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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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태완이법의 무산으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 꽤나 두터운 페이지를 자랑하지만 펼쳐지는 드라마도, 그 깊이도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그렇다고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시즈쿠이 슈스케의 연출력이 좋아서인지 흡인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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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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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살인죄의 공소시효 적용을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1999년 대구에서 일어난 6살 아동의 목숨을 빼앗은 황산 테러는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고 현재 공소시효가 다가오자 살인죄만큼은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 책임을 묻게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법안이 '태완이법'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이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이라도 25년만 지나면 공소시효로 검찰은 더이상 그 범죄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지 못한다. 일본도 살인죄는 우리나라와 똑같이 25년이다.


 일본도 있고 우리나라도 있으니까 얼른 공소시효라는 게 세계 보편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살인죄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는 없는 나라가 더 많다. 미국도 없고, 영국도 없으며 우리나라와 일본 법제의 근본이 되는 독일도 없다. 미국 드라마 중에 '콜드 케이스'라는 것이 있다. 장기간에 걸쳐 미해결로 남은 사건을 콜드 케이스라고 부른다. 그 기간이라는게 보통 수십년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공소시호에 걸렸을 사건들이다. 일본 드라마에도 오다기리 죠가 주연한 '시효 경찰'이란 게 있었다. 거기서 오다기리 죠는 경찰인데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시효가 만료된 범죄를 조사한다. 결국 진범을 찾아내더라도 오다기리 죠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가서 제발 진실을 알려달라고 멋적게 부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콜드 케이스'에선 그렇지 않다.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범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모두 '철컹철컹'이다. 미국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묵힐대로 묵힌 범죄라도 진실이 드러나면 모조리 처벌 받는다. 유가족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불합리한 것이 공소시효다. 살인으로 가족이나 연인 혹은 지인을 잃은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그 아픔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가 시간의 경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죄를 사해 버린다? 납득될리 만무하다.


 도대체 왜 공소시효라는 게 있는 걸까?

 형사소송법에선 그 이유를 대략 두 세가지 든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다. 장기간 미제 사건의 경우 범죄를 입증할만한 증거 찾기가 곤란하므로 수사에 드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범인도 그동안 추적을 피하느라 형벌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니 그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을만큼 받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국가가 태만하여 범인을 못 잡았는데 그 책임을 범죄자에게 가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국가가 유가족에게 얼마나 냉정한 지 잘 알 수 있다. 피해자가 당한 아픔은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는 소요되는 비용을 따진다. 증거 능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만 미드 CSI만 봐도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증거를 찾아내는 수사 과학 기술들이 발전하는 걸 잘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증거의 상쇄는 얼마든지 보완 가능하다는 의미다. 더구나 가해자의 아픔을 고려한 이유에선 헛웃음마저 나올 정도다. 유가족은 그 기간동안 가해자보다 몇 십배나 더 커다란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체포에 대한 공포보다 영원한 상실이 훨씬 더 큰 아픔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아무런 죄책마저 없다. 그들은 그저 당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오로지 가해자만 고려하고 있는 것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가의 태만 운운하는 부분은 점입가경이다. 그것이 정말 이유라면 공소시효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 태만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거나 지원을 확충하는 게 먼저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공소시효는 그 불합리성이 인정되어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추세다. '태완이법'으로 이제 우리나라도 그 흐름에 들어가는구나 여겼다. 하지만 법사위는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반대한 의원들이 대부분 변호사 출신들이었는데 그 이유로 법적안정성을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적안정성인지 모르겠다. 법적 안정성이란 국가가 내가 존재하리라 믿었던 제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가질 수 있는 불이익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공소시효를 신뢰하는 이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범죄자들이다. 즉 공소시효가 지키고자 하는 법적안정성은 주로 범죄자들을 위한 법적 안정성인 것이다. 과연 국가가 그런 자들의 법적안정성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로 유명한 시즈쿠이 슈스케의 2013년도 작품 '검찰측 죄인'도 공소시효를 테마로 하고 있다. 제목이 어딘가 낯이 익다면 당신은 분명 애거서 크리스티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리라.이 제목은 그녀의 작품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바꾼 제목이니까 말이다. 시즈쿠이 슈스케하면 얼른 카멜레온이 떠오른다. 미스터리면 미스터리, 로맨스면 로맨스, SF면 SF, 장르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데도 늘 성공적으로 변신하는 까닭이다. '검찰 측 죄인'에선 법정 미스터리에 도전했다.


 두 명의 검사가 주인공이다. 하나는 베테랑 검사인 모가미. 그는 '법률이라는 검으로 악인을 일도 양단한다'는 신조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끝가지 추포해 기필코 정의를 관철하겠다는 존재다. 다른 하나는 초짜 검사인 오키노. 모가미에 반해 검사가 된 인물로 당연히 처음엔 모가미의 신조를 따라 행동하지만 나중에 가서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인물이다. 


