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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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기요. 네, 거기 당신. 아, 피하지는 마세요. 도를 믿으세요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얼굴이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만큼 생겼다구요? 와, 너무 하시네요. 모독을 당해드렸으니 그 보답으로나마 잠깐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긴 시간은 뺏지 않을테니까요. 네? 알았으니까 무슨 얘기냐구요? 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 들어보셨나요? 들어보셨다구요? 럭키군요. 다행이 당신이 제게 할애할 시간을 좀 더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네요. 다 읽어보셨나요? 보셨다구요. 와, 정말 매니아시군요. 제3인류는? 아, 그건 아직이라구요. 잘 되었네요. 하마트면 이대로 이별을 고할 뻔 했어요. 아무튼 제3인류 빼고 다 읽어보셨다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거 혹시 못 느끼셨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이 사실은 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 그렇게 같은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죠. 이런 못 느끼셨다구요? 도대체 뭘 읽은 거예요? 등장인물도 겹치고 이야기도 전작의 내용들이 언급되는 등 분명하게 이어지는 지점들이 있잖아요. 아, 뭐라 하는 것은 아니구요. 좀 더 디테일하게 읽어보시라는 거죠. 그러면 분명 느끼게 되실 겁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이 모두 하나의 흐름 속에 단계별로 서 있다는 것을. 제게 긴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증명해 드리겠습니다만 당신이 바쁘시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그건 생략하고 바로 '제3인류'라는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네, 저는 언제나 듣는 상대의 눈높이를 맞추는 사람이랍니다. 하하하. 어쨌든 아마도 '제3인류'를 읽게 되시면 분명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제3인류'도 그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연속성 위에 서 있는 작품이라는 걸 말이죠.


 짧게 그 증거를 말씀드리죠. 일단은 그동안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여기서도 여전히 얼굴을 빼곰 내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또 하나! 그 에드몽 웰즈의 손자인 다비드 웰즈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쩌면 당신도 읽어보시면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제3인류'가 어쩐지 인간판 '개미' 같다고 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되더군요. 연속성의 증거에 대해선 짧게 이야기 하느라 딱 두가지만 말씀드려 성에 차지 않으셨죠. 그래야 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바로 왜 인간판 '개미'로 여기는가에 대한 이유도 말해야 했거든요. 시간을 많이 뺏기가 죄송스러워 이렇게 나눈 것이죠. 결코 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신을 배려한 결과임을 부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그 이유를 이제 말씀 드릴게요. '개미'를 읽어보셨다니까 아시겠지만 거기엔 로제타 석을 이용해 개미의 신으로 군림하는 '니콜라'라는 존재가 나옵니다. 그런데 '제3인류'에도 그런 존재가 나와요. 그것이 바로 가이아죠. 네, 어디서 많이 들어온 이름이라구요? 와, 대단하세요! 맞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이름이죠. 제우스가 멸망시킨 타이탄 족. 그래서 가이아가 신이냐구요? 글쎄요, 정확한 의미에서 신은 아니에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인격을 가진 지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쉽게 지구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세요. 거기다 기상도 마음대로 조정하고 모든 동물을 움직이며 때로 인간에게 불만이 생기면 쓰나미를 일으켜 휙 쓸어버리기도 하는 지구를 떠올려 보세요. 네, 그게 바로 가이아입니다. 어떤 면에선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제대로 이름 붙인 것이죠. 사실 대지란 지구의 살결 아니겠어요.


 네, 뭐라구요? 그런 비슷한 존재가 예전에도 나왔던 것이 기억나신다구요? 와, 정말 매니아셨군요. 맞습니다. 나왔었죠. 바로 6부작인 '신'에서 말이죠. 미카엘이란 이름이었죠. 지구 1호를 관리하던. 그러고 보니 가이아와 미카엘 닮은 점이 많네요. 일단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 신화의 신탁처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물론 개미에서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판 '개미'라는 생각이 자꾸 들 수밖에요.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더없이 냉정하고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도 가이아와 미카엘의 공통점이죠. 네, 그런 미카엘이 기분나빴다구요? 아, 이런 그러면 가이아도 마음에 드시지 않겠네요. '제3인류'의 가이아는 미카엘 보다 한 숟갈 더 뜨거든요. 이를테면 가이아는 자신의 기억을 담당하는 석유를 인간들이 마구 캐내자 신종플루 같은 독감균을 만들어 내어 수십억의 인구를 죽여버립니다. 뭐, 그런 황당한 자식이 있냐구요? 자신이 알츠하이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무자비한 짓을 벌여도 되느냐구요? 거,보세요.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을 거라 그랬죠. 하지만 가이아에게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있답니다. 혹시 공룡이 멸종당한 이유를 아시나요? 네, 맞습니다.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거대한 운석 때문이었죠. 그것도 다 아시다니 오늘은 제가 운이 좋네요. 말을 한참 줄일 수 있어서. 여하튼 그 운석의 충돌은 오랜 빙하기를 가져왔고 지구 가이아는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는 상처였죠.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겨 본 사람은 다시는 그와 같은 위기를 겪지 않으려 조심하기 마련입니다. 도둑에게 당한 사람이 편집증일 정도로 문단속에 온통 신경을 쓰듯 말이죠. 그런 사람에겐 아주 작은 위협조차 중대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과잉 대응이 나오는 것이죠. 네, 가이아는 행여 또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벌벌 떠는 불쌍한 녀석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 가이아가 인류를 비롯하여 지구의 모든 생물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란 어떤 사람인가요? 근엄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이 얼른 떠오르죠. 왜, 미소를 지으시죠?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 같은데. 나중에 말해주겠다구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베르베르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가이아를 전혀 다르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상처에 벌벌 떨고 한없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제3인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말하기로 하죠. 거기로 나가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어렵게 말할게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말이죠. 그건 바로 '선별'입니다. 아, 당신도 아시는군요. 네, 그건 '개미'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죠. 때문에 더욱 이 '제3 인류'가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벌 떠는 겁장이에 지나지 않는 이 가이아가 자기를 지키려 하는 대표적인 행동도 바로 선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메르쿠리우스 임무' 기억나시나요? 새로 추대된 클리푸니 개미 여왕이 개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에 대한 음식 공급을 중단하자으로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들이 자신을 따르는 개미들에게 지하실에 갇힌 자신들을 구조해달라는 메세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말이죠. 이게 '제3인류'에서 좀 더 확장된 스케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가이아의 생존에 위협하자 가이아가 '제3인류'라는 것을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거든요. 인간이 '가이아'가 되고 그들의 개미가 '제3인류'가 된 것말고는 차이가 별로 없죠? 이래서 '제3인류'를 자꾸 인간판 '개미'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개미의 핵심 주제인 선별이 여기서도 비중있게 다뤄지기까지 하죠.


