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110KG의 거구의 밥. 그는 뉴욕 플래츠 거리에 있는 커즌 마브의 술집에서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것도 벌써 20 년 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삶은 한결 같았다. 내내 혼자였으며 평일엔 술집으로 일하러 가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사람좋은 밥이라 불렀다. 자주 가는 성당의 리건 신부는 그를 사랑이 많은 남자라 그랬다. 하지만 그의 삶은 몸은 비록 바깥에 있을지라도 감옥 안의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소설의 제목은 작은 방울을 뜻하기도 하는 '드롭(DROP)'인데, 정말 그의 삶이 차지하는 영역이란 '드롭'만큼이나 협소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요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늘 술집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하듯 술을 마시는 노파 밀리처럼. 자의로 그런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불행도 친구가 될 수 있다.(P. 22)'고. 물론 이유는 있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존재 하나가 나타난다. 여자? 아니다. 개다. 복서 종의 어린 새끼. 그 개는 플래츠 거리의 쓰레기 버리는 날에 우연히 밥의 눈에 띄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맙소사. 저렇게나 말랐다니. 갈빗대가 다 드러났어. 귀에는 마른 피가 커다란 딱지로 변해 있었다.  개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갈색 몸에 하얀 주둥이. 몸에 비해 너무나 커다란 앞발.(P. 23)

 그 개는 쓰레기 더미에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밥은 쌓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뭐든 손에 넣었다. 빚으로 교수대를 세우고 빚더미가 무게에 못 이겨 무너지려 할 때쯤, 예약 할부제로 집을 사서 교수대 제일 위에 던져 올렸다. 재산을 늘릴 때마다 그만큼, 아니 더 많이 버릴 수밖에 없다. 밥은 쓰레기 더미를 볼 때마다 폭력에 가까운 탐욕을 느껴야 했다. 애초에 금했어야 할 음식을 먹고 똥을 싸지른 느낌.(P. 20)

 개는 거기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나도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왔기에 이 문장들이 가슴에 마구 꽂혀오는 중이다. 거주민들이 버린 종이 상자가 대형 트럭만큼이나 쌓여있는 것을 보면 밥의 마음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밥이 하는 일과 상관이 없다. 밥은 개를 똥더미에서 구해주려 한다. 그로써는 처음으로 '드롭'과 같은 삶에 또 하나의 작은 방울 같은 존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를 받아들이니 세계가 더 커졌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조용했던 밥의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난데없이 커즌 마브의 술집이 두 불한당에게 습격 당한다. 경찰이 찾아오고 마침 토레스란 그 경찰이 같은 성당에서 밥을 봤다고 말하기에 밥은 혹시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불한당 중 한 명이 차고 있는 시계가 멈춰있더라는 말을 해 준다. 커즌 마브는 밥에게 어리석은 말을 했다고 나무란다. 사실 그 돈은 술집의 진짜 주인인 슬라브계 갱단의 것이었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밥과 경찰 토레스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는 밥이 경찰의 끄나풀은 아닐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갱단의 두목은 밥과 마브에게 잃어버린 돈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바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인물이 밥의 삶으로 들이닥친다. 이름은 에릭. 그는 자기가 개의 주인이라며 밥에게 개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이미 개와 정이 들 대로 든 밥은 거절한다. 더구나 그는 로크(밥이 붙여준 개의 이름이다.)를 학대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러자 에릭은 만일 개를 돌려주지 않으면 밥이 개를 학대했다고 신고할 것이라 한다. 개에겐 나중에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특별한 장치를 쓰면 주인을 알 수 있는 칩이 들어가 있는데 그 칩은 자기가 주인으로 되어 있으니 경찰은 밥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임을 알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앞과 뒤로 마치 밥의 삶을 쪼개려는 듯 세찬 바람이 몰려온다. 과연 밥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로코(개의 수호성인이자 독신자와 순교자의 수호 성인 이름이라고 한다.)와 같이.


 소설 '더 드롭'은 톰 하디와 제임스 갠돌피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다. 맞다. 소설에서 영화로 간 것이 아니고 영화에서 소설로 갔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데니스 루헤인이 썼다. 그것을 좀 더 보완하여 소설로 만든 것이 이번에 나온 '더 드롭'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톰 하디가 주인공인 밥 역할을 맡았고 얼마 전에 타계한 제임스 갠돌피니가 마브 역을 맡았다. 세번째에 나온 여자는 노미 라파스인데 밥과 좀 끈적한 관계가 되는 여인 나디아 역을 맡았다. 혹시 스웨덴 판 밀레니엄 영화를 보았다면 얼굴을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리스벳 살란데르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라파스다. 마지막 남자는 에릭 역의 마티아스 스호에 나르츠다.