 소설은 이 둘의 갈등을 담고 있다. 그들에게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있다. 바로 가마타에서 일어난 노부부 살해 사건. 용의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사단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쓰쿠라. 모가미는 그의 이름을 보고 경악한다. 대학 다닐 때 그는 한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 곳을 관리하던 부부에게는 유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마쓰쿠라였던 것이다. 모가미는 유키를 누구보다 아꼈기에 그 사건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마쓰쿠라는 아주 유력한 용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그 때 법을 공부하고 있던 모가미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다시는 그런 사건에서 무력해지고 싶지 않아 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공소시효의 만료로 더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유키의 부모도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유키와 그 부모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거의 절망에 가까운 죄책감을 가진다. 너무 커서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던 모가미였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그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모가미는 생각한다. 공소시효가 지나 이미 처벌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을 이번 것으로 처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모가미는 위험한 유혹에 빠진다. 


 오키노는 모가미를 신뢰한다. 처음엔 모가미를 철썩같이 믿고 마쓰쿠라를 엄청 심하게 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정황이 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쓰쿠라만 용의자로 몰고가는 모가미를 비롯한 수사진들에게 회의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난 검사 실격이야. 그 사람은 특수부의 무리한 수사 때문에 목숨을 끊었는데도 범인상을 미리 정해놓고 철저히 억측으로 수사를 진행하려 하고 있지. 생각해보면 그게 그 사람의 대답인지도 몰라. 이게 바로 검사라는 대답. 보기에 따라서는 그게 정답일 테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임무에 의문을 품으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난 무리야. 검사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이래서 될까 고민하는 게 당연하잖아.(p. 386 ~ 387)


 그러다 결국 모가미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순간이 닥쳐오고 오키노는 이제 마쓰쿠라를 변호하는 변호사와 협력하여 그를 무죄 방면 시키려 애쓴다. 그러다 이 사건에 얽힌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게 된다.


 책은 모두 574페이지로 꽤나 묵직한 편이다. 오로지 하나의 사건만 주가 되느라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즈쿠이 슈스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공소시효를 필터로 하여 법률로 현실 속에 정의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경험시키려 한다. 캐릭터는 잘 살아 있고 법정 미스터리에 기대하게 마련인 법적인 부분의 묘사는 치밀하며 몇몇 부분은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장면까지 들어있는 터라 엔터테인먼트로도, 오늘의 법현실을 생각해보는 데 있어서도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다. 대립하는 캐릭터 모두 끝까지 페어플레이 하고 있어 더욱 관전하는 맛이 난다. 분명 두께만큼 깊이도 묵직한 소설로 무엇보다 '태완이법'의 무산이 쓰라렸다면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법을 주관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리고 있다. 그것은 법 말고 다른 건 하나도 안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가 얼마나 부유하든 권세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잘못을 했다면 응당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법은 눈을 가리기는 커녕 너무 크게 뜨고 있어서 탈이다. 아니 거기다 색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더 문제다. 요즘처럼 법이 과연 무엇일까 많이 자문하게 되는 적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모가미의 말대로 법이 칼이라면 백종원이 쥐면 누군가를 배불리겠지만 살인자에겐 흉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법이 가진 진짜 문제는 그것을 누가 휘두르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제대로 잘 휘두를 수 있는 사람과 휘둘러서는 안 될 사람을 선별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런 지원과 견제의 시스템이 가능한 법체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 말로 유가족의 눈물과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첩경이리라. 그 고민의 한 걸음을 이 책으로 내딛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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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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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잿빛음모'는 법정 스릴러의 마이스터라 할 수 있는 존 그리샴의 27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년에 나왔지만 배경은 2008년, 그러니까 한창 서브프라임 사태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던 때로 하고 있다. 그 때, 소설의 주인공 서맨사 코퍼는 당시의 많은 젊은 변호사가 그랬듯이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게 된다. 하지만 전적인 해고는 아니고 비영리 법률 구조 클리닉에서 일정 기간 변호사로 일을 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조건부였는데 그렇게 해고된 변호사가 너무 많아 경쟁률이 치열한 관계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 더구나 그녀는 변호사이면서도 항공기 사고 같은 엄청난 소송 가액의 사건만 쫓다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바람에 망한 변호사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법정에서 소송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그래서 예전 법률 회사에서 그랬듯이 서류 작업만 하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일은 더욱 구하기가 힘들다. 결국 무차별로 여러 비영리 법률 단체에다 구직 메일을 보냈던 서맨사는 9번의 거절 메일을 받은 끝에 드디어 10번째의 메일에서 면접을 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곳은 바로 애팔레치아 산맥에 위치한 브래디라는 한 작은 산간 마을에서 활동하는 마운틴 법률 구조 클리닉. 서맨사 코퍼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곳으로 떠난다. 대도시 뉴욕과는 전혀 다른, 비록 워싱턴과 500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삶의 모습은 한 세기 이상이나 차이나는 그 곳으로...


