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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6월의 신간 추천이 도래했군요.

  신간평가단을 해서 그런가 요즘 저의 시간 감각은 추천과 리뷰 마감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7월에 벗하고 싶은 신간들을 골라봅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번의 강력 추천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브로흐의 가장 대표작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적이 없었던 작품이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중 하나로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네요.

 

 유럽 모더니즘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아이네이스'의 저자이자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유령으로도 나왔었던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24시간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스 여행 도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르길리우스는 돌연 자신에게 삶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이제 막 완성한 자신의 대표작인 '아이네이스'를 불태우려 합니다. 그러자 그 작품의 위대함을 알고 있는 동료 시인들이 그것을 제지하려 하고 황제 또한 로마의 정체성 자체가 담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서는 안된다고 설득합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이러한 논쟁들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논쟁의 주제 또한 다양해서 예술, 종교, 국가, 전체주의 등 거의 인간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사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태워버리려 했듯이 브로흐 자신도 창작의 고통이 너무 커서 이 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작품 속의 베르길리우스는 그대로 브로흐의 페르소나인 것이며 무대는 비록 과거의 로마이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논쟁들은 사실 현대 문명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죠.

 

  독일 작가 브로흐는 나치에게 자유주의 작가로 찍혀 1938년, 그의 나이 52세 때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구체적 물증이 없었기에 풀려났는데 그 때문에 그는 바로 토마스 만과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미국에서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 써내려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많은 논쟁들이 나오듯이 문체 또한 고정적이지 않고 마치 물이 흐르듯이 유동적인데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브로흐 역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원래 브로흐의 작품들이 아주 독창적이지만 이것은 그 정수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경이로움인데 말로만 전해듣던 그 전설을 이 기회에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미국에 있는 동안 쓰여졌기 때문에 미국판이 독일어판 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진이 1944년에 미국에서 나온 초판본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온 판본이 되겠군요. 그래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1,700달러에 거래되고 있더군요.

 이런 ㅠ ㅠ...

 

 

 

 

 

 

 

 

  렌조 미키히코를 좋아하시나요?

  네, 회귀천 정사, 저녁싸리 정사의 그 렌조입니다.

  개인적으론 참 특이한 작가였습니다.

 

  회귀천 정사나 저녁싸리 정사를 읽으면

  마치 옛날 유행했다던 순애보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로에 대한 순수하고도 자상한 마음에

  오이 피클 처럼 푹 절여있다보면

 렌조란 작가는 참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왠 걸 그 순간 그는 솜씨좋은 외과의 처럼 매스를

 들고 그 이면을 파헤쳐 보여 주죠.

 

 

  "헤~ 과연 네가 보고 있던 것이 진실일까?"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을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렌조 미키히코 입니다.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도 그의 매스가 한 번 가해지면 기이한 일탈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고 한없이 아름다운 순애보 역시도 증오와 복수라는 감정 위에 세워진 치밀한 계산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술사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모자에서 토끼가 불쑥 튀어나오게 하는 마술사 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환영이고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실체임을 놀라움 가운데 가져오는 작가인 것이죠.

 

  '조화의 꿀'은 유괴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괴'란 실체를 탈취하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그 실체를 전유하는 테마 위에서 렌조는 또 어떻게 실체를 환영으로 만들고 그 이면에 배여있는 진실을 펼쳐보일까요? '조화(造花)'에서 꿀이 나오도록 만드는 그의 마술이 진정 보고싶군요.

 

 

 

 

 

 

  이미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자유'가 발간되었습니다만 사실 조너선 프랜즌의 대표작은 바로 이 '인생수정'이 아닐까 합니다.   조너선 프랜즌은 '로컬리티(locality)'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보편 보다는 특수를 지향하는 작가죠. 이를테면 그는 일반이라는 틀에서 한 개인이나 가정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개인과 가정을 통해서 보편을 담는 작가입니다. 그렇게 그는 찰스 테일러의 서사적 주체(즉 주체란 다름아닌 특수한 집단, 지역의 소속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의 입장과 유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처해 있는 특수한 장소, 상황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의식이란 그렇게 보편 보다는 언제나 특수한 맥락을 따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로컬리티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중요한 것으로 다룹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도 사실 이런 입장에서 정의로움을 고려하지요. 이렇게 지금에 와서 로컬리티가 중요해진 이유는 한 마디로 리오타르가 말하듯 거대 서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그 보편이 장악하지 못했던 특수한 상황, 지역, 정체성들에 집중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금 '보편'을 사유하는 것이죠. 프랜즌은 바로 그러한 작가입니다. 그가 그려내는 가족의 이야기란 하나의 특수적 상황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는 오히려 시대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인생수정'은 그런 로컬리티적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 그래서 저역시 꼭 벗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우울과 몽상'의 번역에 실망해서 사실 포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기다려온 저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반갑기 그지 없군요. 포의 대표 단편 16개가 실려있는 이 작품은 새로운 번역이기 때문도 하지만 무엇보다 편집한 사람이 마이클 코넬리라는 점. 그리고 각 단편마다  유명 스릴러 작가들이 짤막한 감상평이 덤으로 실려있다는 점 때문에 골랐습니다. 서점에서 보니 실물의 외관도 상당히 근사하더군요. 이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

 

 

 

 

 

 

 

 

 가나에의 작품은 모두 저의 관심대상입니다.

 '왕복서간'에서 보여준 그녀의 변화가 흥미로웠는데

 'N을 위하여'는 과연 어디로 나아갔는지 궁금하군요.

