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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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스스로는 왠지 '이공계 스릴러'라는 레이블을 붙이고 싶은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작가 페터 회가 참 오랜만에 돌아왔다. 그 스밀라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캐릭터 '수잔'이 주인공인 '수잔 이펙트'란 소설과 함께 귀환한 것이다. 이 소설에도  '스밀라'처럼 기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수잔부터가 그러하다. 수잔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흉중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 수잔이 특별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고백하는 당사자가 최면 같은 것에 걸린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수잔에게 술술 털어놓는 것이다.


 "방금 그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었어. 소매를 걷어 올린 것도 내 의지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다른 것,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었어. (...) 누가 이걸 보고 평범한 대화라고 하겠어? 그걸 부르는 이름이 있니? "

 "제가 자란 곳에서는 수잔 이펙트, 수잔 효과라고 불렀어요." (p. 27)



 이처럼 제목의 '수잔 이펙트'는 수잔의 특별한 능력을 가리킨다. 나는 앞서 분명히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스밀라'와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스밀라'엔 스밀라 혼자 나왔지만, 이 소설엔 가족이 등장한다. 바로 수잔의 가족이다. 남편과 남매 쌍둥이가 있다. 모두 수잔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다. 수잔과 남편 라반이 함께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수잔 이펙트가 한껏 증강된다. 그들이 있는 공간 전체에 있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 혼자만 간직한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 앞다투어 찾아오는 것이다.(쌍둥이의 능력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길.) 수잔의 능력이 가진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자기 연구 주제까지 삼은 노벨상 수상자 안드레아 핑크는 라반 역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수잔과 연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유도된 탓일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가족으로 '타임지'에 소개까지 된 가족이지만 문제가 많다. 내내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다 지금은 완전히 해체 직전까지 가버렸다. 


 우리는 노력했다. 그래서 태생부터 독불장군에 극도의 개인주의자인 네 명이 과연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수수께끼도 풀었던 것이다.(p. 21)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푸는 것은 실패했다. 소설은 이 네 가족이 외국에서 그것도 온갖 추문을 일으켜 경찰에게 체포되거나 추적을 당하던 중에 덴마크의 법무부 장관 토르킬 하인의 지시로 모두 덴마크로 강제 송환된 데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수잔의 가족 앞에서 토르킬 하인은 어떤 일 하나만 해주면 가족 모두의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의 가족이 실은 자체 내에 이미 몰락을 잉태하고 있는 양자물리학과 다를 바 없다고 깨달은 수잔은 미래가 없는 가족에게 미래라는 시간을 가져다 주기 위해 그 임무를 맡기로 한다. 그것은 1970년대부터 존재했던 덴마크의 비밀 조직, 의회미래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보고서 두 건과 위원회 명단을 그 위원이었던 마그레데 스플리드를 찾아가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잔의 특별한 힘이 여지껏 굳게 닫힌 그녀의 입을 열게 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 생각은 들어맞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족족 살해되어 버리고 이런 죽음의 위협은 수잔과 가족에게까지 찾아온다. 이런 일이 잦아지니 수잔과 그 가족들은 단순해 보이는 임무 이면에 뭔가가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 '의회미래위원회'에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해 나간다. 놀랍게도 이 '의회미래위원회'는 비유하자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범죄 예지 시스템 같은 것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해서 보고서를 만들던 위원회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를 관리했던 자가 바로 토르킬 하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는 몰라도 마지막 보고서 두 개가 누락되었고 거기에 어떤 일들이 예측되어 있는지 알기 이해 하인은 수잔의 가족과 거래를 한 것이었다. 이제 하인마저 믿지 못하게 된 수잔과 가족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전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음모가 지금 이 순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의 작은 사건이 마침내 인류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무언가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수잔 이펙트'는 '스밀라'와 유사하다. 그 소설에선 스밀라의 내적 불안과 혼돈이 거대한 음모로 연결되었지만 이 소설에선 가족 간의 불신과 불통이 그것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소설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세계 붕괴의 음모는 사실 붕괴 중인 수잔 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때문에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대로 가족의 미래를 보존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와 이어진다고 하겠다. 누구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잘 알았으나 공동체의 운명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우선시 하는 바람에 종말을 맞아버린 '의회미래위원회'는 사실 극도의 개인주의로 똘똘뭉친 수잔의 가족이 수수께끼를 끝내 풀지 못했을 경우 찾아 올 불길한 예언이나 다름 없다. 공동체라는 점에서 수잔 가족의 모습은 또한 현재 프랑스 대선의 양상으로 한층 더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유럽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잔 이펙트'를 페터 회가 유럽 연합에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실린 그의 목소리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너무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하지 말며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들수록 무엇보다 상대방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하자 정도가 될 것 같다.


