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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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채워야할  모를 때가  많다대부분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모방이다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고 다들 바라는 것이니 좋은 것이겠거니 정당화 한다거지는 남의 것을 통해 자기 존재를 지속하는 사람이다언제나 타인을 모방해 자신을 형성하는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거지나   다를  없다앨리스 먼로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거지 소녀 로즈란 여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엔 모두 열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로즈 삶의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서 그녀가 자기 자아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 역시 모방이다.

 

 그녀는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뭔가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어릴 때는 새엄마 플로처럼 아버지(혹은 어른) 원하는 모습이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고(장엄한 매질) 학교에 들어가서는 프래니 맥길처럼 타고난  모습을 절대적 한계로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세상의 공격에 그대로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코라처럼 사생아라는 사실과 변기 치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 환경이라는 한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를 당당하게 만들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다(특권). 자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자기 마을에만 있었을 적엔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가난이 부유한 이들과 비교되어 눈에 들어왔으며(자몽  처음으로 홀로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갔을 때는 결백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가온 수치와 비루함 앞에서 용기있게 그것을 내치느냐 아니면 굳이 해가   없다고 여기고 순응하느냐 사이에서 번민해야했다(야생백조). 그런 상황과 그녀의 선택은 결혼을 앞두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함께  시간이 길어질수록 느는  실망 뿐이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패트릭의 청혼을 정말  존스의 그림인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거지 소녀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며(거지 소녀) 이러한 수동성은 자신이 너무 부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으로 굴절되어  매력적으로 다가온 불륜의 유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고(장난질) 패트릭과 이혼  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야 했을 때조차 불륜남 톰과 함께 자기 욕망을 실현하느냐 아니면  애나에게 엄마의 책임을 다하느냐 사이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섭리).  모든 순간에 로즈는   번도 자신이 상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적이 없었다언제나 상황의 압박 속에서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경계하면서 그들이 보기에 좋을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얻을  없었고 반복된 실연의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에서 벗어날  없었다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혼자만의 삶에 보다 뿌리를 내린 뒤에도 로즈는 여전히 세상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용기있게 드러내는 ‘야생 백조 되지 못한다(사이먼의 행운). 

 

 페인트칠한 돔형 지붕과 기둥들이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비친 장밋빛 하늘 위로 경이롭게 떠다니다 축포를 터트리듯 산산이 흩어졌다새떼가심지어 야생백조떼가커다란 돔형 지붕 밑에서 깨어나 지붕을 뚫고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도   있었다.(‘야생 백조’, p. 121)


 그녀는  외롭고 사람들의 초대를 받길 바라며(p. 277) 배우라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섞여들어갈  있을(p. 278) 정도가 되었지만 바라는 행복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급기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을 항성처럼 지탱해주던 플로가 치매에 걸리고 자신을 매혹했던 그토록 독립적이며(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흑인을 검둥이로 불렀을 정도로(p. 335)) 강했던 존재감마저 이제 과거지사가 되어버린다(스펠링). 그와 똑같이 개인이 가진 고유한 개성을 정해 놓은 규격에 맞춰 몰개성으로 희석시켜 버리는 사회의 행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있을만한 행진에서 항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가감없이 내보였던 밀턴 호머도자기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중심으로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려는 사람보다 자신의 생각을 - 그것이 설령 선입견이라  지라도 -  많이 관철시키려는 미스 해티 같은 이들이 많아지는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간다그것은 밀턴 호머를 따라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어린 시절 밀턴 호머의 신도라는 것을 남몰래 공유했던 친구이기도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으로도 드러난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편의 이야기에 나타난 일련의 모습을 보다보면 모방 외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 보인다. 후반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듯, 세상은 점점  고유한 개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주체들에게 가혹적으로 굴고 그런 존재들을 자기가 먼저 선택하지 못하고 마냥 코페투아왕의 간택을 기다려야만 하는 그림  거지 소녀로 만들려고 하는  같기 때문이다처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내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턴 호머란 이름 자체도 그걸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싶다사라진 낙원을 뜻하는 ‘실락원   밀턴과 자신의 진짜 고향을 상실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호머의 이름을 합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나온 1970년대 후반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급속도로 보수화가 되어가던 무렵이기도 했다. ‘장엄한 매질에서 아무  없는 베키의 아버지타이드 노인을 오직 풍문에 근거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해트 네틀턴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가 되어 마치 그런 일은 일절 없었던 것처럼 회고하는 것과도 같이 과거는 미화되었고 오로지  좋은 과거를 복원하기 위하여 기성의 권위에 존중할 것만 요구되었던 시절이었. 당연히 자신만이 가지는 개성 혹은 차이는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다. 60년대 꽃피웠던 히피즘은 말할 것도 없고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했던 흑인과 여성 중심의 운동 역시 어느새 얼어붙고 말았다. 소설은 그런 분위기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협소한 범위로 획일화 되자 ‘거지 소녀에서 패트릭의 가족들이나 ‘장난질 나오는 산부인과 병동의 여성들처럼 사람들은 오직 타인에게 인정받을  있는 직업이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모방한 소비를 통하여 자신을 입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지 소녀  빈곤함의 채록이기도 하다.