 

 

 

 

 

 

 

 

 

 

 

 

 편혜영 작가를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한국 문학쪽 경험은 별로 없어서

 많은 분들이 언급하시길래

 조금은 공부를 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려

 골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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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___________^
이번 소설은 재밌어보이는 게 참 많던데 말이어요.
편혜영의 소설이 가장 눈에 들어오고, 미나토가나에의 소설도 재밌어 보이고.
엊그제 타 인터넷 서점에서 재미삼아 신청한 신간평가에 당첨되었어요.
호스피스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인데 받고보니 놀랍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어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좀 더 성실해질걸ㅋㅋ 셤 끝나고 일단 리뷰 하나 써야겠어요.
셤 기간에 주말이 끼어서 그런지 시험 안 같아요.
낮에 한두시간 낮잠을 잤더니 잠도 안와서 티비보고 있네요. 문제집 훑어보는것도 못할 망정...

오드득 2012-07-08 23:45   좋아요 0 | URL
오! 축하해요^ ^
원래 바로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딴짓 많이 하게 되잖아요^ ^ 저 같은 경우도 시험 공부 하다가도 괜히 방청소 하게 되고 책 정리하게 되고 마구 그러던걸요. 사람 심리라는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벼락치기가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이진님은 모두가 부러워마지 않는 방학이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아도 될 듯 싶어요. 방학이 없는 저로서는 정말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에요 ㅠ ㅠ 좋은 한국 소설들 볼 때마다 소이진님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많이 하는데(전 이쪽은 정말 젬병이라서^ ^;) 언젠가는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눌 때가 오겠지요. 그럼 남은 시험도 잘 치르시길^ ^

이진 2012-07-09 14:41   좋아요 0 | URL
에에, 방학이 방학이 아닌 걸요. 올해부터 학교도 주 5일제 들어갔잖아요. 방학이 확 줄어버렸어요. 보충학습 일수는 더 늘어났구요. 방학이 한 달도 안되는 4주인데, 보충학습이 3주랍디다. 아아... 저는 보충 듣다가 서울로 도피해버릴겁니다. 그걸 위안 삼아서 지내야지요. 저도 한국 소설에 강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한국 문학에 심취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새내기예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작가와, 그 대표작 몇개만 나열할 수 있을 뿐이지 좋아하는 작가도 적구요. 그래도... 신간평가단은 하고싶다. ㅋㅋㅋ 시험 잘 칠게요. 개인적으로 국어와 사회가 주종목인데 사회를 망쳐서 지금 기분이 영 안 좋아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들을 소설로 영화로 만드는 일은 확실히 모험이다.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주지 못하면 권태롭게 될 것이고 그 권태를 피하고자 너무 새롭게 만들어 버리면 그 낯설음 때문에 또 독자와 관객들로 부터 기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동화들이 남녀들의 성역할이나 인종 그리고 계층에 대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거의 전복적으로 동화를 다루려고 했던 애니메이션 '슈렉'조차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화 속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크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살짝 비틀기만 시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형성과 새로움 사이에 아슬아슬한 조율이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빚어내는 소설가와 영화 감독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제가 되는 셈이다.

 

 여기 유명하다는 것으로 치자면 둘째 가면 서러워 할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백설공주'이다. 백설공주는 신데렐라와 더불어 거의 유명세에 있어서는 상벽을 이루지만 어쩐 일인지 신데렐라 보다는 실사 영화로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영화 '에버 에프터'에서 동화에서 처럼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능동적인 신데렐라로 한 번 재해석이 이루어진바 있고 힐러리 더프 주연의 영화 '신데렐라 스토리'는 아예 배경을 현대물로 바꿔서 '에버 애프터'와 비슷하게 적극적인 캐릭터로 신데렐라를 해석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백설공주는 아직 그런 재해석이 전무하다. 아마도 그림 형제의 원작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워낙에 걸작이어서 재해석 조차 시도하기가 두려웠던 것일까? 아무튼 그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데렐라와는 달리 백설공주는 별다른 신통한 재해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번에 백설공주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소설과 영화가 나와 흥미를 끈다. '더 셀'로 유명한 감독인 타셈 싱의 '백설공주'와 루퍼트 샌더스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이 바로 그것이다.(이외에 디즈니에서도 '스노우 앤 더 세븐'이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중에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이른바 '원소스 멀티 유징'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와 소설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나온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바로 그 소설판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원소스'이기 때문에 물론 영화와 스토리 라인은 크게 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보여지는 스노우 화이트, 즉 백설공주와 더 헌츠맨, 즉 처음 여왕의 명령으로 숲으로 백설공주를 데려가 죽이려고 했던 사냥꾼은 이전의 모습과는 분명 많이 달라졌다. 백설공주는 더 이상 원작대로 여왕이 자신이 죽일 때까지 넋놓고 기다리지 않으며 사냥꾼은 아예 한 번 등장하는 조연이기를 거부했다. 즉 이 새로운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백설공주를 여전사로 성장시키는 스타워즈로 말하자면 '오비원 캐노비'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드디어 백설공주에 있어서도 신데렐라에서 이루어졌던 재해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기존 이미지를 거의 전복시킬 정도로...

