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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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분'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김진혁 피디는 알고 있다. 그가 EBS에 있을 때 만들었던 '지식채널e'는 내가 사랑한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그가 만든 '미야자와 겐지'편은 그 때까지 그저 '은하철도 999'의 원작 동화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겐지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고 인간적인 매력마저 한없이 느끼도록 하였다.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유투브를 뒤져 지난 방송분까지 다 찾아 보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내게 '지식채널e'는 각별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아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했다. 앎의 범위가 넓어졌고 아는 것은 깊이가 더해졌다. 그러니 김진혁 pd가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측에 의해 보복성 인사를 당했을 때는 나도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와 '다큐프라임'을 연출할 때도 사측은 그에게 똑같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 때 그는 '반민특위'에 관한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70%넘게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제작을 중단 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11년간 일했던 EBS를 떠나게 된다. 권력의 눈치를 너무 보는 방송국에서 더이상 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의 손으로 빚어낸 프로그램을 다시 못보는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믿을만한 언론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요즘엔 그런 언론인이 서울에서 반딧불을 보는 것만큼이나 희소하다. 언론을 권력의 시녀도 모자라서 그 시녀의 시종이라고 일컫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편파와 왜곡은 일상이고 진실보다는 선동에 더 주력한다.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고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TV를 없애는 것이었다. 불공정하고 거짓된 말에 너무도 멀미와 피로를 느꼈던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김진혁 PD가 다시 돌아와 또 다른 형식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것이 바로 '5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책이 나오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난 이 책을 순전히 '김진혁'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독립 언론 '뉴스타파'.

 '5분'은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어봤는데 소재와 담론이 더욱 거침없어진 듯 하다. 책은 모두 '생각, 하다'와 '경계, 짓다'라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각 9개의 꼭지를 담고 있는데 형식은 먼저 '5분'의 방송 내용을 수록하고 뒤에 그것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소재를 꼭 한국의 현실과도 연결한다는 것으로 항상 꼭지의 마지막은 그것과 상관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아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 대상이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기에 사유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다. 더구나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오늘의 사회를 마주하노라면 꼭 한 번은 부딪혔을 문제들인지라 더욱 그렇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의무급식 중단으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던 복지, 교학사의 친일적 역사 교과서 발간으로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 식민 사관의 극복, 젊은 시나리오 작가인 최고은씨의 아사로 불거진 열악한 영화판 종사자들의 문제, '안녕하십니까'의 대자보로 일깨운 이 모든 불의와 그로인한 아픔 앞에서 그저 나만 안녕하면 다냐는 문제 제기에다 정당한 파업권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해고당한 노동자에게 47억을 배상하라는 거의 살인이나 다름없는 판결로 수많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자살을 가져왔던 상황 앞에서 같은 노동자로서 느끼는 참담함 그리고 최근 어제 6030원으로 결정난 최저임금까지. 볼 때마다 한 번은 궁금했고 더러는 고민했던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절로 사유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이 책 '5분'은 이 방송이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는 미국의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가 했던 방송 제목 그대로 'SEE IT NOW'라 할 수 있다.


이 책엔 '안녕들하십니까'란 대자보 전문이 실려 있는데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 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P.93)


 당신의 대답은 무엇일까? 나는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나는 작년 세월호 이후로 눈물이 많아졌고 분노도 많아졌다. 사회를 바라볼수록 쌓이는 갈증을 해갈할 단비는 그 어디에서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상심으로 더욱 깊게 갈라지도록 하는 삽질만 가득하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그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생각뿐이다. 보도를 보니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자가 한 해만 7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젊은 세대의 70%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고도 한다. 이유는 사람의 가치를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와 닮은 자들이 많다. 그만큼 여기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5분'을 읽어보면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나 최저임금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영화판 종사자들의 이야기는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본다는 젊은 세대의 성토가 사실이며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언론이라도 공정해야 할텐데 공영방송이라는 KBS 사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그리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인터넷 댓글마저 명예훼손으로 걸고 넘어지겠다고 나서는 지금의 방통위를 보노라면 공정에 대한 기대는 어림도 없는 전망이라는 것을 확신케 한다. 더구나 지금은 마치 대처의 이중국민 정책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온갖 라벨링으로 연대해야 할 사람들을 사분오열시키고 국민마저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더욱 어디서 희망의 끈을 찾을까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심정은 김진혁 PD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무엇보다 그는 직접 경험까지 한 터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울분의 토로가 아니다. 절망의 목록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럴수록 냉정한 눈으로 사태를 보려하며 정확히 문제를 짚으려 한다. 나는 그것을 특히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에서 느꼈는데 사실 누구나 알듯이 '국개론'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국개론'은 이 책에 나오는 '국가개조론'의 준말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정작 자신을 위하는 사람은 뽑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될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지지하는, 그러니까 그들의 '계급배반투표'를 비아냥하는 말이 바로 '국개론'인 것이다. 실제로 2013년 대선 당시 저소득층의 60.5%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는데이를 두고 유행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책엔 좀 다른 시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쓴 손낙구의 분석이 그랬다.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있었던 네 번의 선거를 분석했고 거기서 계급배반투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사 결과 사람들은 이제껏 계급에 충실한 투표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계급배반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를 주지못하는 정치 또는 정당 체제에 있다"(P. 201)


