 타자 친화 또는 지향적인 존재다.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은 그런 딸이 영원하길 바라는 시였다. 이는 곧 문학이 어떤 권위나 지식으로 내리누르는 규정에 굴종하지 않고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타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관련된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서사는 바로 이러한 셰이드가 딛고 서 있는 자리의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건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킨보트의 해석이 아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셰이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 같은 형체로 응고된 어둡고 창백한 반점 덩어리가 현관 불빛이 가까스로 미치는 정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p. 235)(강조는 필자)'


 여기에 들어간 '창백한'과 '불빛'은 제목의 '창백한 불빛'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한다. 그런데 킨보트는 이걸 단순한 전기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석을 단다. 불가해한 타자의 출몰과 그걸 그대로 존중하려는 문학에 대하여 과학이라는 도구로 타자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킨보트가 과학을 언급하니 헤이즐이 죽은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죽은 1957년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미국인들이 이제 곧 공중에서 핵폭탄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압도적으로 느꼈던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은 오직 과학에 사활을 걸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문학이 설 자리는 그렇게 점점 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헤이즐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셰이드는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문학을 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셰이드의 이런 말은 그가 문학을 많고도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내 생각에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있어.” 킨보트 :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중국이나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없어 달랑  사진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p. 194)


 이제 오직 수수께기로 가득차 보였던 '창백한 불꽃'이 내밀하게 간직한 속뜻을 내게 조금 드러내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건 타자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토록 문학이 윤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이 소설 전에 나온 '롤리타'가 오로지 소재로 오해를 받아 큰 논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한 사람의 타자를 대한다는 것이 한 명의 스승을 대하듯 겸허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하기 위해 '롤리타'도 그렇고, '창백한 불꽃'도 그렇고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공감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자극과 그 못지 않은 터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암호를 작품마다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오는 얘기인데, 그 이유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린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44)


 '창백한 불꽃'이 주고자 하는 태도가 이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킨보트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 -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타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으로 군림하려 하는 한, 독선과 묵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까지 보고나니 홀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보다 미미하지만 저마다 다른 색깔과 형상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절로 다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더위로 숨막히는 여름밤을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뒤바꾸듯, 그 어디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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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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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채워야할  모를 때가  많다대부분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모방이다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고 다들 바라는 것이니 좋은 것이겠거니 정당화 한다거지는 남의 것을 통해 자기 존재를 지속하는 사람이다언제나 타인을 모방해 자신을 형성하는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거지나   다를  없다앨리스 먼로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거지 소녀 로즈란 여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엔 모두 열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로즈 삶의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서 그녀가 자기 자아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 역시 모방이다.

 

 그녀는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뭔가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어릴 때는 새엄마 플로처럼 아버지(혹은 어른) 원하는 모습이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고(장엄한 매질) 학교에 들어가서는 프래니 맥길처럼 타고난  모습을 절대적 한계로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세상의 공격에 그대로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코라처럼 사생아라는 사실과 변기 치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 환경이라는 한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를 당당하게 만들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다(특권). 자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자기 마을에만 있었을 적엔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가난이 부유한 이들과 비교되어 눈에 들어왔으며(자몽  처음으로 홀로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갔을 때는 결백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가온 수치와 비루함 앞에서 용기있게 그것을 내치느냐 아니면 굳이 해가   없다고 여기고 순응하느냐 사이에서 번민해야했다(야생백조). 그런 상황과 그녀의 선택은 결혼을 앞두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함께  시간이 길어질수록 느는  실망 뿐이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패트릭의 청혼을 정말  존스의 그림인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거지 소녀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며(거지 소녀) 이러한 수동성은 자신이 너무 부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으로 굴절되어  매력적으로 다가온 불륜의 유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고(장난질) 패트릭과 이혼  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야 했을 때조차 불륜남 톰과 함께 자기 욕망을 실현하느냐 아니면  애나에게 엄마의 책임을 다하느냐 사이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섭리).  모든 순간에 로즈는   번도 자신이 상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적이 없었다언제나 상황의 압박 속에서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경계하면서 그들이 보기에 좋을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얻을  없었고 반복된 실연의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에서 벗어날  없었다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혼자만의 삶에 보다 뿌리를 내린 뒤에도 로즈는 여전히 세상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용기있게 드러내는 ‘야생 백조 되지 못한다(사이먼의 행운). 