 재밌게 읽었다. '스밀라'에서 느꼈던 페터 회의 독특한 작품 세계가 잘 살아나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캐릭터도, 문장도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도 어느 하나 톡톡 튀지 않는 게 없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겐 다소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내 취향은 이런 쪽이므로 정말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상상 하나가 있다. 수잔을 우리나라 대선 토론에 참석해 보면 어떨까? 라반까지 함께. 그러면 다섯 명의 대선 후보 흉중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국민들에게 그대로 다 드러날텐데. 정치의 생명이 거짓과 모략 그리고 협잡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이 되는 그런 나라에 하루빨리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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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임무, 음모를 가지고 그들을 이용하는 조직 등을 볼 때 저는 페터 회 [콰이어트 걸]이 더 오버랩 되는군요. 재밌겠습니다^^

오드득 2017-05-08 00:23   좋아요 0 | URL
앗, 저는 ‘콰어어트 걸‘을 아직 못 읽었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독특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일련의 연속성이 느껴지네요. 꼭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딥 워크 - 강렬한 몰입, 최고의 성과
칼 뉴포트 지음, 김태훈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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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력이 떨어져서 고민이다. 그것을 나는 특히 책을 읽을 때 느낀다.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끼어들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읽은 부분을 멍하니 읽고 또 읽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물며 소설을 읽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등장 인물마저 헛갈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처음엔 기억력이 떨어져서 그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최근들어 부쩍 산만해진 탓이었다. 이런 내 모습이 갈수록 실망스러워 뭔가 집중력을 높일만한  묘책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책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능력을 만들어준다는 이 책, '딥 워크'를.


 저자는 칼 뉴포트. 현재 조지타운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조교수라고 한다. 따로 검색을 해 보니 미국에서 공부 잘 하는 사람으로 알아주는 존재였다. 그것도 고도의 집중력에 기반한 학습 방법의 카운셀러로 이름이 높아서 더욱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집중력을 증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왜 우리가 집중력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바로 그것을 앞으로 찾아올 시대 변화와 연계하여 설명해 주는 책이었다. 자기계발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인문학적 성찰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고나 할까. 기대했던 것 이상을 수확하게 된 풍성한 독서였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먼저 '딥 워크(DEEP WORK)'란 인지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 붙인 완전한 집중 상태에서 직업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에 의하면 카를 융, 미셸 드 몽테뉴, 마크 트웨인, 우디 알렌, 피터 힉스, 조앤 K 롤링, 빌 게이츠, 닐 스티븐슨 등의 과거와 현재의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두루 이런 '딥 워크'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높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딥 워크'의 전통은 지금의 지식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메일이나 SNS, 인터넷을 비롯한 네트워크 도구들 때문이다. 무엇보다 맥킨지가 2012년 행한 조사에 따르자면 현재 미국 지식 노동자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업무 시간의 60% 이상을 전자 통신과 인터넷 검색에 쓰고 있는데 그 중 이메일을 읽고 쓰는 시간만 해도 거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되돌아 보니, 나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때는 업무 시간의 절반을 이메일 읽고 쓰는데만 보내고 있을 때도 있다. 바로 이런 네트워크 도구들이 지식 노동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산만하게 만들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피상적 작업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피상적 작업이란 딥 워크와 정확히 반대되는 말로써 '지적 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서 다른 것에 정신을 팔아도 얼마든지 수행 가능한 작업'을 일컫는다.


 지금 우리는 고도의 정보화 사회이고 이러한 정보 경제 양상은 줄기차게 가속화 되고 있다. 따라서 딥 워크의 중요성도 앞으로 계속 커질 전망이다. 왜냐하면 정보 경제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계속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복잡한 것을 빠르게 익히는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용한 가치를 하나 창조하면 거대한 소비자 집단에 쉽게 연결되는 환경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결과물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면 소비자가 온라인을 통해 다른 것으로 손쉽게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여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든 최선의 성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눈에 봐도 이 모든 게 쉽지 않아 보인다이만한 일을 해내려면 설령 짧은 시간이라 해도 고도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바로 '딥 워크'의 능력이다. 그래서 칼 뉴포트는 이렇게 '딥 워크'가 앞으로는 성공을 위해 필수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초능력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몰입은 의미 없는 낡은 능력이 아니라 밥값을 못하는 사람들을 몰아내려 하는 정보 경제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진정한 보상은 페이스북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혁신적으로 분산된 시스템을 잘 구축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딥 워크는 너무나 중요해서 비즈니스 저술가인 에릭 바커의 표현을 빌리면 '21세기의 초능력'으로 간주해야 한다.(p. 19)


 하지만 날로 발달하는 이런 저런 네트워크 도구들 때문에 앞서도 말했듯 지식 노동자의 업무 환경은 갈수록 피상적 작업만 쌓여가는 곳이 되어버린다. '딥 워크'를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점점 희박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딥 워크 가설'이라는 걸 내놓는다. 이런 식으로 딥 워크의 희소가치가 점점 상승하여, 그 능력을 키우고 자기 삶의 중핵으로 만든 소수만이 앞으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바로 이 책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이기도 하다. 거기에 맞춰 책은 크게 2부로 나눠진다. 1부에서는 이 딥 워크 가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딥 워크를 하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공개한다.


 요즘 '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대선 때문에 한층 더 유행하게 된 이 말엔 알파고와 같은 인공 지능의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 많은 일자리들이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내재되어 있다. 아니, 조립이나 피자를 굽는 것 같은 단순 노동들은 이미 기계로 대체되고 있다. 운동화를 만드는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회사의 공장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50만 켤레의 운동화를 고작 10명의 관리인이 생산할 정도로 무인 생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10명이라는 수조차 더욱 줄어들 예정이다. 올해 초엔 트럭에 피자 굽는 로봇을 태워 지역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ZUME'라는 기업까지 생겨났다.