 이걸 보고 내가 퍼뜩 한 생각은 과연 내가 무엇을 아느냐였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섣불리 단정부터 내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모든 문제를 바라보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 냉정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채널e'가 그랬듯이 '5분'도 은연중 내게 설령 아는 것이라 해도 좀 더 깊이 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바닥까지 모조리 훑어본 뒤에 절망해도 늦지 않다면서...



 이로써 '5분'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내게 증명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꼭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주는 데다 어떤  땐 그저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했던 문제들마저 냉정하고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니까. 그렇게 보다 바른 판단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려는 책이 바로 '5분'이다. 이는 서문에 인용된 해직 언론인의 마음 그대로다.


 행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순간순간 행복한 때가 있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순간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거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음에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 듯 싶다. 행복은 그런 분들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p. 7)


 이 말에 따라 김진혁pd는 이 '5분'을 어떤 의미로 만들었는 지를 밝힌다.


 어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득 발걸음을 멈추는 5분을 마련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P.8


 5분은 하루의 입장에서 보자면 별 것 아니다. 하지만 언론 기자의 말대로 우리의 행복이 완벽한 하루에서 오지는 않는다. 때로  하루의 아주 작은 순간도 하루 전체를 행복하게 물들일 수 있다. 사람의 추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간이다. 그 순간이 삶 전체를 '그래도 살만했어.'라고 여기는 만족감을 낳게 만들기도 한다. 그건 불과 5분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행복이란 상황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순간의 축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내가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었던 순간, 아무런 계산 없이 타인을 돕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순간, 그렇게 세상에 굴하지 않고 내 인간다움을 증명했던 순간. 바로 그것들이 모여 행복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닐런지.

 행복은 그런 순간들이 모인 모자이크일 것이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커지는.


 이 책은 보아야 할 지점들을 가리키고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사유하도록 인도하여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행위란 앎이 수반되어야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실용을 위해 취득한 설익은 앎은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허다한 지식인들처럼 굴종을 낳지만 그런 타산없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다른 앎은 옳은 것을 선택할 베짱을 줄 것이다. '5분'은 그런 베짱을 키우는데 좋은 조력자가 될 듯 하다.

 '5분'은 스스로 그런 베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이 시대에 전혀 안녕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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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란 무엇인가 - 하버드대 최고의 심리학 명강의
브라이언 리틀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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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하버드대 성격심리학 교수인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성격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우리도 살면서 성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한 번쯤 가졌봤을 질문으로 시작한다. 10개의 장은 모두 배턴을 주고받는 릴레이 경기처럼 앞 부분의 결론을 뒤에서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는 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의 첫인상부터 마지막의 자아성찰까지 여러가지 재밌는 심리 실험과 지금까지 쌓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성격에 대한 보편적 궁금증뿐 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까지 유쾌하고(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브라이언 리틀은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하는데 책에 무던히 박혀있는 유머와 위트를 보노라면 정말 내향적일까 의심마저 들 정도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한 마디로 성격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었다면 추천할만한 안내서라고 하겠다.



 책의 매력은 처음 첫인상을 이야기할 때부터 드러난다. 우리는 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첫인상으로 상대의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늘 상대의 첫인상을 헤아리고 이러저러한 사람이라 규정 짓는다. 하지만 리틀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첫인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행동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자료로 증명된 사실 하나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성격에서 원인을 찾는 반면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p. 17)


 읽고 무릎을 쳤다. 우리는 정말 이렇다. 사소한 행동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할 때는 모두 이유가 있음을 알리고 싶어하고 타인의 경우엔 성격 탓으로 돌리며 말도 안 되는 이유 달지말라고 나무란다. 내가 성격대로 행동하지 않음을 알면서 남들은 성격대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다. 리틀은 그러한 우리의 첫인상을 성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개인 구성 개념에 근거한 가정이라고 정의한다. 개인구성개념이란 성격심리학의 용어로 사람에 대한 부분적인 사례 관찰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는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데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첫인상이 드러내는 진실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개인 구성 개념이다. 남을 판단할 때,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구나'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구성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타인을 좁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고 넓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다. 리틀은 이왕이면 보다 확장된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개인 구성 개념이 제한적일수록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예측하고 대처하기가 어려워 불안은 커지고 자유는 줄어.(p. 23)'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타인이 미운 이유가 사실은 바로 내게 있기 때문이다. 리틀은 적대감을 이렇게 정의한다.