 네? 도대체 '제3인류'가 뭐냐구요? 의미는 단순해요. 선별이 세번째로 일어났다는 뜻밖에 없거든요. 태초의 인류는 거인족이었다고 합니다. 가이아가 생존에 도움이 되려면 되도록 체구가 큰 것이 좋겠다 싶어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들이 '제1인류'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위협이 되자 그보다 작은 '제2인류'를 만들어 멸종시켜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인 현생 인류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인류도 거인족과 똑같은 경향을 보이는군요. 그래서 가이아는 다시 한 번 멸종을 위한 선별을 합니다. 그렇게 세 번의 선별이 진행되었고 하여 '제3인류'입니다. 이렇게 씁쓸하게도 종말을 위한 세 번째의 병기라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뭐라구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이러느냐구요? 갑자기 파시즘에 경도되기라도 한 것이냐구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급 정도되는 작가가 아무 이유없이 그렇게 설정했을 리는 없겠죠. 네, 거기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종말을 가져온다는 것에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사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기서 누군가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요. 아니, 선별과 배제가 내내 이어져 왔으니 항상 노려왔던 것이기도 합니다.네? 그게 누구냐구요? 바로 아버지입니다. 앗, 당신이 아버지라구요? 이런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렇다고 내 자식에게 이런 책을 읽힐 순 없다며 책을 집어던지시지는 마시구요. 조금만 차분히 들어보세요. 이제 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디이푸스의 후예라도 된 듯 줅기차게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오려 하는지 얘기해 드릴테니까.


 그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란 존재가 사실은 선별과 배제의 근원적으로 불러 일으키는, 요즘 아이들 말로 하자면 최종 보스이기 때문입니다. 네, 안심하세요. 여기의 아버지는 지극히 상징적인 존재니까요. 보다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의 말을 잠시 빌려올게요. 아시다시피 그는 한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대타자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개인 밖에 있는 존재인데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이기에 큰 '대'자가 붙은 것이죠. 쉽게 말하면 사회 질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회 질서는 위계 질서라는 게 있지요. 자식은 부모를 따라야 하고 부하직원은 상사를 따라야 하며 군인은 지휘관을 따라야 하듯이 말이죠. 위계엔 언제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정상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 거하면서 위계 질서 자체를 떠받치고 관리하는 존재가 말이죠. 그것이 대타자이며 그 지위란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흔히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죽이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아버지예요. 이제 안심하시겠죠? 당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구요.


 베르베르가 자꾸만 살의를 느끼는 것은 그런 아버지가 반복해서 선별과 배제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은 성별이나 계급, 인종에 관계없이 대등한데 이 아버지란 존재는 온갖 빗금으로 나와 너를 나눠 누구는 데리고 있고 누구는 내쫓기 때문이죠. 다른 누군가가 아닙니다. 서구 사회를 오래도록 지배해 온 근원적 사유체계 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라는 책에서 서구의 형이상학을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죠. 고대 그리스 이후로 서구를 지배해 온 형이상학은 동일자와 타자를 엄밀히 나누고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들려 했으며 그렇게 되지 않는 타자는 배척했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땅에 묻고자 하는 건 바로 그런 아버지입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했듯이 분리와 차이를 통해 비극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는 아버지 말이죠. 혹시 당신도 자녀들을 차별했다면 그 대상일지 모르니 조심하시죠. 네, 사람을 어떻게 보냐구요? 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그런 분이 아닐 줄 알았어요.