 'ZUME'의 피자 굽는 로봇


 2016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는 이런 식으로 2020년까지 무려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번역가, 회계사나 변호인 같은 전문직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법률 을 전문으로 하는 ROSS라는 인공 지능이 개발되어 미국 대형 로펌에 취업한 바가 있다. 유엔 미래 보고서는 적어도 2030년엔 이 세 직업이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는 거대한 IBM 컴퓨터가 삽시간에 많은 흑인 여성 계산원들을 실직의 위기로 내모는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변화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미리 거기에 맞춰 능력을 향상시킨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발빠른 대처의 대가로 오랫동안 그토록 원하던 관리자로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신기술에 대한 지식을 누구보다 빨리 습득하여 자신에게 숙원과 같았던 관리자 지위까지 오르게 된 도로시 본.


 바로 이런 일이 앞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겠지만 거꾸로 누군가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우등생 클럽인 파이 베타 카파의 맴버이자, 공부 관련 블로그인 '스터디 핵스'로 공부에 있어 미국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로 인정 받고 있는 저자 칼 뉴포트는 선언한다. 바로 그 후자를 딥 워크가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직장만 둘러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피상적 작업만 양산하는 온갖 네트워크 도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지금 우리 업무 환경은 '상시접속 문화'와 '최소저항의 원칙' 아래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시접속 문화'는 수신한 물음에 언제든 빨리 답신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낳았다. 기업 환경에서 어떤 행동들이 과연 실적으로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이것을 저자는 '계량의 블랙홀' 현상이라 부른다.) 현재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을 중시하게 만드는 '최소저항의 원칙'은 네트워크 도구들을 사용하여 빨리 답신하는 것을 일하는 자신에게 있어서나 기업에게 있어서나 생산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장기적 계획과 집중 보다는 그저 단기적인 불편만 피하면 된다는 풍조를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바쁘다는 것이 높은 생산성과 직결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분주함이 생산성과 동의어가 되었고 지식 노동자들은 그보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더 나은 방법이 없기에 갈수록 분주한 모습만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자신도 공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이고 이런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딥 워크'는 실현되기가 어렵다. 한다고 해도 분명 일을 안 한다거나 나태하다는 오명만 잔뜩 뒤집어 쓸 게 뻔하다. 뉴욕대 교수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기도 한 닐 포스트먼은 컴퓨터 혁명이 시작되었던 90년대 초에 이미 이런 상황을 경고한 바 있었다. 신기술이 가져다 줄 효율성에만 혈안이 되어 그것이 야기할 문제들은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좀 더 발전된 기술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예언을 들어 맞았고 새로운 기술만 무분별하게 편식한 결과가 바로 우리의 현재인 것이다. 날마다 산적된 피상적 작업만 분주하게 잘 처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납득하며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인 '오대수'라는 이름처럼 그저 오늘만 대충 수습하는 것으로 자족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말이다.


 딥 워크는 오늘날의 사업 환경에서 우선시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딥 워크는 어려운 반면 피상적 작업은 쉽고, 직무에 따른 명확한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는 피상적 작업을 통해 분주하게 보이는 일이 자리 보존에 도움이 되며, 우리의 문화가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능력에 미치는 영향과 무관하게 '인터넷'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게 보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추세가 형성된 이유는 몰입하는 데서 나오는 가치나 몰입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대가를 직접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p. 70 ~ 71)


 하지만 시대의 거대한 흐름은 이제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는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계속 그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다간 끝내 도태되거나 쉽게 대체되는 운명으로 말이다. '히든 피겨스'의 도로시 본처럼 노력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상승시킬 필요가 있다. 거기에 딥 워크, 즉 몰입은 아주 에너지 넘치는 동력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해도 선뜻 시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사람은 아무래도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다. 때문에 저자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도록 두 가지를 독자에게 제안한다.


위니프리드 갤러거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


 하나는 위니프리드 갤러거의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이론이다. 둘 다 '몰입'의 긍정적 가치를 한껏 강조하는 이론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환경에 관해서라면 특히 갤러거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실은 특정한 대상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결과로 나타난 주관적인 것이라 전제한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 몰입하여 나름의 정신 세계를 구축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거기에 맞춰 달라진다는 의미다. 몰입, 즉 딥 워크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내재되어 있기에 몰입한 상태로 시간을 충분히 보내면 우리 마음 또한 세계를 의미와 중요성이 넘치는 곳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환경을 자신이 주도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의미와 가치가 부유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갤러거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쉽게 권태를 느끼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산만하고 너절한 피상적 작업만 하고 있는 탓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그에게 '몰입(flow)'이란 자발적으로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으로 육체나 정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때 찾아오는 최고의 순간을 의미한다. 갤러거는 그냥 몰입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대상에 몰입을 해야 삶 역시 중요하고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말하지만 칙센트미하이는 대상과 상관없이 몰입만 하면 최고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비록 이런 차이는 있더라도 '딥 워크'가 자신의 삶을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라는 데는 둘 다 찬동하고 있다.


 이만하면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무의미와 권태에 지쳤다면 당장 '딥 워크'부터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딥 워크'를 할 것인가? 그 의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2부이다. 2부는 '딥 워크'를 실행하는 네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 각 규칙마다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네 가지 규칙이란 이러하다.


  1. 몰두하라.

  2. 무료함을 받아들여라.

  3. 소셜 미디어를 끊어라. 

  4. 피상적 작업을 차단하라.