 일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서맨사 코퍼는 두 가지의 현실을 목도한다. 하나는 탐욕스런 석탄 기업의 노골적인 노천 채굴로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는 자연 환경과 주민들의 삶이다. 노천 채굴이란 석탄을 캐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갱도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피하고자 중장비를 동원하여 무식하게 그냥 땅만 죽어라 파헤치는 방식이다. 수십대의 중장비가 동원하여 숲을 초토화시키고 아래의 암반층은 폭약으로 날려 버린다. 제거된 나무들과 흙들은 계곡에다 버린다. 결국 계곡이 메워지고 하천이 매장된다. 그리고 그 물에 의존하는 생태계도 고사된다. 그 곳에서 이런 석탄 기업의 행패와 싸우고 있는 도너반이라는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땅을, 또 그렇게 땅에 발붙이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어요. 돈과 권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이유만으로"(p. 69)


 도너반에 말대로 서맨사는 희망의 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린 이들을 만난다. 그것이 서맨사가 목도하게 된 또 하나의 현실이다. 수임료 0으로 일하는 마운틴 법률 클리닉이 아니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을 이들이 그 곳에는 많다. 그들을 위해 분투하는 클리닉의 사람들과 석탄 기업과 투쟁하는 도너반을 보며 서맨사는 변호사가 정말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차츰 깨달아간다. 소송이 너무 싫어서 서류 작업만 하고 싶은 그녀이지만 이제 소송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맨사가 목격한 현실이 서맨사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처럼 이 소설은 법정 스릴러라기 보다는 서맨사 개인의 성장 소설로 읽힐 여지가 더 크다. 사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은 아직도 존 그리샴 하면 프로페셔널한 킬러로 늘 주인공의 목숨이 아슬아슬했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나 '팰리컨 브리프'를 떠올리거나 '의뢰인"이나 '타임 투 킬'처럼 통쾌한 한 방이 있는 법정에서의 싸움을 기대할 텐데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 도너반이 보여주는 석탄 기업의 만행은 독자에게 '팰리컨 브리프' 와도 같이 악한 거대 기업과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영웅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만 그건 뒤로 갈수록 배반당하고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들이키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서사는 정돈되지 않으며 초반에 뿌려진 떡밥도 회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반에 도너반의 죽음이 나왔는 데도 그 이유와 해결에 대해서조차 소설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흡사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 놓고 실망스럽기 그지없게 끝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시합 같다. 당연히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왜 존 그리샴은 이런 패착을 두게 된 것일까?

 너무나 현저히 드러나는 것이라 아무래도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도너반과 서맨사가 가지는 차이다. 도너반은 불우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석탄 기업에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아주 적극적으로 석탄 기업과의 투쟁에 임한다. 석탄 기업은 자연에 그런 깡패 짓을 하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런 짓을 서슴치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반은 굴하지도 겁먹지도 않는다. 오히려 투쟁 의지만 더 불태울 뿐이다. 도너반이 불이라면 서맨사는 얼음이다. 그만큼 소극적이라는 의미다. 도너반은 소송을 즐겨하지만 서맨사는 어떡하든 소송을 피하고 싶어한다. 서맨사가 마운틴 법률 클리닉에 호감을 가지면서도 선뜻 그 곳의 정식 변호사가 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불의엔 분노하지만 싸우기 보다는 피하고 싶어하는 쪽. 이렇게나 둘은 다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도너반은 초기 그리샴의 주인공들과 많이 닮았다. 영화로 치면 '팰리컨 브리프'의 쥴리아 로버츠, '의뢰인'의 수잔 서랜든,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의 톰 크루즈 , '레인 메이커'의 맷 데이먼 그리고 '런어웨이 주어러'의 존 쿠삭 같은 이들 말이다. 그들의 대담성과 적극성을 도너번은 분명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존 그리샴은 그를 죽여버린다. 이제 석탄 기업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도너번은 자신이 몰던 경비행기의 추락으로 어이없이 죽고마는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도너번의 전면전은 분명 소설의 흥행을 위한 견인차였다. 존 그리샴에게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줬던 캐릭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도너반의 동아줄을 잘라 버리고 서맨사라는 새끼줄을 잡는다. 소설의 인기를 위해서라면 너무도 연약한 그 줄을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미국의 법률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닐까 하는.

