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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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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먼저 호들갑부터...
작년에 이 소설이 에드거상을 받았을 때 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단순한 이유로 이 책을 쓴 브루스 디 살바가 4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였다는 점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소설 '악당들의 섬'은 그 40년 경력 기자의 첫 데뷔작이다. 일단 기자 출신의 작가는 내게 신뢰감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그러니까 '발란더 형사' 시리즈의 해닝 만켈,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보슈 형사'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까지 다 기자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좀 더 마니악(maniac)한 이유로 이 40년 경력의 기자를 작가로 이끌었던 장본인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에드 멕베인이다. 맙소사! 87분서 시리즈의 그 에드 멕베인이다. 94년 가을, 디 살바는 자신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한 단편을 칭찬하는 편지를 한 독자로 부터 받게 된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 글은 장편의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요. 장편 소설을 써 볼 생각은 없는지요?" 독자의 이름은 에반 헌터였다. 필명인 에드 멕베인의 본명. 그 때 부터 디 살바는 그 편지를 코팅해 컴퓨터에 붙여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이 소설을 멕베인에게 헌정하면서 그 에피소드를 첫 머리에 공개하고 있다. 하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그토록 놀라운 칭찬을 해 주었는데 어찌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소설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있겠는가!
세번째도 역시 마니악한 이유다.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 소설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 사실 내 귀는 팔랑거릴 정도로 얇다. 그런 칭찬엔,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했다고 하면 금방 혹하고 만다. 아무튼 그 작가들이란 바로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그리고 할란 코벤을 비롯 리스트가 꽤나 즐비하다. 그러니 보게 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나오자마자 잡아서 허겁지겁 읽을 수 밖에...
그렇게 나는 악당들의 섬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과연 그 기다림이 어떤 보상을 받게 되었는지 물으신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대답해야 하리라...
기대 이상으로 내게 이 소설은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그 많은 동료 작가들의 칭찬 속에 나 역시 첨언하고 싶어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사실 앉은 자리에서 내처 두 번을 읽고도(덕분에 엉덩이가 조금 아팠다.) 지금도 간혹 재미있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읽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그동안 스릴러도 꽤나 진지하게 접근해 읽었고 리뷰 역시도 사회적인 것과 관계해서 쓰곤 하였지만 이 작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의미를 따지고 구조를 살피고 깔려있는 상징을 파악하기 전에 이미 문장 자체에서 물씬 전해져오는 살인적인 유머 때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신적 무장 해제를 당한 속에서 마구 웃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머가 가미된 스릴러를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봐, 머저리 전에도 말했듯이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할 수가 없어."
폴레키가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요. 가서 교통사고나 취재하는 게 어때요? 그 쪽이 직접 당한다면 더 좋고요."
로젤리가 말했다.
로젤리의 유머 감각은 충분히 즐겼으니, 뭉그적대다가 한 방에 얻어터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휴지통이 폴레키의 여송연처럼 연기를 내뿜었다. 냄새가 과히 좋지도 않았다. 지금이 떠나기에 적기인 듯 했다. 나는 나가는 길에 복도의 화재 경보기를 눌렀다. 그 망할 놈의 장치가 진짜 작동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P.18)
이런 식의 유머에는 난 정말 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정말 낄낄거리며 거침없이 읽었다. 이런 재미를 또 어느 스릴러 소설에서 느껴보았을까 생각했지만 단연코 없었다.(물론 내 독서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다.)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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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유머만 있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다. 흔히들 웃는 광대가 더 슬픈 건 그 웃음 아래 세상의 가장 작은 존재로서 느끼는 진한 비애감이 스며있기에 그렇다고 한다. 디 살바의 '악당들의 섬'에 흐르는 유머도 이와 같다. 또한 니체는 인간은 너무나 슬픈 동물이기에 웃음을 만들어야 했었다고 말했는데 '악당들의 섬'의 유머는 바로 여기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처절한 광경을 목도 했을 때의 무장해제 되어버린 마음이 무심결에 짓는 황망함의 웃음이며 그런 세상이지만 어떡하든 포기하지 않고 고쳐보겠다는 견딤의 웃음인 것이다. 밀리건이 이렇게 웃음을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처지 때문이다. 그는 기자이고 기자의 신념으로 진실을 밝혀 누군가의 방화로 인해 자꾸만 반복되는 비극을 끊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거기에 별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자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밀리건은 고독하다. 바로 그 고독, 오로지 혼자 그 비극을 자기 일 처럼 생각하기에 웃음을 유일한 그의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일상에 골몰한 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밀리건의 편집장이 내내 그에게 써 오라고 요구하는 기사처럼 그저 자신이 속한 일상이 여전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주는 개에 얽힌 미담 정도만이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곁의 시내 한가운데서 누군가의 방화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죽어도 편집장은 무슨 신성한 의무라도 되는 양 원고에서 '빌어먹을'이나 '우라질' 같은 저속한 단어를 보는 족족 골라내어 한없이 평온한 일상으로 만들 뿐이다. 더러운 건 닦아내고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건 제거하면 된다는 듯이...