 아무튼 '제3인류'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이러면 또 문득 떠오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이 하나 있지 않나요? 우왓! 정답이에요! 맞아요, 바로 '아버지들의 아버지'죠. 어때요? 이런 제목을 듣고나지 이제는 좀 수긍이 가시겠죠? 베르베르는 내내 '아버지'란 과녁을 겨누어왔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나라 시인 이성복의 이런 시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아버지, 이 개XX. 넌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리고 록그룹 '도어즈'의 노래 'THE END'에 나왔던 이런 가사두요.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만 호로자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부 의식은 국경과 시대를 넘나들어 항존해 왔다는 것이죠. 오죽하면 프로이트조차 문명의 근원엔 살부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겠어요. 그러니 아, 위험해하고 내치지 마시고 읽으세요. 이것은 다만 문명 비판이니까요. 더구나 늘 천착해왔던 주제인지라 제법 귀기울만 합니다. 문명 비판이라고 하니까 왠지 무거울 것 같다구요? 이런, 이 소설의 작가가 누구인지 잊었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입니다. 재미와 몰입으로 독자가 작품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도록 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구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흔쾌히 참여하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우리 문명의 근원적인 잘못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재미 외에 이런 성찰의 덤까지 주니 할인 마트의 '1+1'처럼 어찌 덥썩 잡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빠져 보세요. 제가 팬이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후회는 별로 없을 거예요. 그 어떤 배제와 차별 없이 모두가 대등한 가운데 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비행엔 분명 탑승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뺐은 건 아니죠?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그래도 유익한 대화이지 않았나요? 아니라구요? 아니, 왜 주먹은 쥐시는지? 어쨌든 이제 드릴 말씀도 더 없고 하니 그만 헤어져야 겠네요.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으시다면 다음에 또 대화를 나누면 되겠지요. 네, 뭐라구요? 다음에 또 만나면 각오 하라구요. 가이아의 아픔을 이해하게 만들어주겠다구요? 아니, 이런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있는 힘껏 눈높이에 맞추어 자세히 말씀드린 것 밖에는 없는데. 너무하세요, 정말! 네? 왜 멱살을? 이혼하면 책임지라구요? 오늘이 결혼 기념일이라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만나 오붓이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저 때문에 한참이나 늦게 되었으니 어떡하냐구요? 그렇지 않아도 기념일을 하나도 못챙겨 아내가 잔뜩 벼르고 있는 참인데 오늘은 진짜 죽었다구요? 아, 그러면 진작 말씀 좀 하시지.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이런 우시면 어떡합니까? 아, 정말 아버지는 고달픈 존재로군요. 어쩐지 가이아가 왜 그렇게 유별나게 구는지 이해할 듯도 해요. 아악! 얼굴은 때리지 마세요. 생명이라구요. 악!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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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술사 1 - 기억을 지우는 사람 아르테 미스터리 10
오리가미 교야 지음, 서혜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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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다는 건, 기억의 집적이다. 사는 것에 우리의 선택이 없었던 것처럼 어떤 기억을 갖느냐에 있어서도 우리의 선택은 허용되지 않는다. 싫은 기억, 부끄러운 기억, 그저 빨리 잊어버리고만 싶은 기억들도 우리는 지니고 살아야 한다. 더구나 사람이 창조될 때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인지, 좋고 기쁘며 행복한 기억보다는 나쁘고 슬프며 불행한 기억들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미소의 여운은 잠시지만 고통의 잔영은 너무나 길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음울한 기억의 그늘 아래서 오래도록 신음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라게 된다. 누가 이런 기억 따위 지워줬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것을 소설로 풀어낸 책이 바로 변호사 출신 작가 오리가미 교야의 '기억술사'이다.



 주인공은 현재 대학생인 료이치. 그는 신입생 환영회 때 '교코'라는 여자 선배를 만나 그만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만다. 하지만 그녀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으니 과거 치한에게 당한 일 때문에 밤에 혼자 집밖에 있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료이치는 사랑의 힘으로 교코가 과거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는다. 그런데 어느 날, 교코가 자신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류이치는 직감한다. 교코가 싫고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는, 괴담 속 존재인 기억술사를 만났음을. 


 기억술사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괴인이다. 기억술사를 불러내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기본적으로 기억술사는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 스스로 나타난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도시 전설 가운데 해외로부터 수입된 것이 적지 않은데, 기억술사 이야기는 일본, 그것도 도쿄 인근 이외의 곳에서는 들을 수 없다. 여고생을 중심으로 극히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분류하자면 '괴인 빨간 망토'나 '입 찢어진 여자' 등으로 대표되는 '괴기 괴인 계열' 도시 전설에 속한다.(p. 34)


너무나 아끼던 사람에게서 기억되지 않는 아픔을 심하게 겪어버린 료이치는 기억술사가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한다. 그 생각을 그만 졸업생 초청 강연회에 강사로 온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가 그에게서 기억술사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얼마 후, 료이치는 변호사에게서 저번에 만나 기억술사에 대해 말해줘서 고맙다는 전화를 받는다. 료이치는 거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료이치는 변호사를 만난 기억도 없고, 전화번호조차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료이치는 또 다시 깨닫는다. 자신도 모르게 기억술사를 만나버렸다는 것을.


 기억술사에게 직접 당하기까지 한 그는 더욱 열의를 다해 기억술사를 사방으로 찾아 나선다. '기억술사'는 연작 형식이다. 기억술사에게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료이치를 중심으로 연속되고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는 료이치가 만난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다카하라. 그 역시 갑자기 닥쳐 온 일신상의 사정과 자신과 관계된 한 사람 때문에 기억술사를 찾는다. 세 번째 이야기는 사라진 기억 때문에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여고생 사사 미사오가 중심이다. 료이치는 이 여고생의 존재를 기억술사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가입한 한 괴담 전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되고, DD, 이코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들과 함께 과연 여학생의 사라진 기억이 기억술사 때문인지 조사한다.


 '기억술사'는 제22회 일본 호러소설 대상에서 독자상을 수상했다. 세 번째 이야기까지 읽으면 이 소설이 왜 호러 독자상을 탔는지 잘 알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설이 보여주는 주된 분위기가 호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기억술사 괴담이 나오긴 하지만 공포와는 무관하고 이야기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흥건하게 스며들어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에 이르면 이 소설이 왜 호러 독자상을 탔는지 납득하게 된다. 마지막은 소름이 돋는다. 그도 그럴 것이 료이치와 함께 기억술사를 추적하던 이들이 어느새 그에 대한 기억들을, 료이치 자신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잃어버린 것이다. 료이치는 기억술사가 자신을 뒤쫓고 있으며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의 기억을, 괴담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 먹어치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소꿉 친구이자 친 여동생처럼 아끼는 '마키'가 있다. 료이치는 기억술사가 마키의 기억마저 먹어치우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있는 힘껏 마키를 기억술사에게서 보호하려 한다. 그런 료이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반전의 진실이다.