 

  이러한 백설공주의 이미지는 그러나 대중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스노우 화이트'는 현명하게도 여왕 캐릭터를 전혀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낯설 수 밖에 없는 백설공주의 여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독자와 관객들에게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사정을 부가하여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별 무리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즉 그림형제의 원작이 세계 최고의 미모에 집착한 여왕의 악행이라는 그렇게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에 새로 나온 '스노우 화이트'는 여왕이 다스리는 어둠 제국의 백설공주의 모국 점령이라는 그렇게 제국군 대 공화국으로 서로 싸웠던 스타워즈 처럼 집단적 차원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여전히 개인적 차원의 이야기였다면 여전사가 되어버린 백설공주의 모습에 위화감이 들었겠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복수를 향한 싸움이라면 백설공주가 아무리 칼을 들고 전장을 초한지의 번쾌처럼 누벼도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라도 여왕은 원작보다 훨씬 더 강대한 마법사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또한 여전사가 된 백설공주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드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이제 여왕은 독빗과 독사과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솥에다 이것저것 약물을 혼합하던 전통적 마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런 과정이 없어도 그저 손짓 하나로 강력한 마법이 가능한 모습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확장되면 그 힘의 보충 또한 보통의 방법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이번의 여왕은 자신의 강력한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늘 어린 여자 아이의 생명력을 흡수한다. 마치 어린 여자들의 영혼과 생명력이 여왕에게 있어 건전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렇게 흡혈귀의 외양마저 둘러쓴 여왕은 더욱 공포의 존재가 되고 때문에 백설공주도 거기에 걸맞게 강력해져야 한다고 독자와 관객들은 생각하기에 더욱 여전사로서의 백설공주 모습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조율에 성공했다고나 할까. 때문에 여전사로서의 성장을 위해 사냥꾼의 존재가 중요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사냥꾼과 백설공주는 다스베이더에 맞서 싸웠던 오비원캐노비와 루크 스카이워커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스노우 화이트'와 스타워즈는 여기에서 보듯 사실상 이야기가 근본적인 측면에서 똑같다.  악령이 출몰하는 검은 숲은 또한 백설공주의 보호처가 되기에 제국의 역습으로 공화국 기지를 버리고 다른 먼 별로, 사람들이 가지 않는 행성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루크 스카이워크와 똑같고 또한 바로 그 행성에서 자신의 새로운 스승인 요다를 만나게 되는 것도 검은 숲에서 백설공주와 사냥꾼이 만나게 되는 것과 똑같다.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와 소설이 한계를 가진다면 이 작품들의 원본이 사실상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이기 때문에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타워즈는 사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많이 가져왔다. 결국 이야기는 돌고 도는 것이라는 걸 스타워즈 케이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원작의 전형성과 새로움을 아슬아슬하게 조율시키려는 시도가 결국은 자신의 고향을 원작이 아니라 전혀 다른 원작에다 삼은 셈인데 그럼 결국 스타워즈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새로운 아버지 찾기의 이야기였다. 스타워즈는 70년대에 나왔다. 그것도 초반이다. 70년대 초는 지긋지긋한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국내적으로 60년대에 일어난 여러 극심한 갈등들을 풀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곧 다가왔으므로 그 갈등을 푸는데 시간을 그리 많이 쓸 수는 없었다. 그러한 무의식적인 초조함, 뭔가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강력한 권위의 등장에 대한 희구. 바로 그러한 것들이 낳은 것이 '스타워즈'였다. 그러니까 다스베이더는 바로 60년대의 미국 자체를 상징한 존재였다. 50년대의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60년대를 거치면서 악의 아버지 다스베이더가 되었고 그 아버지가 가져온 온갖 혼돈을 아들이 해결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스타워즈'였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이 바로 좋은 아버지가 그 나쁜 아버지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타워즈는 사실 아버지의 권위를 강력히 희망하는 영화다. 혼돈된 상황을 단번에 정리해줄 그런 존재로서 아버지를 요청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배려하며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합의하기 보다는 강력한 부권으로서 일시적으로 조정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다이라는 초월적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노우 화이트'는 이 '스타워즈'의 여성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차이가 있다면 대치하는 주요 캐릭터가 여자라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까 혼돈을 정리해줄 강력한 부권의 도래를 바라는 것은 '스노우 화이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스노우 화이트'는 내내 되찾고 싶은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녀에게 있어 국가를 다시 찾는 것은 아버지를 다시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왕이 첫날밤에 단검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백설공주의 나라는 여왕의 손에 넘어가고 지옥이 되어버렸다. 즉 나쁜 아버지 대신에 나쁜 어머니가 있고 그 어머니가 어지럽혀 놓은 세상을 다시금 아버지를 통해 복원하겠다는 것이 바로 '스노우 화이트'의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사냥꾼이 메인 캐릭터가 되었다. 그가 유사-아버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죽어버린 아내를 다시 살려주겠다는 여왕에 약속에 따라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 그녀가 은신해 있다는 검은 숲으로 왔다.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거의 죽은 듯이 살았는데 바로 이 모습에서 그는 백설공주의 죽어버린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지며 그녀의 아버지 자리를 대체할 것임을 미리 암시한다. 결국 그 암시대로 그는 백설공주의 스승, 그렇게 아버지의 위치에 오르며 그녀의 나라이자 곧 자신의 나라이기도 한 왕국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정체성을 그녀에게 습득시킨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인도에 따라 결국 백설공주는 질서를 확립하게 된다. 결국 '스타워즈'와 동일한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그 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의 사회자 멘트 그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러는 걸까요? 왜 지금 백설공주를 새로이 재해석한 '스노우 화이트'가 하필이면 '스타워즈'의 모습을 취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유는 상상의 몫에 맡길 수 없다.