 

  '몰두하라'에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딥 워크' 습관을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무료함을 받아들여라'에서는 딥 워크 최대의 적인 산만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특히 여기서 '데드라인 공략법'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는데, 미국 대통령으로 유명한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하버드 재학 시절 주로 사용한 방법으로써 그 양태가 우리가 시험칠 때 자주 하는 '벼락치기'와 흡사해 눈길을 끌었다. 빠듯한 시간이 '딥 워크'를 가능하게 만들고 향상까지 시킨다니, '벼락치기'도 영 쓸모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험생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집중력을 높이는 암기 훈련'이 이목을 끌 것 같다. 전미 기억력 챔피언이자 카드 암기 부문 기록 보유자이기도 한 론 화이트의 카드 암기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카드 한 장을 따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섯 개의 방이 있는 집을 그리고 그 방에 친숙한 가구들로 채운 다음 카드를 한 장씩 볼 때마다 가구와 특정 인물의 상황을 연결시켜 집에 하나하나 배치하는 기억법으로 누구든 훈련을 거치면 카드 한 벌을 쉽게 외울 수 있다고 한다. 칼 뉴포트가 쉽게 된다고 장담하고 있어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다.


 바로 이런 그림처럼 암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딥 워크 습관 형성을 위해 더욱 힘써 주장하는 것은 소셜 미디어와 피상적 작업의 차단이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단절로, '소셜 미디어 차단'에선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취한 '짐싸기 파티'와 같은 '30일 간의 근절 방식'이 그리고 '피상적 작업 차단'에선 '37 시그널스'라는 기업이 실제로 실시했던 제도가 관심을 집중시킨다.


  저자가 많은 네트워크 도구들 중에서 하필이면 소셜 미디어만 딱 꼬집어 말하는 것은 그것이 딥 워크를 가장 심하게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는 예측할 수 없는 간격으로 개인화된 정보를 제공하여 엄청난 중독성을 지닌다고 말이다(p. 193)'.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가디언 오브 갤럭시 VOL.2' 시사회 장에 갔었다. 공식 개봉 전의 상영이라 주최측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영화 도촬을 막기 위해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핸드폰을 모두 수거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반사신경처럼 핸드폰을 찾는 동작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곧잘 보였다. 무심코 손이 갔다가 '아, 참 맡겨놨지' 하면서 '핸드폰도 없는데 영화 상영까지 뭘 하면서 보내나?' 하는 말도 들려왔다. 사정이 이러하니 엄청난 중독성이라는 말도 그리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토록 중독되어 있을까? 저자는 그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아 돈을 버는 회사들이 능숙한 마케팅으로 소셜 미디어를 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놓칠 것이라는 생각을 깊이 심어준 탓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소셜 미디어가 이렇게 급격하게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콘텐츠가 트윗이든 페이스북이든 실제 가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얼마나 교환했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도록 만든데 있다고 한다. 즉 '나의 업데이트 상태에 '좋아요'를 눌러주면 나도 '좋아요'를 눌러주는 식으로 가치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되면 모두에게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중요한 콘텐츠를 올린 듯한 허구적인 느낌(p. 195)을 주어 소셜 미디어가 지금처럼 창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셜 미디어가 주는 '잠시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허구적인 만족감이 사실은 전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저자는 30일 간 소셜 미디어와 단절할 것을 권유한다. 이 부분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나도 한동안 그간의 소셜 미디어와 블로그 활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모두를 나름 주체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소상히 되짚어 보니 착각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셜 미디어에 대한 지은이의 제안을 보다 더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피상적 작업 차단'과 관련한 '37 시그널스' 기업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업무 환경을 주도하고 있는 '상시접속 문화'와 '최소저항의 원칙'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 아니며 제도적 차원에서 변화를 준다면 얼마든지 '딥 워크'가 가능한 환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37 시그널스' 회사가 주도하여 상시접속 문화를 차단하고 직원마다 한 달에 걸쳐 자신만의 프로젝트에 '딥 워크' 할 수 있는 시간까지 할애해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매출이 줄기는 커녕 이익이 오히려 더 늘어났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37 시그널스'의 모습은 저자가 제시한 '딥 워크 가설'이 옳다는 것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러니 더욱 딥 워크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런 '37 시그널스'의 사실이 널리 알려져 조직적 차원에서 이제는 피상적 작업의 양산과 분주함이 생산성과 동의어가 되는 흐름에서 벗어나 '딥 워크'가 보다 중시되는 분위기가 주류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이러한 변화는 조직 문화에 일대 파란을 가져올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회사와 사원의 관계란 주종이나 다를 바 없는 수직적 상하 관계였는데, '딥 워크' 문화가 자리잡게 되면 직원 모두가 회사의 이익과 문화 그리고 가치 구현에 있어 저마다 주체로서 참여하는, 그렇게 '파트너'라는 수평적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을 목전에 앞두고 대체 불가능한 개인적 가치의 확립과 더 높은 상승을 위해서도 '딥 워크'가 많은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에 더하여 조직 문화마저 이제까지의 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 협력과 상생으로 인도해 줄 것이기에 그 의미가 가일층 높아지는 것 같다.