 존 그리샴은 이 소설에서 현재 미국의 법률 현실이 어떠한 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름아닌 서맨사의 아빠, 마샬을 통해서다. 그는 소송 펀드 매니저다. 소송 펀드란 사모 펀드의 일종으로 배상액이 큰 사건을 맡은 변호사에 투자하여 배상액의 몇 %를 이익으로 배당받는 펀드다. 미국에선 요즘 그런 게 유행하고 있다. 이제 소송까지 투자의 대상이 된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소송 가액 때문이다. 도너반만 해도 석탄 회사와 전면전을 벌이려면 2백만 달러의 비용이 필요하다. 대부분 이런 소송은 막대한 자료 조사와 증인등 준비가 필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 작은 산악 마을의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도너반은 물론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소송 펀드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더이상 애런 브로코비치 같은 케이스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로 수잔 서랜든이나 맷 데이먼 그리고 톰 크루즈나 존 쿠삭 같은 이들이 활약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감수하기엔 비용이 너무도 막대해져버린 탓이다. 자본의 힘에 눌려 '어 퓨 굿맨' 같은 영웅 서사는 이제 퇴장해야 할 처지다. 존 그리샴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도너반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석탄 회사가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맨사의 의문에 마샬 변호사를 통하여 거대 기업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일을 할 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쐐기를 박는다. 마치 예전의 주인공들에게 지금의 노회한 존 그리샴이 조언하는 것 같은 이런 마샬의 말은 차라리 존 그리샴의 항복 선언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잿빛 음모'는 혼란의 산물이다.

 여기엔 자신이 바라는 꿈과 그것을 배신하는 현실 사이에서 아직 어디로 갈 지를 정하지 못한 존 그리샴의 망설임이 보인다. 도너번이 표상하는 영웅 서사를 포기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서맨사가 표상하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한 탓에 그만 이런 어정쩡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고민은 한 번으로 족하다. 독자들의 인내심은 두 번, 세 번의 고민을 참아 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은 독자에게 맡기고 어느 한 방향으로 길을 정해 그것만 치열하게 달려가는 작품으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지금 도너반의 배짱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존 그리샴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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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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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가 신문에 연재한 소설들, 그러니까 첫 '우미인초'부터 '산시로'까지는 왜 하나같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에서 시작되는걸까? '우미인초'는 교토의 산을 올라가는 중이고 '갱부'의 소년은 자신이 죽을 곳을 찾아 걸어가는 중이며 '산시로'는 기차를 타고 도쿄로 가는 중이다. 단적으로 이 모든 이들은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곳에서 뛰쳐나와 불확실한 상황 속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소세키의 소설들은 그의 문학론을 세상에 송출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그런 면에서 신문 연재란 자신의 문학론을 가장 대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그이니만큼 연재소설엔 각오가 남달랐을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감안한다면 분명 여기에도 뭔가 뜻이 있을 듯 하다.


 어쩌면 이것은 당대 일본 상황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때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껏 부풀었던 희망의 거품이 모조리 꺼지고 지식인들 사이에선 현재 일본에 대한 환멸과 우울이 거세어지던 시대로 골목 어귀를 돌다가 문득 길을 잃고 말았다는 자각으로 당황하며 저 하늘 멀리 사위어가는 황혼녁의 태양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세키 역시 비슷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터라 시대 현실의 반영으로써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란 가정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엔 보다 더 근본적 이유가 있어 보인다.  바로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결과라는 측면이다.

 그는 유년 시절에 친부모와 헤어져 양부모 밑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 또 양부모에게 파양을 당하여 다시 친가로 돌아와야 했다. 흔히 말하듯 부모란 자식에게 둥지와 같은 존재다. 둥지가 제 발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 않듯이 부모도 자식에겐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는 존재였다. 부모에 대한 그러한 생각 때문에 우리들은 어쩌면 사랑이나 진리처럼 세상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만일 부모가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변하지 않는 가치나 세상에 대한 믿음도 무너지고 말리라. 나쓰메 소세키는 두 번이나 그런 경우를 당했다. 자신이 안정적이라 믿었던 세상이 여지없이 붕괴해 버리는 것을 두 번 경험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어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랬다. 소세키에겐 세상의 그 무엇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같은 강물에 두 번 손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모든 것은 그저 우연적이고 임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진실로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이 여름이 곧 끝나 겨울이 올 것을 내다봤으며 혹한의 겨울에 처했어도 봄이 오리라는 것을 믿었다. 일본 사회도,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던 서양의 근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강물이 흐르다 어쩌다 닿게 된 바위였고 새가 어쩌다 앉게 된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소세키에게 도락의 여유를 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니, 도락에 대한 신념을 주었다고 해야 하리라.

