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아랍인 Vol.1 -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1978~1984)
리아드 사투프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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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리아. 아마도 현재 중동 국가 중 가장 많이 언론에 보도되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 IS가 거기에 있고, 더하여 2011년에 시작된 내전으로 벌써 20만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지옥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 곳은 시리아일 것이라고. 그래서 궁금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참으로 많이 접하는 이름이나 시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정작 하나도 없었기에.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었다.


 한 나라를 아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재적 접근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적 접근 방법이다. 외재적 접근은 한 나라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만큼 시각에 있어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 시각 역시 바라보는 국가가 놓인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근대 이후에 서양의 제국주의에 봉사하느라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널리 퍼진 것처럼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을 두고 단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 표현했다. 그래서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무려 86%에 달한다는 시리아처럼,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멀리 타자의 영역에 위치하는 나라일수록 외재적 접근이 줄 수 있는 편견과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내재적 접근이란, 쉽게 말하여 그 나라의 입장이 되어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상황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리아드 사투프의 그래픽 노블, '미래의 아랍인'을 손에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리아를 시리아인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리아드 사투프는 1978년 생이다. 그는 시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리아 시골 출신으로, 국가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 유학와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던 여자는 원래 어머니가 아니었다. 실은 어머니의 친구를 더 원했지만 친구가 아버지를 떼어내려고 거짓으로 아버지와 데이트 약속을 했는데, 어머니가 하염없이 친구를 기다릴 아버지가 불쌍해 그 사실을 말해주려 약속 장소로 나갔다가 끝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리아드의 아버지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못된다. 시리아 문화가 가진 가부장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세속적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속물이다. 중동 정세에 관심이 대단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 관심의 대부분이 프랑스에 살면서 시리아의 시골 출신으로서 가지게 된 자괴감이나 차별 받은 경험이 낳은 보복 감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로 인해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조국 사람들을 교육으로 그 종교의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중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런 신념에 있지 않고 프랑스에서 박사가 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모습과 자신이 얻은 성공에 대한 과시에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차남의 지위가 대개 다 그렇듯이, 그 역시 집안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바로 그것을 현재 성취한 신분과 성공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자마자 아내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중동 국가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결국 리비아 대학에 자리를 얻은 그는 아내와 아들 리아드를 데리고 리비아로 간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될 리아드를 형상화 한 그림. 그림의 황토색은 나라를 나타낸다. 만화는 나라마다 색깔을 달리 하는데, 황토색은 리비아를, 파란색은 프랑스를, 분홍은 시리아를 나타낸다.


 리아드가 언제 리비아로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책의 부제는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그 연도를 1978년 부터 1984년까지라고 명기하고 있으나 만화의 표현은 이것과 모순된다. 리아드는 78년생이니 만일 부제에서 표기한 연도대로 리비아로 갔다면 간난 아기로 묘사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어엿하게 자기 다리로 걷고 아빠와 제대로 대화도 가능한 아이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실수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뜻하지 않게 리아드의 아랍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작품은 리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오고가는, 마치 방랑자와도 같았던 어린 시절을 담아낸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리아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살아본 이가 아니었으면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참 많이 듣게 된다. 초반에 나오는 리비아부터 솔깃하고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특히 집이 그랬다. 독재가 카다피가 리비아를 다스렸을 때, 그는 리비아의 모든 사유주의 재산을 없앴다. 모든 것은 국가가 배급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것은 리비아 집에 열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집은 리비아 국가가 소유한다는 의미로 집의 모든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리아드 가족이 잠깐 외출을 다녀와 보니 다른 가족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고 이제 자신들의 집이 되었노라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리비아 법에 아무도 없는 집은 누구나 들어와 살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비아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가족 전부가 집을 떠나선 안되고 무조건 한 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한단다. 결국 리아드 가족은 집을 잃었고 이 사실로 인해 리아드의 어머니는 리비아에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외출하지 못했다.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융통성이 없으면 체제가 얼마나 한 개인에게 어처구니 없게 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외출을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시리아인을 남편으로 둔 여자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만화에서 그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대부분 실내에 갇혀 있었고 가족들과 외출할 때는 항상 끝에서 조용히 가족들을 따라다녔다. 자신이 먼저 주장하는 법도 없었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쪽이었고 남편의 고향 시리아에 갔을 때는 여성의 존재를 하찮게 취급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관습도 가만히 수용했다. 이 부분에서 내부인의 눈으로 보여준 시리아의 집안 풍경은 정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아의 여인들은 남자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고 음식도 남자들이 남긴 것을 먹어야했다. 그냥 여인이라도 참기 힘들 것 같은데 하물며 리아드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발달했다는 프랑스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리아 여인들과 똑같이 받아들였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물론 리아드의 기억 그대로이긴 하겠지만 리아드가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것엔 다른 의미도 투영된 것 같았다.


 프랑스에 왔을 때, 리아드의 모습. 이렇게 만화는 부성의 공간과 모성의 공간을 색깔로 구분하고 있으며, 실상 리아드가 경험하는 것도 다르다.


 그것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시리아인들의 모습 때문이다. 리아드가  처음으로 시리아인 사촌들을 만나자마자 경험한 것은 유태인을 적대하는 모습이었다. 사촌들이 다짜고짜 리아드를 유태인이라 부르며 공격했던 것이다.


 리아드가 시리아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났던 모습이 시리아 편의 처음을 연다. 그곳에서 목격하게 될, 차별과 폭력을 한 컷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작을 여는 한 컷이 의미심장하게 보여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리아드에게 있어 각 나라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마을에서 살게 되었을 때, 리아드는 또래 아이들이 모두 약한 동물들과 아이들에게 유태인이라 부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기서는 폭력이 예사로 행해졌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강아지를 삼지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고 강아지가 신음 소리를 내자 한 어른이 뛰쳐나와선 강아지의 목을 태연하게 날려 버렸다.



