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의 아프리카에서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거세게 일어난 재스민 혁명과 더불어 민주주의는 다시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근대 이후로 가장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정치 체제이지만 아직도 민주주의만큼 논쟁적인 개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계층들이 저마다 다 다른 목소리로 '이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하고 있는 판국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고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다 라고 말하는 측도 있다. 거기다 정치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로 보는 측도 있고 요즘 같이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국가를 포함하여) 한 체제의 정당성은 오로지 국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는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제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즉 민주주의란 오로지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그 나라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체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사실은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 나오는 국민이란 단어나 합의란 단어가 그 자체로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외부적으로 그 뜻을 구체화할 수 밖에 없는 가치충전식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민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 그리고 합의의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만큼 다양한 나라와 계층들이 모두 다 자기가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정도'의 문제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약점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여전히 민주주의가 논쟁적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국민을 제대로 교양을 쌓지 않은 평민들까지 확대시킬 경우 스스로 그들의 이해관계 추구를 제어할 길이 없으므로 그들의 욕망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선동될 여지가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중우정치로 빠져들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체제에 놓아두었는데 사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그 자신 직접 체험한 결과에서 나온 선택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포된 불명확성과 그 기준의 부재 때문에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로 이름높은 로버트 달 같은 학자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발현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식으로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조차도 오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그런 역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때 그 때의 현실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에게 연대기라는 것이 있다면 당시 상황이 빚어낸 민주주의들이 저마다 하나하나의 단층들이 되어 층층이 쌓여진 지층 같은 모습이라는 것. 그렇게 민주주의는 각 시대와 나라에 따른 고유한 것들이 있었을 뿐 일련의 발전된 경로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개념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추출된 요소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쌓여진 수많은 단층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가지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일종의 콜라쥬를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지금 소개하려는 책 로저 오스본도 보여준다.

 그가 작년에 펴낸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그 전에 집필한 서구 문명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고 쓰여진 책이다. 로저 오스본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역사 작가인데 그건 그의 전공이 역사가 아니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질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가장 주목받는 역사 작가중의 하나가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역사 연구와 서술 방법이 지질학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한다. '지질학적'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가능할텐데 그것은 셜록 홈즈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이해될 듯 싶다. 지질학에 대해 소양이 아주 깊은 홈즈는 옷이나 신발에 묻은 흙만 보아도 그가 어디를 거쳐서 자신에게 왔는지 다 알아낸다. 그렇게 홈즈가 세부를 통해 경로라는 하나의 줄기를 뽑아내듯이 지질학은 세부와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학문이다.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오스본의 전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책으로 그렇게 각 시대별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세한 세부의 묘사를 통해 끝내는 민주주의라는, 그 내부 속에 애매한 구멍을 가진 그것에 대한 전체적 밑그림마저 독자 스스로 그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바라보는 민주주의는 로버트 달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연대기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 그것이 발달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여겨져 잘못된 가정을 하기 쉽상이다. 그 첫째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옛 민주주의로 부터 무언가 배웠을 가정이다. 실제로는 모든 형태의 민주국가가 제 나름대로 민주적 제도와 관례를 만들어내야 했다. (...)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사건의 전개가 항상 개선을 뜻한다는 생각이다. (..)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P. 22)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기 때문에 도식화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의 주요 기능이 바로 변화와 적응이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지탱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P. 19)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자체가 가진 속성이 만들어내는 단층화 과정을 고대 아테네로 부터 시작해 최근의 민주주의적 상황까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지질학적 스타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의 세부를 공들여 복원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로저 오스본이 말한대로 민주주의가 그야말로 특정한 시대의 자유로운 변화와 적응의 산물임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책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3장 중세에 발현되었던 민주주의 모습이라든지 4장 그라우뷘덴의 총투표제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만이 가진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라우뷘덴의 경우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의 기원이 아테네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 곳이기도 해서 이번에 자세히 엿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로저 오스본의 책은 학창시절과 대학시절 많이 배웠던 민주주의에 있어서 공백으로 남겨진 역사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헌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참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헌법을 보다보면 반드시 영국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등 서구 헌법의 역사와 기본권의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간략하게만 서술되어 있어서 제대로 그 면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헌법책에서 이름만 들어왔던 '수평바'의 진면목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런 식으로 그 자세한 모습을 몰라서 그 역사를 그저 암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이 책에는 그동안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공백이었던 미국 독립과 비슷한 시기의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모습과 인도의 민주주의 정착과정까지 다루고 있어 그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특히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미국과 똑같이 식민지로 부터 독립하였으나 그렇게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미국이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이룩한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공화국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결국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란 확정의 개념이 아닌 과정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뚜렷이 인지하게 된다. 그 시대의 특정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해 온 것이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생물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다.(p. 497) 

 

 깨닫게 되는 건 비단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만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자체에 흠결을 가진 개념이라 하더라도 분명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식별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모습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둘은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모습에 가장 근사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것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도 당시 대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미 영국혁명 당시 저변으로 확대된 기층 민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라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가능케한 제대로 된 정당제도를 낳았고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로 인해 도시 사회로 활발하게 이양되고 덕분에 변호사, 상인, 자영업자, 의사, 회계사등 도시 중산층이 성장하게 됨으로써 갈수록 정치토론과 참여가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p. 277)는 생각까지 하고 있어 정치활동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은 민주주의는 기층 민중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참여가 있을 때라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만이 좋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첩경임을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과일은 막연히 누군가 따 주기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젓든 장대를 들고 휘적이든 아뭏든 뭔가 따려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자에게만 보상처럼 뚝 떨어진다. 민주주의란 한 체제가 어떠해야 하느냐를 국민적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합의에 참여하는 국민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렇게 보다 많은 이들을 주인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로 있게하는 보다 좋은 민주주의는 로저 오스본이 잘 보여준대로 쟁취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투쟁이 가져오는 불안 보다는 적당한 타협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오스번이 말했던 대로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인데 그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 497) 바로 내 삶과 마찬가지라는 부단한 관심과 참여만이 당신이 원하는 민주주의를 당신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장하준은 언젠가의 책에서 민주주의란 가진 돈 만큼 권리가 인정되던 자본주의에 대항해 돈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권리를 행사하게끔 만들어 자본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좋은 체제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 돈으로 결정되던 권리를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가를 그의 책 '사다리 걷어차기'는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장하준이 이렇게 칭찬하는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다른 측면에서는 사실은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힘을 두려워한 부르조아들이 노동자들을 선거권으로 한 국가에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으로 만들어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평등한 나라의 일원으로 각성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키고 그래서 계급적 단결을 와해시키려는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즉 이들의 주장은 만일 그러한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없었으면 자본주의의 파국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전면적으로 찾아왔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점진적 개선 보다는 단 한 번의 파국적 혁명을 위한 '부단한 부정(negative)'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말들의 함의는 당신이 거처하는 민주주의라는 공간이 순탄한 평화 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 보통 선거권을 둘러싼 음모와 지젝의 말에게서 나타나듯이 당신히 느끼든 못 느끼든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은 저마다 자신이 바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수 많은 힘들과 전략이 맞부딪히는 전장에 다름아니다. 그 힘들과 전략은 당신을 비켜가지 않으며 좋든 싫든 당신 신체 위에서 무수한 전선(front line)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후방은 없다. 로저 오스본의 이 책의 원제는 링컨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했던 말이기도 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는 부단한 당신의 관심과(소유격을 나타내는 OF는 민주주의를 소유물로 만든다. 누구든 자기의 소유물엔 부단한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당신의 신체 자체를 필요로 한다.('BY' 자체가 행위를 요구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 전에 이 책을 통해 미리 생각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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