 적대감은 스스로도 이미 부당하다고 판단한 구성 개념을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다.(p. 23)


 리틀의 책은 이런 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우리가 판단하는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의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능동적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능동적인 해석자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는 게 리틀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을 늘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격을 좀 더 자유를 증진하는 쪽으로 파악하려 한다. 예컨대, 2장에서는 과연 우리 대부분이 믿고 있는 대로 성격은 고정적인 것인가(이는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라고 한다.)를 묻는데, 거기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과 달리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내향성 또는 외향성이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처럼 석고처럼 굳어진 특성으로 나눠 정해진 틀에 집어넣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을 그날의 상황에 맞추고, 우리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사회적 자아를 맞춰가는 능력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은 50퍼센트만 옳다(사실 우리 성격의 절반 정도는 유전적 영향을 많이 받고 나이가 들면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게 연구로 밝혀졌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절반만 굳어 있다.(p. 73)'


 이는 단순히 그의 신념이 아니고, 연구로 밝혀진 것이기도 하지만 성격의 본질 때문이기도 하다. 성격은 원래 하나가 아니라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이 공존(p. 79)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격은 만들어지고 도전받고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에서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동기가 모두 세 가지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질(이를 생물 발생적 근원이라고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화에 따른 결과(이를 사회 발생적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것이 적절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그 사람의 생애를 통틀어 굳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이며 마지막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이를 특수 발생적 근원이라 부른다)이다. 즉 누구나 삶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는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틀은 이 세 번째의 것을 특별히 자유 특성이라 부르는데, 그만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동기가 되는 성격을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조합으로 이뤄지고 자유의 영역 또한 꽤나 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쉽게 고정되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다. 오래 전 MBTI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별점을 보듯 MBTI를 했던 것 같다. 그건 성격의 레이블링(labeling)과도 같아서 우리는 네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유형을 브랜드라도 되는 것처럼 걸고 다녔다. 그것으로 우리는 타인을 쉽게 규정했다. 설령 그가 유형에 맞지 않는 행동을 과도하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내 개념이 오류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너 왜 이래? 너답지 않아?'하고 도리어 나무랐다. 그러니 '나다운 게 도대체 뭔데?'하며 거센 반박을 받아도 쌌다.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내게 무엇보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게 나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지를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나에 대해서도 얼마나 고정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비록 유전적으로 성격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황에 따라 이런 저런 성격을 넘나들며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능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나를 한정된 시야로 바라볼 필요는 없었고 타인에 대해서도 고정 관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나 자신이 내 상황을 헤아리듯,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는 특히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인데 특히나 스스로 창조적이라고 여길수록 더욱 요구되는 태도였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스티브 잡스'처럼 창조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라면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성공적인 업적을 이룬 창조적인 리더를 연구한 결과 그들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특성 때문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대담하고 혁신적인 성취는 단 한 사람의 창조적 영웅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건 신화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건축가 '대조군'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앞에 나온 이들의 성격 특성을 기억해 보라. 이들은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직 하고, 생각이 명확하고, 관대하고, 이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교적이며 착실하고, 세밀한 작업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창조적 목표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특성이다.(p. 221)


 다시 말해,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성이 뒷받침 될 때 좋은 성과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성이란 무엇보다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데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은데도 성과를 낼 경우, 그건 그가 잘 나서라기 보다는 주변 타인들이 그의 그릇된 인성을 참고 잘 도와준 결과였다. 그들의 희생이 뒷받침 되어 나타난 성과였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자기 주장이 강한 창조적인 사람과 일을 할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불안하고 심리적 적응도 낮다고 한다.


 이렇게 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내려놓고 타인을 환대하는 게 필요했다. 미국의 회사들이 왜 창조적인 인재보다 협력 잘 되는 인재를 더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식으로 내 생각의 눈금과 타인에 대한 시선을 다시 조정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타인을 의식하는 정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성격과 장소의 관계라든지, 내 삶을 스스로 얼만큼 조절해야 하는지 등등 성격과 삶의 관계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유용한 정보들이 꽤 많았다. 평소 성격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면 딱 적당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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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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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죽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그는 경계 위에 사는 자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경계다. 그는 서 있는 그 곳에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 맞부딪힌다. 국가는 평평한 대지다. 고정되고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롤러로 밀어버린 포장도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 외국인은 언덕 혹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내리누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빈틈이 되어 균질된 국가에 불균질을 가져온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하나의 인위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다. 외국인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존재로 인해 국가가 재정립 되기에 그렇다. 외국인의 정체성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힘은 거꾸로 흐른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한 반정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세공해 나간다. 외국인에겐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도록 강제하면서 거꾸로 국가 자신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 한다. 자기 정체성의 부유함을 위해 외국인을 흡혈하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게 외국인은 더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반대 명제로써 차용해야 할 특수한 맥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외국인이 가진 존재 본연의 모습이 어떤 지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가 되었던 외국인은 국가에게 그저 백지다. 그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기가 가능한, 인위적으로 산출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국인은 문학이다.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존재 규정이 주로 증언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통신사의 증언으로, 미국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도래했다. 그와 똑같이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허다한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유럽에 소개 되었다. 돌연한 외국인과의 첫 만남은 먼저 텍스트의 매개, 즉 문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외국인은 문학으로 존재한다. 문학이 허구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그러하다. 본질은 상관 없다.