  마지막의 섬찟함과 반전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의 결말에서 확 올라갔다가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선 다소 쳐지던 기대를 다시 한 번 높이 솟구치게 하여 끝내 2편과 3편의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게 만든다. 읽은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재밌는 작품인 것은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작품의 감상에서 벗어나 좀 더 사회적인 측면을 끌어들이면 나는 '기억술사'가 현재 일본인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은연 중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일본은 2011년에 후쿠시마 원전 대재앙을 겪었고 그 여파는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미래는 한없이 불안하다. 이것은 거꾸로 일본의 대중 매체들이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드라마든 책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어떻게든 일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주입하려 한다는 것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소설에서 하필이면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의 밤이 무척이나 공포스러운 교코가 처음에 나오는 것이 내겐 참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교코의 그러한 모습이 실은 현재 많은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교코만큼이나 오늘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원전 대재앙이 있었다는 기억 자체를 지우고 싶어 한다. 기억술사는 그들의 무의식이 정말로 바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료이치처럼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엄연히 존재하는 과거의 비극을 그저 잊는 것으로 현재와 미래의 안정을 도모하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하고 말이다. 어둔 과거를 그저 잘라내 버리는 것은 원전 대재앙 이후에 아베 정권이 자행했던 것 그대로인지라 더욱 그렇다. 료이치는 반대한다. 그 이유에 대한 이러한 그의 말은 새겨둘만하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도 어쩌면 몇 년쯤 뒤에는 좋은 추억으로 바뀌거나 싫은 기억인 채로 있더라도 그게 계기가 돼서 변할 수 있거나.. 할 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하지만 지워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야. 그 뒤의 가능성이 제로가 돼. 길을 도중에 차단하는 거나 같아. 그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걸어온 길까지 지워버리는 일이야. 기억을 지우는 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그 순간만으론 알 수 없다는 얘기야.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야." (p. 352)


  아프고 싫은 기억들이 그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당장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봐도 그런 기억들이 우리를 좀 더 성장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패의 기억은 좀 더 노력하게 만들고 실연의 기억은 곁에 있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며 상실의 기억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깊이 깨닫게 한다. 진정한 성장의 한 걸음은 언제나 아픈 반성과 혹독한 성찰 속에 내딛을 때가 많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그대로, 보다 성장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의 껍질을 깨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술사에게 동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억술사는 자신의 행위가 치유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저 모르핀을 놓아주는 것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치유는 언제나 고통을 정면으로 관통할 때 이뤄진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모르핀의 약효가 떨어지면 이전의 고통이 곧바로 소환되는 것처럼, 단순한 망각은 무수한 반복만 부를 뿐이니까 말이다. 기억술사 자신이 이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같은 일의 반복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한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p.354)


 아직 2편과 3편의 이야기를 읽지 못했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오리가미 교야의 '기억술사'는 일본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망각의 획책에 맞서 기억과 그것을 통한 성찰을 강조하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과거의 잘못과 아픔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정직하게 응시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롯이 감내하며 꾸준히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는.

 잇따른 망각 앞에서 공포를 느꼈던 료이치의 마음은 어쩌면 일본 주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망각과 무책임의 유혹이 우리와도 결코 멀리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억술사'를 더욱 허투루 볼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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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5 2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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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각일 뿐이다 - 과학자의 언어로 말하는 영성과 자아
샘 해리스 지음, 유자화 옮김 / 시공사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못지 않게 유명한 무신론자 과학자가 또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샘 해리스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샘 해리스의 책을 '종교의 종말' 빼고는 다 읽었는데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2014년에 나온 것으로 2012년에 나온 '자유 의지는 없다'에 바로 뒤이은 저작이다. 샘 해리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은 두 가지 지적 자극 때문이다. 하나는 익숙한 것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게 하여 그 본질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것과 끊임없는 회의와 의심으로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던, 그렇지만 다 안다고 여겼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다듬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전작에서 '자유 의지'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박했던 그가 이번엔 '자아'가 착각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과 근거가 담긴 책이 바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이다. 원제는 'WAKING UP'. 한국어 제목 보다는 원제가 이 책이 말하는 것에 더 적합하다. 정말로 이 책은 '깨어남'이라는 원제 그대로 '영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얼른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다. 보통은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내적인 도정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샘 해리스의 영성도 이와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 없이도 그런 영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으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오로지 당신에게만 명백한) 사실뿐이다.(p. 79)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영성'으로 그는 영성이 무엇보다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없더라고 영적 경험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경험을 종교 체험으로 간주하고 종교를 벗어난 것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경험을 종교적 교리의 렌즈로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는 탓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 체험을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절대 근거 비슷하게 여기기까지 하는데 실제 영적 경험에는 그들의 전통적 믿음을 지지하는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그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착각(p. 21)이라고. 뇌의 미로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르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맞추어 자신이 말하는 영성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환영을 반복해서 잘라내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굳이 신이나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자유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과학으로 도덕이 가능하듯. 역시 영성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성의 모범은 무엇보다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영성 방법은 과학자의 것과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험주의다. 불교의 가르침도, 과학자의 연구도 모두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험을 매우 중시한다. 바로 이것이 왜 '나'가 착각이며 환영에 지나지 않는가에 중대한 근거가 된다. 이것은 2장, '의식'에 가서 본격적으로 설명된다. 의식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잘 보여줬듯이, 자아의 등뼈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나'를 느끼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대로 외부에 있던 영혼의 침입일까?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변화일까? 샘 해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식의 탄생은 조직화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원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 바로 그 원자의 집합이 존재하는 경험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성찰해보아야 할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이다.(p. 75)