 소설의 표지는 영화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총이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처음 이 포스터를 보았을 때는 왜 하필 이렇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물론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브루클린이긴 하지만 말이다. 의문은 소설을 읽고 나서 풀렸다. 알고보니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였다.

 중요한 것은 현수교가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데니스 루헤인이 왜 이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는 지가 이해된다. 이 소설에서 데니스 루헤인은 특이하게도 인물들을 병렬적으로 소개한다. 물론 주인공은 밥이지만 독자는 밥의 삶과 내면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밥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인 밥과 토레스 그리고 에릭의 삶과 내면도 구경하는 것이다.(나디아에겐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도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같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대답은 그들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묘사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태풍 앞의 현수교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삶이다. 그렇다. 그들의 삶은 불안하다. 앞과 뒤로 몰려드는 강풍 탓에 요동치는 밥만큼이나 말이다. 원인은 있다. 모두 저마다 다른 삶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문득 일으킨 균열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억지로 메우다 보니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해 될 것이다. 왜 브루클린 브릿지를 받치고 있는 것이 하필 권총인지. 권총은 대표적은 폭력의 은유다. 즉 브루클린 브릿지가 등장 인물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은유 한다면 결국 그들은 폭력으로 안정을 얻고 있다는 뜻이 된다. 폭력은 억지로 뭔가를 얻으려는 가장 강한 행동이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조급한 마음에 억지로 메우려 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그 때문에 실패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순순히 균열을 받아들였으면 비극은 적었을 것이다. 실패한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밥은 언젠가 나디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알고 보면 바로 이 말에 그 해답이 있다. 

 누구나 상대한테 얘기하고 싶어해요. 뭐든 자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거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를 보여 줄 때가 되면 찔끔 움츠리고 말아요, 나디아.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이 떠들어 위장하는 겁니다. 해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명하려는 거예요.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하게 떠들어 대죠. 도대체 말이 됩니까?(P. 139)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존재 안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균열은 그래서 더욱 위기로 다가왔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먼저 흩날리는 것은 가벼운 것들이다. 존재감이 엷은 것들만이 산산이 흩어진다. 그들도 그랬던 것이다. 내 안에 채워 놓은 것이 없었기에 조그만 균열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예감으로 다가왔고 그만 무리를 했던 것이다. 소설은 결국 밥을 통해 그 균열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 가를 말해준다. 이것도 역시 밥이 나디아에게 들려주는 말에서 나타난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해 본 적 있어요? 당신 생각에?"
 "누구 용서요?"
 밥이 되물었다.
 나디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뻔하잖아요."
 "네. 예전엔 속죄가 불가능한 죄가 있다고 믿었어요. 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결국 악마는 목숨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려요. 이미 영혼을 손에 넣었으니까. 악마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죽고 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안됐다. 넌 못 들어와. 용서 못 할 죄를 지었으니까. 혼자 지내거라. 영원히."
 "차라리 악마가 낫겠네요."
 "그래요? 지금 생각은 달라요. 신이 아니라 우리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이해하겠죠?"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올 생각을 못 해요." (P. 167)

 여기서 우리는 왜 데니스 루헤인이 밥을 개 그리고 나디아와 만나게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개와 나디아(아마도 여기서 데니스 루헤인이  나디아란 이름을 쓴 것은 원래 나디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요정 이름이기에 원제인 '더 드롭'과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모두 밥을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이 권총을 쥘 때가 아니라 도움을 바라는 개의 앞발을 잡아주고 비슷한 상처를 지닌 여인의 손을 연민으로 잡아줄 때 말이다. 그렇게 문득 마주한 균열을 불안을 야기하는 나의 상처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를 내보이는 계기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의 악몽도 끝나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말한다. 비록 성당은 스타벅스 매장이 되고 사람들이 필라테스를 신으로 섬기더라도 '함께'로 나를 떠받친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는 마브와 토레스 그리고 에릭 모두 밥처럼 바깥으로 불러내는 존재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은 언제나 구원을 주된 테마로 다루어왔었다. 주인공들에겐 늘 쉽게 씻기 힘든 죄의식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구원은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미스틱 리버'가 대표적인 예다. 악마는 언제나 승리했다. '살인자들의 섬'에서의 주인공처럼 이미 우리 영혼을 그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데니스 루헤인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동안 그의 세계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울타리 안의 세상이었다. 이제 그는 그 곳을 빠져나가려 한다. '더 드롭'은 비록 작은 물방울만큼 작은 시도일지라도 어쨌든 그가 변하려고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과연 이 발걸음이 데니스 루헤인을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런 지 몹시 기대된다.