 그런 외국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를 썼다. 열 다섯의 나이였다.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했던 곳을 방문한 뒤다. 고향의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서 떠난 여정이었다. 거기는 일본에 의해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늘 뭔가 모자란 존재감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한 존재감을 주리라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증언자'가 되려 했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단편의 인상만을 말할 뿐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항해 그들이 외국인으로 규정하는 타자 본연의 모습은 어떠한 지를 증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에 문학으로 대항한 셈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란 존재자에게 은폐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그것이 그의 시였다.


 시란 고유한 존재의 증명, 국가에 의해 탈취된 존재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시 앞에서 외국인을 만들고 그 경계가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공선'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을 때 중국의 루쉰은 적국 일본의 사람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 안내'란 책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고바야시 다키기자 1933년 2월에 살해되었을 때, 루쉰은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일본과 지나의 대중은 원래부터 형제이다. 자산 계급은 대중을 속여 그 피로 경계를 그었으며, 또한 지금도 긋고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과 그 선구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내고 있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 실증의 하나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히 동지 고바야시의 혈로를 따라 전진하여 손을 맞잡을 것이다. 루쉰"    (p. 100)


 루쉰에게 다키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국적은 아무 의미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같은 신념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뿐이었다. 루쉰에게도, 다키지에게도 시가 있었다. 그도 결국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통해 자신이 싸워야 할 현장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편의 개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으로 여겼던 것은 특정 체제와 국가가 중심이 된, 사실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면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권력 아래 가둬둔다면 이제 우리는 다른 특수를 찾아야 하고 그 특수가 보편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세계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석권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 해방을 위한 대안이 없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쪽의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세계문학에 요구해야 할 보편성이다. (p. 166)


 사실 특수와 보편이 생각만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란 존재가 자의적이듯,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선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은 누군가 명확히 금긋기를 하고 있던 탓이다. 그 금긋기가 국가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국적 때문에 서로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가없이 자의적임이 밝혀진 이상, 서로를 나와 다른 얼굴로 여길 필요는 없어졌다.


 재일 조선인인인 나,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 우리는 서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쉽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 근대 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인 이상, 식민지주의와의 부단한 투쟁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향해 자기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보편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167)


 시는 국가를 분쇄한다. 그들이 나누는 인위적인 경계,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를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 만드는 모든 획책을 허문다.

 시는 모두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불균질의 영토로, 그 자신이 저항의 거점이 되도록 호명한다.


 요즘들어 갑자기 애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이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 요구할 때이다. 최근엔 애국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라고 한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올라서 쓸 돈이 적은데 이제 노동자더러 보장되지 않는 정년과 갈수록 적어지는 임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애국은 늘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일까? 왜 재벌에겐 애국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애국이라는 게 이토록 일방적이라면 도대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국가는 무엇일까?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마우리치오 비롤리는 패트리어티즘과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트리어티즘은 몇 세기에 걸쳐 하나의 집단 공동의 자유를 지탱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요컨대 공화정 전체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거나 환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과 동질성을 옹호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공화주의 패트리어티즘의 적이 폭정이나 독재정치, 억압과 부패였던 것에 반해 내셔널리즘의 적은 타문화에 의한 자문화 오염, 이종 잡교, 인종적 불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불통일이다.(p. 257)


 그들의 애국은 패트리어티즘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인 애국, 즉 패트리어티즘엔 보다시피 국가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부르조아의 집행위원회(최근 대법원의 한명숙 판결은 지금의 국가가 이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으로써의 국가는 없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러한 패트리어티즘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시는 국가만이 전유하고 있던 문학적 쓰기에 수많은 가필로 그 언어와 용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저자가 어머니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다. 처음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시로 인해 현상이 아니라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의 문맹이 일본 식민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결과였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나 사회구조의 반영'(p.182)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무려 네 개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젠더(가부장제), 경제(빈곤), 민족(식민지 지배), 정치였다. 장벽이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로 갇힌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굴하지 않는다.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두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조국에서 수형자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고 탈주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일본에는 '다노모시코'라는 재일 조선인만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일본 국가의 권력을 교란시키며 한국에서는 비전향범의 어머니라는 신분이 국가 권력과 맞서게 한다. 국가화의 산물인 언어는 몰랐지만 오히려 비언어가 줄 수 있는 더 큰 자유로 권력이 만든 모든 장벽을 초월한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와 같은 존재(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언설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께름칙함에 시달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는 이러한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받고 지식을 몸에 익힌 다음, 그 필터를 통해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갖게 된 권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달까. 나아가 그 특권을 지닌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머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p. 194)