 '우미인초'의 리뷰에서도 말했듯이 직업과 달리 도락은 단적으로 거기에 너무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추종이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 누군가 금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금시계의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가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도락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우미인초'부터 그는 내내 이 '도락'을 강조해왔다. 전혀 다른 세계를 담고 있는 '갱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 작품 모두 '떠난다'로 시작하는 것엔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변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현재는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어쩌다 깃든 임시적인 거처에 불과할 뿐이니 맹종 보다는 먼저 자신의 시선으로 관찰을 하라는 뜻을 향한 출발이라는.

 그렇기에 세 소설 모두에서 소세키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위도 계속 뭔가를 보는 일이리라.



 세번째 연재작 '산시로'는 소세키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그만큼 인기를 얻었다는 뜻으로 일례로 이 소설의 무대로 지금의 동경대가 나오는데 거기 실제로 있는 연못에서 소설의 주인공 산시로는 흠모하는 여인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연못은 현재 '산시로의 연못'이라고 불릴 정도다. 그거야 어쨌든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우미인초'부터 내내 지속된 직업과 도락의 싸움이 보다 전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산시로'엔 도락과 직업 사이의 선명한 전선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노노미야와 히로타 선생 같은 속세의 명성이나 돈을 쫓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뿐인 '도락'이 있고 다른 쪽엔 그런 자를 패배시키고 길들이려 드는 '세계'가 있다. 산시로는 그 틈에 끼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흠모하는 여인인 미네코도 마찬가지다.


 여인이 상징으로서의 어떤 지향점으로써가 아니라 주인공과 똑같은 참여자로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존재로 나타나는 점이 '산시로'의 이채로운 점이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주인공과 동행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면에서 '산시로'는 후에 나올 소설인 '문'에서의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와 두려움을 공유하는 '부부'를 강력하게 예고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왜 하필이면 '산시로'에서 도락과 직업의 대립이 전면화 되었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산시로' 바로 전에 나온 단편인 '문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 그 단편을 가져오는가 하면 바로 '산시로'를 쓰던 당시의 소세키를 여기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소세키는 세속적 인물인 미에기치로부터 문조를 하나 얻어 키운다. 그는 현재 소설 쓰기의 난항을 겪고 있는 참인데 그 고민 때문에 쓰기에 몰입할 수 없어  '찌요찌요'하고 우는 문조의 울음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그 때마다 그는 문조에게 가서 모이도 주고 물도 갈아준다. 그리고 꿋꿋이 버텨가는 작은 문조('문조는 화려한 하나의 발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묵묵히 새장 안을 지키고 있었다.' - '문조' 중에서)를 보며 감탄한다. 그 생명의 독립적인 면모 때문에 소세키는 세상의 조건에 따라 혼인을 시키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까지 한다(이것은 산시로에서의 미네코 결혼과 관계가 있다. 거기서 미네코는 산시로 앞에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p. 330)'라는 뜻모를 말을 한다. 이 고백은 바로 문조에서의 소세키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문조는 소세키 말고는 아무도 착실하게 신경 써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죽게된다. 다시 말해 외로이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문조가 무심한 세상에 의해 죽게된 것과 같았다. 그는 미에기치에게 마치 세상을 원망하듯 이렇게 가족을 성토하는 엽서를 쓴다.


 '집안 식구들이 먹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문조가 죽어버렸네. 내가 부탁도 하지 않은 물건을 새장 안에 집어넣지를 않나. 더욱이 먹이를 주어야 하는 의무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잔혹하지 않은가.'


 마지막에 미에기치에게서 답장이 오는데 소세키는 '문조가 불쌍하게 되었습니다.'란 문구만 있을 뿐, 집안 식구들이 나쁘다거나 잔혹하다는 말은 일체 없었다고 밝힌다.


 문조의 죽음은 하찮게 되었다. 그만큼 세상은 비정해 버렸다. 그렇게 한 개인의 삶은 무가치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물론 소세키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서양의 근대화를 추종한 결과 일본에 직업인이 너무 많아진 탓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들이 양산된 까닭이다. 하여 그는 보다 전선을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꺼이 세상의 비주류가 되어 걸어도 불안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주려 했다. '문조'처럼.