 이것은 폭력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었지만, 그래서 결국 어머니도 참지 못하고 리아드를 위해 프랑스 행을 결정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폭력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곳엔 폭력이 만연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때렸고, 남자는 여자를 때렸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적대로 그것을 정당화했다. 폭력은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가장 획일적인 방식이다. 거기엔 타인에 대한 고려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타인에 대한 적대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시리아는 이렇게 체제에 저항한 자들을 교수형 시키고 그 시체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걸어 놓는다. 아버지의 대사는 시리아에 만연한 폭력이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준다. 오로지 단 하나인, 자신만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것임을.


 하지만 리아드의 어머니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많이 듣고, 조용히 판단하며 관용으로 타인의 것을 먼저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면서도 리아드를 그런 폭력적 상황에 방치하는 것과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이런 선명한 대비가, 무심히 자신의 자전적 기억만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작품에서 리아드의 어머니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착실히 하나의 의미 지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항구적인 이슬람과 서양 문명 사이의 싸움만큼이나 이주노동자와 난민 사태 등으로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요즘, 아무래도 과연 상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가 시대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의 모델을 리아드의 어머니를 통하여 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총 3부작으로, 난 이제 겨우 1부만 보았을 뿐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러나 분명 리아드 어머니의 묘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아드가 자신의 어머니를 단순하게 존재감이 엷은 여자로 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정말 그랬다면 그래픽 노블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평가받는 앙굴렘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전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여성 묘사는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리아드는 경계의 존재다. 그는 아버지인 아랍인과 어머니인 유럽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겐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 그리고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모델들이.

 아마도 이런 모델로써의 의미를 독자에게 강조하기 위해 리아드가 프랑스와 아랍을 오고가는 형식으로 묘사했는 지도 모른다. 색깔까지 달리 써 가면서 말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리아드에게 자주 아랍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아랍인이 아니다. 그래서 제목도 '미래의 아랍인'일 것이다. 그러나 리아드가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언젠가 미래에 아랍인이 된다고 해도 아버지를 빼다 박은 아랍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속적으로 아버지가 그다지 좋은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목이 뜻하는 바는 분명 현재의 아버지가 대표하는, 그렇게 지금의 아랍이 보여주는 적대의 모습이 아닌, 보다 바람직한 아랍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한계가 있는 아버지의 모델 옆에, 그것의 보완으로써 어머니의 모델을 병치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모델이 유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유럽의 모습은 아니다. 굳이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상화된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어머니가 보여주는 모습이 현재 유럽과 차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낯설기 그지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데다 자신의 자유마저 구속하는 타인의 문화와 관습까지 묵묵히 감내했다. 관용과 희생이 전부였다. 이런 모습은 오리엔탈리즘을 부르짓는 유럽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굳이 찾자면 이런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박애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박애의 정신을 세 가지 기본 정신 중 하나로 천명했던 프랑스 혁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박애로 충만한 유럽. 그랬기에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리아드의 어머니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미래의 아랍인'은 바로 그 박애가 혼합된, 그래서 어머니처럼 먼저 관용과 희생이 체화된 존재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1권밖에 읽지 않은 나로서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아주 섣부른 추정이다. 그래서 이런 내 해석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다음 권을 만나고 싶다. 1권의 마지막은 시리아에서 사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는 리아드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시리아로 가는 장면이다. 공항에서 리아드 모습은 곧 다가올 미래 때문에 더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인데 그래서 다시 가 본 시리아에서 리아드에게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더 많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역시도.


 1권은 2015년 2월 15일에 나왔는데, 1년 하고도 4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까지 2권이 아직 안 나오고 있다. 그래서 끝을 이런 말로 끝내고 싶다. '2권과 3권, 빨리 출간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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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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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와 수치심'은 '시적 정의'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마사 너스바움의 책이다. 그녀는 계속 '공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변해왔다. 공적인 삶이란 단순히 말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시적 정의'는 바로 그런 삶을 영위하는데 문학적 상상력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란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타인의 삶이란 우리 자신과 멀다. 타인의 내면을 내 마음처럼 볼 수 없고, 그가 삶에서 당하는 체험을 내 피부처럼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바로 타인의 상황을 마치 나의 일처럼 여기는 상상력이다. 그럴 때 문학은 좋은 토양이 된다. 문학은 무엇보다 타인의 삶으로 가득하고, 우리는 독서를 통해 그들의 상황과 내면을 경험할 수 있다. 문학은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만들어 준다. 그런 면에서 공적인 삶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든다. 이기가 아닌 이타, 이용이 아닌 배려, 강요가 아닌 이해의 장으로. 그래서 너스바움은 교육이나 재판 같은 공적 제도가 문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그녀에겐 뚜렷한 지향점이 있다. 쉽게 말해, 타인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면 그녀가 왜 '혐오와 수치심'에 주목하는 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생각해 보면, 혐오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연대를 막는 대표적인 감정이 아니던가! 너스바움은 감정에 주목한다. '시적 정의'에서 강조한 문학적 상상력의 대상 역시 따지고 보면 타인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감정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비이성적이며 자연 발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성적이며 원인에 따른 결과라고 본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에 대해 '인지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감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와 다르다. 왜냐하면 감정의 경우에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정은 대상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사고를 수반한다. (p. 64)


 감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녀는 공공성이 있는 공적 제도들을 탐구하는데, 그 제도들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법이다. 그런데 그 법이 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감정이 인지적 산물이며 지금 우리의 법이 감정 상태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의 1장에서 충분히 논증한다. 그런 법과의 상관관계에 있어 혐오와 수치심은 더욱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혐오와 수치심이 무엇보다 범죄를 규정하는 형법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형법은 어떤 것이 범죄가 되는가를 규정한다. 여기서 법과 도덕은 구별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다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을 한다. 쉽게 표현하면, 비도덕적인데다 처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 국가는 범죄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느 정도 비도덕적이어야 국가가 범죄로 규정하고 개입하는가?