 (이제와 드는 생각은 데니스 루헤인이 드롭이란 제목을 단 것은 루크레티우스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라는 거대한 것도 알고 보면 빗방울이 우연히 마주친 것과 같은 것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말했다. 모든 존재는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빗방울이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뭔가의 이유로 경로를 이탈할 때 세계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세계란 의미다. 우연이 유의미를 만든다. 여기서 밥과 개 그리고 나디아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밥의 말도 경로를 이탈한 빗방울과 비슷하고 말이다. 그럼, 왜 레인 드롭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물론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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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2-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낮에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냥 이 글을 봤는데 집에서 보는 것과 글씨체가 다르더군요 제가 보는 것은 돋움체(이것은 돋움보다 낱말과 낱말 사이가 조금 넓어요)예요 맑은 고딕으로 쓴 건가봐요 소스를 보니 그 두 가지가 다 쓰였더군요 컴퓨터에 그 글씨체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여서 자동으로 돋움체도 쓰이는 건가 생각했는데, 글을 올릴 때 헤르메스 님이 <span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돋움체, DotumChe, AppleGothic;˝><span style=˝font-family: `Malgun Gothic`, `맑은 고딕`;˝> 이렇게 두가지를 다 붙였나보네요 제가 맑은 고딕으로만 한번 써봤습니다 돋움체가 저절로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안 생기더군요 맑은고딕만 쓰면 그냥 돋움으로 보여요 이건 기본이어서 그렇군요 별거 아닌 말을 했네요

다음부터는 돋움체로 보이면 다른 글씨체로 써서 그렇구나 해야겠습니다 그것보다 컴퓨터에 그 글씨체를 저장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야 알았군요


희선

yamoo 2014-12-1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영화를 한 번 보겠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2015-01-01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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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언급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은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 이렇게 세 가지다.



 읽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바깥 일본 사회 동정에 소세키가 예민하게 반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도련님'은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다. 후발 주자로서 서양 제국주의에 잔뜩 움츠려 있던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시대적 분위기가 거기엔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사소설'의 대표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사소설'이란 작가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오로지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 하는 경향이 많다.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도 어느 정도 사회 동향과 담장을 쌓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번에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오해라는 것이다.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아주 민감하게 연동하는 작가다.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인 '도련님' '그 후' 그리고 '마음'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후'는 '도련님'처럼 어떤 외부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일까?

쓰여진 연도를 감안하면 바로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후'는 1909년에 연재되었다. 1909년은 일본에게 중요하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아주 중요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주권을 상실해 1909년에는 거의 명목상의 권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게 강제 병합된다. '그 후'는 바로 그런 시기에 쓰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이런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건 그대로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후'를 기점으로 이후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인공이 남의 연인을 빼앗아 오는 설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말로 나쓰메 소세키는 '그 후'를 시작으로 내내 그런 설정을 가져왔다. '문'도 그렇고 '마음' 역시 그러하다. 물론 '행인'은 이와 정반대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후'를 기점으로 내내 계속된 나쓰메 소세키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행인'은 그 노선을 더욱 강조하는 작품이다. 간단히 설정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된다. 일단 '행인'은 대학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내가 동생과 바람을 피는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그래서 철저히 감시한다. 더구나 아내가 정말 정절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까지 한다. 이 정도로 대학교수는 비정하며 이기주의적인 인물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 일본의 모습을 대학교수로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는? 바로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이다. 즉 '행인'은 당시 일본 소유가 된 조선을 행여나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이유가 있다. '행인'이 연재 되던 1913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을 보면 그 때가 얼마나 용광로 같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는 언제나 식민지 조선이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그 후다.