 이 책, '딥 워크'는 개인과 조직 모두에 대해 몰입이 가진 창조와 변화의 힘을 제대로 느끼고 습득하게 만드는 책이다. 앞으로의 내 삶에 구체적 설계를 위해 뭔가 길잡이가 될 만한 정보들이 필요한 분이나 그런 몰입의 시간이 한번쯤 내게도 주어졌으면 하고 많이 바랐던 분들은 물론 현재 조직 문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 중인 분들 모두에게 감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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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우가 잠든 숲'은 보텐슈타인과 피아 형사 콤비가 주연인 타우누스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함을 빌어 감히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여우가 잠든 숲'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타우누스 시리즈의 결정판 같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친밀해 보이지만 속 모습은 전혀 반대인 공동체, 집단적인 방관과 무책임 속에 은폐되어 버린 과거의 비극,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되어 온 사회, 그 사회의 진정한 구원은 과거의 비극에 깃든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고 무고한 자가 희생양의 족쇄에서 풀려날 때 찾아온다는 것 등등. 타우누스 시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중핵으로 일컬을만한 것들이 '여우가 잠든 숲'에선 모조리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혹시 당신이 보텐슈타인 형사의 팬이라면 이 소설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2권 말미에 실린 넬레 노이하우스의 고백에 따르면, 이 소설엔 무엇보다 올리버 보텐슈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껏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오랜 세월 존재했었던 - 하여,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무방한 - 상처가 여기서 드디어 드러난다. 그가 왜 승진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오로지 사건의 진실만 쫓는 형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자신의 조그만 잘못에도 쉽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타우누스 시리즈의 대표작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피아가 독선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부러라도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투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지, 바로 그 내막이 이 소설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텐슈타인이 지닌 무려 42년 동안 지속된 고통의 결을 헤아리고 동시에 치유를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42년 전, 그러니까 1972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려 그의 오두막을 찾는다.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 뒤, 소설 속 시간은 2014년의 현재로 돌아온다. 한 청년이 시즌이 지나 인적이 뜸해진 캠핑장을 찾는다. 그는 마약 중독자다. 그러나 그 곳을 찾아온 것이 마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찾아왔다. 마약을 완전히 끊기 위해. 그에겐 연인이 있다. 그녀는 사내 아이를 임신했다. 곧 태어날 아들에게 청년은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다. 격리된 이 곳에서 갱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 그리고 사고. 남자가 찾아 온 캠핑장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캠핑카 하나가 전소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불에 탄 시체. 피아의 전남편이자 법의학자인 헤닝은 그 시신이 남자이며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임을 밝혀낸다. 결혼과 일 모두에서 실패하고 이 곳에서 여행을 떠난 동생 대신 캠핑장을 관리하고 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전직 기자 펠리치타스는 폭발 즈음해서 급하게 떠난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딸 소피아의 양육으로 곤란을 겪는 보텐슈타인은 도저히 맡길 데가 없어서 딸을 데리고 범죄 현장으로 간다. 이런 보텐슈타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캠핑장을 찾은 청년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프롤로그까지 포함하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버지와 관련하여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자 그리고 아버지가 된 자. 모두 뜻하지 않게 가정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펠라치타스 또한 마찬가지다. 피아 역시 범죄 현장에서 하필이면 전남편과 같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살며시 보여주는 증상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안정으로 충만한 가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연 그러한 것 같다. 불에 탄 캠핑카 소유주를 시작으로 수사를 확대해 보니 그 어느 가정도 우리가 기대하는 범주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신뢰 대신 적대가, 안정 대신 불구가 되어버린 가정들이 공동 묘지의 묘비처럼 즐비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속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살인 또 살인. 죽음에 임박한 요양원의 할머니가 급사하고 보텐슈타인에게 뭔가 전하려 했던 신부도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살인이 거듭될 때마다 보텐슈타인은 상처를 입는다.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엄격하게 자기 절제를 하는 보텐슈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선 속수 무책이다. 피아가 걱정할만큼 보텐슈타인은 사건 수사에 개인 감정을 드리운다. 그러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려 42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 되어버린 바로 그 아이의 실종 사건에 관련 되어 있음을 알고는 아예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공공연히 선언해 버린다.


 당신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난 이 사건과 그냥 어떤 식으로건 관련돼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 이 뼈의 주인공은 한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소. 42년 전에 실종됐는데, 그 때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소!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말이오. 내 말 알아듣겠소? (1권. p. 316 ~ 317)


그 날 사라진 소년의 이름은 아르투어. 실종된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보텐슈타인이 새끼 때부터 젖을 먹여가며 키운 여우 막시마저 같이 사라졌다. 당시 보텐슈타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던 두 존재가 동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일로 보텐슈타인은 달라졌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 누구도 친하려 하지 않았던 아르투어와 기꺼이 친구가 되고 가련히 여겨 새끼 여우를 아낌없이 보살폈던, 그토록 약한 자에게 공감하며 정이 넘쳤던 보텐슈타인은 사라지고 감정을 억제하고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 하는 보텐슈타인이 되어 버렸다. 사건이 모두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관계가 있어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로 소환된다. 그렇게 넬레 노이하우스는 보텐슈타인으로 하여금 여지껏 피하려고만 했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서.


