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리스 블랑쇼는 독서란 자신도 모르게 저자와의 깊은 투쟁으로 들어서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문학의 공간’이란 책에서다. 무의식적으로는 몰라도 의식적으로는 아직까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읽은 한 책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란 소설이다.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고 그로 인해 남녀공학이 금지되며 여자들의 사회 진출은 봉쇄되고 일부다처제마저 허용되는 등 체제가 극한의 가부장제로 변하는 것을 한 학자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이 소설은 곳곳에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내 가치관과 어긋나 전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곳곳에서 흠을 찾아내고 그의 논거를 허물어뜨릴 반격을 고심했다. ‘복종’의 독서는 한 마디로 치열한 공성전이었다. 나는 공성이고 우엘벡은 수성이었다. 그의 성은 그리 견고하다고 할 수 없었다. 제법 사실적인 묘사로 무장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생긴 빈틈도 많았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이슬람화에 있어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만한 여성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커다란 흠결이었다. 남녀 공학이 폐지되고 여성에게 고등 교육은 허용되지 않으며 사회적 진출의 통로마저 압도적으로 차단될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까지 허용되는 데도 가장 독립적이라 알려진 프랑스 여성들은 봉기는 커녕 변변한 시위조차 안 했다. 다들 조용했고 그것을 시행한 이슬람 정부를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프랑스의 여성들이 모조리 뇌 개조라도 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읽을 때 받는 소설의 인상처럼 소설이 실제의 프랑스를 담으려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엘벡은 태연하게 써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엔 독립된 여성들마저 지워져 있었다. 모든 여성들은 오로지 남성과 결부되어서만 존재했다. 가장 지식인이라 할만한 마리프랑수아즈조차 학자라기 보다는 아내의 면모를 더욱 드러냈고 미리암도, 알리사도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남성과 대등한 여성은 없었다. 거기에 해당될 수도 있었던, 우익 쪽 대권 후보로 나온 여성마저도 결국엔 패배한다. 소설엔 트로이의 여성 예언자 카산드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역시 꽤나 의미심장하다. 카산드라는 태양의 신 아폴론의 유혹을 받는다.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잘 보이려고 예언의 능력까지 선물했으나 카산드라는 그를 거부한다.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냉대를 받은 것이다. 옹졸한 아폴론은 카산드라가 그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저주를 내린다. 카산드라는 많은 예언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입은 있으나 남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없었다. 남성에 의해 목소리가 지워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여성에게 하고 있는 그대로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복종’은 사실 남성만의 판타지라고.


 물론 ‘복종’은 환상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이긴 하지만 분명 2022년의 프랑스라는 가상 사회를 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리는 시간 대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이 소설은 더욱 환상에 충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문학의 '환상성' 전문가인 로즈메리 잭슨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녀는 환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우리에게 한없이 낯선 것, 즉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들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뤄지는, 현실 세상에선 가능할 리 없는 남성 욕망의 평화롭고도 완벽한 충족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일 테고 그런 의미에서 ‘복종’은 로즈메리 잭슨이 요구하는 환상의 요소를 충족하고 있다고 하겠다.


 낮 시간에 전혀 들리지 않던 소음이 모두가 잠든 밤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은 현실의 이면에 억압된 것들을 깨운다. 대부분 현실의 문제점을 간직한 것으로써 그대로 두면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현실이 ‘비정상’ 혹은 ‘괴물’이란 이름으로 가둬둔 것들이다. 환상은 그런 것들을 해방시킨다. 하여 내 세계가 완벽하지 않으며 절대가 아니라 가능한 많은 세계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비정상’이나 ‘괴물’들은 사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인도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복종’도 그렇다. 무모함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 소설이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이슬라모포비아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이슬람은 일종의 사유 실험으로써 프랑스에 있어서,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라면 전적으로 타자이기에 정중히 초대된 것이라 봐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토록 하여 현재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반추해 보도록 하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로써 말이다. 그대로 소설의 이슬람은 프랑수아로 하여금 현재 굳어진 유럽의 남녀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프랑수아의 친구 브뤼노와 안리즈 부부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그 부부는 결국 이혼했는데 프랑수아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여성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 이해한다. 프랑수아는 결혼이 위스망스의 시대처럼 성역할의 구분이 분명하고 여성이 어디까지나 가정 내에 머무를 때 온전히 지켜지리라 믿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의 생각과 같다. 이런 식으로 '복종'은 슬쩍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갖다 댄다. 로즈메리 잭슨이 말한 환상이 만든다는 여백과 같다. 진실이라 여겨 경계가 없던 그 곳에 문득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건너가 진실이라 여겼던 것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고 어떤 땐 울화와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내 기분에 상관없이 '복종'은 상대화를 향한 참조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미셸 우엘벡이 '복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미셀 푸코의 용어를 빌려와 말한다면 일종의 ‘계보학’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처음 시작했던 계보학의 핵심은 계보의 복기에 있다. 알고자 하는 대상의 시작과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진리처럼 굳어진 실체를 계보로 용해시켜 본래의 모습이 앙상한 허구의 구성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계보학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주로 참조를 통해 이뤄진다. 계보학은 무엇보다 우리의 기준에서 그 시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안으로 들어가 그 시대의 눈으로 당대를 보게 만들기에 역사들 사이에 위계가 없고 모두를 대등하게 대한다. 역사 이외의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중립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저마다 지니고 있는 진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환상이 현실의 대차대조표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엔 두 개의 계보가 나온다. 하나는 주인공의 것으로, 그는 '거꾸로'로 유명한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데 위스망스는 여러 면에서 주인공과 비슷하다. 위스망스가 파리에서 한 평생을 보냈듯이 프랑수아도 거의 파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지금 느끼고 있는 무기력과 냉소는 위스망스가 '거꾸로'를 쓰던 시절의 모습과 판박이다. 무신론자였던 위스망스는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하는데 그와 똑같이 주인공도 무신론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이렇게 개인의 계보가 있고 다른 한 쪽엔 사회의 계보가 있다. 물론 프랑스 사회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이슬람 정권의 성립 과정과 그 이후의 모습은 거센 민중 봉기만 없을 뿐이지 프랑스 대혁명과 닮아 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테러에다 당리당락에 따른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의 모습까지도 비슷하다. 프랑스 대혁명 중에 귀족들이 받았던 충격은 프랑수아가 이슬람화 되어가는 프랑스를 보면서 받은 충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이 민초들에게 참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남녀가 한 공간에서 같이 교육을 받고, 아내 외에 다른 여성을 더 이상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또한 귀족들에겐 적잖은 심적 타격이었을 것이다.