 아마도 그 겸허한 응시가 '시의 힘'이 최종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 힘은 우리 모두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파리아'로 만드려 한다. 파리아는 원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회,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모두가 파리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시의 힘은 그것을 갈구하며 그가 쓴 책, '시의 힘'은 그 갈구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서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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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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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블랑쇼는 독서란 자신도 모르게 저자와의 깊은 투쟁으로 들어서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문학의 공간’이란 책에서다. 무의식적으로는 몰라도 의식적으로는 아직까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란 소설이다.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고 그로 인해 남녀공학이 금지되며 여자들의 사회 진출은 봉쇄되고 일부다처제마저 허용되는 등 체제가 극한의 가부장제로 변하는 것을 한 학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이 소설은 곳곳에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내 가치관과 어긋나 전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곳곳에서 흠을 찾아내고 그의 논거를 허물어뜨릴 반격을 고심했다. ‘복종’의 독서는 한 마디로 치열한 공성전이었다. 나는 공성이고 우엘벡은 수성이었다. 그의 성은 그리 견고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제법 사실적인 묘사로 무장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긴 빈틈도 많았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이슬람화에 있어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만한 여성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커다란 흠결이었다. 남녀 공학이 폐지되고 여성에게 고등 교육은 허용되지 않으며 사회적 진출의 통로마저 압도적으로 차단될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 허용되는 데도 가장 독립적이라 알려진 프랑스 여성들은 봉기는 커녕 변변한 시위조차 안 했다. 다들 조용했고 그것을 시행한 이슬람 정부를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프랑스의 여성들이 모조리 뇌 개조라도 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읽을 때 받는 소설의 인상처럼 소설이 실제의 프랑스를 담으려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엘벡은 태연하게 써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엔 독립된 여성들마저 지워져 있었다. 모든 여성들은 오로지 남성과 결부되어서만 존재했다. 가장 지식인이라 할만한 마리프랑수아즈조차 학자라기 보다는 아내의 면모를 더욱 드러냈고 미리암도, 알리사도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남성과 대등한 여성은 없었다. 거기에 해당될 수도 있었던, 우익 쪽 대권 후보로 나온 여성마저도 결국엔 패배한다. 소설엔 트로이의 여성 예언자 카산드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역시 꽤나 의미심장하다. 카산드라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유혹을 받는다.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잘 보이려고 예언의 능력까지 선물했으나 카산드라는 그를 거부한다.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냉대를 받은 것이다. 옹졸한 아폴론은 카산드라가 그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저주를 내린다. 카산드라는 많은 예언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입은 있으나 남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없었다. 남성에 의해 목소리가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여성에게 하고 있는 그대로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복종’은 사실 남성만의 판타지라고.


 물론 ‘복종’은 환상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이긴 하지만 분명 2022년의 프랑스라는 가상 사회를 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리는 시간 대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이 소설은 더욱 환상에 충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환상성' 전문가인 로즈메리 잭슨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녀는 환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우리에게 한없이 낯선 것, 즉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들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뤄지는, 현실 세상에선 가능할 리 없는 남성 욕망의 평화롭고도 완벽한 충족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복종’은 로즈메리 잭슨이 요구하는 환상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고 하겠다.