 물론 문조는 죽는다. 하지만 죽는다고 해서 패배는 아니다. 그것은 주류 세상의 시각일 뿐이다. 소세키에겐 다르다. 그는 '우미인초' 마지막에서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죽음을 잊은 자는 사치하게 된다.(...) 아무리 춤을 추든, 아무리 미치든, 아무리 장난을 치든 살아있는 데서 벗어날 염려는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사치는 심해지고 대담해진다. 대담함은 도의를 유린하며 마구 날뛴다. 만인은 삶과 죽음이라는 큰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며 말하기를 죽음을 버린다고 한다. 삶을 좋아한다고 한다. 여기서 만인은 삶을 향해 나간다. 단 만인은 죽음을 버린다는 데서 일치하기 때문에 죽음을 버려야 할 필요조건인 도의를 서로 지키도록 묵계했다. 하지만 만인은 나날이 삶을 향해 나가기 때문에 나날이 죽음을 등지고 멀어지기 때문에 마구 날뛰며 추호도 삶 안에서 벗어날 염려가 없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도의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도의에 중점을 두지 않은 만인은 도의를 희생으로 삼아 온갖 희극을 행하며 의기양양하게 군다. 장난친다. 떠든다. 조롱한다. 무시한다.(...) 이 쾌락은 도의를 희생으로 삼아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희극의 진보는 멈출 줄을 모르고 도의 관념은 나날이 희박해진다.('우미인초' p. 434)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근대의 성립이 죽음을 점차 격리하고 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뤄졌으며 네델란드의 철학자 요한 반 퍼슨은 죽음의 망각이 현세적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낳았고 그만큼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들보다 훨씬 전에 근대에 들어와 더 많이 망각되는 죽음이 가져올 문제점에 대해 이처럼 정확히 피력했다. 그에게 죽음은 긍정의 대상이다. '메멘토 모리'가 강했던 중세에 기사나 귀족들이 명예를 중시했던 것처럼 보다 더 스스로를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인으로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으로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게끔 만드는 울타리로 여긴다. 그는 죽음이 망각되면 사람들이 보다 현실 중심적이 되어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채우느라 사람이 근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의조차 무너질 것이라 보았다. 그런 그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했는 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바다. 지금의 정부는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낳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절반이 약간 넘는 유권자들은 '20만원의 연금만 받을 수 있다면', '아파트 가격만 올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도의 같은 것은 쉽게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곳곳에서 불법이 승리하고 편법이 활개 치는 세상을 목도하고 있는 참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산시로가 가장 마지막에 한 말 그대로 '스트레이 십'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길 잃은 양. 정확히 우리 모습이지 않은가.


 하지만 '산시로'가 그런 우울의 초상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기에 희망을 암호처럼 수놓듯 문조와 같은 자들도 새겨넣었다. 그것이 바로 노노미야와 히로타 선생이다. 그들은 문조가 그랬듯이 세상이 자신의 길을 전혀 알아주지 않아도 타협하지 않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도락의 신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불안하지도, 조급하지도 않다. 산시로는 이런 그들을 선망하는데 그러고 보면 산시로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충고를 들은 셈이다. 소설 초반 산시로는 열차에서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색을 가지고 있는 여인과 우연히 만나 뜻하지 않게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는데 그녀의 은근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나중에 그녀에게서 '당신은 참 베짱이 없는 분이로군요.(p.24)'란 말을 듣게 된다. 베짱.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그에게 필요했을 지 모른다.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만 미네코는 말 할 것도 없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 길을 몰라서 스트레이 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말했듯이 정말은 우리도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나만 거꾸로 걷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다 낙오할 것만 같아서 두려워 서성이는 것일 뿐이다. 너무나 직업인이 된 나머지 도락이 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는 커녕 보려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떠받드는 가치와 안정을 쫓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이전 선거가 잘 보여줬듯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파멸시킬 선택 뿐이다. 오답인 걸 알면서 선택해 놓고 그것이 정답이길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망상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정답을 기꺼이 선택할 베짱이 필요하다. 주눅들지 않고. 문조처럼! 문조는 설령 그것이 모이를 주는 손이라 해도 자신을 굽히고 아양을 떨어본 적이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가 구축한 세상 안에서 마음껏 활개치고 다녔다. 죽을때까지 그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세상과 싸웠다. 그런 베짱이 이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베짱이 있을 때 우리는 걷고 있는 길이 설령 아무리 모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길은 더이상 불안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도전으로 다가오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린 문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눈을 갖고 싶다. 문조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산시로를 손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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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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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미인초'는 항우의 애첩으로 유명한 우희의 무덤 앞에 피어났다는 꽃의 이름이다. '우희'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중국 감독 첸 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다. 여기서 장국영이 '패왕별희'라는 경극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남자 배우로 분했었다. 그의 이름은 두치. 그는 창녀의 아들로 생활고를 못이긴 엄마는 어린 그를 경극단에 맡긴다. 그의 곱상한 외모로 여자 역할을 맡기기로 결정한 단장은 그를 철저하게 여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킨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그는 결코 남자로 살 수 없었다. 경극만이 아니었다. 시대 속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때는 일본 제국주의와 국공내전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한창 중국이 격동하던 중이었다. 거기서도 두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격량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린다. 그는 한 곳에 머무르려 하나 시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국 죽음만이 그에게 영원한 정지를 가져다 준다.