 

 페인트칠한 돔형 지붕과 기둥들이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비친 장밋빛 하늘 위로 경이롭게 떠다니다 축포를 터트리듯 산산이 흩어졌다새떼가심지어 야생백조떼가커다란 돔형 지붕 밑에서 깨어나 지붕을 뚫고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도   있었다.(‘야생 백조’, p. 121)


 그녀는  외롭고 사람들의 초대를 받길 바라며(p. 277) 배우라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섞여들어갈  있을(p. 278) 정도가 되었지만 바라는 행복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급기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을 항성처럼 지탱해주던 플로가 치매에 걸리고 자신을 매혹했던 그토록 독립적이며(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흑인을 검둥이로 불렀을 정도로(p. 335)) 강했던 존재감마저 이제 과거지사가 되어버린다(스펠링). 그와 똑같이 개인이 가진 고유한 개성을 정해 놓은 규격에 맞춰 몰개성으로 희석시켜 버리는 사회의 행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있을만한 행진에서 항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가감없이 내보였던 밀턴 호머도자기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중심으로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려는 사람보다 자신의 생각을 - 그것이 설령 선입견이라  지라도 -  많이 관철시키려는 미스 해티 같은 이들이 많아지는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간다그것은 밀턴 호머를 따라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어린 시절 밀턴 호머의 신도라는 것을 남몰래 공유했던 친구이기도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으로도 드러난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편의 이야기에 나타난 일련의 모습을 보다보면 모방 외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 보인다. 후반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듯, 세상은 점점  고유한 개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주체들에게 가혹적으로 굴고 그런 존재들을 자기가 먼저 선택하지 못하고 마냥 코페투아왕의 간택을 기다려야만 하는 그림  거지 소녀로 만들려고 하는  같기 때문이다처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내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턴 호머란 이름 자체도 그걸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싶다사라진 낙원을 뜻하는 ‘실락원   밀턴과 자신의 진짜 고향을 상실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호머의 이름을 합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나온 1970년대 후반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급속도로 보수화가 되어가던 무렵이기도 했다. ‘장엄한 매질에서 아무  없는 베키의 아버지타이드 노인을 오직 풍문에 근거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해트 네틀턴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가 되어 마치 그런 일은 일절 없었던 것처럼 회고하는 것과도 같이 과거는 미화되었고 오로지  좋은 과거를 복원하기 위하여 기성의 권위에 존중할 것만 요구되었던 시절이었. 당연히 자신만이 가지는 개성 혹은 차이는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다. 60년대 꽃피웠던 히피즘은 말할 것도 없고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했던 흑인과 여성 중심의 운동 역시 어느새 얼어붙고 말았다. 소설은 그런 분위기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협소한 범위로 획일화 되자 ‘거지 소녀에서 패트릭의 가족들이나 ‘장난질 나오는 산부인과 병동의 여성들처럼 사람들은 오직 타인에게 인정받을  있는 직업이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모방한 소비를 통하여 자신을 입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지 소녀  빈곤함의 채록이기도 하다.


  결과 무엇이 남았는가?

그건 ‘장난질에서 성공한 클리퍼드와 조슬린 부부가  보여주듯허망함이며 ‘거지 소녀에서  훗날 우연하게 재회한 패트릭이 로즈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적의 뿐이다오직 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소진시켜  자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운 까닭에 대해서도 더이상 자기 내부에서 찾아낼  없기 때문에 그저  비어있는 자신을 느끼거나  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아가 로즈가 조슬린 부부를 혐오하면서도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잇달아 실패를 안기는 삶을 타협과 포기로 계속 짊어지고 가는 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현재의 라는사실은 지속성의 잔재에 불과할 뿐인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때론 마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수동성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탓인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회의 압박 강도가 심해지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다면서 쉽사리 두 손을 들 수 없다. 이런 삶의 궤적이 도달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그런 삶이 가져오는 고민과 피로의 증폭을 소설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게 된 까닭이다. 다행히도 소설은 어느새 자신이 육중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을 위해 탈출할 수 있는 단서 또한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놓아두고 있었다. 그건 물론 스스로 자신의 독립성을 쟁취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로즈가 '장난질'에서 클리퍼드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한없이 낯설고 홀로 배회하는 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파월리버' 기꺼이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파월리버는 어떠한 곳이었나?