 주인공은 다이스케다.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부유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생활엔 아무런 걱정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다. 그는 늘 불안하게 일상을 감각 하지만 백수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는 자신의 심장이 약해서라고 여기고 있다. 하루는 예전 친구인 하리오카가 찾아온다. 그는 결혼과 함께 지방으로 떠났는데 뜻하지 않게 회사 비리에 연루되어 자기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사직을 하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도쿄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시 돌아온 것이다. 원래 아주 친했던 사이라 다이스케는 반갑게 맞는다. 하리오카에겐 미치요라는 아내가 있다. 다이스케도 결혼 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 때는 미치요에게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어 하리오카와 미치요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미치요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뜻하지 않게 아버지로부터도 혼사가 들어온다. 자신이 사업상 도움을 받는 이의 딸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원래 다이스케는 요네자와 효노부가 쓴 '빙과'의 주인공 오레키 호타로처럼 '에너지 절약주의자'로 구태여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하려고 애쓰는 따위의 성격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는데 그 사람과 결혼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치요가 눈에 밟힌다. 결국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선택한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연이 끊어진다. 아버지, 형, 형수 그리고 하리오카.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린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는 그녀가 결혼한 3년 동안 자신에게도 혼사가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고 내내 혼자 살았다고 하면서 그 시기가 다름 아닌 그녀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당신이 어디까지나 원 없이 복수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진정으로 바라는 일입니다. 오늘 이렇게 당신을 불러서 굳이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실은 당신에게 당하는 복수의 일부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이미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죄를 짓더라도 당신 앞에서 참회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p. 269)


 그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복수를 당한다. 아담이 야훼가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는 오직 하와만 있을 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 고된 노동의 형벌을 받았듯이  다이스케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오로지 홀로 책임져야 한다. 소설은 일자리를 구하러 집을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으로 끝난다.


 표면 상으로 이 이야기는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다. 다이스케가 주로 대립하는 것은 두 사람인데 하나는 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하리오카다.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백수로 지내는 다이스케를 영 못마땅해 한다. 본인은 성실성과 열정만으로 커다란 부를 얻은 사람으로 다이스케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다이스케에게 자신만 위해 살지 말고 타인이나 사회를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그게 국민의 의무라는 말까지 한다. 하리오카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내와 다이스케의 사이를 알기 때문에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하리오카는 이런 말을 했다.


 "자넨 비웃고 있어. 그러는 자넨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자넨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이야. 달리 말하면 의지를 발전시킬 수 없는 인간이겠지. 의지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야. 인간이니까 말이네. 그 증거로 항상 공허함을 느끼고 있을 거야. 난 내 의지를 현실 사회에서 실현하려고 하고 내 의지 덕분에 이 현실 사회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네. 거기에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거야. 자네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지. 그러다 보니 관념 세계와 현실 세계를 따로따로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런 엄청난 부조화를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무형의 큰 실패가 아닐까?"(p. 102)


 여기에 다이스케는 잘 반박하지 못한다. '도련님'을 읽고 아버지와 하리오카의 대사를 읽으면 아버지와 하리오카가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실성과 열정. 시대의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 그것이 바로 '도련님'의 주인공 특성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도련님'에서 주인공은 지인이 애인을 빼앗기자 그를 대신해서 복수까지 해주려 한다. 말하자면 그 주인공은 다이스케와 정반대의 인물인 것이다. 즉 여기서 다이스케를 가장 맹렬히 공격하는 대표적인 두 사람은 모두 '도련님' 주인공의 도플갱어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렇게 '그 후'를 '도련님'과 마주한다. 왜?


 '도련님'과 '그 후'를 나란히 놓고 보면 정말 커다란 변화가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도대체 그토록 적극적인 주인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쓰메 소세키는 왜 이렇게 수동적인 주인공을 전면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건 바로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 변화 때문이다. 러일전쟁 직후만 해도 일본은 부푼 희망 속에 있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강국이 되었다는 증거였고 이제 일본의 앞길에는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일본은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약속된 장밋빛 미래는 여지없이 시든 꽃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후'는 그런 일본의 현실적인 모습을 다이스케의 말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이스케는 당시 전형적인 일본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상황도 경제 상황도 성에 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메이지 이념은 사라지고 모두가 오로지 현실적인 이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도덕도 없고 신념도 없고 꿈도 없었다. 오로지 재력과 권력만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날로 파시즘화 되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생각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거기에 물들거나 아니면 완전히 따로 존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모든 일본 지식인들에게 떨어진 선택의 기로. 여기서 다이스케는 전자를 선택한다.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았던 현실 일본 특성에 스스로 물드는 것이다. 하리오카가 노동의 의미가 먹고 사는 데 있다고 하자 다이스케는 그건 신성한 노동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자신은 그런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다이스케가 그런 노동을 하려고 전차를 타는 것을 본다. 그 마지막 장면은 정말로 의미심장하다.