 여기에 대해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이 하나의 원리를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해악의 원리(이 책에서는 '위해의 원리'로 번역하고 있다.) 다. 즉 동의하지 않은 상대방에게 위해가 될 행위만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원리다. 달리 말해, 스스로 자신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거나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방이 동의를 하고 자유롭게 위해 행위에 참여한 경우는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영미법계는 이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렇게 밀의 원리를 따를 경우 문제가 생긴다. 혐오는 위해의 원리에 잘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엔 동성애자를 처벌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이란 영화로 이제는 우리들에게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앨런 튜링을 생각해 보라. 그는 절대 해독이 불가능하다던 독일군의 암호 '애니그마'를 풀어 연합군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었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당시 영국에 있었던 동성애자 금지법에 의하여 범죄자가 되어 법원으로부터 화학적 거세형을 받았다. 결국 그는 거세로 인한 우울증으로 사과에다 독약을 주사하여 그것을 깨물고는 죽는다. 그러나 동성애는 상대방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밀의 원리를 따른다면 결코 범죄가 될 수 없다. 앨런 튜링이 자살했던 것은 오로지 동성애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그런데 데블린은 이런 혐오마저 범죄로 규정하려 했다. 그는 도덕도 법으로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학자였다.


 미국에도 그런 법이 있다. 이른바 소도미 법이다. 그 법은 불륜, 간통, 동성애 행위를 포함하여 상호 합의 아래 이뤄지는 다양한 형태의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한다. 앞서 밀의 원리에 따르면 상대방의 동의가 있으면 범죄가 되지 않는다. 이 법은 법이 감정을 기반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그것이 아니면 이 법은 성립할 수 없다. 밀의 원리에 명백하게 저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블린은 이 법을 옹호한다. 혐오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밀의 원리에 위배된다. 하지만 데블린은 밀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혐오를 범죄로 규정한다. 데블린의 생각은 이러하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상호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이 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혐오는 바로 그 도덕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그런 데블린의 생각이 도덕의 최소한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했던 형법의 기본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데블린이 말하는 최소한의 도덕성이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이 되어야 하지, 혐오를 근거로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데블린의 후예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카스, 밀러 그리고 케이헌이 그러하다. 모두들 위해의 원리에 해당되지 않는 혐오도 법이 포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너스바움은 2장에서 그들의 논리를 차례로 논파한다. 그리고 그런 혐오는 법에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논증한다.


 그런 다음, 3장에서 너스바움은 혐오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파헤친다. 사람들은 특정 대상에 대해 왜 혐오감을 갖는 것인가? 그녀는 단적으로 혐오는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혐오는 우리의 불안과 공포의 산물인데,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을 잘 살펴보면 거기엔 두 가지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전염의 공포요, 다른 하나는 추락의 공포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는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추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 때 혐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피하고 싶은 것인데, 얼마든지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혐오의 감정을 배태한다.


 최근 강남역 묻지마 살인으로 저변에 깔려 있던 여성 혐오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했는데, 너스바움에 따르면 그것도 다 설명이 된다. 물론 이것은 수치심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것이지만 혐오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특히나 남성의 경우, 자신이 느끼는 수치심이 곧잘 혐오로 연결되는 까닭이다. 너스바움은 여성 혐오가 남성이 아주 어릴 때부터 받는 사회화 과정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남성은 어릴 때, 여성과는 다르게 사회화 된다. 여성들은 부모에게서 자신의 감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잘 표현하며 다른 이의 감정에 자주 공감하도록 하는 사회화를 거치지만, 남성의 경우엔 반대다. 아무도 자신의 내적 세계를 탐구하고 표현하라고 말해주지 않으며 어떤 감정 상태에 대해 물어도 남자니까 하는 식으로 간단한 대답으로 마무리 된다. 남성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보단 무시하거나 감추도록 훈련 받는다. 꽃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 우는 것도 모두 자신의 흠이 된다. 그런 남성성의 강요는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든다.


 35년간 남학생을 치료해 온 임상 심리학자 댄 킨들론과 마이클 톰슨에 따르면 소년들이 흔히 보이는 공격성은 결코 테스토스테론의 효과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호르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여성성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공격적인 적대감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혐오는 자신의 수치와 관계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나약하다는 생각 때문에 추락에 대한 불안이 생겨나고, 그러다 결국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전염의 공포가 엄습한다. 여성 혐오는 이렇게 자리 잡는다. 결국 여성 혐오란 자신이 느끼는 여성성에 대한 편협하기 그지 없는 적대의 산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결국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여성성이 절대 부족함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오로지 사회의 강요가 초래한 왜곡된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에서 고통을 느낀다면 사회가 잘못된 안경을 씌운 것에 있다. 더구나 그 색안경은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 형편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성 혐오 또한 100% 부조리일 뿐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그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혐오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인지 충분히 논증해 보인다. 논의는 체계적이고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쉽게 혐오와 수치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의 형성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우리들에게 충분한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분노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홧김에 저지르는 폭행이나 상해치사가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야 할까?'에 대해, 너스바움이 남성의 사회화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교육 받지도 못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스바움의 말마따나 감정은 이성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자신의 감정들에 대해 차분히 헤아려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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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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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3부가 드디어 나왔다. 3부의 제목은 '포르투나의 선택'. 첫 느낌은 감격이다. 결코 우리말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맞다. '포르투나의 선택'은 초역이다. 이제야 술라의 말년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부상을, 늘 그렇듯이 뛰어난 콜린 매컬로의 필치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나의 선택' 1권은 모두 2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기원전 83년 4월부터 81년 5월까지 담는다.


