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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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고 작가라 생각하는 하라 료가 돌아왔다. 이번엔 단편집이다. '천사들의 탐정'은 하라 료의 유일한 단편집이다. 아직도 그의 대표작(유일작이기도 하다.)인 사와자키 시리즈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당장 만나볼 것을 권해드린다. 과작으로 유명한 그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로 88년에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이 단편집을 포함하여 네 권의 장편 밖에 없다. 장편은 그 중, 2004년에 나온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를 제외하고 세 작품 모두가 발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죽인 소녀'를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나 '안녕 긴 잠이여' 어느 것을 읽어도 좋다. 시대를 까맣게 물들인 부조리와 비윤리적인 어둠에 상처받고 비틀거린 적이 있다면 다들 하나같이 쓰라린 당신의 영혼을 가만히 다독여 줄 테니까. 당신이 마주하는 지옥 앞에서, 당신 곁에 서서 같이 지켜봐줄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사립탐정 사와자키다.



 제목에 '천사들'이 들어간 이유는 도합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이 단편집에서 아픔을 겪고 비극을 당하는 자들이 모두 십대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의 어둠에 덜 물들었기에 천사인 것이다. 어둠에 덜 물들인만큼 그들은 이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대에 구원의 변화를 가져올 미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단편에서 사와자키가 목도하는 것은 그런 천사들의 날개조차 꺾여버렸다는 것 뿐이다. 비정한 어른들의 시대는 그들마저 삼켜버려 결국 비내리는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무수한 깃털의 잔해로 둘러싸인 가운데 부러진 날개를 껴안고 신음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현장들을 관통하면서 사와자키는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분명하게 확인한다. 천사와 같은 아이들을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간 어른들의 무책임을.


 열여섯 살 소녀 가수가 자살하고, 열아홉 살 매니저는 공갈미수에 그쳤지만 스무 살 언저리의 소년 가수들은 대마초 파티에 어울렸다가 체포되었다. 그 일로 크게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주변 어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흥미가 없는 듯했다. 애초에 의뢰인이 있어서 조사에 나섰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쌀쌀했던 날 밤에 잘못 전화를 걸어왔던 소녀는 결코 자살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는 내 직감은 어긋나지 않았던 셈이지만, 그런 건 자랑이 될 수 없었다.(p. 208)


 단편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면 단편의 세계가 지금 우리의 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아보였기 때문이리라. 단적으로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가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진실조차 어른들의 방관과 협잡 속에 규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OECD 국가 중 아이들이 가장 불행한 나라이고 연애과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를 넘어 이제는 집과 인간관계마저 포기하는 '오포세대'란 말이 공공연한 유행어가 되고 있는 나라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뜯어고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어른들로 가득한 시대. 정녕 아이들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천사들의 탐정'은 90년에 나왔다. 일본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의 끝자락. 끝없는 탐욕으로 부풀대로 부풀어진 거품 안에서 그 과실에만 흥청망청 취하느라 그만 입혀버린 상처들, 낳아버린 아픔들이 차츰 드러나던 시기. 바로 그 때, '날개 잃은 천사들에게'란 작가의 말과 함께 '천사들의 탐정'은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어른들이 몰랐던, 어쩌면 알면서도 애써 감추려 했었던 아이들의 현재를 재현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들, 버림받고 잊혀진 아이들, 어른들의 부정을 직시하고 있는 아이들, 죽고 싶을 정도로 강한 절망을 느끼지만 호소할 때가 어디에도 없는 아이들, 멋대로 규정되어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욕심으로 희생된 아이들. 사와자키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지금 당신들의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은 돈이 아니라 바로 이 아이들이 아니냐며 외친다. 그는 의뢰를 완수한 것의 대가로 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진실과 어른다운 책임을 원했으나 어른들은 오로지 사와자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입힌 상처를 봉인하고 망각하려고만 들었다. 그러므로 사와자키가 단편들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돈에 대한 거절은 그대로 '아이들의 아픔은 이런 것으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 오로지 진실을 온전히 파악하고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다할 때라야 치유가 가능하다'는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탐정은 언제나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다. 그가 추구하는 사건의 진실은 내부에서는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고 오직 바깥으로 나가 내부를 다시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탐정이 행하는 수사가 다양한 타인들을 통한 탐문으로 이뤄지는 것은 그렇게 계속 타자들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벽을 허물어 자신의 바깥으로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은 경계 위에 제대로 섰을 때, 문득 발견된다. 특히나 하드보일드 탐정은 현상된 비극 앞에서 사회의 책임을 추적하는 자이므로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와자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가 서야 할 경계가 하나 더 존재한다. 바로 어른과 아이의 경계이다. 그 경계에서 사와자키는 야누스적인 면모를 취한다. 어른들에겐 비난과 책임을 통감하라는 호소의 얼굴을, 아이들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얼굴을 내보이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처음 나오는 '소년이 본 남자'부터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털어 자신과 무관한 여자를 구해달라며 사와자키에게 의뢰해 온다. '자식을 잃은 남자'에선 비록 자신의 출생 사실조차 모르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자식이 불행한 사고를 당한 현장에 추모의 꽃다발을 놓는다.