 이처럼 '패왕별희'는 요동치는 시대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같은 인물을 제목으로 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 또한 그런 것을 보여준다. '우미인초'는 소세키가 불혹의 나이에 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어 생애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한 소설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한 '문학론'을 출간했는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문학론'이었다고 한다. 소설이란 그가 추구하는 문학론을 실험하는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었단다. 자신의 문학론이 얼마나 세상에 통용될 수 있는 지를 가늠하는.


 그런 의미에서 '신문 연재'라는 가장 대중적인 실험이자 소통의 매개체를 쓰고 있는 '우미인초'는 당시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다고 보아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그가 직접 고백한 바에 따르면 문학이란 어디까지나 '나와 사물 사이에 일어나는 분화와 발전에 따라서 점차로 몽롱해지는 것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의식한 것을 다시 자세히 구별해가는 것'이다. 즉 그에게 문학이란 하나의 시대상 안에서 점점 더 모호해지는 개별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신 작용을 자세히 구분해서 '세밀하고 명료하게' 묘사해 나가는 작업인 것이다. 또한 그 분화에 있어서는 그것의 내용 역시도 다종다양하기 마련이라 어떤 의식의 경로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지의 선택 역시 대부분 자유로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런 흐름은 가급적 존중하여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것이며 인위적인 취사선택은 곤란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자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문학은 꽤나 현상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심리학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집요하게 추구했던 개인주의와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성에 짓눌리기 마련인 개체성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개체의 그 어떤 미세한 정신 작용도 현전하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어떤 보편과도 다른 개체만의 고유한 경로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이란 어쩌면 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앞에서 '나'라는 존재를 구하려는 작업인 지도 모른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모두가 항우를 버릴 때, 자결로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했던 우희처럼 말이다. 우희의 자결은 그대로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이 허용된다면 보편에 대한 '고유한' 개인의 승리였던 것이다.


 바로 그런 이야기를 소설 '우미인초' 역시 하고 있다.



 여기엔 두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나온다.

 먼저 여자부터 차례로 밝히자면 하나는 후지오, 다른 하나는 이토코다. '그 후' 리뷰에서도 말한 바 있는데 소세키의 소설에서 여자란 그냥 여자가 아니다. '그 후'에서 여자란 나라를 표상했다. '우미인초'도 다르지 않다. 두 명의 여자는 각자 다른 나라를 가리킨다. 후지오는 일본이 따라가고자 하는 서양을, 이토코는 거기에 반발해 일본 고유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그렇게 그녀가 에도 이전의 수도였던 교토 여자인 것처럼 러일전쟁 이전의 메이지 유신 때의 일본을 의미한다.


 이어 세 명의 남자인 고노, 무네치카 그리고 오노는 이 둘 사이에서 어느 한 방향을 정하고 걷는 개인들이다. 고노는 이토코를, 오노는 후지오를 바라보며 걷는다. 무네치카는 그 사이를 어정쩡하게 맴돈다. 무엇보다 이 세 명의 모습은 그대로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 지식인들을 반영하고 있다. 더러는 현실에 타협하여 메이지 유신의 정신 따위 모두 잊고 권력과 물질에 경도되었고(오노) 더러는 서양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비타협 노선을 표방하고 메이지 유신에 걸맞는 그러나 현재는 잘 보이지 않는 대안을 찾으려 방황했다(고노) 또 더러는 어떤 땐 세속적 성공을 탐하다가도 또 어떤 땐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나 팔짱을 끼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했다(무네치카). 소설에서 주요한 소재가 되는 금시계는 정확히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 가장 유혹이 되었던 대상을 의미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남들이 '우와!' 할 수 있는 세속적 성공이다. 교토에서 도쿄로 갓 올라온 지식인 오노는 후지오의 금시계를 욕망하는데 그래서 연인인 이토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오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서 당시 일본에서 그것의 기준을 정하고 있는 존재이자 후지오가 표상하는 서양의 근대 가치관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나쓰메 소세키에게 그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직업인'이 되는 것이다. 오노의 이러한 모습은 '우미인초' 초반에 나오는 고노와 무네치카의 한가한 산보 모습과 대조적인데 나쓰메 소세키가 이 소설에서 그 둘을 대비시키고 있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그는 언젠가의 연설에서 사람이 하는 일을 두고 '도락'과 '직업'으로 나눈 적이 있다. 이것은 서양의 근대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생겨나게 된 구분으로 결정적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의 근대가 정착시킨 분업화로 인해 직업이 세분화 그리고 전문화 됨으로써 사람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고 여긴다. 물론 여기서의 불구는 신체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으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이런 것이다.