 기원전 88년.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놓고 용호상박으로 다투고 있었던 마리우스와 술라. 그 때,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손길은 술라에게로 향했다.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가 아시아를 침략하여 로마의 속국들을 해방시키자 결국 그리스와 소아시아가 로마의 총독들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 일로 인해 술라가 그것을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져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집정관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로마의 일인자가 된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로마의 동부로 떠난다. 하지만 포르투나의 손길은 변덕스러웠으니, 말년의 뇌졸증으로 이성의 힘이 약해진 마리우스가 그런 술라를 질투하여, 술라가 로마를 비운 사이에 로마를 다시 장악하여 끝내 집정관을 자신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기량과 대중의 인기로 인해 하늘 아래 같이 존재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던 전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결국 술라는 그 때까지 로마 역사상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아피우스 가도를 따라 로마의 수도로 진격하는 일을 선택한다.


 기원전 83년. 다시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여전히 로마의 안전을 위협하는 동쪽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포르투나의 손길은 또 다시 변덕을 부려 반대쪽을 향한다. 당시 다른 한 명의 집정관(아시다시피 로마는 집정관을 두 명 선출한다.)은 킨나였는데, 그는 술라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킨나는 술라가 로마에 없는 사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아프리카에 피해 있었던 마리우스를 로마에 오도록 한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오자마자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집정관 자리에서 축출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드디어 집정관 자리에 일곱번째 오른다. 그의 삶을 오래도록 지배하고 있었던 예언은 그렇게 성취된다. 포르투나 여신의 손길이 이번에는 마리우스를 향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집정관에 오르고 얼마있지 않아 지병인 뇌졸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만 것이다. 마리우스의 죽음과 함께 그 때까지 승기를 잡고 있었던 킨나의 운도 다하여 결국 부하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결국 포르투나는 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외견은 그렇게 보였다. 일단 마리우스가 죽은 현재 로마에는 더이상 술라의 라이벌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3부의 1권은 포르투나가 다시 한 번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독재관까지 되어 가장 정점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술라의 라이벌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만큼 오만하고, 그만큼 야심이 크며 세상을 그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놀이터로 여기는 이들을.


 '들'이라고? 맞다. 복수()다. 두 명이니까. 그들이 바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다. 그들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훗날 '삼두 정치'로 같이 로마를 지배할 그들이. 그리고 마치 로마가 전제정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이, 원로원과 1인 통치를 두고 전면전을 펼칠 그들이 말이다. 이렇게 바야흐로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흥미로운 시간의 막이 올라가는 것이다.


 '로마의 일인자'를 선택하는 포르투나의 손길은 누구에게로 향하게 될까? 물론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다들 인정한다.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폼페이우스가 로마 최고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폼페이우스마저 없었다면 술라가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는 콜린 매컬로의 손 끝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로마의 묘사를 통해 분명히 보게 된다. 포르투나는 언제, 어디서든 반전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예언을 통해 카이사르가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그것을 막기 위해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절대 집정관에 오를 수 없게끔 무거운 굴레를 씌워버렸다. 현실 정치에 도저히 발을 내밀 수 없는 종교인, 즉 신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로마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카이사르에겐 오롯이 절망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말이다. 카이사르가 거기서 헤어날 방법은 없었다. 당시 로마의 절차상 신관에서 해방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신처럼 커다란 권력이 아니면 풀어줄 수 없는 사슬이었다. 하지만 정말 포르투나의 손길이 이 때부터 카이사르에게 있었던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이 절체절명에 다다른 순간에.


 사람의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모인 집합으로써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 불가다. 술라의 권태가 낳은 변덕이 아니었다면 로마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기억하는 카이사르라는 위상은 폼페이우스가 되었을 것이며 로마도 언제까지나 원로원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포르투나의 우연한 손짓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로마의 역사가 흘러가는 물줄기를 크게 바꿔버렸다. 누구도 볼품없는 노새를 타고 로마를 떠난 카이사르 앞에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포르투나가 무엇이기에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포르투나가 자신과 함께 한다고 생각했던 술라는 포르투나를 이렇게 생각했다.

 

 "로마인인 술라는 신들이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형적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구체적인 사건들에 영향을 자신보다 열등한 다른 힘을 통제하는 구체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신들은 자기들의 세계에서만큼 산 자들의 세계에서도 질서와 체계성을 원했다. 산 자의 세계가 질서 있고 체계적이면 힘들의 세계에서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행운과 복을 주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덜 주며, 또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힘은 포르투나였다. 그리고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라 불리는 힘은 다른 모든 힘들의 총합이자,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하나 힘들에게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힘들을 한데 묶는 결합조직이었다.(p. 291 ~ 292)


 이제 독재관이 된 술라는 포르투나에서 막시무스로 옮기려 한다. 만인지상의 권력을 차지했으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힘마저 가지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술라는 이 말을 한 뒤에 로마 최고 신관을 선거 없이 자신이 직접 뽑겠다고 하면서 그 전에 지금 특별 신관으로 있는 카이사르를 처형하겠다고 선언한다. 자신만큼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는 존재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포르투나와 막시무스의 힘은 대비된다. 그리고 이런 대비를 통해 포르투나가 가진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도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견제와 균형이라는 것.


 마리우스와 술라. 술라와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

 포르투나의 손길이 한 인물에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것은 모두 모든 힘이 어디 하나로 결집되지 않게 하려는, 그렇게 다들 분담한 가운데 서로에 대한 견제를 통해 균형을 가져오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술라는 포르투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카이사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나 여신의 선택을 받은 건 나지! 내게는 늘 운이 따랐어. 하지만 거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기억하게. 포르투나는 질투심이 강하고 요구가 많은 애인이야."(p. 426)


 자신의 원수인 킨나의 딸과 결혼한 카이사르에게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술라 앞에서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며 당당하게 외쳐, 온전히 술라의 반대편에 서겠다고 선언한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포르투나에 대해 다른 견해로 반박한다.


