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측 죄인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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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 살인죄의 공소시효 적용을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1999년 대구에서 일어난 6살 아동의 목숨을 빼앗은 황산 테러는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고 현재 공소시효가 다가오자 살인죄만큼은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 책임을 묻게하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법안이 '태완이법'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이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이라도 25년만 지나면 공소시효로 검찰은 더이상 그 범죄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지 못한다. 일본도 살인죄는 우리나라와 똑같이 25년이다.


 일본도 있고 우리나라도 있으니까 얼른 공소시효라는 게 세계 보편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살인죄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는 없는 나라가 더 많다. 미국도 없고, 영국도 없으며 우리나라와 일본 법제의 근본이 되는 독일도 없다. 미국 드라마 중에 '콜드 케이스'라는 것이 있다. 장기간에 걸쳐 미해결로 남은 사건을 콜드 케이스라고 부른다. 그 기간이라는게 보통 수십년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공소시호에 걸렸을 사건들이다. 일본 드라마에도 오다기리 죠가 주연한 '시효 경찰'이란 게 있었다. 거기서 오다기리 죠는 경찰인데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시효가 만료된 범죄를 조사한다. 결국 진범을 찾아내더라도 오다기리 죠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가서 제발 진실을 알려달라고 멋적게 부탁만 할 뿐이다. 그러나 '콜드 케이스'에선 그렇지 않다.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범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모두 '철컹철컹'이다. 미국엔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묵힐대로 묵힌 범죄라도 진실이 드러나면 모조리 처벌 받는다. 유가족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불합리한 것이 공소시효다. 살인으로 가족이나 연인 혹은 지인을 잃은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그 아픔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가 시간의 경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죄를 사해 버린다? 납득될리 만무하다.


 도대체 왜 공소시효라는 게 있는 걸까?

 형사소송법에선 그 이유를 대략 두 세가지 든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다. 장기간 미제 사건의 경우 범죄를 입증할만한 증거 찾기가 곤란하므로 수사에 드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범인도 그동안 추적을 피하느라 형벌 못지않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을 것이니 그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을만큼 받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국가가 태만하여 범인을 못 잡았는데 그 책임을 범죄자에게 가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국가가 유가족에게 얼마나 냉정한 지 잘 알 수 있다. 피해자가 당한 아픔은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는 소요되는 비용을 따진다. 증거 능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들지만 미드 CSI만 봐도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증거를 찾아내는 수사 과학 기술들이 발전하는 걸 잘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증거의 상쇄는 얼마든지 보완 가능하다는 의미다. 더구나 가해자의 아픔을 고려한 이유에선 헛웃음마저 나올 정도다. 유가족은 그 기간동안 가해자보다 몇 십배나 더 커다란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체포에 대한 공포보다 영원한 상실이 훨씬 더 큰 아픔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아무런 죄책마저 없다. 그들은 그저 당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국가는 오로지 가해자만 고려하고 있는 것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가의 태만 운운하는 부분은 점입가경이다. 그것이 정말 이유라면 공소시효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 태만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거나 지원을 확충하는 게 먼저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공소시효는 그 불합리성이 인정되어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추세다. '태완이법'으로 이제 우리나라도 그 흐름에 들어가는구나 여겼다. 하지만 법사위는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반대한 의원들이 대부분 변호사 출신들이었는데 그 이유로 법적안정성을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적안정성인지 모르겠다. 법적 안정성이란 국가가 내가 존재하리라 믿었던 제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가질 수 있는 불이익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공소시효를 신뢰하는 이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범죄자들이다. 즉 공소시효가 지키고자 하는 법적안정성은 주로 범죄자들을 위한 법적 안정성인 것이다. 과연 국가가 그런 자들의 법적안정성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로 유명한 시즈쿠이 슈스케의 2013년도 작품 '검찰측 죄인'도 공소시효를 테마로 하고 있다. 제목이 어딘가 낯이 익다면 당신은 분명 애거서 크리스티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리라.이 제목은 그녀의 작품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바꾼 제목이니까 말이다. 시즈쿠이 슈스케하면 얼른 카멜레온이 떠오른다. 미스터리면 미스터리, 로맨스면 로맨스, SF면 SF, 장르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데도 늘 성공적으로 변신하는 까닭이다. '검찰 측 죄인'에선 법정 미스터리에 도전했다.