 비록 계보는 역사를 단층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나 유사하게 보이는 이 두 단면은 비교를 가능케 하여 결정적으로 환상처럼 계보도 가지고 있는 힘 하나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바로 절대를 상대화 시키는 힘이다. 즉 아무리 영원한 상식처럼 굳어진 것이라 해도 그 역시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그 당시엔 충격을 동반하는 한없이 낯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이슬람 세력 지도자 하메드 벤 아베스의 야심대로 전 유럽이 이슬람으로 통합되어 그대로 계속 이어져 갔다면 후일 누군가가 남녀평등과 일부일처제를 주장했을 때 분명 듣는 사람들의 입은 놀라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뭐, 저런 이상한 놈이 다 있느냐?'란 따가운 눈초리는 덤일테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환상과 계보는 설령 내 가치관이 아무리 진리처럼 굳어졌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동일한 틀로 찍어낸 기성품에 불과할 지 모른다는 의심을 낳고 나아가 우리에겐 오직 지금의 세상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깨뜨린다. 여기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가 유용한 말을 하나 했는데 지금 그것을 빌려오려 한다.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라는 쌍을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체제라고 선전하고, 그 밖의 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함으로써 ‘이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여기서 ‘이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바디우가 적으로 통칭하는, 환상의 존재와 계보로써의 역사를 부정하는 이들은 이념의 폐쇄를 의도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상상의 혈맥 중간을 권력으로 꽉 묶어서는 흐르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유일의 실체라 여기며 식물처럼 살아가도록 만든다. 이카루스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도약의 환희 보다는 추락의 공포를 더 주지시키고 오디세우스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겐 모험의 자유보다 방랑의 불안을 강조하여 구속 당한 곳에서의 안정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도록 유혹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에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이후 가타라니 고진은 연구 보다 시위에 더 매진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같이 행동할 것을 독려한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부르는 고진에게 누군가 시위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걷는 것입니다.'라고. 바디우의 이념은 다른 게 아니다. 그냥 걷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설령 방향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것. 내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의 증명. 그것이 다름아닌 이념이며 환상과 계보가 궁극적으로 해방하고자 하는 힘인 것이다.


 이는 소설의 마지막과 얼마나 다른가. 이슬람 개종을 결심한 프랑수아가 대강당에서 '오직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라고 선언할 때 그는 정지해 있다. 프랑수아만이 아니다. 아침 조례 시간처럼 우리 대부분은 어떤 권위 혹은 권력에 복종할 때마다 제 자리에 식물처럼 가만히 서 있다. 물론 복종은 전적으로 강요가 아니고 우리의 욕망으로 동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멀미가 오고 피로를 느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위화감이 솟아오르게 된다. 환상과 계보의 힘은 그럴 때를 위해 필요하다. 완전히 전복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산발적 봉기를 위한 힘인 것이다. 그 힘은 그 때 걷도록 한다. 한 발 옮겨 나를 내리누르던 권위 혹은 권력을 옆으로 흘려 보내도록 만든다. 제목의 복종은 바로 그 순간의 내 선택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프랑수아가 그토록 좋아하는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는 제목 그대로 현실의 모든 가치와 사상들을 뒤집어 보는 소설이다. 한없이 염세적이었던 주인공 데 제셍트는 그것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것을 소설 '복종'은 환상과 계보를 통해 하고 있다.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 '복종'은 당신을 다시 걷도록 만드는 힘을 은밀히 비축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