 그가 이토록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실체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경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의식에 대해 뇌를 통해 밝혀진 것은 뭐란 말인가? UCLA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인지 신경과학자인 그는 답한다. 그것은 의식 자체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식의 내용을 찾은 것 뿐으로 현재까지 뇌를 통한 의식의 연구는 의식 자체와 의식 내용 간의 구분을 짓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p. 85) 그리고 두뇌가 결코 '나'라는 의식의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로저 스페리가 발견한 '분할뇌'를 통해 낱낱이 밝힌다. 분할뇌 사례는 두 가지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는 뇌의 좌우반구가 고도의 기능적 특수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두뇌 자체가 정보의 인식과 행위 의도 그리고 의식 경험 모두에 있어서 분리가 가능하니, 서로 다르게 활동하는 두뇌의 부분들을 두고 하나의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나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별개의 의식을 포함하여 하나의 '나'라는 의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근거란 경험밖에 없게 된다.(그러므로 제목이 말하는 착각의 대상은 '나'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실재에 대한 착각이다. 있는 건 다만 '경험'뿐이다. 이 경험주의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과도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 같다.)


 3장 '자아'는 바로 이러한 나를 나로 여기게 만드는 경험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의식이 경험이라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둘이다. 하나는 신체적 연속성의 경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연속성의 경험. 그런데 전자는 후자에 부수적이다. 정신적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이 '경험으로써의 자아'가 왜 우리의 전부인지에 대해 논증한다. 이것을 긍정하게 되면 왜 샘 해리스가 신이나 종교 없이도 영성이 얼마든지 가능한지 또 어떻게 과학적으로도 가능한지 이해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자아가 단지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험의 양태를 스스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원효 대사가 말한 '일체유심조'다. 샘 해리스의 영성은 원효 대사의 것과 많이 닮았다. 그가 왜 불교적 영성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런 식으로 4장, '명상'에서는 영성의 구체적 방법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과 결부되어 설명된다. 알고 보니 샘 해리스는 이런 쪽의 경험이 아주 많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계에 안 가 본 데가 없으며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 오랜 구도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그의 말은 단호하며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으로 '구루, 죽음, 약물'이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서는 임사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 그 방면에 있어 최근 아주 유명해진 책인 이븐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대해 아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1위를 무려 52주나 했다. 그만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발간되었는데, 아주 많은 이들이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이 그만한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뇌를 전문으로 하는 신경외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를 수술한 전문의마저 그의 두뇌가 완전히 정지했다고 증언했기에 저자의 임사 체험은 더욱 실제로 받아들여졌고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샘 해리스는 이 책에서 왜 그 책이 실은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공한 증거는 잘못되었고 과학과 무관하다고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읽었고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혹시 진짜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놀라며 읽었던 터라 샘 해리스의 반박이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다. 근거가 설득력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가 이븐 알렉산더에 대해 논박하는 것은 그 역시 임사 체험 못지 않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덮어놓고 믿지는 않았다.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류 가능성이 다분한 것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여기서 이 책의 진짜 목적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샘 해리스가 이븐 알렉산더에 반대하며 취하는 태도가 실은 영성을 통해 체화시키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깨달음은 내 의지를 신이나 종교에 의탁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기대어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약물과 같은 외부적인 힘을 매개로 이루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비판과 회의가 생생하게 활동하는 이성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지금 내게 찾아온 경험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석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 그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자아의 망집을 허물고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닿고자 하는 영성의 도정이다.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과 유사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p. 430)


 샘 해리스도 같은 것을 두려워 한다. 이성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을 막는 모든 것들을, 그저 모든 것이 다 결론이 난 것처럼 달리 보고 생각하는 움직임들을 꼭꼭 자기 아래 가두는 모든 것들을. 부패된 지성이 뿜어대는 악취에 선량한 이성들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자유 의지'나 '자아'처럼 현재 마치 종착역처럼 되어버린 개념들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성을 단 한 단어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자유라고.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자유 말이다. 나는 샘 해리스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 전부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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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담 2021-07-2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도움이 되는 리뷰네요. 번역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 망설였는데,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 네트워크 시대의 권력, 부 , 생존
조슈아 쿠퍼 라모 지음, 정주연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시대가 달라지면 감각도 다르게 된다고 보았다. 니체가 주로 활동했던 때는 흔히 말하는 근대였다. 근대는 확실히 이전의 중세와 달랐다. 존 버거는 르네상스 이후로 우리의 오감 중 특히 시각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근대는 한 마디로 시각 패권주의의 시대였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한편 시간이라는 게 생겨나 모든 일상이 정확한 시간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리고 증기 기관의 발달로 속도도 생겨났다. 기관차와 자동차의 속도는 말과 자기 다리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빠르기였다. 이 미친 빠르기와 초 단위로 관리되는 일상이 니체에겐 거의 광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시대를 견디려면 현재의 오감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그 감각을 니체는 '제 6의 감각'이라 불렀다. 니체에 따르면 여섯 번째 감각은 역사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인류의 삶에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와 경향이 있어서 자기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라톤 선수처럼 코스 전체에 대한 감각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종으로 역사와 횡으로 시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감각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증명하듯이 그런 감각을 가진 자들이 대체로 성공을 일궈냈다. 그런데 니체의 말대로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감각이 요청되는 것은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험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재는 또 근대와 다르다. 흔히들 지금을 네트워크의 시대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연결된다. 잠깐 페이스북만 이용해도 무수한 사람과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다. 근대의 사람이 보고 다룰 수 있었던 정보의 양과 지금 우리가 보고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례로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언론은 당시엔 정보를 생산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데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힘을 못 쓴다. 미국 대선에서도, 우리나라 대선에서도 언론의 영향은 미미했다. 이제 정보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생산도, 유통도 모두가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또 달라졌으니 또 하나의 감각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여섯 번째의 감각을 넘어선 '일곱 번째의 감각'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 '타임'지 디지털 부문 편집장 출신인 조슈아 쿠퍼 라모의 생각이다. 바로 그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밀도 있게 풀어낸 것이 바로 '제 7의 감각, 초연결지능'이다.