 두 명의 검사가 주인공이다. 하나는 베테랑 검사인 모가미. 그는 '법률이라는 검으로 악인을 일도 양단한다'는 신조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끝가지 추포해 기필코 정의를 관철하겠다는 존재다. 다른 하나는 초짜 검사인 오키노. 모가미에 반해 검사가 된 인물로 당연히 처음엔 모가미의 신조를 따라 행동하지만 나중에 가서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인물이다. 


 소설은 이 둘의 갈등을 담고 있다. 그들에게 갈등을 일으킨 사건이 있다. 바로 가마타에서 일어난 노부부 살해 사건. 용의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사단이었다. 그의 이름은 마쓰쿠라. 모가미는 그의 이름을 보고 경악한다. 대학 다닐 때 그는 한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 곳을 관리하던 부부에게는 유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마쓰쿠라였던 것이다. 모가미는 유키를 누구보다 아꼈기에 그 사건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마쓰쿠라는 아주 유력한 용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그 때 법을 공부하고 있던 모가미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다시는 그런 사건에서 무력해지고 싶지 않아 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공소시효의 만료로 더이상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유키의 부모도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유키와 그 부모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거의 절망에 가까운 죄책감을 가진다. 너무 커서 장례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던 모가미였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그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모가미는 생각한다. 공소시효가 지나 이미 처벌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을 이번 것으로 처벌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모가미는 위험한 유혹에 빠진다. 


 오키노는 모가미를 신뢰한다. 처음엔 모가미를 철썩같이 믿고 마쓰쿠라를 엄청 심하게 신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정황이 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쓰쿠라만 용의자로 몰고가는 모가미를 비롯한 수사진들에게 회의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난 검사 실격이야. 그 사람은 특수부의 무리한 수사 때문에 목숨을 끊었는데도 범인상을 미리 정해놓고 철저히 억측으로 수사를 진행하려 하고 있지. 생각해보면 그게 그 사람의 대답인지도 몰라. 이게 바로 검사라는 대답. 보기에 따라서는 그게 정답일 테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임무에 의문을 품으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난 무리야. 검사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이래서 될까 고민하는 게 당연하잖아.(p. 386 ~ 387)


 그러다 결국 모가미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순간이 닥쳐오고 오키노는 이제 마쓰쿠라를 변호하는 변호사와 협력하여 그를 무죄 방면 시키려 애쓴다. 그러다 이 사건에 얽힌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게 된다.


 책은 모두 574페이지로 꽤나 묵직한 편이다. 오로지 하나의 사건만 주가 되느라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즈쿠이 슈스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공소시효를 필터로 하여 법률로 현실 속에 정의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경험시키려 한다. 캐릭터는 잘 살아 있고 법정 미스터리에 기대하게 마련인 법적인 부분의 묘사는 치밀하며 몇몇 부분은 가슴을 애잔하게 만드는 장면까지 들어있는 터라 엔터테인먼트로도, 오늘의 법현실을 생각해보는 데 있어서도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다. 대립하는 캐릭터 모두 끝까지 페어플레이 하고 있어 더욱 관전하는 맛이 난다. 분명 두께만큼 깊이도 묵직한 소설로 무엇보다 '태완이법'의 무산이 쓰라렸다면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법을 주관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리고 있다. 그것은 법 말고 다른 건 하나도 안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가 얼마나 부유하든 권세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잘못을 했다면 응당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법은 눈을 가리기는 커녕 너무 크게 뜨고 있어서 탈이다. 아니 거기다 색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더 문제다. 요즘처럼 법이 과연 무엇일까 많이 자문하게 되는 적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모가미의 말대로 법이 칼이라면 백종원이 쥐면 누군가를 배불리겠지만 살인자에겐 흉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법이 가진 진짜 문제는 그것을 누가 휘두르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제대로 잘 휘두를 수 있는 사람과 휘둘러서는 안 될 사람을 선별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런 지원과 견제의 시스템이 가능한 법체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 말로 유가족의 눈물과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첩경이리라. 그 고민의 한 걸음을 이 책으로 내딛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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