 그는 정의를 믿고, 규칙과 가치를 믿었기에 경찰이 되었다. 선과 악도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사라지면서 예전에 그를 가득 채우고 독려하던 사냥 욕구도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속고 바보 취급 당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1권. p. 37)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 신물이 났다. 사라지거나 죽은 피해자에겐 아무 관심이 없는 세상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경찰직을 떠날 생각을 한다. 바로 그런 시점에 넬레는 보텐슈타인을 원점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부 사회의 책임인지, 과연 보텐슈타인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보텐슈타인에게 이 소설의 여정은 더욱  뼈아픈 것이기도 하다. 넬레 노이하우스가 이렇게 보텐슈타인을 은연 중에 심문대 위에 세우는 것은 아르투어와 관련된 그의 태도가 현재 독일 한 편에서 진행중인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사함이란 것은 바로 반응이다. 아르투어가 사라졌을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가족의 아이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 찾는 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했고 방관했다, 그러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하나, 아르투어의 가족이 외지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아르투어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 사건은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아르투어의 부모는 아주 선한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고 남들처럼 계속 우리를 찾아와 꼬치꼬치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였던 것 같아요. 이전엔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적대감이었죠.(1권, p. 370)


 비단 아르투어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루퍼츠하인(실제 지명이기도 하다.)에서 유일한 의사인 레나테 바제도프 또한 외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내 환자들이에요. 그중에는 30년전부터 이 병원을 찾은 사람도 많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름과 질병, 혈연관계에 대해 잘 알아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아요. 나는 여기 토박이들의 눈엔 여전히 이방인이에요.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도요.(2권, p.59)


 바로 이것이 소설 초반, 마치 루퍼츠하인 자체가 저주 받은 것처럼 모든 가정이 붕괴된 것의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비극 앞에서 침묵했고 방관했다.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고 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작태를 외지인이란 이유 하나로 정당화 시켰다. 외지인을 희생양 삼아 비극이 벌여 놓은 공동체의 상처는 쉽게 봉합되고 그들이 바라는 정상 생활 또한 수월하게 되찾았지만 사실 그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모든 가정들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던 것이다. 그 비극과 정면으로 맞서고 치유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은 도미노처럼 이어졌고 무수한 희생자만 낳고 말았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청년도 알고보면 그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마을의 모습은 그렇게 친했고 소중했던 친구와 여우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도 적극적으로 거기에 뛰어들어 뭔가 하기 보다는 42년 동안이나 소극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보텐슈타인에게 너무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저 자신의 상처 달래기에 바빴던 보텐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가해자들 중 하나였다. 넬레가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가 보텐슈타인에게 이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진작에 아르투어와 막시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훨씬 더 빨리 그들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바로 그 마음을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제도프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피아에게 자진해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건네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피아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난 용기를 보여야 할 때 외면한 적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두려워졌어요. 내가 잘 아는 세 사람이 살해되었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는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여기서 일어난 일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두고만 볼 수 없어요. (2권, p. 59)


 나는 바로 이것이 넬레 노이하우스가  '여우가 잠든 숲'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픈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비극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 설령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여우 막시처럼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러니 그것의 진실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것. 그렇지 않으면 방관한 자들의 자녀인 엘리아스와 파올리네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 더 큰 비극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42년 전, 아르투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지금까지 내내 반편으로 살아온 레오 켈러는 그대로 사건 이후 지금까지의 보텐슈타인의 삶이 정말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보텐슈타인 역시도 레오 켈러처럼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소설 마지막에 보텐슈타인이 내놓은 집을 레오 켈러가 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레오 켈러가 이제 진짜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집을 가지게 되었듯이 보텐슈타인도 카롤리네와 소피아와 더불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의미까지 더하여.


 '여우가 잠든 숲'은 최근 시리아 난민과 IS의 테러로 외지인에 대한 반감과 적대가 한층 깊어지고 있는 현재 독일에게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배척 보다는 관용과 대화의 태도를 권유하는. 소설에서 모든 게 자기 일이라 생각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배척과 적대가 실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기세가 좀 꺾였지만 독일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 당이 자국에서 제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무분별한 반감과 적대를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독일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백인 우월주의에다 이민과 이슬람 그리고 페미니즘과 동성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정단 국민전선이 내놓은 대선 후보 마린 르 펜이 1위의 에마뉘엘 마크롱과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결선 투표 진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미국 대선과 참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유럽에서의 이러한 극우의 득세는 거듭된 테러로 실제 자신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진보 세력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기이한 것은 성소수자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극우 세력을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무슬림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배척하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반감이 그들을 적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기엔 지금까지 프랑스가 자랑했던 톨레랑스와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가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서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을 자꾸 연기하게 만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논리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나는 정의의 가장 기본적 임무의 하나는 최대한 공적 정동의 공간을 넓히고 정체성의 축소에 항거하고 또한 불행의 공간이란 결국 우리가 전체 인류 차원에서 직면해야 할 공간이지 결코 정체성에 국한되는 발언에 가두어서는 안 되는 공간임을 기억하고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행에서 오직 정체성만을 중요한 것으로 입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행에서 오직 희생자의 정체성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비극적 사건 자체에 대한 위험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복수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 복수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항상 잔혹함이 반복되는 서막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 위대한 그리스 비극은 정의의 논리와 복수의 논리를 대립시켰습니다. 정의의 보편성은 가족, 지방, 국가, 정체성의 복수와 대립됩니다.

