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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110KG의 거구의 밥. 그는 뉴욕 플래츠 거리에 있는 커즌 마브의 술집에서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것도 벌써 20 년 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삶은 한결 같았다. 내내 혼자였으며 평일엔 술집으로 일하러 가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사람좋은 밥이라 불렀다. 자주 가는 성당의 리건 신부는 그를 사랑이 많은 남자라 그랬다. 하지만 그의 삶은 몸은 비록 바깥에 있을지라도 감옥 안의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소설의 제목은 작은 방울을 뜻하기도 하는 '드롭(DROP)'인데, 정말 그의 삶이 차지하는 영역이란 '드롭'만큼이나 협소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요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늘 술집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하듯 술을 마시는 노파 밀리처럼. 자의로 그런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불행도 친구가 될 수 있다.(P. 22)'고. 물론 이유는 있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존재 하나가 나타난다. 여자? 아니다. 개다. 복서 종의 어린 새끼. 그 개는 플래츠 거리의 쓰레기 버리는 날에 우연히 밥의 눈에 띄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맙소사. 저렇게나 말랐다니. 갈빗대가 다 드러났어. 귀에는 마른 피가 커다란 딱지로 변해 있었다. 개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갈색 몸에 하얀 주둥이. 몸에 비해 너무나 커다란 앞발.(P. 23)
그 개는 쓰레기 더미에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밥은 쌓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뭐든 손에 넣었다. 빚으로 교수대를 세우고 빚더미가 무게에 못 이겨 무너지려 할 때쯤, 예약 할부제로 집을 사서 교수대 제일 위에 던져 올렸다. 재산을 늘릴 때마다 그만큼, 아니 더 많이 버릴 수밖에 없다. 밥은 쓰레기 더미를 볼 때마다 폭력에 가까운 탐욕을 느껴야 했다. 애초에 금했어야 할 음식을 먹고 똥을 싸지른 느낌.(P. 20)
개는 거기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나도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왔기에 이 문장들이 가슴에 마구 꽂혀오는 중이다. 거주민들이 버린 종이 상자가 대형 트럭만큼이나 쌓여있는 것을 보면 밥의 마음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밥이 하는 일과 상관이 없다. 밥은 개를 똥더미에서 구해주려 한다. 그로써는 처음으로 '드롭'과 같은 삶에 또 하나의 작은 방울 같은 존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를 받아들이니 세계가 더 커졌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조용했던 밥의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난데없이 커즌 마브의 술집이 두 불한당에게 습격 당한다. 경찰이 찾아오고 마침 토레스란 그 경찰이 같은 성당에서 밥을 봤다고 말하기에 밥은 혹시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불한당 중 한 명이 차고 있는 시계가 멈춰있더라는 말을 해 준다. 커즌 마브는 밥에게 어리석은 말을 했다고 나무란다. 사실 그 돈은 술집의 진짜 주인인 슬라브계 갱단의 것이었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밥과 경찰 토레스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는 밥이 경찰의 끄나풀은 아닐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갱단의 두목은 밥과 마브에게 잃어버린 돈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바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인물이 밥의 삶으로 들이닥친다. 이름은 에릭. 그는 자기가 개의 주인이라며 밥에게 개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이미 개와 정이 들 대로 든 밥은 거절한다. 더구나 그는 로크(밥이 붙여준 개의 이름이다.)를 학대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러자 에릭은 만일 개를 돌려주지 않으면 밥이 개를 학대했다고 신고할 것이라 한다. 개에겐 나중에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특별한 장치를 쓰면 주인을 알 수 있는 칩이 들어가 있는데 그 칩은 자기가 주인으로 되어 있으니 경찰은 밥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임을 알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앞과 뒤로 마치 밥의 삶을 쪼개려는 듯 세찬 바람이 몰려온다. 과연 밥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로코(개의 수호성인이자 독신자와 순교자의 수호 성인 이름이라고 한다.)와 같이.
소설 '더 드롭'은 톰 하디와 제임스 갠돌피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다. 맞다. 소설에서 영화로 간 것이 아니고 영화에서 소설로 갔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데니스 루헤인이 썼다. 그것을 좀 더 보완하여 소설로 만든 것이 이번에 나온 '더 드롭'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톰 하디가 주인공인 밥 역할을 맡았고 얼마 전에 타계한 제임스 갠돌피니가 마브 역을 맡았다. 세번째에 나온 여자는 노미 라파스인데 밥과 좀 끈적한 관계가 되는 여인 나디아 역을 맡았다. 혹시 스웨덴 판 밀레니엄 영화를 보았다면 얼굴을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리스벳 살란데르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라파스다. 마지막 남자는 에릭 역의 마티아스 스호에 나르츠다.
소설의 표지는 영화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총이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처음 이 포스터를 보았을 때는 왜 하필 이렇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물론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브루클린이긴 하지만 말이다. 의문은 소설을 읽고 나서 풀렸다. 알고보니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였다.