  결과 무엇이 남았는가?

그건 ‘장난질에서 성공한 클리퍼드와 조슬린 부부가  보여주듯허망함이며 ‘거지 소녀에서  훗날 우연하게 재회한 패트릭이 로즈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적의 뿐이다오직 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소진시켜  자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운 까닭에 대해서도 더이상 자기 내부에서 찾아낼  없기 때문에 그저  비어있는 자신을 느끼거나  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아가 로즈가 조슬린 부부를 혐오하면서도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잇달아 실패를 안기는 삶을 타협과 포기로 계속 짊어지고 가는 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현재의 라는사실은 지속성의 잔재에 불과할 뿐인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때론 마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수동성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탓인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회의 압박 강도가 심해지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다면서 쉽사리 두 손을 들 수 없다. 이런 삶의 궤적이 도달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그런 삶이 가져오는 고민과 피로의 증폭을 소설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게 된 까닭이다. 다행히도 소설은 어느새 자신이 육중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을 위해 탈출할 수 있는 단서 또한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놓아두고 있었다. 그건 물론 스스로 자신의 독립성을 쟁취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로즈가 '장난질'에서 클리퍼드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한없이 낯설고 홀로 배회하는 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파월리버' 기꺼이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파월리버는 어떠한 곳이었나?


 파월리버는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죄지은 여행자들이 잡혀서 형벌을 받는 악취나는 신기루다. 그녀는 정말로 놀라지도 않았다. 해서는 안되는 점프를 했고, 그래서 이곳에 착지하게 되었다.(p. 220)


 그러한 죄지은 땅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로즈는 행진에서 조롱과 경멸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밀턴 호머와 많이 닮았다.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 사회가 규정한 것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매혹의 대상으로 삼고 실천까지 반복해서 감행한 것이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슬린 부부의 허망함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이 지녔던 적의와 거꾸로 더욱 타인의 곁에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펠링'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과거와 좀 달라진 로즈의 모습을 본다. 이전까지 로즈는 자기를 위해 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해 타인 곁에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일방적인 모방의 단계에서 서로가 대등한 대화의 관계로 진입한 것과도 같다. 거기서 로즈는 이제 자기만의 고유햔 주체성을 구축할 기억들을 쌓기 시작한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 그녀는 랠리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더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p. 369)


  이런 로즈의 변화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감행하라는 권유로 새기게 만든다. 플로의 경고로 대변되는 사회의 지속적인 위협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담하게 뛰어들라는.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지 소녀 자신 뿐이라고 말이다. 

 이제 말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내가 말한 로즈의 수동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인 수동성만은 아니다. '장엄한 매질'에서 로즈가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에게 취했던 연기처럼, 그리고 '야생 백조'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만지는 노인 목사에게 온전히 당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게임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지독함과 과장을 로즈 역시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폭력의 피해자 역할에 마음껏 몰입한다그로써 그녀가 불러일으키는혹은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는 감정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진저리치며 보여줄 경멸이다.(p. 38)


  작가가 로즈에게 배우란 직업을 준 것도 이와 연결되지 않을까 한다. 배우란 수동성과 능동성이 하나의 절충을 이루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그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배우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도 뛰어난 연기를 통해 공감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대중의 생각과 취향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서해안 지역 사람들 모두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연약이었다그들은 오늘  연약해진 느낌이 든다거나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니에요로즈는 말했다 내가 오래된 말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분명하게 느껴져요초원의 바람과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고 거칠어졌다그녀는 말가죽이란 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주름진 갈색 목덜미를 찰싹 쳤다벌써부터 그녀는  연기하게  인물의 말투와 버릇을 조금씩 따르기 시작했다.(p. 311)

 소설은 로즈가 배우로 꽤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렇게 연약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말가죽처럼 질기고 강한 면모를 보였어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휘둘리지 않는 것. 내가 아무리 자의대로 할 수 없는 협소한 상황에 있더라도 마냥 수동적으로 끌려가기 보다 비록 조금이나마 내 주체성을 발휘해 보려 노력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과 이를 위한 모든 시도가 설령 바라는 것만큼 빨리 보상을 받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리라고 낙관하는 것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다.

 소설은 처음 로즈의 삶을 거울처럼 충실히 비춰 보여주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느새 그 거울 앞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로즈가 취했던 방법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고 그로 인해 가졌던 패배와 아픔의 기억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채우고 있으며 만일 지금 내가 비루함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행여 나 또한 무분별한 모방 속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세상이란 얼마전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 유토피아'라고 말했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과 권위에 집착하고 남들의 편견에 별 비판없이 동조하여 무리를 이루어 거기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은 배척하라는 선동과 가짜 뉴스가 날뛰는 판이니 더욱 이 질문을 예사롭지 않게 새기게 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강요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삶의 정경에 대한 섬세한 재현을 통해 독자를 차분하게 몰입시킨 가운데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는 이 소설은, 소설이 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이는 오늘날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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