 -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중에서 -




 소설에 외지인과 인간이 아닌 여우 막지를 데려 온 넬레의 마음은 이런 바디우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보텐슈타인이 앞으로 구현할 정의가 바로 바디우가 말한 정의일 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지?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도 결코 멀리 있지 않기에 그 정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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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브레인 - 새대가리? 천만에! 조류의 지능에 대한 과학적 탐험
나단 에머리 지음, 이충환 옮김, 이정모 감수 / 동아엠앤비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새에게는 대단히 실례되는 일이지만, 아주 멍청하다는 뜻으로 '새대가리 같다'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쩌다 새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일까? 그 첫 시작은 아무래도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인도양의 한 섬에서 그 어떤 포식자도 없이 한가로이 평화를 누리고 있던 도도새는 생애 처음으로 포식자를 만났다. 그것도 하필이면 정말 운이 없게도 포식자 중에서도 가장 상위이자 악랄한 유럽 선원들을 말이다. 자비도 없고 한계도 없는 그들에게, 사냥 당해 본 경험이 전무 했기에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그 기본적인 방법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도도새는 그저 속절없이 사냥 당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럽 선원들은 "이런 멍청한 새를 다 보겠네." 하고 낄낄 웃었지만, 도도새는 그저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는 것이라 대처를 못 하는 것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도도새의 대량 학살을 통해 새는 지능이 낮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여기에 19세기의 비교해부학자 루트비히 에딩거가 또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당시 아주 유명한 비교해부학자였던 그는 새의 뇌에는 생각을 책임지는 피질 같은 영역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으며 오직 본능에 따른 행동만 할 수 있는 선조체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언했다. '새에게 생각하는 능력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루트비히 에딩거의 이 주장으로 도도새로 비롯된 새의 지능에 대한 폄하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주장은 20세기까지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런던 퀸메리 대학이 인지생물학 부교수이자 까마귓과와 유인원, 앵무새의 사회 심리학적 행동 이해의 전문가인 나단 에머리는 5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다양하게 진행된 새의 두뇌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새의 두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증명한다. 그것이 바로 '버드 브레인'이다.



 새의 두뇌에 대한 시각의 결정적인 변화는 1990년대에 일어났다. 인간이나 유인원에게만 있다고 여겨졌던 행동을 새 역시도 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학계에 쏙쏙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가빈 헌트는 뉴칼레도니아 까마귀들이 판다누스 잎과 고리형 나뭇가지를 가지고 두 가지 형태의 도구들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으며 아이런 페퍼버그는 회색앵무새가 부리와 혀로 다양한 물건들을 탐색한 뒤, 어떤 물건을 지목하자 정확하게 '양털'이라고 대답했음을 알렸다. 이 발견들은 나중에 사실로 검증되었다. 새가 도구도 사용할 줄 알고, 언어 능력도 있다니! 이러한 발견들은 루트비히 에딩거가 형성한 새의 두뇌에 대한 인식 지평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새의 두뇌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해졌고 새의 지능이 알려진 것과 다르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증명되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실들을 충실히 담고 있다. 이해를 돕는 자세한 설명과 눈을 즐겁게 하는 많은 그림 자료들까지 더해서 말이다.


 책은 주로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꼭지마다 이렇게 꼭 커다란 그림과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새의 두뇌에 대한 이러한 발견들은 한편으로 진화에 대한 시각까지 변화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종의 진화는 직선적이었다. 어류에서 영장류까지 일련이 연속된 흐름으로 상정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진화의 최종 단계라는 생각에 인간을 가장 우월하게 여기는 인간 중심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현재 새의 두뇌로 통해 알게된 사실들은 타고난 육체적 한계를 가지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모든 종들이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진화는 열등에서 우월로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최선을 다해 적응해 온, 비유하자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가지를 가진 관목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런 면까지 더해 '버드 브레인'은 지금까지 오해로 점철된 새의 두뇌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진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 생물학, 특히 새에 관심 있다면 꼭 한 번 봐야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새의 두뇌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열등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조류가 장거리 여행이 가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책은 새가 어떻게 비행기에 있는 첨단 항법 장치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만으로 이런 여행이 가능한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귀소 본능이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비둘기의 경우 자신의 집을 어떻게 찾느냐 하면 일단 집에서 출발할 때 커다란 지형 지물을 가지고 자신이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지도를 뇌의 해마 속에 코드화 한다고 한다. 더 긴 여행을 떠나거나 이용해야 할만한 지형 지물이 없을 경우엔 몸에 내장된 나침반을 사용한단다. 새의 몸 자체가 나침반이 되는 것으로 체내 시스템을 그런 나침반이 활용 가능하도록 아예 바꿔 버리는 것이다. 대양을 횡단해야 하는 철새의 경우엔 태양의 위치를 관측해서 비행한다고 한다. 태양의 위치가 확인 불가능한 밤에는 놀랍게도 옛 선원들이 그랬듯이 별자리를 이용한단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새는 이것만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지구 자기장 자체마저 이용한다니, 정말 양파도 아닌 것이 까면 깔 수록 놀랄 것 투성이다. 어떤 존재를 판단할 때는 섣불리 단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이런 이유까지 더해 '버드 브레인'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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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속편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수짱과 지하루. 확실히 둘은 다르다.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대표적인 캐릭터고, 지하루는 스탠드 얼론이라 할 수 있는 '내 누나'에 나오는 누나 캐릭터다. 여러 면에서 둘은 차이가 난다. 수짱은 남자 하나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지만 지하루는 남자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남자를 거듭 만나며 그 날 기분에 따라 남자를 골라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는 태도이지 싶다. 수짱은 수동적이지만 지하루는 능동적이다. 지하루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인연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그렇기에 질문이 많은 수짱과 달리 지하루는 그 어떤 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수짱이라면 분명 쥰페이가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라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루는 단호하게 '나!'라고 대답한다. 