 나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 뒤 주차장 쪽 도로로 향했다. 오가는 차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에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아버지를 대신해 흰 장미 한 송이를 길에 던졌다. 그 때 길 건너편 보도 끄트머리에 놓인 옅은 색의 예쁜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가 어린 여동생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꽃다발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p. 108)


 꽤나 쿨한 결말이지만 '자식을 잃은 남자'을 읽으면 꽤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자식을 잃은 남자'는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어 더 인상 깊게 다가오는데, 너무나 커다란 것에 눈이 현혹된 나머지 그만 정말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놓쳐버린 어른과 오히려 그런 어른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아이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작품으로, '천사들의 탐정'이 추구하는 바가 가장 잘 드러난 단편이다. 이는 '선택받은 남자'와 더불어 하라 료가 '천사들의 탐정'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진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개의 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선택받은 남자'는 마지막에 나오는 단편으로, 책임을 다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사나기'라는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구원으로써의 미래는 바로 그럴 때 열리게 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한 작가의 소설은 사회를 향한 그의 기도라고 말한 바 있다. '천사들의 탐정'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고통과 절망만 그려졌다면 이렇게 여기지 않았겠지만 그만큼이나 희망의 면모마저 누벼 놓았기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기도는 희망을 의탁하고픈 마음의 발현이니까. 하지만 일본은 이 간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하여 마치 저주처럼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결코 그 때의 일본과 다르지 않다. 

 세월호 참사와 최근 일어난 강남역 묻지마 살인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 도어 수리 기사 사망 사건.

세 사건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을 참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강남역에 붙은 누군가의 추모 포스트잇에 쓰여진 것처럼 다만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뿐이었다는 것을.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극의 연쇄를 끊을,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단순 사고라고, 한 정신병자의 소행일 뿐이라고 치부하거나 작업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라고 오히려 희생자를 공격하기 바쁘다. 교훈을 얻기 위한 성찰은 생계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런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우연하게 발생한 아주 특수한 사건으로만 몰아가 망각의 주문을 스스로 건다. 지옥에서조차 혀만 꼬챙이에 꾀고 있는 사람은 불길 가득한 탕에서 온몸이 구워지는 사람을 보며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하면서 안심한다고 한다. 바로 다음 차례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지옥은 청맹과니의 세상이다. 자기 몸으로 닥쳐오지 않으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렇게나 징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도 아직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심히 넘기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보자면 지옥은 다른 게 아니라 수월하게 살기엔 좋은 방관과 망각 자체가 개방시키는 것 같다.


 그런 때에, 하드보일드는 방관과 망각의 봉인을 뜯는다. 봉인으로 꼭꼭 감춰졌던 타인의 비극을 출현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립탐정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와 비슷하다. 무엇이 진정한 과오인지 모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성 세대의 가치관으로 게토가 되어버린 중심지를 떠나 스스로 변방에서 유랑을 자처하며 무시되고 망각된 아픔을 나열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라고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대가 가장 어려울 때, 하드보일드가 출몰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시다시피 하드보일드가 출현한 원점은 대공황 때였다.


 비록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장소도 틀리지만, 나타나게 된 상황은 결코 차이가 나지 않기에, '천사들의 탐정'에 나타난 사와자키의 여정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가 지옥이라는 것은 그만큼 괴물 되는 것이 쉽다는 것으로도 증명되는 것 같다.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갑질을 목격한다. 그 때 갑질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괴물처럼 보인다. 최근엔 문학 판사라며 재직 시절 꽤나 명망 높았던 판사가 변호사가 되자마자 돈의 유혹에 굴복해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 사건도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범죄를 가리려 한 행동은 과연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열했다. 그녀도 괴물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두 개의 위험에 노출된 것 같다. 하나는 언제든 무고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 다른 하나는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위험. 그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생각해 보면 하나로 모인다. 타인의 처지와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자들이 괴물이 되니까. 결국 타인의 처지와 아픔을 내 것처럼 여기고 그것에 대해 꾸준히 성찰하는 것만큼 두 개의 위험을 피할 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하드보일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미력하나마.


 소설의 리뷰를 이렇게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소설에 대해서만 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우리시대엔 보고 기억해야 할 타인의 아픔이 정말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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