 제7의 감각은 간단히 말해 어떤 사물이 연결에 의해 바뀌는 방식을 알아내는 능력이다. 왜 이 능력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행위가 세상에 진정으로 새로운 역할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힘이 초고밀도로 집중되고 복잡하고 즉각적인 혼란의 위험이 발생한다. 폴 비릴리오는 배를 발명하면 난파도 동시에 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똑같이 네트워크와 네트워크의 연결은 긍정적 결과 못지않게 부정적 결과 또한 야기할 것이다. 광범위한 SNS의 연결이 IS 테러집단에 악용되고 우리의 일상 생활을 방해하며 사생활 침해를 가져오는 것처럼 말이다.


 네트워크는 기존의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않지만 그 갈등에서 우리를 구해주지도 않는다. 네트워크는 오래된 증오에 새로운 충성심을 채운다. 그리고 과거의 원한을 더 사무치게 만들고 분노를 느낄 때 세상을 공격하기 더 쉽게 만든다. 인류가 비행기와 탱크 같은 '차가운 무기'의 세상에서 디지털 광신호와 생물학적 감염이 퍼져나가는 '뜨거운 무기'의 세상으로 이동했다고 단언하면 명쾌하겠지만, 사실 더 흥미진진하고 위험한 것은 차가운 시스템과 뜨거운 시스템의 생소한 결합이다. 우리의 미래에는 GPS와 TNT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비유도폭탄이 훨씬 더 정확하게 제 역할을 할 것이다. DNA 같은 구성물로 이루어진 병원균들이 네트워크가 알아낸 감염이 가장 용이한 장소에 배달될 것이다.(p. 113)


 '제 7의 감각'은 초연결사회가 가진 바로 이러한 동전의 양면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부제가 '초연결지능'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십계'로 유명한 폴란드의 영화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동유럽의 개방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유와 더불어 이전에 없었던 죄악도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혼돈을 주었다. 내 영화는 바로 그 혼돈에 대한 것이다.' 네트워크 시대도 이와 같다. 개인의 역량이 확장된만큼 위험 역시 커진 것이다. 저자가 '제 7의 감각'을 생존 본능으로 보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 네트워크란 것 자체도 생존과 안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터넷'이란 개념이 최초로 세상에 출현한 것은 1959년으로 냉전시대 때였다. 그것을 발표한 사람은 바로 하워드 휴즈 항공사 출신의 전기 엔지니어인 폴 배런. 그 때는 아직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기억이 생생하여 특히나 미국의 경우 누구나 언제든 버튼 하나로 지구 모두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최근에 나온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 바로 그런 시대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미국 외교와 국방부의 주된 관심사는 적인 소련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위험을 잘 피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스프투닉 위성과 잇다른 로켓 발사 성공으로 언제든 자기 머리 위로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런 위험 회피 원망에 더욱 불을 지폈다. 거기다 더욱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미국엔 수많은 폭탄과 미사일 그리고 10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실상 미사일 공격을 한 번 받으면 그걸로 응전이 영영 불가능해져 버리는 현실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 걸쳐 있는 미군 기지 간 연락망이 오직 구리선을 이용하는 전화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구리선은 미사일 공격에 쉽게 끊어졌고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미국은 즉각 대응이 어려웠다. 이 난점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폴 배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폴 배런은 미군 통신이 가진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 점에서 수십만 개의 점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는 연결망 시스템을 착안한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폴 배런은 말한다.


 '어떻게 연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p. 164)


 하지만 이런 생각은 미군 수뇌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터넷은 수직적 명령 체계가 아닌 대등한 참여로 이뤄지는 수평적 체계였고 이것은 당시 상명하달식의 통제와 복종에 익숙해진 군 수뇌부에 아주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은 폴 배런과 같이 일하고 있던 동료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와 동료 전문가들 모두 '제 7의 감각'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곧 사장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낳은 그들의 낯설음을 결코 책망할 수 없는 것은 네트워크 시대가 그들의 그러한 반응이 당연했을 정도로 아주 혁신적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존 홀랜드는 그것을 '복합에서 복잡의 변화'라 부른다. 복합과 복잡은 다르다. 복합은 상호작용을 하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더라도 예측에 따라 설계할 수 있으며 반복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은 정확한 설계대로 제작할 수 없고 구성 요소를 통제하는 것도 어렵다. 바로 이런 설계와 통제 면에서 복합과 복잡은 차이가 많이 나는데 네트워크는 이러한 '복잡계'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네트워크란 새로운 상호작용이 마구 일어나는 저수지와 같아서 늘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도적 상태에 있다. 존 홀랜드는 이를 두고 '창발'이라 칭한다. 상향식 상호작용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형태의 질서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세계 안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감각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전과 다르게 네트워크 시대는 마이크로 소프트나 애플 또는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그리고 유투브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선점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에서는 아무리 후발 주자라 하더라도 선발 주자가 올라간 사다리를 그들 역시 올라갈 수 있었는데(우리나라가 대표적이다.) 네트워크 시대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제 2의 아마존, 페이스북, 유투브가 잘 생겨나지 않는 이유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게이트 키핑'이라 부른다. 권력은 이제 얼마나 많은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를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제 7의 감각'은 그러한 새로운 토폴로지, 즉 지형을 만드는 게이트를 찾아내고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책은 모두 415페이지로 다소 두툼한 편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왜 지금 제 7의 감각이 요구되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제 7의 감각'이 무엇인지 말하며 마지막 3부에서는 그 감각의 응용 같은 것으로 제 7의 감각의 저변 확대로 만들어 갈 사회의 변화를 그린다. '제 7의 감각' 뿐 아니라 갈수록 피부에 와 닿는 '네트워크'라든가 '정보화 시대'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한 번쯤 호기심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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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2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 님 책 소개가 넘 좋아서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지는데요.
다음에 도서관 갈 때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함 대출해봐야겠네요.