 파월리버는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죄지은 여행자들이 잡혀서 형벌을 받는 악취나는 신기루다. 그녀는 정말로 놀라지도 않았다. 해서는 안되는 점프를 했고, 그래서 이곳에 착지하게 되었다.(p. 220)


 그러한 죄지은 땅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로즈는 행진에서 조롱과 경멸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밀턴 호머와 많이 닮았다.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 사회가 규정한 것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매혹의 대상으로 삼고 실천까지 반복해서 감행한 것이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슬린 부부의 허망함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이 지녔던 적의와 거꾸로 더욱 타인의 곁에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펠링'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과거와 좀 달라진 로즈의 모습을 본다. 이전까지 로즈는 자기를 위해 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해 타인 곁에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일방적인 모방의 단계에서 서로가 대등한 대화의 관계로 진입한 것과도 같다. 거기서 로즈는 이제 자기만의 고유햔 주체성을 구축할 기억들을 쌓기 시작한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 그녀는 랠리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더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p. 369)


  이런 로즈의 변화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감행하라는 권유로 새기게 만든다. 플로의 경고로 대변되는 사회의 지속적인 위협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담하게 뛰어들라는.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지 소녀 자신 뿐이라고 말이다. 

 이제 말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내가 말한 로즈의 수동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인 수동성만은 아니다. '장엄한 매질'에서 로즈가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에게 취했던 연기처럼, 그리고 '야생 백조'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만지는 노인 목사에게 온전히 당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게임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지독함과 과장을 로즈 역시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폭력의 피해자 역할에 마음껏 몰입한다그로써 그녀가 불러일으키는혹은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는 감정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진저리치며 보여줄 경멸이다.(p. 38)


  작가가 로즈에게 배우란 직업을 준 것도 이와 연결되지 않을까 한다. 배우란 수동성과 능동성이 하나의 절충을 이루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그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배우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도 뛰어난 연기를 통해 공감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대중의 생각과 취향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서해안 지역 사람들 모두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연약이었다그들은 오늘  연약해진 느낌이 든다거나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니에요로즈는 말했다 내가 오래된 말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분명하게 느껴져요초원의 바람과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고 거칠어졌다그녀는 말가죽이란 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주름진 갈색 목덜미를 찰싹 쳤다벌써부터 그녀는  연기하게  인물의 말투와 버릇을 조금씩 따르기 시작했다.(p. 311)

 소설은 로즈가 배우로 꽤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렇게 연약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말가죽처럼 질기고 강한 면모를 보였어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휘둘리지 않는 것. 내가 아무리 자의대로 할 수 없는 협소한 상황에 있더라도 마냥 수동적으로 끌려가기 보다 비록 조금이나마 내 주체성을 발휘해 보려 노력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과 이를 위한 모든 시도가 설령 바라는 것만큼 빨리 보상을 받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리라고 낙관하는 것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다.

 소설은 처음 로즈의 삶을 거울처럼 충실히 비춰 보여주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느새 그 거울 앞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로즈가 취했던 방법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고 그로 인해 가졌던 패배와 아픔의 기억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채우고 있으며 만일 지금 내가 비루함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행여 나 또한 무분별한 모방 속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세상이란 얼마전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 유토피아'라고 말했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과 권위에 집착하고 남들의 편견에 별 비판없이 동조하여 무리를 이루어 거기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은 배척하라는 선동과 가짜 뉴스가 날뛰는 판이니 더욱 이 질문을 예사롭지 않게 새기게 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강요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삶의 정경에 대한 섬세한 재현을 통해 독자를 차분하게 몰입시킨 가운데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는 이 소설은, 소설이 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이는 오늘날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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