 담배 가게 입구의 노렌이 빨갰다. '대방출'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도 새빨갰다. 전신주도 빨갰다. 빨간 페인트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갰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 (p. 325)


 그는 물들고 빨간 한 가지 색깔이 된다. 물론 이 빨간 색은 욱일기가 그렇듯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기로 한다. 결국 고유한 자신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국주의의 일원이 된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되었던가? 바로 미치요 때문이다. 그가 미치요를 원했고 하리오카로부터 빼앗아왔기 때문이다. 즉 다이스케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바로 미치요 때문이고 일본제국주의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 후'는 한 마디로 불길한 예언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 본질은 탐욕이고 그에 따라 조선의 강제 병합은 기필코 파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예언의 소설인 것이다. 우리는 다이스케의 미래를 '문'에서 보게 될 것이다. '문'에 나오는 부부는 여러모로 다이스케와 미치요 커플의 판박이다. '문'의 주인공 역시 다른 남자의 여자를 빼앗았고 남자는 거기에 큰 상처를 입어 만주로 떠나 버린다. 주인공은 만주를 두려워하는데 그건 만주로 떠난 여자를 빼앗긴 남자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하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만주의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뒤로 더욱 만주와 그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다.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나쓰메 소세키는 분명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보면서 일본마저 패망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후반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불안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선생님도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며 아름다운 부인과 단둘이 은둔해 살아간다. 그가 스스로를 죄스럽다고 여기게 된 이유는 지금의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서 빼앗았고 그(이 남자는 오로지 이니셜로 표기되는데 공교롭게도 'K'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님은 메이지 천황이 죽은 날 할복한다. '마음'은 말하자면 '그 후'부터 시작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사유하는 나쓰메 소세키 경로의 최종판이다.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의 관계의 헤아림이 그만큼 깊고 거기에 대한 죄의식도 크다. 


  소세키는 메이지 정신에 입각한 일본만의 진정한 근대를 추구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의 일본은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거기엔 메이지의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공생은 없었고 오로지 지배와 착취 그리고 탄압만이 가득했다. 예민한 지성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다가올 비극을 내다봤다. 그는 그것을 '그 후'부터 일련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언제나 죄의식을 안고 사는 자로서 글로나마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그렇지만 '그 후'가 남기는 여운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시대의 폭압 아래서 홀로 분투하는 고독한 영혼의 그림자가 짙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그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시대적 상황과 아픔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다 그대로 집어넣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이후로 갈수록 더 깊어졌다. 감히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역사보다 더 섬세하고 사려 깊게 1910년대의 일본과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려준다고.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이어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역사적 차원은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이것이 새로운 번역과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문'을 기다리는 커다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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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0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드득 2014-12-18 01:56   좋아요 0 | URL
이 새벽에 아무개님 댓글을 발견하네요.
저야말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리뷰를 읽고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말만큼 절 기쁘게 하는 것도 없어서요.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아무개님의 마음에도 드는 작품이길 바라겠습니다^ ^
 
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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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치고 읽을 것! 시대로 인한 스트레스로 체증이 왔다면 바늘로 손을 따지 말고 이 책을 읽을 것! 시원한 배설만큼은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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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효과 - 통치성에 관한 연구
콜린 고든 외 지음, 이승철 외 옮김 / 난장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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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책이다. 푸코의 통치성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보아야 할 책! 다른 책에선 난해 했던 개념들이 쉽게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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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슬립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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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의 속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지만 주인공의 삶을 위해 누군가와 공감하고 서로 돕는다는 게 자신에게도 얼마나 구원이 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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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12-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의 후속작이라! 재밌겠어요. 헤르메스님 저도 마터스에 환장했어요. 못 읽겠다고 했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그 고통 속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게 좋아요. 한강의 책을 읽는 데 엄청난 감정소모가 필요한 것처럼요! 사실 제가 또 잔인한 걸 좋아해서요. 고어물도 꽤 잘본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