오드득 2017-05-21 14:03   좋아요 0 | URL
웃! qualia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저도 좋겠네요^^
 



 일본의 만화가 오쿠 히로야가 2000년부터 무려 14년에 걸쳐 연재한 ‘간츠’는 현재 일본 SF 만화의 대표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간츠’를 나는 우리나라에 단행본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어왔으니 나름 오래된 팬이라 할 만한데 그건 무엇보다 화려한 작화에 압도당한 게 컸다. 당시는 만화를 CG로 그리는 것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을 때였는데 오쿠 히로야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어 놀라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작가 자신이 워낙 영화 팬이라 그런지 만화의 페이지마다 영화적인 연출로 가득했던 것도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죽은 자들이 낯선 장소로 호출되고 거기에 있는 구체의 지시에 따라 특정 장소로 강제 전송 되어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성인’이라 부르는 존재와 싸운다(고 쓰고 ‘서바이벌 게임’이라 읽는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독특하고, 또 어떻게 보면 뻔하게 보이는 설정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슈트와 메카 그리고 병기의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고 성인과의 전투가 정지 화면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데다 박력이 넘쳐 뒷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장면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간츠’의 커다란 인기 덕분에 몇 번이나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 만들어져 그 소망은 쉽게 성취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차라리 소망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만 낳게할 뿐이었으니….




 원작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기는 커녕 처참하게 실패한 것들만 즐비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작품인만큼 그 때문에 오히려 영상화가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간츠:오'가 영화를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대 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것 같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는 이 작품이 13년간 연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투 이야기를 보여주는 ‘오사카 전투’라는 것. 개인적으로 나는 이 전투가 ‘간츠’의 사실상의 클라이막스라 생각한다. 무력으로 압도하는 적에 대한 공포, 그것을 무릅쓰고 벌어지는 처절하면서도 절박한 전투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에피소드를,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인데, 순수한 CG 애니메이션으로 담다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순수 CG 애니메이션에 대해 만족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만든,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최근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하나 있다. 일본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것들은 다 ‘꽝’이라는 믿음이다. 허황된 믿음이 아니다. 근거가 되는 팩트의 리스트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이제 신념으로 지녀도 좋을 정도다. CG 애니메이션은 더하다. ‘파이널 판타지’부터 시작해서 ‘캡틴 하록’까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린 쥐가 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리운 추억에 이끌려 뒤따라 갔다가 그 그리움마저 탈곡기에 탈탈 털리는 멘붕을 맛보았으니.

 이런 까닭에 처음엔‘간츠:오'에 대하여 회피 전략을 썼다. 그런데 먼저 개봉한 일본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그럼 이제 ‘간츠’의 장면들이 제대로 영상화된 것을 볼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귀가 쫑긋, 눈이 번뜩, 가슴이 벌렁벌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얼른 개봉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간츠 : 오'가 개봉되었다. 결론은 대만족. ‘간츠’의 가장 완벽한 영상화라 할 만하다.

 슈트를 입은 플레이어의 생동감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할 것 없이 뛰어나고 아주 자연스럽다. 


주인공 카토. 정말 실감나는 표정이다.


 특히 오사카 팀의 시마키가 다리 위에서 검을 휘두를 때의 재현은 정말 놀라웠다. 어찌나 유려하고 자연스러운지. 어쩐지 영화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켄신이 생각났다. 초반에 나오는 몇몇 엑스트라 중엔 진짜 인간처럼 보이는 이들까지 몇몇 있었다. 이처럼 CG로 사람을 리얼하게 묘사할 때 받게 되는 어색함이 이 애니메이션에선 꽤 덜한 편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폴라 익스프레스’부터 봐왔다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액션이 좋았던 것도 분명 한없이 자연스럽게 보였던 CG 인물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물 묘사가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이만큼 잘 묘사했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간츠’의 만화를 즐겨 본 이들이라면 두 가지에 특히 더 관심이 가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는 병기나 메카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성인과 싸우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꽤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간츠 : 오’를 통해 간츠의 무기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병기의 묘사가 잘 되어있다. 원작에선 원래 카토의 무기였던 ‘Y건’의 포획이나 ‘Z’건의 중력파 묘사 모두 무척 실감이 날 정도로 재현이 잘 되었다. 덕분에  ‘Z’건의 중력파를 몇 번이나 맞고도 계속 일어서던 ‘텐구’의 무시무시한 멧집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다가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압권이라 할만한 장면 중의 하나는 소의 모습을 한 상체와 거미의 모습을 한 하체를 가진 규유키(오쿠 히로야는 단행본 말미에 오사카 미션에 나오는 모든 성인들이 실은 일본의 유명한 요괴 설화집인 ‘백귀야행’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여기 나오는 성인들이 어떤 요괴를 모델로 한 것인지 밝혀놓고 있다.)와 간츠 대원이 사용하는 거대 로봇의 전투라 할 것인데, 규우키가 강에서 솟아 오르는 장면이나 거대 로봇이 빌딩 사이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나 굉장한 박력을 보여준다. 분명 ‘퍼시픽 림’이 없었다면 이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을 것 같다.