"무릇 애인이란 그래야 제맛이죠!"(p. 426)


 그는 질투와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태연히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역사적인 인물의 최후 만남이 끝났다. 한 쪽은 막시무스의 대변자가 되어, 다른 한 쪽은 포르투나의 대변자가 되어.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소설에서 폼페이우스를 보며 바로가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혼란이 시작되기 전에는 누구나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다. 폼페이우스의 군사행동이 시작되고 적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 때, (카르보나 세르토리우스가 아닌) 술라와 대면할 때 폼페이우스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시험일 것이다! 같은 편이든 아니든,늙은 황소와의 관계가 젊은 황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굽힐 것인가? 그는 굽힐 수 있는가?(p. 39)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도 진정한 시험을 치뤘다. 폼페이우스는 굽혔고, 카이사르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많은 것을 가졌던 폼페이우스는 더 많은 것을 가진 술라에게 굴복했고, 가진 것이 거의 없었던 카이사르는 대항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권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라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물리치며 로마로 입성하는 과정과 독재관이 되어 최고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 그리고 그런 술라에게 가담한 폼페이우스와 반대 편에 선 카이사르의 태동을 그린다. 더하여 앞에서 인용한 누구는 술라 최고의 실수라고 부르는 카이사르의 사면이라는 역사상 아주 중요한 장면까지. 단 한 순간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더구나 1부와 2부에서 이미 넘치게 보여준 현란한 필력은 여기서도 여전히 빛을 발해 한층 더 그랬다. 하물며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들까지 등장해 생생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니 어떻게 도중에 관둘 수 있을 것인가! 빛의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고 결국 얼른 2권을 읽고 싶다는 바람만 한가득 안은 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술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바로에게 폼페이우스는 '술라 자신의 존엄'이라고 대답한다. 물질 만능주의였던 로마에서 술라는 유일하게 무형의 가치를 쫓는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존엄은 무력을 통해 지켜졌다. 그는 다른 로마의 일인자와 다르게 말년에 그 어떤 신변의 위험도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을 암살할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재관이 되자마자 자기 눈에 가시 같았던 원로원과 기사 계급 사람들을 모두 2,600명 처형했다. 대부분은 원로원 보다 민회의 권위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민중파 사람들이었다. 그 자신도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타고난 혈통을 더 중시했다. 그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을 만들려 했고 그래서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어쩌면 그가 귀족정을 원했던 것은 마리우스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출신 문제도 있어서 민중파 쪽이었다. 술라를 지지했던 귀족들은 그의 권력을 등에 업고 로마와 이탈리아에 있는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4,700명이나 살해했다. 술라의 존엄은 그렇게 지켜졌고 유지되었다. 수많은 반대자들의 피로써. 그가 추구하는 막시무스가 과연 어떻게 이뤄지는 힘인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3부의 여정은 자신의 존엄을 쫓는 이들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술라에 맞서서 포르투나를 따르는 카이사르는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만들어 갈 것인가? 카이사르 역시 술라처럼 최고 권력에 오른다. 하지만 그가 그런 자리에 올랐던 것은 마리우스를 따라 원로원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친 표현일 수 있지만, 막시무스가 아닌 포르투나적인 힘의 실천이었다. 이제 거기에 이르는 여정이 2권 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빨리 만나고픈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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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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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고 작가라 생각하는 하라 료가 돌아왔다. 이번엔 단편집이다. '천사들의 탐정'은 하라 료의 유일한 단편집이다. 아직도 그의 대표작(유일작이기도 하다.)인 사와자키 시리즈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당장 만나볼 것을 권해드린다. 과작으로 유명한 그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로 88년에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이 단편집을 포함하여 네 권의 장편 밖에 없다. 장편은 그 중, 2004년에 나온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를 제외하고 세 작품 모두가 발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죽인 소녀'를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나 '안녕 긴 잠이여' 어느 것을 읽어도 좋다. 시대를 까맣게 물들인 부조리와 비윤리적인 어둠에 상처받고 비틀거린 적이 있다면 다들 하나같이 쓰라린 당신의 영혼을 가만히 다독여 줄 테니까. 당신이 마주하는 지옥 앞에서, 당신 곁에 서서 같이 지켜봐줄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사립탐정 사와자키다.



 제목에 '천사들'이 들어간 이유는 도합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이 단편집에서 아픔을 겪고 비극을 당하는 자들이 모두 십대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의 어둠에 덜 물들었기에 천사인 것이다. 어둠에 덜 물들인만큼 그들은 이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에 구원의 변화를 가져올 미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단편에서 사와자키가 목도하는 것은 그런 천사들의 날개조차 꺾여버렸다는 것 뿐이다. 비정한 어른들의 시대는 그들마저 삼켜버려 결국 비내리는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무수한 깃털의 잔해로 둘러싸인 가운데 부러진 날개를 껴안고 신음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현장들을 관통하면서 사와자키는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분명하게 확인한다. 천사와 같은 아이들을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간 어른들의 무책임을.


 열여섯 살 소녀 가수가 자살하고, 열아홉 살 매니저는 공갈미수에 그쳤지만 스무 살 언저리의 소년 가수들은 대마초 파티에 어울렸다가 체포되었다. 그 일로 크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주변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흥미가 없는 듯했다. 애초에 의뢰인이 있어서 조사에 나섰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쌀쌀했던 날 밤에 잘못 전화를 걸어왔던 소녀는 결코 자살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는 내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던 셈이지만, 그런 건 자랑이 될 수 없었다.(p. 208)