 거기엔 바로 드러나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혼란기였던 70년대 초와 지금 이 시기의 미국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공통점이 말이다. 즉 이 둘은 모두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스타워즈가 그렇게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스타워즈가 정말로 당시 미국 대중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것을 상상적으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 화이트'도 이와 마찬가지다. 무언가 빨리 해결을 바라는 조급함이 있다. 일례로 소설에서 한 공작은 운좋게 여왕이 학살에서 살아남아 왕국으로 부터 도망쳐 자신의 영지에다 저항의 거점을 마련한다. 그의 아들은 백설공주와 소꿉친구로 사실 그 아들은 백설공주와 '에버 에프터'를 이루는 왕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정작 백설공주가 천신만고 끝에 공작에게 찾아오자 공작은 백설공주의 명예를 위해 싸우거나 왕국 수복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대로 계속 지낼 것이라 선언한다. 하지만 백설공주는 자신은 공주이며 국왕이 없는 지금 그의 신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왕국을 되찾을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공작에게 명령한다고 하여 여왕과 전쟁에 돌입한다. 바로 이 논쟁이 '스노우 화이트'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신속한 해결. 바로 그것을 바란다는 것을.

 

 

 

 

 

 

 

 

 

 

 

 

 

 

 

 

 

 

  '스타워즈'도 '스노우 화이트'도 똑같이 그런 것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빨리 벗어나고픈 대중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바로 홉스의 말이다. 그것도 홉스가 주권에 대해 내렸던 정의(definition)이다. 홉스의 주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권과 다르다. 주권에 대해 홉스는 이렇게 말했다. 주권이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힘이라고. 바로 그 예외상태란 전쟁을 의미한다. 즉 주권이란 홉스에 의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다. 백설공주는 말하자면 바로 이 홉스의 주권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왜 전쟁인가? 그것은 갈등과 분란을 강력한 힘으로 조기에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강력한 아버지, 리바이어던의 권위를 빌려서 말이다.

 

  이제 종합해서 말하자면, 백설공주의 재해석이라고만 생각했던 '스노우 화이트'는 사실은 전혀 다른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대중들이 뭔가 조급증에 걸렸으며 그들은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 줄 강력한 주권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다. 바로 그 희구의 징후를 드러내기 위하여 백설공주는 자신의 원본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 강력한 염원을 담았던 작품인 '스타워즈'의 후예가 되기로 자처한 것이다.

 

 이것은 위기의 신호가 아닐까? 스타워즈는 70년대의 보수로의 회귀라는 강력한 흐름의 신호탄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어쩌면 동일하게 홉스적 주권의 도래를 바라고 있는 '스노우 화이트' 역시도 그 비슷한 징후가 될지 모른다. 이후의 미국이 다시금 강력한 보수주의로 회귀할 것이라는...

 (어쨌든 기우인지 아닌지는 때가 되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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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페이퍼 아주아주 자세하게 읽었는데(오늘만큼 헤르메스님의 글을 자세히 읽은 적도 없네요ㅎㅎ) 아주 좋아요. 소개해주신 영화도 참 매력적이고 글도 탄탄하고, 좋고. 내용을 모르다보니 그저 좋다고만.. ㅋㅋㅋㅋ

헤르메스님 이제 완전한 여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습한 열기가 훅훅 불어오네요.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책에 빠져서 더위를 잊어야 겠습니다. 시험이 이틀 남았네요. 시험이 끝나려면 일주일 가까이 남았네요. 책을 며칠 동안이네 안 읽었더니 참, 힘드네요. 짜증나고.

이진 2012-07-04 21:34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디너> 리뷰 언제 올려주실 거예요?
헤르메스님의 <디너> 리뷰 얼른 보고 싶어요.
헤르메스님 리뷰 읽고 책 읽으려고 준비 중이예요! ㅋㅋ

오드득 2012-07-06 21:25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흑흑... 저의 미천한 리뷰를 기다려주셨다니 정말 감격이에요...
소이진님을 위해서라도 빨리 써야 하는데...
왜 이리 시간이 안 나는지... 아무튼 시간이 나는 대로 얼른 쓰겠습니다.
그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폐허에 바라다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별 뜻 없이 집어 들었는데 손에서 놓기가 어렵더군요.
 아무래도 이 소설만이 가진 어떤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리하게 정의하자면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는 과정의 소설입니다.
 형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장르물이지만 정작 추구하는 건 '누가 했느냐?'라는 식의 범인 체포가 아닙니다. 그 보다 더욱 천착하는 것은 사건 해결이야 어찌 되었든지간에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랄까요? 산책자의 소설이라고 할까요? 산책자는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걷고 있다는 그 사실, 걸으면서 주위의 풍경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이죠. 풍경을 음미하면서 조용히 걸을 수만 있다면 목적지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바로 산책자입니다.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는 정말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로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형사가 주인공도 아니고 루 아처라는 사립탐정이 주인공입니다만 풀어가는 스타일이 사사키 조와 유사합니다. 로스 맥도널드는 주로 당시 미국 가정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갈등들을 드러내는데 주력하는 작가인데 역시나 그 불안과 갈등등은 범죄로 표출되지만 맥도널드 역시도 누가 그것을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가정이 왜 이렇게 불안과 갈등을 안게 되었느냐는 것이며 바로 그 이유의 탐색을 위해서 당대의 미국 사회를 풍경을 온전히 드러내는데 주력합니다. 말 그대로 로스 맥도널드의 소설도 과정의 소설인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폐허에 바라다'의 주인공 센도의 역할이 기묘합니다. 그는 형사이지만 어쩐지 사립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참여했던 사건의 비극으로 PTSD, 즉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센도는 이 때문에 그 마음의 상처 부터 치료하고자 휴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양을 하는 가운데서도 자꾸만 과거의 인연으로 사람들이 사건을 의뢰해 와서 할 수 없이  계속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폐허에 바라다'는 그런 식으로 뛰어든 사건들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휴직 상태이기 때문에 멋대로 경찰의 신분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찰이지만 사건 탐문 때는 경찰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보를 얻기위해 할 수없이 사람들에게 경찰임을 드러낼 때는 명함을 건네줍니다. 이건 그대로 사립탐정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 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그렇게 센도는 경찰이지만 경찰이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는 외양만 보자면 사립탐정과 같습니다. 더구나 사건을 탐문할 때 마다 늘 스스로나 타인들이 자꾸만 휴직 상태임을 일깨웁니다. 그렇게 경찰로 일한다기 보다는 사립탐정으로 일한다는 것을 내내 일깨워주는 것만 같습니다.
 