 아! 하나 더 있다. 오다 하치로가 입고 있었던‘하드 슈트’의 묘사도 좋았다. 만화에서의 박력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게 또 있었으니 바로 최종 보스가 되는 누라리횽과의 대결이다.

 누라리횽은 원래 ‘백귀야행’에서 오사카 상인의 모습을 하고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요괴라고 한다.


누라리횽


‘간츠’의 누라리횽은 처음엔 그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변신 능력을 자랑한다. 죽여도, 죽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되살아날 뿐 아니라 갈수록 더 강력해져 싸우는 사람이나 보는 이나 ‘이제 제발 죽어줘’ 하고 절로 애원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 변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괴상하고 더러는 꽤나 망측한데 실은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이것이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이 누라리횽의 변신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라웠다. 딱 하나만 빼고(이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빼도 무방한 존재다.) 제대로 다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누라리횽의 변신 모습 중에는 여성 나체로만 이루어진 거대 여성도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잘 옮겨도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여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마저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대 여성 나체를 무한정 볼 수 있었기에 감탄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카토의 절규와 함께 펼쳐지는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그 비통함이랄까 격노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전해져 CG 애니메이션에서 모처럼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토록 만들었다.


'누라리횽'의 최종 진화형. 후덜덜한 카리스마로 마지막의 긴장감을 책임진다.


 ‘간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간츠’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간츠 : 오’에게 정말 만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있었던 야마자키 안조와 카토의 대화가 조금은 길어지는 바람에 그동안 잘 쌓아왔던 긴장감이 좀 풀어진다는 것과 초반 커다란 얼굴만 굴러다니는 성인과의 총격 장면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일하게  CG 전투처럼 보였다는(현실감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것을 빼면 시쳇말로 꽤나 잘 빠진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간츠’에 대해 조금은 양가적 감정이었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인과 관련하여 무작정 좋아하기가 좀 저어되었다. 성인이 내게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이주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간츠’에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학살 당하는 성인들은 현재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주자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의 높은 인기는 그런 것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해소시켜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만 반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배척과 폐쇄성 때문에 성인과는 무조건적인 대결 뿐이며 주인공들의 결속과 구원 또한 오로지 성인의 제거를 통해 이뤄진다는 게 작품의 이야기와 액션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이 애니메이션이 조금은 가시게 해 줘서 반가웠다. 바로 원작과 좀 다르게 묘사된 카토와 안조의 결말 부분이다. 카토와 안조의 설정도, 전개도 원작 그대로이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결행되는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와 관련해 조금은 희망적인 관측을 낳게 만든다. 그 선택이 나와 전혀 다른 것, 그것을 포용하여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카토는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타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는 성인과 싸우는데, 그런 태도 때문에 더욱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에게로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간츠:오’가 더욱 마음에 든다.


야마자키 안조(카토와 안조의 관계가 이 영화의 테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재도 일본에선 만화가 활발하게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의 검심’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망의 도미노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정말 못 만들어서 그렇기도 하고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무시하고 오로지 원작 그대로 무리하게 실사화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는 특히나 CG의 경우 너무 기술적인 측면에만 경도된 나머지 관객이 공감할만한 드라마를 형성하는 데 소홀이 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간츠:오’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지, 그 좋은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놀라운  CG 기술을 선보이지만 그것을 독보적으로 만들지 않고 진행 중인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여 표현이라는 외형과 이야기라는 내면 서로가 균형을 잘 이루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다가가려면 기술도, 이야기도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선 안된다는 걸   ‘간츠: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속편도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마지막 결전인 카타스트로피 편이 궁금한데, 지구가 침공 당하고 미국이 사라지며 간츠 대원 전체가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장대한 스케일인지라 진정 블록버스터 급이라 할만한 그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재현될지 몹시 기대된다.   ‘간츠:오’만큼이나 성공적이어서 이전의 실패작들을 기꺼이 흑 역사로 치부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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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점과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이만큼 재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서는 그저 칭찬만 하기로 한다. 부디 성공해서 카타스트로피 판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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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합니다ㅠb

오드득 2017-05-21 14:09   좋아요 1 | URL
앗! 고양이라디오님도 똑같은 마음이라니, 무척 반갑습니다.^^ 그 전 영상화된 작품들에 너무 실망이 컸기에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지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만족할만한 작품들이 나와주길 고대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1 16:50   좋아요 0 | URL
전 반대로 <간츠: O>를 먼저 접하고 간츠 실사판 영화를 찾아보았습니다. 실망감이 몇 배로 크더군요ㅠㅋ 앞으로도 에니메이션 간츠 시리즈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드득 2017-05-22 01:57   좋아요 1 | URL
아, 이런, ‘간츠:오‘를 먼저 접하고 실사판을 보셨다면 실망감이 더욱 컸었겠네요. 끝까지 보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얼른 후속작이 나와서 고양이라디오님에게 남아 있는 실사판의 기억을 남김없이 날려버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2 18:19   좋아요 0 | URL
정확하시네요ㅎ... 보통 영화를 보면 끝까지 보는 편이라... 힘들었습니다ㅠㅋ

오드득 2017-05-25 20:46   좋아요 1 | URL
동병상련이죠^^ 일본은 이제 실사판은 좀 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혼‘도 그리 기대되지 않아요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