 낮 시간에 전혀 들리지 않던 소음이 모두가 잠든 밤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은 현실의 이면에 억압된 것들을 깨운다. 대부분 현실의 문제점을 간직한 것으로써 그대로 두면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현실이 ‘비정상’ 혹은 ‘괴물’이란 이름으로 가둬둔 것들이다. 환상은 그런 것들을 해방시킨다. 하여 내 세계가 완벽하지 않으며 절대가 아니라 가능한 많은 세계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비정상’이나 ‘괴물’들은 사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인도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복종’도 그렇다. 무모함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 소설이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이슬라모포비아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이슬람은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써 프랑스에 있어서,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라면 전적으로 타자이기에 정중히 초대된 것이라 봐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토록 하여 현재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반추해 보도록 하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써 말이다. 그대로 소설의 이슬람은 프랑수아로 하여금 현재 굳어진 유럽의 남녀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프랑수아의 친구 브뤼노와 안리즈 부부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 부부는 결국 이혼했는데 프랑수아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여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 이해한다. 프랑수아는 결혼이 위스망스의 시대처럼 성역할의 구분이 분명하고 여성이 어디까지나 가정 내에 머무를 때 온전히 지켜지리라 믿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의 생각과 같다. 이런 식으로 '복종'은 슬쩍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갖다 댄다. 로즈메리 잭슨이 말한 환상이 만든다는 여백과 같다. 진실이라 여겨 경계가 없던 그 곳에 문득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건너가 진실이라 여겼던 것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고 어떤 땐 울화와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내 기분에 상관없이 '복종'은 상대화를 향한 참조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미셸 우엘벡이 '복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미셀 푸코의 용어를 빌려와 말한다면 일종의 ‘계보학’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처음 시작했던 계보학의 핵심은 계보의 복기에 있다. 알고자 하는 대상의 시작과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진리처럼 굳어진 실체를 계보로 용해시켜 본래의 모습이 앙상한 허구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계보학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주로 참조를 통해 이뤄진다. 계보학은 무엇보다 우리의 기준에서 그 시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안으로 들어가 그 시대의 눈으로 당대를 보게 만들기에 역사들 사이에 위계가 없고 모두를 대등하게 대한다. 역사 이외의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중립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저마다 지니고 있는 진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환상이 현실의 대차대조표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엔 두 개의 계보가 나온다. 하나는 주인공의 것으로, 그는 '거꾸로'로 유명한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데 위스망스는 여러 면에서 주인공과 비슷하다. 위스망스가 파리에서 한 평생을 보냈듯이 프랑수아도 거의 파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지금 느끼고 있는 무기력과 냉소는 위스망스가 '거꾸로'를 쓰던 시절의 모습과 판박이다. 무신론자였던 위스망스는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는데 그와 똑같이 주인공도 무신론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이렇게 개인의 계보가 있고 다른 한 쪽엔 사회의 계보가 있다. 물론 프랑스 사회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이슬람 정권의 성립 과정과 그 이후의 모습은 거센 민중 봉기만 없을 뿐이지 프랑스 대혁명과 닮아 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테러에다 당리당락에 따른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의 모습까지도 비슷하다. 프랑스 대혁명 중에 귀족들이 받았던 충격은 프랑수아가 이슬람화 되어가는 프랑스를 보면서 받은 충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이 민초들에게 참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남녀가 한 공간에서 같이 교육을 받고, 아내 외에 다른 여성을 더 이상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또한 귀족들에겐 적잖은 심적 타격이었을 것이다.


 비록 계보는 역사를 단층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나 유사하게 보이는 이 두 단면은 비교를 가능케 하여 결정적으로 환상처럼 계보도 가지고 있는 힘 하나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바로 절대를 상대화 시키는 힘이다. 즉 아무리 영원한 상식처럼 굳어진 것이라 해도 그 역시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그 당시엔 충격을 동반하는 한없이 낯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이슬람 세력 지도자 하메드 벤 아베스의 야심대로 전 유럽이 이슬람으로 통합되어 그대로 계속 이어져 갔다면 후일 누군가가 남녀평등과 일부일처제를 주장했을 때 분명 듣는 사람들의 입은 놀라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뭐, 저런 이상한 놈이 다 있느냐?'란 따가운 눈초리는 덤일테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환상과 계보는 설령 내 가치관이 아무리 진리처럼 굳어졌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동일한 틀로 찍어낸 기성품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의심을 낳고 나아가 우리에겐 오직 지금의 세상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깨뜨린다. 여기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가 유용한 말을 하나 했는데 지금 그것을 빌려오려 한다.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라는 쌍을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체제라고 선전하고, 그 밖의 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함으로써 ‘이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여기서 ‘이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바디우가 적으로 통칭하는, 환상의 존재와 계보로써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은 이념의 폐쇄를 의도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상상의 혈맥 중간을 권력으로 꽉 묶어서는 흐르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유일의 실체라 여기며 식물처럼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카루스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도약의 환희 보다는 추락의 공포를 더 주지시키고 오디세우스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겐 모험의 자유보다 방랑의 불안을 강조하여 구속 당한 곳에서의 안정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도록 유혹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에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이후 가타라니 고진은 연구 보다 시위에 더 매진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같이 행동할 것을 독려한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부르는 고진에게 누군가 시위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걷는 것입니다.'라고. 바디우의 이념은 다른 게 아니다. 그냥 걷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설령 방향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것. 내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의 증명. 그것이 다름아닌 이념이며 환상과 계보가 궁극적으로 해방하고자 하는 힘인 것이다.