타조는 적에게 쫓기면 머리를 땅에 박고 이제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안심하다가 결국 적에게 먹힌다고 한다. 억지로 안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이러한 타조의 막무가내식 안심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에 의해 착착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이런 기만적인 안정이란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거짓의 일상이요 부질없는 환각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 속에서 밀리건의 마음이 평온할리가 없다. 뉴옥(NEW獄 - '새로운 지옥')이라 할만한 뉴욕에서 사립탐정으로 일하고 있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가 알콜 중독에 시달리듯이 로드 아일랜드의 마운틴 호프의 기자 밀리건은 담배와 이혼한 아내로 부터의 독설에 시달린다. 사실 이혼한 아내가 전화할 때 마다 처음부터 들려오는
"이!
나쁜!
새끼야!"
(책에 나온 그대로 인용. 이 인용문은 끝날때까지 내내 이대로 나온다.)
이 같은 욕설은 사실 밀리건에게 있어서 욕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것이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식으로 평온하게 덧칠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같은 세상이 거짓이며 자신은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일종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울음이 된다. 그러니까 밀리건에게 자신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그 정체성을 되새기는 장치로서 디 살바가 의도적으로 내내 반복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그렇게 자학적 각성을 할 정도로 그는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언론학 교수들은 자신의 기사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말라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적 초연함을 기르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기자도 개의치 않는 온기 없는 기사를 독자인들 신경 쓰겠는가. 나는 혹시 신이 들으실까 해서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제설차가 소화전을 파묻을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쌍둥이가 소리쳐 도움을 갈구 할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P.54)
그래서 그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신마저 포기하여 모두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약자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성장하고 있는 도시의 진실을 파헤쳐 그것을 멈추려 한다.
"비 좀 멈추게 해줘요! 비 좀 멈추게 해달라고요!" (P. 357)
이 소설은 그런 싸움이다. 때로는 유치하리만큼의 유머로 또 때로는 뼈마저 얼려버릴 정도의 냉소를 머금은 소설이지만 이 근본엔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자의 사회의 구원을 위한 투쟁이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구약 시대의 이사야 같은 선지자 처럼...
때문에 이러한 밀리건의 분투를 읽으면서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를 떠 올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약자들의 삶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면서 홀로 분투하고 있는, 그런 면에서 밀리건의 형제라고 해도 무방한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의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도 애덤스의 그 작품은 언급 된다. 결국은 다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 스커더가 만나는 한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한다.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 읽어 보신 적 있나요?"
읽은 적이 없었다.
"그 책에 토끼 마을이 나오거든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토끼들의 마을이죠. 인간들이 토끼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식량은 충분해요. 식량을 주는 사람들이 이따금 덫을 놓아 토끼 고기를 먹으려고 드는 것만 빼면 토끼 천국이라고 할 수 있죠. 살아남은 토끼들은 절대 덫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덫에 결려 죽은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어요. 그들은 덫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죽은 동료들이 아예 살았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행동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이죠."
그녀는 이야기하는 동안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문득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뉴요커들이 마치 그 토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여기 사는 건 문화든 일자리든 간에 이 도시가 주는 뭔가가 필요해서죠. 그리고 이 도시가 우리 친구나 이웃들을 죽일 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죠. 그런 기사를 읽으면 하루나 이틀 쯤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거에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려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우린 마치 그 토끼들 같아요. 그렇죠?"
(로렌스 블록 '800만가지 죽는 방법 P. 249 ~ 250)
젠장, 뉴욕 뿐이겠는가? 밀리건의 마운트 호프도 마찬가지고 우리 서울 역시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망각과 무관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비겁하다는 것의 증표일 뿐이다 . 아마도 그래서 밀리건은, 매트는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홀로라도 싸우는 것이며 바로 그 용기가 부러워서 이렇게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벗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트 보다 밀리건이 더 나은 게 하나 있다면 그는 웃으며 싸울 줄 안다는 것이다. 이왕 싸우려면 웃으며 싸우자는 '나꼼수'의 말처럼.(또 젠장, 오늘 속보로 김어준과 주진우가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언론인이 선거 운동에 개입한 게 그 이유란다. 그렇게 많은 언론 전문가들이 나꼼수가 언론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그들을 비난한 이들 조차 나꼼수는 예능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눈에는 닥치고 불법이다. 누구는 카퍼레이드까지 해도 알아서 합법이고... 매카시 식의 마녀사냥은 아직도 영원히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 20대 후반의 투표율은 37.9%다.(그 전이 24.2%였으니 그나마 희망은 있는 것인가? 정말?) 다시 말해 망각과 무관심이 습관이 되어버린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이 사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밀리건을 아낀다. 언젠가 이 비가 멈추리라는 희망 속에 기꺼이 남들에게 우산이 되어주려는 그를... 어서 그의 후속작이 나오면 좋겠다.
그 때를 기다리며 아마도 나는 곧 세번째 악당들의 섬을 방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