굳이 사사키 조가 왜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한 것일까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찰이지만 왜 자꾸 사립탐정의 역할을 연기하게끔 하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에 대한 대답이 사사키 조가 '페허에 바라다'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의 주된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역시 센도에게 PTSD를 가져다 준 사건의 성격입니다. 그 사건의 내막은 마지막 에피소드인 '복귀하는 아침'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데 센도가 PTSD를 가지게 된 것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제대로 대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저 고지식하게 수사 원칙을 지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극적 사건(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사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원칙 따위는 무시해 버려야 하는 것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죠. 그러므로 결과만 좋으면 과정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훗설이 말하는 에포크, 즉 판단중지가 필요한 것이죠. 제대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키고 다시금 처음부터 되새겨 볼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폐허에 바라다'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바로 센도가 지금 안고 있는 그 의문에 대한 탐문인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사키 조가 왜 이 소설을 과정의 소설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하드보일드 장르의 사립탐정으로 만들었는지가 이해되는 것이죠. 사립탐정의 역할은 경찰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경찰이 질서의 복원이라면 사립탐정의 역할은 폐허가 되어버린 질서를 관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기에 대해서 좋은 말을 했었죠. 아시다시피 그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광팬입니다. 그 소설을 말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립탐정은 어떤 진실을 추적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는 그것이 변질되고 말았다는 사실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립탐정은 변화의 목격자이며 바로 이 때문에 사사키 조는 굳이 센도에게 사립탐정의 외양을 취하게 한 것입니다. 센도에게 폐허의 관찰자가 되기를 바랐던 사사키 조의 의중은 에피소드 곳곳에 나타나는 세월에 변해버린 공간의 묘사에서 두드러집니다. 훗카이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의 무대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들어오거나(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폐허에 바라다)이거나 좋았던 전통이 몇몇의 협잡으로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 곳(오빠 마음)이거나 한 곳들이죠. 그렇게 변화의 와중에 있는 곳입니다. 센도는 바로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탐문합니다. 그리고 확인합니다. 공간이 변한 만큼 사람들 역시도 변해 버렸다는 것을. 그것도 현실적인 욕망의 추구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센도가 가지고 있었던 PTSD를 불러온 의문에 해답이 되는 셈입니다. 즉 사사키 조는 정당한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변화에 임기응변으로 임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그 모든 공간과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결국은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하더라도 원칙을 고수함이 올바른 것이라고. 이는 센도와 공간의 대비로 인해 두드러집니다. 즉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공간과 사람들과는 달리 센도만은 PTSD마저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고지식하고 남들이 보면 안지켜도 될 것 같은 것도 충실히 지키려들죠. 그 세세한 원칙의 고수를 사사키 조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지킬 것은 지키는 것. 센도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의 독특한 매력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현실적 타협을 위해 신념을 져버리거나 원칙을 무시하는 것쯤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시대에 고지식하게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것을 작가가 마음으로 부터 지지하는 소설이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사키 조는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산책자의 소설로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던 것은 이러한 센도의 신념에, 사사키 조의 지지에 공명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사키 조의 작품은 '경관의 피'와 '제복 수사'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있는 것 같던데 차후의 여정이 어떻게 될 지 또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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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의 아프리카에서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거세게 일어난 재스민 혁명과 더불어 민주주의는 다시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근대 이후로 가장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정치 체제이지만 아직도 민주주의만큼 논쟁적인 개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계층들이 저마다 다 다른 목소리로 '이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하고 있는 판국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고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다 라고 말하는 측도 있다. 거기다 정치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로 보는 측도 있고 요즘 같이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국가를 포함하여) 한 체제의 정당성은 오로지 국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는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제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즉 민주주의란 오로지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그 나라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체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사실은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 나오는 국민이란 단어나 합의란 단어가 그 자체로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외부적으로 그 뜻을 구체화할 수 밖에 없는 가치충전식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민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 그리고 합의의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만큼 다양한 나라와 계층들이 모두 다 자기가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정도'의 문제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약점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여전히 민주주의가 논쟁적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국민을 제대로 교양을 쌓지 않은 평민들까지 확대시킬 경우 스스로 그들의 이해관계 추구를 제어할 길이 없으므로 그들의 욕망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선동될 여지가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중우정치로 빠져들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체제에 놓아두었는데 사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그 자신 직접 체험한 결과에서 나온 선택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포된 불명확성과 그 기준의 부재 때문에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로 이름높은 로버트 달 같은 학자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발현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식으로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조차도 오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그런 역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때 그 때의 현실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에게 연대기라는 것이 있다면 당시 상황이 빚어낸 민주주의들이 저마다 하나하나의 단층들이 되어 층층이 쌓여진 지층 같은 모습이라는 것. 그렇게 민주주의는 각 시대와 나라에 따른 고유한 것들이 있었을 뿐 일련의 발전된 경로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개념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추출된 요소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쌓여진 수많은 단층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가지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일종의 콜라쥬를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지금 소개하려는 책 로저 오스본도 보여준다.