 단편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면 단편의 세계가 지금 우리의 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리라. 단적으로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가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진실조차 어른들의 방관과 협잡 속에 규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OECD 국가 중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나라이고 연애과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를 넘어 이제는 집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는 '오포세대'란 말이 공공연한 유행어가 되고 있는 나라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뜯어고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어른들로 가득한 시대. 정녕 아이들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천사들의 탐정'은 90년에 나왔다. 일본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의 끝자락. 끝없는 탐욕으로 부풀대로 부풀어진 거품 안에서 그 과실에만 흥청망청 취하느라 그만 입혀버린 상처들, 낳아버린 아픔들이 차츰 드러나던 시기. 바로 그 때, '날개 잃은 천사들에게'란 작가의 말과 함께 '천사들의 탐정'은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어른들이 몰랐던,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감추려 했었던 아이들의 현재를 재현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들, 버림받고 잊혀진 아이들, 어른들의 부정을 직시하고 있는 아이들, 죽고 싶을 정도로 강한 절망을 느끼지만 호소할 때가 어디에도 없는 아이들, 멋대로 규정되어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욕심으로 희생된 아이들. 사와자키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지금 당신들의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은 돈이 아니라 바로 이 아이들이 아니냐며 외친다. 그는 의뢰를 완수한 것의 대가로 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진실과 어른다운 책임을 원했으나 어른들은 오로지 사와자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입힌 상처를 봉인하고 망각하려고만 들었다. 그러므로 사와자키가 단편들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돈에 대한 거절은 그대로 '아이들의 아픔은 이런 것으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 오로지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고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다할 때라야 치유가 가능하다'는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탐정은 언제나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다. 그가 추구하는 사건의 진실은 내부에서는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고 오직 바깥으로 나가 내부를 다시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탐정이 행하는 수사가 다양한 타인들을 통한 탐문으로 이뤄지는 것은 그렇게 계속 타자들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벽을 허물어 자신의 바깥으로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은 경계 위에 제대로 섰을 때, 문득 발견된다. 특히나 하드보일드 탐정은 현상된 비극 앞에서 사회의 책임을 추적하는 자이므로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와자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가 서야 할 경계가 하나 더 존재한다. 바로 어른과 아이의 경계이다. 그 경계에서 사와자키는 야누스적인 면모를 취한다. 어른들에겐 비난과 책임을 통감하라는 호소의 얼굴을, 아이들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처음 나오는 '소년이 본 남자'부터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털어 자신과 무관한 여자를 구해달라며 사와자키에게 의뢰해 온다. '자식을 잃은 남자'에선 비록 자신의 출생 사실조차 모르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자식이 불행한 사고를 당한 현장에 추모의 꽃다발을 놓는다.


 나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 뒤 주차장 쪽 도로로 향했다. 오가는 차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에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아버지를 대신해 흰 장미 한 송이를 길에 던졌다. 그 때 길 건너편 보도 끄트머리에 놓인 옅은 색의 예쁜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가 어린 여동생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꽃다발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p. 108)


 꽤나 쿨한 결말이지만 '자식을 잃은 남자'을 읽으면 꽤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자식을 잃은 남자'는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어 더 인상 깊게 다가오는데, 너무나 커다란 것에 눈이 현혹된 나머지 그만 정말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놓쳐버린 어른과 오히려 그런 어른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아이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작품으로, '천사들의 탐정'이 추구하는 바가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다. 이는 '선택받은 남자'와 더불어 하라 료가 '천사들의 탐정'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진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개의 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선택받은 남자'는 마지막에 나오는 단편으로, 책임을 다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사나기'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구원으로써의 미래는 바로 그럴 때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한 작가의 소설은 사회를 향한 그의 기도라고 말한 바 있다. '천사들의 탐정'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고통과 절망만 그려졌다면 이렇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그만큼이나 희망의 면모마저 누벼 놓았기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기도는 희망을 의탁하고픈 마음의 발현이니까. 하지만 일본은 이 간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하여 마치 저주처럼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결코 그 때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세월호 참사와 최근 일어난 강남역 묻지마 살인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 도어 수리 기사 사망 사건.

세 사건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을 참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강남역에 붙은 누군가의 추모 포스트잇에 쓰여진 것처럼 다만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뿐이었다는 것을.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극의 연쇄를 끊을,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단순 사고라고, 한 정신병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치부하거나 작업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라고 오히려 희생자를 공격하기 바쁘다. 교훈을 얻기 위한 성찰은 생계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우연하게 발생한 아주 특수한 사건으로만 몰아가 망각의 주문을 스스로 건다. 지옥에서조차 혀만 꼬챙이에 꾀고 있는 사람은 불길 가득한 탕에서 온몸이 구워지는 사람을 보며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하면서 안심한다고 한다. 바로 다음 차례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지옥은 청맹과니의 세상이다. 자기 몸으로 닥쳐오지 않으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렇게나 징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도 아직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심히 넘기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보자면 지옥은 다른 게 아니라 수월하게 살기엔 좋은 방관과 망각 자체가 개방시키는 것 같다.


 그런 때에, 하드보일드는 방관과 망각의 봉인을 뜯는다. 봉인으로 꼭꼭 감춰졌던 타인의 비극을 출현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립탐정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와 비슷하다. 무엇이 진정한 과오인지 모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성 세대의 가치관으로 게토가 되어버린 중심지를 떠나 스스로 변방에서 유랑을 자처하며 무시되고 망각된 아픔을 나열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라고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대가 가장 어려울 때, 하드보일드가 출몰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시다시피 하드보일드가 출현한 원점은 대공황 때였다.


 비록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장소도 틀리지만, 나타나게 된 상황은 결코 차이가 나지 않기에, '천사들의 탐정'에 나타난 사와자키의 여정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가 지옥이라는 것은 그만큼 괴물 되는 것이 쉽다는 것으로도 증명되는 것 같다.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갑질을 목격한다. 그 때 갑질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괴물처럼 보인다. 최근엔 문학 판사라며 재직 시절 꽤나 명망 높았던 판사가 변호사가 되자마자 돈의 유혹에 굴복해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 사건도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범죄를 가리려 한 행동은 과연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열했다. 그녀도 괴물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두 개의 위험에 노출된 것 같다. 하나는 언제든 무고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 다른 하나는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위험. 그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생각해 보면 하나로 모인다. 타인의 처지와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자들이 괴물이 되니까. 결국 타인의 처지와 아픔을 내 것처럼 여기고 그것에 대해 꾸준히 성찰하는 것만큼 두 개의 위험을 피할 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하드보일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력하나마.