 개화의 조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리고 직업의 성질이 분화되면 분화될수록 우리들은 불구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직업이 점차 전문화되는 쪽으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생존경쟁을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곱절의 일을 하던 것이 3배 내지는 4배로 점점 속도를 빨리 해서 쫓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그 결과 그 쪽으로만 시간과 끈기를 모두 소모하게 되고 우리 이웃의 존재와는 격리되어 외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의 일은 관심권에서 멀어져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진 직업전선에서 단지 한 가지만 선택하여 그 안에 갇히게 되고, 다른 방면으로 옮겨갈 여유가 전혀 없게 된 것은 요컨대 우리들의 사회적 지식이 협소하고 세심하게 한정된 결과로서, 이는 마치 스스로 좋아서 불구가 되는 것과 동일한 결과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도락과 직업' 중에서)


 즉 여기서 불구란 영혼의 시야가 지극히 협소해지는 것을 뜻한다. 눈을 가지고 있어도 이웃을, 내 울타리 바깥의 세상을 못 보는 상태. 경마장의 말처럼 오로지 자기 밖에 못 보는 상태가 나쓰메 소세키에겐 불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될수록 그는 끊임없이 세파에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술자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는 기술자와 딱 자기 과정만 알 수 있는 기술자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위기가 닥쳐왔을 때 잘 흔들리지 않고 보다 잘 대처할 수 있는 자는 어디까지나 모든 과정을 숙지하고 있는 기술자일 것이다. 자기 것만 알고 있는 기술자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정보도 없기 때문에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즉 후자의 기술자는 전혀 독립적이지 못하다. 전자의 기술자는 얼마든지 홀로 독립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지만 후자의 기술자는 자신의 다리로 설 수 없다. 누군가 부축해줘야만 한다. 그러므로 불구인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 그대로다.

 '스스로 독립된 인간으로 홀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러한 인간으로 변해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바라보면 이러한 나쓰메 소세키의 말이 얼마나 혜안인지 대번에 느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 초기에 이만큼 멀리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도락' 덕분이었다. 앞서 말한 직업의 모습을 반대로 생각하면 도락이 된다. 그것은 인위적인 분화를 거부하며 하나 밖에 모르는 전문성 보다 다양한 정보에 익숙해 지기를 꿈꾼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통섭의 태도라고 할 수도 있다.직업과 달리 도락은 실생활과 관련이 없고 그 때문에 물질적 보상에 구애되지 않으며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책략을 부리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만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직업인은 후지오의 눈에 들려고 애썼던 오노처럼 세속적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스지만 '도락인'은 그런 것에 초연하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중심적이 된다. 즉 사회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행한다. 소크라테스가 경청하고 있다고 고백했던 자기 내면의 소리인 다이모니온에게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미인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자연의 제일의'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고노와 무네치카가 교토에서 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갈 때 처음 나온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굽이쳐 흐르는 강을 두고  '자연의 제일의'라고 말한다. 강에게 무슨 사회 규범 같은 것이 있겠는가? 강은 그저 자기가 내키는 대로 흐를 뿐이다. 품은 마음 그대로를 지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일의'다. 나쓰메 소세키는 바로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쩌면 순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즉 실리를 추구하는 속세의 계산을 넘어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고수해 나가는 순리인 것이다. '도락'은 독립된 인간이 되어 이 순리에 따라 살 수 있게 만든다고 소세키는 여긴다. 하여 '우미인초'에는 끊임없이 도락과 직업의 대립이 있으며 그것은 교토와 도쿄, 고노와 오노 그리고 후지오와 이토코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오노가 최종적으로 제일의에 따라 이토코를 택했을 때, 후지오는 이미죽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연출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여성을 설정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전개다.


 이렇게 얘기하자니 아무래도 후지오를 그렇게 본다면 고유한 개인의 복권과 상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론이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서투르게나마 변호해 본다면 주제와 방법의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즉 고유한 개인의 복권은 방법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내외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 작가가 멋대로 개입하여 재단하는 것을 지양하고 되도록 어떤 상황에서의 외면과 내면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개인마다 다 다른 것 같아도 가만히 들어보면 몇 종류의 목소리로 범주화가 가능하듯이 한 개인을 아무리 철저히 고유한 개인으로 묘사하더라도 그가 가진 특성이 어떤 보편성을 뜻할 수 있다. 단순히 말해 혈액형에 대한 보편적 분석이 내 얘기처럼 들리듯이 말이다. 후지오는 바로 그런 접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족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느라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우미인초'는 서양의 근대적 직업관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지, 그것도 누구도 그 해악을 몰랐던 근대 초기에 이미 묘파하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도 리처드 세넷이나 지그문크 바우어의 책을 읽어보면 나쓰메 소세키가 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소세키가 제대로 짚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미인초'는 그러한 혜안이 한껏 우러나 있는만큼, 거기다 그 때의 상황과 지금의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는만큼, 아무래도 꼭 좀 읽어보시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도락과 직업'이라는 눈으로 보면 분명 와닿는 것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미인초'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도 어느 정도 상통한 면이 있다. 같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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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7 0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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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7 0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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