 그가 작년에 펴낸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그 전에 집필한 서구 문명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고 쓰여진 책이다. 로저 오스본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역사 작가인데 그건 그의 전공이 역사가 아니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질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가장 주목받는 역사 작가중의 하나가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역사 연구와 서술 방법이 지질학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한다. '지질학적'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가능할텐데 그것은 셜록 홈즈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이해될 듯 싶다. 지질학에 대해 소양이 아주 깊은 홈즈는 옷이나 신발에 묻은 흙만 보아도 그가 어디를 거쳐서 자신에게 왔는지 다 알아낸다. 그렇게 홈즈가 세부를 통해 경로라는 하나의 줄기를 뽑아내듯이 지질학은 세부와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학문이다.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오스본의 전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책으로 그렇게 각 시대별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세한 세부의 묘사를 통해 끝내는 민주주의라는, 그 내부 속에 애매한 구멍을 가진 그것에 대한 전체적 밑그림마저 독자 스스로 그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바라보는 민주주의는 로버트 달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연대기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 그것이 발달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여겨져 잘못된 가정을 하기 쉽상이다. 그 첫째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옛 민주주의로 부터 무언가 배웠을 가정이다. 실제로는 모든 형태의 민주국가가 제 나름대로 민주적 제도와 관례를 만들어내야 했다. (...)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사건의 전개가 항상 개선을 뜻한다는 생각이다. (..)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P. 22)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기 때문에 도식화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의 주요 기능이 바로 변화와 적응이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지탱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P. 19)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자체가 가진 속성이 만들어내는 단층화 과정을 고대 아테네로 부터 시작해 최근의 민주주의적 상황까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지질학적 스타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의 세부를 공들여 복원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로저 오스본이 말한대로 민주주의가 그야말로 특정한 시대의 자유로운 변화와 적응의 산물임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책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3장 중세에 발현되었던 민주주의 모습이라든지 4장 그라우뷘덴의 총투표제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만이 가진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라우뷘덴의 경우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의 기원이 아테네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 곳이기도 해서 이번에 자세히 엿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로저 오스본의 책은 학창시절과 대학시절 많이 배웠던 민주주의에 있어서 공백으로 남겨진 역사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헌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참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헌법을 보다보면 반드시 영국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등 서구 헌법의 역사와 기본권의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간략하게만 서술되어 있어서 제대로 그 면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헌법책에서 이름만 들어왔던 '수평바'의 진면목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런 식으로 그 자세한 모습을 몰라서 그 역사를 그저 암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이 책에는 그동안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공백이었던 미국 독립과 비슷한 시기의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모습과 인도의 민주주의 정착과정까지 다루고 있어 그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특히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미국과 똑같이 식민지로 부터 독립하였으나 그렇게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미국이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이룩한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공화국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결국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란 확정의 개념이 아닌 과정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뚜렷이 인지하게 된다. 그 시대의 특정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해 온 것이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생물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다.(p. 497) 

 

 깨닫게 되는 건 비단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만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자체에 흠결을 가진 개념이라 하더라도 분명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식별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모습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둘은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모습에 가장 근사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것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도 당시 대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미 영국혁명 당시 저변으로 확대된 기층 민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라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가능케한 제대로 된 정당제도를 낳았고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로 인해 도시 사회로 활발하게 이양되고 덕분에 변호사, 상인, 자영업자, 의사, 회계사등 도시 중산층이 성장하게 됨으로써 갈수록 정치토론과 참여가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p. 277)는 생각까지 하고 있어 정치활동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은 민주주의는 기층 민중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참여가 있을 때라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만이 좋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첩경임을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과일은 막연히 누군가 따 주기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젓든 장대를 들고 휘적이든 아뭏든 뭔가 따려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자에게만 보상처럼 뚝 떨어진다. 민주주의란 한 체제가 어떠해야 하느냐를 국민적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합의에 참여하는 국민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렇게 보다 많은 이들을 주인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로 있게하는 보다 좋은 민주주의는 로저 오스본이 잘 보여준대로 쟁취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투쟁이 가져오는 불안 보다는 적당한 타협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오스번이 말했던 대로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인데 그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 497) 바로 내 삶과 마찬가지라는 부단한 관심과 참여만이 당신이 원하는 민주주의를 당신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장하준은 언젠가의 책에서 민주주의란 가진 돈 만큼 권리가 인정되던 자본주의에 대항해 돈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권리를 행사하게끔 만들어 자본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좋은 체제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 돈으로 결정되던 권리를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가를 그의 책 '사다리 걷어차기'는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장하준이 이렇게 칭찬하는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다른 측면에서는 사실은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힘을 두려워한 부르조아들이 노동자들을 선거권으로 한 국가에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으로 만들어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평등한 나라의 일원으로 각성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키고 그래서 계급적 단결을 와해시키려는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즉 이들의 주장은 만일 그러한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없었으면 자본주의의 파국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전면적으로 찾아왔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점진적 개선 보다는 단 한 번의 파국적 혁명을 위한 '부단한 부정(negative)'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말들의 함의는 당신이 거처하는 민주주의라는 공간이 순탄한 평화 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 보통 선거권을 둘러싼 음모와 지젝의 말에게서 나타나듯이 당신히 느끼든 못 느끼든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은 저마다 자신이 바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수 많은 힘들과 전략이 맞부딪히는 전장에 다름아니다. 그 힘들과 전략은 당신을 비켜가지 않으며 좋든 싫든 당신 신체 위에서 무수한 전선(front line)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후방은 없다. 로저 오스본의 이 책의 원제는 링컨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했던 말이기도 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는 부단한 당신의 관심과(소유격을 나타내는 OF는 민주주의를 소유물로 만든다. 누구든 자기의 소유물엔 부단한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당신의 신체 자체를 필요로 한다.('BY' 자체가 행위를 요구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 전에 이 책을 통해 미리 생각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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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자아, 먼저 호들갑부터...