중요한 것은 현수교가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데니스 루헤인이 왜 이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는 지가 이해된다. 이 소설에서 데니스 루헤인은 특이하게도 인물들을 병렬적으로 소개한다. 물론 주인공은 밥이지만 독자는 밥의 삶과 내면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밥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인 밥과 토레스 그리고 에릭의 삶과 내면도 구경하는 것이다.(나디아에겐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도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같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대답은 그들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묘사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태풍 앞의 현수교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삶이다. 그렇다. 그들의 삶은 불안하다. 앞과 뒤로 몰려드는 강풍 탓에 요동치는 밥만큼이나 말이다. 원인은 있다. 모두 저마다 다른 삶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문득 일으킨 균열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억지로 메우다 보니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해 될 것이다. 왜 브루클린 브릿지를 받치고 있는 것이 하필 권총인지. 권총은 대표적은 폭력의 은유다. 즉 브루클린 브릿지가 등장 인물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은유 한다면 결국 그들은 폭력으로 안정을 얻고 있다는 뜻이 된다. 폭력은 억지로 뭔가를 얻으려는 가장 강한 행동이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조급한 마음에 억지로 메우려 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그 때문에 실패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순순히 균열을 받아들였으면 비극은 적었을 것이다. 실패한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밥은 언젠가 나디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알고 보면 바로 이 말에 그 해답이 있다.
누구나 상대한테 얘기하고 싶어해요. 뭐든 자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거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를 보여 줄 때가 되면 찔끔 움츠리고 말아요, 나디아.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이 떠들어 위장하는 겁니다. 해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명하려는 거예요.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하게 떠들어 대죠. 도대체 말이 됩니까?(P. 139)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존재 안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균열은 그래서 더욱 위기로 다가왔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먼저 흩날리는 것은 가벼운 것들이다. 존재감이 엷은 것들만이 산산이 흩어진다. 그들도 그랬던 것이다. 내 안에 채워 놓은 것이 없었기에 조그만 균열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예감으로 다가왔고 그만 무리를 했던 것이다. 소설은 결국 밥을 통해 그 균열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 가를 말해준다. 이것도 역시 밥이 나디아에게 들려주는 말에서 나타난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해 본 적 있어요? 당신 생각에?"
"누구 용서요?"
밥이 되물었다.
나디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뻔하잖아요."
"네. 예전엔 속죄가 불가능한 죄가 있다고 믿었어요. 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결국 악마는 목숨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려요. 이미 영혼을 손에 넣었으니까. 악마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죽고 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안됐다. 넌 못 들어와. 용서 못 할 죄를 지었으니까. 혼자 지내거라. 영원히."
"차라리 악마가 낫겠네요."
"그래요? 지금 생각은 달라요. 신이 아니라 우리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이해하겠죠?"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올 생각을 못 해요." (P. 167)
여기서 우리는 왜 데니스 루헤인이 밥을 개 그리고 나디아와 만나게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개와 나디아(아마도 여기서 데니스 루헤인이 나디아란 이름을 쓴 것은 원래 나디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요정 이름이기에 원제인 '더 드롭'과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모두 밥을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이 권총을 쥘 때가 아니라 도움을 바라는 개의 앞발을 잡아주고 비슷한 상처를 지닌 여인의 손을 연민으로 잡아줄 때 말이다. 그렇게 문득 마주한 균열을 불안을 야기하는 나의 상처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를 내보이는 계기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의 악몽도 끝나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말한다. 비록 성당은 스타벅스 매장이 되고 사람들이 필라테스를 신으로 섬기더라도 '함께'로 나를 떠받친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는 마브와 토레스 그리고 에릭 모두 밥처럼 바깥으로 불러내는 존재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은 언제나 구원을 주된 테마로 다루어왔었다. 주인공들에겐 늘 쉽게 씻기 힘든 죄의식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구원은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미스틱 리버'가 대표적인 예다. 악마는 언제나 승리했다. '살인자들의 섬'에서의 주인공처럼 이미 우리 영혼을 그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데니스 루헤인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동안 그의 세계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울타리 안의 세상이었다. 이제 그는 그 곳을 빠져나가려 한다. '더 드롭'은 비록 작은 물방울만큼 작은 시도일지라도 어쨌든 그가 변하려고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과연 이 발걸음이 데니스 루헤인을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런 지 몹시 기대된다.
(이제와 드는 생각은 데니스 루헤인이 드롭이란 제목을 단 것은 루크레티우스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라는 거대한 것도 알고 보면 빗방울이 우연히 마주친 것과 같은 것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말했다. 모든 존재는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빗방울이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뭔가의 이유로 경로를 이탈할 때 세계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세계란 의미다. 우연이 유의미를 만든다. 여기서 밥과 개 그리고 나디아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밥의 말도 경로를 이탈한 빗방울과 비슷하고 말이다. 그럼, 왜 레인 드롭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물론 할 말은 없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