 이는 소설의 마지막과 얼마나 다른가. 이슬람 개종을 결심한 프랑수아가 대강당에서 '오직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라고 선언할 때 그는 정지해 있다. 프랑수아만이 아니다. 아침 조례 시간처럼 우리 대부분은 어떤 권위 혹은 권력에 복종할 때마다 제 자리에 식물처럼 가만히 서 있다. 물론 복종은 전적으로 강요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으로 동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멀미가 오고 피로를 느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위화감이 솟아오르게 된다. 환상과 계보의 힘은 그럴 때를 위해 필요하다. 완전히 전복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산발적 봉기를 위한 힘인 것이다. 그 힘은 그 때 걷도록 한다. 한 발 옮겨 나를 내리누르던 권위 혹은 권력을 옆으로 흘려 보내도록 만든다. 제목의 복종은 바로 그 순간의 내 선택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프랑수아가 그토록 좋아하는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는 제목 그대로 현실의 모든 가치와 사상들을 뒤집어 보는 소설이다. 한없이 염세적이었던 주인공 데 제셍트는 그것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것을 소설 '복종'은 환상과 계보를 통해 하고 있다.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 '복종'은 당신을 다시 걷도록 만드는 힘을 은밀히 비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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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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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즈 러너’를 좋아한다. 비슷하게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다루고 있는 여타의 영 어덜트 판타지 소설과 처별되는 이 소설만의 독특한 면모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은, 대표적으로 ‘헝거게임’이 그러한데, 등장인물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메이즈 러너’는 등장인물 사이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작금의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들이 주로 멸망 후라는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것은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더욱 노골화된 경향으로  현재 미국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간접적인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들이 경쟁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나갔던 것도 현대 사회가 바로 그것을 주축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으로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엔 한계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승리하는 주인공의 묘사가 오히려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도록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하이에크가 주도했던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표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를 개인 기업가처럼 만드는 데 있었다. 즉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와 의식 모두를 1인 기업처럼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뭉치게 만드는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계급 의식을 가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의 개인으로 남겨둘 수 있을까를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했고 거기에 노동자들을 한 명의 기업가처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경쟁이 중시되었다. 나아가 모두를 경쟁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정부의 보호막도 모조리 해체해 버렸다. 그들의 작은 정부란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줄이려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오해에 불과하다. 사실 그들은 정부의 개입을 적극 옹호한다. 단 그 개입이 어디까지나 예전에는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영역까지 진출해 거기에서조차 경쟁 제도를 만들어 낼 때에만 그렇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이나 의료, 수도, 전기,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같은 것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의 경쟁의 창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생각하는 정부의 지상 목표다. 그들이 이렇게 경쟁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얼마든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로 사람들에게 쉽게 정당화시켜 흔한 말로 혹세무민하기 쉽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진짜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능력에 따른 결과로 생각토록 만드는 것. 모두를 ‘MEA CULPA’로 만들어 구조적 모순을 은폐시키는 것.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타격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대했을 개인들을 어디까지나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만 생각케 하여 연대 의지를 휘발시키는 것.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 대폭 늘어난 자기계발서도 신자유주의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형을 양산하려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다시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파리 꼬뮌 혹은 러시아 혁명 같은 노동자들의 계급 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노예와 같은 순종자들.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이 종말 후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도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권력자들은 그런 세계를 종종 유토피아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부수려 한다. 그런데 부수려 하면 할수록, 경쟁에 이기려 하면 할수록 주인공은 더욱 개인 기업가적 모습을 보인다. 능력을 연마하고 홀로 전략을 짜며 성공하면 무리의 인정을 받아 지위가 높아진다. 신자유주의가 그리던 이상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추구하는 대안의 설득력도 그 기초가 부실해진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후반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메이즈 러너’는 달랐던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는 마치 플라톤의 국가를 연상시켰다. 모두가 정해진 자리가 있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미로를 빠져나간다는 공동체의 목적에 맞춰 서로 협력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 자체가 대안을 향한 한 걸음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보가 궁금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흐름이 이 다음엔 어디로 연결될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즈 러너’의 속편 스코치 트라이얼의 개봉에 발맞춰 출간된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의 프리퀄이다. 즉 영화의 결말에 밝혀지는 세상의 멸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소설은 메이즈러너의 주인공 토머스와 테리사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제 토머스는 기억을 지우고 메이즈 러너가 되기 위해 미로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주인공 마크와 트리나를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 소꿉친구다. 나중에 ‘태양 플레어 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태양열의 엄청난 증가로 노출된 지구 상의 사람들이 모두 불타 죽기 바로 직전 마크와 트리나는 서로 마주보며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마크는 트리나를 좋아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근사해 학교 인기인이 된 트리나에게 사랑을 섣불리 고백하지 못한다. 그러다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고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간 터널에서 마크와 트리나는 플랫폼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서둘러 터널로 달아나지만 터널 역시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위기가 닥쳐오고 전직 군인인 알렉의 도움으로 그것을 무사히 넘긴 그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과 이제 정착촌을 이루어 살아간다. 하지만 고난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하루는 공공연히 필요한 물품들을 나눠주러 날아오던 비행선 버그가 나타나더니 도움을 기대하고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화살의 비를 퍼붓기 시작한다. 쓰러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마크와 알렉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결국 며칠에 걸쳐 버그 한 대를 추락시키고 돌아와 보니 화살에 맞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벌레들이 들어와 마구 갉아먹는다며 끔찍한 통증을 호소하다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마크는 비행선에 서 보았던 상자를 떠올린다. 바로 그 상자에 ‘바이러스’라고 되어 있고 ‘전염성이 매우 높다’고 적혀 있었던 것을. 버그가 쏘았던 화살에는 ‘플레어’라는 이름의 사람의 뇌를 공격해 죽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감염자는 속출하고 마크의 친한 친구들도 잇달아 죽는다. 마크와 알렉은 트리나를 비롯하여 사람을 모아 백신을 구하려 버그가 왔던 곳을 찾아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기지에서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알래스카에 있다는 연합 정부가 이대로는 지구 재건이 힘들다고 생각해 바이러스를 통해 인구를 대폭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메이즈 러너 후반의 지구 풍경을 낳은 ‘킬 오더’였던 것이다.