 

 작년에 이 소설이 에드거상을 받았을 때 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단순한 이유로 이 책을 쓴 브루스 디 살바가 4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였다는 점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소설 '악당들의 섬'은 그 40년 경력 기자의 첫 데뷔작이다. 일단 기자 출신의 작가는 내게 신뢰감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그러니까 '발란더 형사' 시리즈의 해닝 만켈,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보슈 형사'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까지 다 기자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좀 더 마니악(maniac)한 이유로 이 40년 경력의 기자를 작가로 이끌었던 장본인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에드 멕베인이다. 맙소사! 87분서 시리즈의 그 에드 멕베인이다. 94년 가을, 디 살바는 자신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한 단편을 칭찬하는 편지를 한 독자로 부터 받게 된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 글은 장편의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요. 장편 소설을 써 볼 생각은 없는지요?" 독자의 이름은 에반 헌터였다. 필명인 에드 멕베인의 본명. 그 때 부터 디 살바는 그 편지를 코팅해 컴퓨터에 붙여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이 소설을 멕베인에게 헌정하면서 그 에피소드를 첫 머리에 공개하고 있다. 하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그토록 놀라운 칭찬을 해 주었는데 어찌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소설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있겠는가!

 

 세번째도 역시 마니악한 이유다.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 소설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 사실 내 귀는 팔랑거릴 정도로 얇다. 그런 칭찬엔,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했다고 하면 금방 혹하고 만다. 아무튼 그 작가들이란 바로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그리고 할란 코벤을 비롯 리스트가 꽤나 즐비하다. 그러니 보게 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나오자마자 잡아서 허겁지겁 읽을 수 밖에...

 

 

 그렇게 나는 악당들의 섬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과연 그 기다림이 어떤 보상을 받게 되었는지 물으신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대답해야 하리라...

 

 기대 이상으로 내게 이 소설은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그 많은 동료 작가들의 칭찬 속에 나 역시 첨언하고 싶어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사실 앉은 자리에서 내처 두 번을 읽고도(덕분에 엉덩이가 조금 아팠다.) 지금도 간혹 재미있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읽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그동안 스릴러도 꽤나 진지하게 접근해 읽었고 리뷰 역시도 사회적인 것과 관계해서 쓰곤 하였지만 이 작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의미를 따지고 구조를 살피고 깔려있는 상징을 파악하기 전에 이미 문장 자체에서 물씬 전해져오는 살인적인 유머 때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신적 무장 해제를 당한 속에서 마구 웃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머가 가미된 스릴러를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봐, 머저리 전에도 말했듯이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할 수가 없어."

 폴레키가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요. 가서 교통사고나 취재하는 게 어때요? 그 쪽이 직접 당한다면 더 좋고요."

 로젤리가 말했다.

 로젤리의 유머 감각은 충분히 즐겼으니, 뭉그적대다가 한 방에 얻어터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휴지통이 폴레키의 여송연처럼 연기를 내뿜었다. 냄새가 과히 좋지도 않았다. 지금이 떠나기에 적기인 듯 했다. 나는 나가는 길에 복도의 화재 경보기를 눌렀다. 그 망할 놈의 장치가 진짜 작동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P.18)

 

 이런 식의 유머에는 난 정말 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정말 낄낄거리며 거침없이 읽었다. 이런 재미를 또 어느 스릴러 소설에서 느껴보았을까 생각했지만 단연코 없었다.(물론 내 독서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유머만 있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다. 흔히들 웃는 광대가 더 슬픈 건 그 웃음 아래 세상의 가장 작은 존재로서 느끼는 진한 비애감이 스며있기에 그렇다고 한다. 디 살바의 '악당들의 섬'에 흐르는 유머도 이와 같다. 또한 니체는 인간은 너무나 슬픈 동물이기에 웃음을 만들어야 했었다고 말했는데 '악당들의 섬'의 유머는 바로 여기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처절한 광경을 목도 했을 때의 무장해제 되어버린 마음이 무심결에 짓는 황망함의 웃음이며 그런 세상이지만 어떡하든 포기하지 않고 고쳐보겠다는 견딤의 웃음인 것이다. 밀리건이 이렇게 웃음을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처지 때문이다. 그는 기자이고 기자의 신념으로 진실을 밝혀 누군가의 방화로 인해 자꾸만 반복되는 비극을 끊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거기에 별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자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밀리건은 고독하다. 바로 그 고독, 오로지 혼자 그 비극을 자기 일 처럼 생각하기에 웃음을 유일한 그의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일상에 골몰한 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밀리건의 편집장이 내내 그에게 써 오라고 요구하는 기사처럼 그저 자신이 속한 일상이 여전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주는 개에 얽힌 미담 정도만이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곁의 시내 한가운데서 누군가의 방화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죽어도 편집장은 무슨 신성한 의무라도 되는 양 원고에서 '빌어먹을'이나 '우라질' 같은 저속한 단어를 보는 족족 골라내어 한없이 평온한 일상으로 만들 뿐이다. 더러운 건 닦아내고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건 제거하면 된다는 듯이...