 '내 누나'는 부모님이 모두 해외로 가버려 뜻하지 않게 둘만 있게 된 남매가 주로 일상을 끝내고 온 저녁 혹은 밤에 집에서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나 거실의 소파에서 대화를 하는데 질문을 하는 것은 주로 남동생 준페이다. 누나 지하루에게 대놓고 '무난한 타입'이란 말을 듣는 쥰페이는 여자의 심리를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이고 여성에게 인기도 별로 없어서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해 봤으며 거기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기도 하여 여자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일과 삶에 있어서나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니 설령 알고 있는 게 있다고 해도 그게 또 어설퍼서 보완해야 할 게 잔뜩이다. 바로 그런 것에 지하루는 답을 준다. 쥰페이가 전혀 몰랐던 여자의 내면과 사랑의 방식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을.



 수짱의 정체성을 질문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지하루의 정체성은 '대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와 관련 있다. 수짱이 수짱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면 언제나 대답을 가지고 있는 지하루는 이미 그 주체성을 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수짱과 지하루를 연결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지하루를 수짱의 종착역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정말 마스다 미리의 의도였는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듣기에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자전적 캐릭터라고 한다. 이게 맞다면 지하루는 마스다 미리가 되고 싶다고 바랐던 인물일 지도 모른다. 혹시 마스다 미리는 종종 꿈꾸지 않았을까? 연하의 귀여운 남자가 '누나' 하면서 찾아와 내 놓는 질문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는 '그건 말이지' 하며 단호하고 멋있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만큼 독립적이며 확고한 주관성을. 이 그림과도 같은.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수짱이 수많은 질문을 통해 가져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바로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혹은 이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질문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아무래도 이런 저런 타인들에게도 질문했을 것이 틀림없고 그러다 연상 남자로부터 뻔한 정답만 말하는 '맨스플레인'을 너무나 많이 당해버려 그것에 대한 반감 혹은 울화로 만일 반대의 위치에서 '우먼스플레인'을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지하루 캐릭터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지하루의 '익스플레인'은 보편적인 정답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제안이며 때로는 맥락이 없고 톡톡 튀는 개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게 아닐런 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대체 불가능의 '익스플레인'지라, 준페이가 그랬듯이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들춰보게 된다. 준페이가 늘 조금은 어이 없고 자존심 긁는 대답을 듣게 될 줄 알면서도 줄기차게 누나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하는 것은 분명 지하루가 초콜렛과 다라카츠카 공연에 중독된 것처럼 지하루의 대답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만 준페이처럼 중독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랬기에 이 책 마지막에서 지하루가 이제 부모님이 온다고 하면서 둘만의 시간이 끝난다는 것을 암시했을 때, '더 읽을 수 없는 거야?' 하면서 적잖이 아쉬웠겠지. 지하루의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겨 귀국 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면 좋겠다.



 지하루의 대답은 내게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보다는 사람은 참 다양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대하는 데도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하는 것도.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하기에 앞서 더 많이 물어보고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인 지도.

 정말로 '내 누나'가 수짱의 해답편 같은 것이라면 왜 '내 누나'의 주된 형식이 수짱의 그것과 다른 것인지 이해되는 것 같다. 수짱의 시간이 주로 독백의 시간이라면 '내 누나'의 시간은 주로 대화의 시간이다. 여기엔 언제나 더불어 언어와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시간들이 보다 강한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가 너무 바라는 시간들이라 더 그렇게 생각되는 지도 모르겠다만.


 일상에서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내면에 있는 결들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게 참 어렵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스킵십 욕구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반려동물을 기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 아마도 사람과 다르게 반려동물은 스킨십을 하기 전과 후에 질 수 있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바라는 대화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말을 꺼내기 전과 그 말을 내뱉고 난 뒤의 계산과 책임없이 그냥 툭 던지고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말해 놓고 괜히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 없이 말을 나누고 싶다. 그러고 보면, 지하루가 그렇게 주체성 강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준페이와의 대화 때문일 지도 모른다. 지하루가 준페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면서 전략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면 '뭐야, 그렇게나 남의 눈치를 살피다니? 그렇다면 주체성이 약한 거 아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하루가 그렇게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데이트를 위해 열심히 꾸미고 남자와 만날 때 이런 저런 기교를 부리는 것은 어쩌면 다시는 이런 느낌, 경험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 시간을 영위하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지하루는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존재다. 마스마 미리가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지하루를 있게 한 것은 준페이와의 대화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인다. 제아무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서 그런다고는 해도 매일 그렇게 살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다. 하루 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준페이와의 대화 시간이 없었다면 지하루는 진작에 나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하루가 여전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부모님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준페이와의 대화로 에너지를 계속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하루를 통해 다시 한 번 꾸밈 없는 진솔한 대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준페이, 이 녀석 정말 부러운 걸!'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엔 이런 누나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문득 그립네(원래 이 글은 그 누나들에 대한 추억으로 장황하게 쓰였다가 급 수정 당했다. 후후). 그 그리움 때문에 지하루와 준페이의 대화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와 자꾸 뒤적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적극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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