 프리퀄인데다 주인공도 다르지만(한국인 캐릭터 ‘민호’도 나오지 않는다. 민호의 이야기는 아마도 ‘피버 코드’에서 나오는 것 같다.) 페이지가 거침없이 넘어가는 것은 여전하다. 익숙한 전개인데도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는 빠른 속도감으로 식상함을 느낄 여지마저 얼른 없애 버리고 있다. 한 마디로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푹 쩔게 만드는 제임스 대시너의 솜씨는 ‘킬 오더’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개가 다소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내가 ‘메이즈 러너’의 매력으로 생각했던 점은 여기에서도 변함은 없었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공존과 그것을 위한 협력이라는 ‘메이즈 러너’의 모토는 여기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무엇보다 마크의 일행을 가로막는 것들 모두가 철저히 공존 보다는 자기 본위로 똘똘 뭉친 집단이기 때문이다. ‘킬 오더’를 만든 연합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숲에서 마크 일행을 마귀라 부르는 광신자 집단(사실 그들은 바이러스의 실험 대상으로 알고보면 피해자였다.)도, 자기들을 감염시켰기에 치료제를 얻기 위해서라도 연합 정부마저 감염시켜야 한다고 선동하는 기지의 브루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비극은 모두 그들의 두려움에서 잉태되고 있는데 정작 그 두려움의 원인은 그들 자신이 낳았다는 것이다. 브루스는 광신자 집단을 두려워 해 세상 전부를 파괴할 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다. 그런데 광신자 집단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똑같이 연합 정부도 ‘킬 오더’ 명령을 수행한 브루스에 의해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린 지극히 편협한 결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극의 부머랭으로 돌아오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그런 그들과 대비되어 주인공 일행이 마지막에 택하는 행위는 더욱 극적으로 강조된다.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 시리즈가 어디를 향해 뛰어가는 작품인지 보다 선명하게 말해주는 작품이다. 나처럼 메이즈 러너의 모토에 반하여 이 작품을 찾게 된 이들이라면 ‘킬 오더’도 만족하리라고 본다. 다 읽고 나니 프리퀄 제2부인 피버 코드가 기다려진다. 글레이더들이 ‘메이즈 러너’가 되기 전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담긴다고 하니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부디 갈증이 깊어지기 전에 나와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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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 바로 얼마 전에 메이즈 러너 시리즈를 새벽까지 탐독했는데
헤르메스님 아니었으면 프리퀄을 놓칠 뻔 했군요!

피버 코드? 으아... 아무래도 제임스 대시너 작품을 다 훑어봐야겠네요.
사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은, 늘 신납니다~

오드득 2015-08-28 18:53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 역시나 저랑 판타지 취향이 비슷하시군요^^
저도 늘 읽을 책이 남아 있을 때 신나더군요^^ 특히 섀도우 헌터스 4권과 5권이 나와서 반가웠어요. 최근 4권을 읽었는데 후반에 완전 폭발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식으로 위기를 넘길 줄은... 어쨌든 신나하며 5권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5-08-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섀도우헌터스 읽고 세권 모두 홀랑 팔아버린터라 후속 안 읽으려고 했는데, 이런, 헤르메스님 말씀 들으니 슬슬 끌려가네요 ㅋㅋ

오드득 2015-08-31 22:36   좋아요 1 | URL
네번째 부터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 세권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잘 기억이 안나서 자주 이전 책을 찾아봤습니다만^^; 마녀고양이님이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한데 제발 낚여주세요^^

2015-08-29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