 

 타조는 적에게 쫓기면 머리를 땅에 박고 이제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안심하다가 결국 적에게 먹힌다고 한다. 억지로 안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이러한 타조의 막무가내식 안심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에 의해 착착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이런 기만적인 안정이란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거짓의 일상이요 부질없는 환각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 속에서 밀리건의 마음이 평온할리가 없다. 뉴옥(NEW獄 - '새로운 지옥')이라 할만한 뉴욕에서 사립탐정으로 일하고 있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가 알콜 중독에 시달리듯이 로드 아일랜드의 마운틴 호프의 기자 밀리건은 담배와 이혼한 아내로 부터의 독설에 시달린다. 사실 이혼한 아내가 전화할 때 마다 처음부터 들려오는

 

 "이!

  나쁜!

  새끼야!"

 (책에 나온 그대로 인용. 이 인용문은 끝날때까지 내내 이대로 나온다.)

 

 이 같은 욕설은 사실 밀리건에게 있어서 욕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것이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식으로 평온하게 덧칠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같은 세상이 거짓이며 자신은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일종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울음이 된다. 그러니까 밀리건에게 자신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그 정체성을 되새기는 장치로서 디 살바가 의도적으로 내내 반복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그렇게 자학적 각성을 할 정도로 그는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언론학 교수들은 자신의 기사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말라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적 초연함을 기르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기자도 개의치 않는 온기 없는 기사를 독자인들 신경 쓰겠는가. 나는 혹시 신이 들으실까 해서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제설차가 소화전을 파묻을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쌍둥이가 소리쳐 도움을 갈구 할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P.54)

 

 그래서 그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신마저 포기하여 모두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약자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성장하고 있는 도시의 진실을 파헤쳐 그것을 멈추려 한다.

 

 "비 좀 멈추게 해줘요! 비 좀 멈추게 해달라고요!" (P. 357)

 

 이 소설은 그런 싸움이다. 때로는 유치하리만큼의 유머로 또 때로는 뼈마저 얼려버릴 정도의 냉소를 머금은 소설이지만 이 근본엔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자의 사회의 구원을 위한 투쟁이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구약 시대의 이사야 같은 선지자 처럼...

  때문에 이러한 밀리건의 분투를 읽으면서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를 떠 올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약자들의 삶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면서 홀로 분투하고 있는, 그런 면에서 밀리건의 형제라고 해도 무방한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의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도 애덤스의 그 작품은 언급 된다. 결국은 다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 스커더가 만나는 한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한다.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 읽어 보신 적 있나요?"

 읽은 적이 없었다.

 "그 책에 토끼 마을이 나오거든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토끼들의 마을이죠. 인간들이 토끼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식량은 충분해요. 식량을 주는 사람들이 이따금 덫을 놓아 토끼 고기를 먹으려고 드는 것만 빼면 토끼 천국이라고 할 수 있죠. 살아남은 토끼들은 절대 덫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덫에 결려 죽은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어요. 그들은 덫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죽은 동료들이 아예 살았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행동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이죠."

 그녀는 이야기하는 동안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문득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뉴요커들이 마치 그 토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여기 사는 건 문화든 일자리든 간에 이 도시가 주는 뭔가가 필요해서죠. 그리고 이 도시가 우리 친구나 이웃들을 죽일 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죠. 그런 기사를 읽으면 하루나 이틀 쯤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거에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려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우린 마치 그 토끼들 같아요. 그렇죠?"

 

(로렌스 블록 '800만가지 죽는 방법 P. 249 ~ 250)

 

 젠장, 뉴욕 뿐이겠는가? 밀리건의 마운트 호프도 마찬가지고 우리 서울 역시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망각과 무관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비겁하다는 것의 증표일 뿐이다 . 아마도 그래서 밀리건은, 매트는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홀로라도 싸우는 것이며 바로 그 용기가 부러워서 이렇게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벗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트 보다 밀리건이 더 나은 게 하나 있다면 그는 웃으며 싸울 줄 안다는 것이다. 이왕 싸우려면 웃으며 싸우자는 '나꼼수'의 말처럼.(또 젠장, 오늘 속보로 김어준과 주진우가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언론인이 선거 운동에 개입한 게 그 이유란다. 그렇게 많은 언론 전문가들이 나꼼수가 언론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그들을 비난한 이들 조차 나꼼수는 예능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눈에는 닥치고 불법이다. 누구는 카퍼레이드까지 해도 알아서 합법이고... 매카시 식의 마녀사냥은 아직도 영원히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 20대 후반의 투표율은 37.9%다.(그 전이 24.2%였으니 그나마 희망은 있는 것인가? 정말?) 다시 말해 망각과 무관심이 습관이 되어버린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이 사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밀리건을 아낀다. 언젠가 이 비가 멈추리라는 희망 속에 기꺼이 남들에게 우산이 되어주려는 그를... 어서 그의 후속작이 나오면 좋겠다.

 

 그 때를 기다리며 아마도 나는 곧 세번째 악당들의 섬을 방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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