 소설의 리뷰를 이렇게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소설에 대해서만 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우리시대엔 보고 기억해야 할 타인의 아픔이 정말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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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을 봤습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말아 주세요. 이 영화는 스포일을 당하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 장면 중 하나인 후반이 의미없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오직 그것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종구의 혼돈을 관객의 혼돈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믿음과 의심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한 부분을 절감토록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스포일러를 무조건, 모조리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추격자'와의 유사성이었습니다.

 '곡성'은 여러 면에서 '추격자'와 비슷합니다. 일단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 '추격자'에서 포주인 주인공 중호(어쩐지 이름마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처럼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종구는 장모와 아내 그리고 딸로 이루어진 가족 내에서 유일한 남자입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 중호도 전직 경찰이었지요. 사건에 개입되는 방식도 유사합니다. '곡성'의 첫 장면은 아침 일찍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인해 종구가 사건 현장으로 호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건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추격자'에서도 중호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은 '4885'라는 전화번호 때문이었죠. 주인공 자신이 정말 마주해야 하는 사건이 다가오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모두 소문이 먼저였습니다.


종구는 동료 경찰이 말해준, 지금 동네에 떠돌고 있다는 일본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먼저 들었었죠. 중호 역시 '추격자'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로부터 사건의 진짜 내막에 대한 소문을 먼저 듣게됩니다. 그 전까지 중호는 여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반응도 똑같습니다. 종구도, 중호도 처음엔 믿지 않습니다. 소문의 당사자와 첫 대면이 우연이라는 것도 겹칩니다. 종구는 일가족이 몰살된 사건 현장이자 불타버린 집터에서 사건을 모두 목격했다고 말하는 무명을 찾다가 느닷없이 조우하고, '추격자'의 중호도 자신이 미끼로 보낸 미진을 찾다가 자기가 살해한 집주인을 찾아온 부부를 살해하고 어디론가 떠나던 범인 지영민과 갑작스런 차추돌로 만나게 됩니다.



 '미끼'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미 '추격자'에서 미끼는 나와 있었습니다. 중호는 4885란 번호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여자를 납치해 팔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자를 잡기 위해 미진을 미끼로 씁니다. '곡성'에서 종구의 딸 이름은 '효진'인데, 아이의 상태가 괴이하게 되자 도움을 청해 찾아온 무당 일광(황정민 분)은 아이가 미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진은 중호가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미끼이기도 합니다. 사실 종구는 효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건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초반에 종구가 얼마나 겁많고 소심한 지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니까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무명은 종구에게 놈이 원하는 것은 가족들의 피를 말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효진은 피를 말리기 위한 미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광도 종구에게 "미끼를 통째로 삼켜버렸구만'이란 말을 하죠. 


 재밌는 것은 미끼가 되는 존재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름이 미진과 효진으로 비슷하고, 둘 다 미끼가 될 때 몸에 열이 나 아팠습니다. '추격자'에서 미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했지만 중호가 억지로 보냈죠. '곡성'에서도 효진이 완전히 달라지기 직전 종구에게 아픔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두 그 호소는 의미 없게 됩니다.



 범인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추격자의 '지영민'과 '곡성'의 일본인은 적그리스도 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영민은 한 때 교회의 신자였으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교회 집사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지영민은 자신이 살해한 이들을 모두 그 집 정원에 매장하는데, 영화는 그 때까지 계속 예수상을 조각하는 지영민의 모습이나,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밤이 십자가로 뒤덮인 장면 등을 통해 지영민을 기독교와 연결시켜 갑니다.(지영민의 골방에 붙어있던 그림과 일본인의 숨겨진 방 벽에 붙어 있던 사진들도 유사한 장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영민을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갖게 합니다. 지영민이 사실은 적그리스도고, 그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원에 매장된 시신들은 모두 자신의 신도인 셈이라고.


 이렇게 보면 '곡성'의 일본인과 정말 유사하죠. 마지막 장면에 얼핏 보이는 일본인 손바닥에 난 성흔, 카메라로 자신이 파멸시킨 영혼들을 속박하는 것 등. 그렇게 그 역시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신도를 모으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광이 말하는 '살'로 표현되는 저주가 그의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일광의 굿 장면을 통해 더욱 전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결국 살이 향한 곳이 다름아닌 효진의 영이라고 생각할 때, 일광의 굿은 굿이 아니라 예배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일단 그가 입은 옷이 전통 무복은 아니죠. 하얀 색이 많은 것이 목사들이 예배할 때 흔히 입는 옷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제 착각일까요? 더구나 말이 전혀 없고(우리나라 굿은 응답 과정이 있으니까요)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하면서 과장된 몸 동작은 부흥회 같기도 하고, 염소 도살 같은 것은 구약의 번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다 효진 방의 제단 위에 놓인 소도 있지요. 그 소도 구약 때 번제에 사용되던 대표적인 동물이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인이 되살린 시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의 나사로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나사로를 되살렸듯 일본인이 되살린 것이죠. 하지만 일본인이 되살린 나사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 옵니다. 동일한 행위, 정반대의 결과. 일본인이 가진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는 순간이죠.


 이런 면에서 '곡성'은 '추격자'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기독교적인 종말론 분위기가 더욱 확대되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수긍한다면 감독이 첫 작품부터 관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이며 다만 이번엔 좀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추격자'와 '황해'에서 거듭되었던 감독의 말은,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지옥이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으며 거기서 우리를 구원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격자는 그래도 중호가 희생자의 아이를 떠맡으면서 희망의 싹이라도 보였지만 '황해'는 그조차 없습니다. '황해'의 주인공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별 짓 다하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무엇보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요? 구남. 그대로 구원(영화에선 아내로 표상되었죠.)을 구하는 남자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천신만고라는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닐만큼 그는 갖은 구원을 향한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얻는 것은 구원이 이미 상실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초라한 죽음 뿐이었죠. 결국 그는 돌아가지 못하고 황해가 그의 무덤이 됩니다.


 저는 '곡성'에서 종구가 일본인을 잡기 위해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띄더군요. '황해'에서도 구남이 추운 겨울날에 높은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은 바벨탑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인간의 능력은 '바벨탑'처럼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가로 그 우수성을 표현하기도 했었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종구가 그 곳에 올랐을 때, 카메라는 흔들려 불안하게 그를 잡습니다. 비상 보다는 추락의 위험을 더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황해'에서도 구남이 산으로 올랐던 것은 달아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상마저 입어 그 높은 곳은 죽음의 접경이기도 했습니다.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구의 몸은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더욱 추락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말리기까지 하죠. 인간의 위대함의 증거가 되었던 가장 높은 곳이 이제는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도 구원은 커녕 불안만 가중될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라간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본인이 바로 아래 있습니다. 이제 곧 지옥을 열 지도 모를 그 존재가, 바로 발 아래 보이지 않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엔 '곡성'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이 지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곡성'에선 주로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 파괴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렇게 영화 본편에서 한 가족이 살던 집이 파괴당하는 장면은 감독의 영화에서 없었습니다. '추격자'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이었죠. '황해'에서도 가족이 생계와 불륜으로 붕괴되긴 했지만 완전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곡성'은 시작부터 가족 몰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앞 장면인 종구의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 모습에 더욱 대조됩니다. 원래 종구는 아침을 먹지 않고 사건 현장으로 거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모가 이런 말로 그를 붙잡습니다.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추격자'와 '황해'까지는 그렇게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종종 가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집은 유일한 피난처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은 몰살당하고, 그 집은 전소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남은 것은 신 밖에 없습니다. '곡성'은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신이 우리 앞에 현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신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두 번 잡히는데(감독은 성당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단독자 신이 거하는 장소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외관은 언제나 요괴가 출몰하는 어스름의 시간대에 낮게 웅크려 있고, 그 내부는 어둡고 비어있습니다.(외관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명이 앉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신부는 작고 초라한 몰골이고, 부제 역시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신인 무명 역시 종구의 비극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종구에게 종말이 닥쳐온 순간, 신은 무력하게 어두운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뿐입니다.(무명을 신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영화에서 가장 먼저 경계를 넘는 자라는 것. 그리고 '금어초'로 경계를 만드는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경계를 초월하고 짓는 것은 신의 대표적인 속성이죠. 그녀가 종구에게 '아이의 아비가 죄를 지어', '의심' 운운 한 것도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이의 아비'는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 방식이고, 죄와 믿음은 종교에서 신의 권위를 위해 가장 강조하는 것들이죠. '욥기'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욥이 묻자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여 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신처럼 무명 역시 그렇게 대답합니다. 종구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의 대답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더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서 신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신조차 무력합니다. 손까지 잡았는데도 종구의 비극을 막지 못합니다.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우리가 영화에서 마지막 보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어둠에 먹힐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영화 초반의 유모차와 마지막 효진의 모습에서 미래마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남은 것은 이 끔찍한 지옥으로서의 현재. 종구는 언제가 효진에게 했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아마도 이름이 종구인 것은 이런 중얼거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마지막 장면의 그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독백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았을 지 모릅니다. 장모가 처음 그에게 했던 말. '산 자는 산 자고,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 말의 본질은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으니 괜찮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세월호'나 '강남역 무차별 살인' 같은 타인의 비극을 보아도 그게 적어도 내게 닥친 것은 아니니까 무심할 수 있는 마음의 본질에도 놓여 있는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난 그렇지 않을 거야' 하는 말은 종구의 마지막 독백처럼 허황된 주문에 불과합니다. 지옥은 벌써 우리 발 아래 와 있고, 언제라도 우리를 삼키려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영화 초반에 언급된,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누가 복음이 인용된 진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꼭 만져봐야 아느냐란 그 말은 직접 당해봐야 꼭 알겠느냐?'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비극들 중에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곡성'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영화 초반 그 비극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종구가 결국엔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영화 초반, 종구는 사건 현장에 가장 늦게 오고, 와서도 멍하니 구경만 했습니다. 카메라는 현장에서 멀찍하게 벗어난 종구나 화면 구석으로 밀려난 종구를 많이 보여주죠. 그렇게 멀리, 얼마든지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그였습니다만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파출소 정전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입니다. '버섯 때문이래' 하면서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던 종구가 느닷없이 현관 유리창 바로 앞에 나타난 나신의 여인을 목격하니까요. 문자 그대로 그것은 엄습입니다.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일광의 말처럼 이유도 없습니다. 종구는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신의 대답은 아무 이유도 없다는 사실만 밝혀줄 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어떤 비극도 나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타인의 비극이든 무심해서는 안되며 나의 비극인 것처럼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곡성'이 말하는 것은 달아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피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는 뜻입니다.


 타인의 비극에 대한 둔감과 망각이  결국은 우리 파멸의 열쇠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너무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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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다구리 2016-05-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무섭고 의미잡기가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점.. 대단하시네요. 욥기의 주제와 관련시킨 점에 뭔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욥의 노래>라는 민음사의 시집에서 비슷한 해석을 읽었는데, <곡성>이란 영화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랐습니다. 이 블로그를 여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467498 도서평에 소개할께요.^^

오드득 2016-06-09 23:59   좋아요 0 | URL
페라리님,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좋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종구와 무명의 대면은 제게 꼭 욥과 하나님의 대면처럼 보이더군요. 욥이 그 때 신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물었듯이, 종구도 무명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 같았어요. 욥기를 다룬 시집이 있다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16-05-3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그저께 되어서야 한 번 보고,
어제 안 되겠어서 한 번 더 보았답니다..... 참 어려운 영화예요.

댓글을 하두 늦게 달아서 헤르메스님이 확인이나 하실 수 있으실지, ^^, 의심과 두려움, 공포로 인해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것을 흡수하여 점점 세력이 커지는 ˝악˝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의심과 두려움으로 빠지는데, 신은 그저 ˝하지 마˝ 라고 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