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 바라다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별 뜻 없이 집어 들었는데 손에서 놓기가 어렵더군요.
 아무래도 이 소설만이 가진 어떤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리하게 정의하자면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는 과정의 소설입니다.
 형사가 등장하는 미스터리 장르물이지만 정작 추구하는 건 '누가 했느냐?'라는 식의 범인 체포가 아닙니다. 그 보다 더욱 천착하는 것은 사건 해결이야 어찌 되었든지간에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온전히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랄까요? 산책자의 소설이라고 할까요? 산책자는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걷고 있다는 그 사실, 걸으면서 주위의 풍경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이죠. 풍경을 음미하면서 조용히 걸을 수만 있다면 목적지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바로 산책자입니다.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는 정말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로 미국의 하드보일드 작가 로스 맥도널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형사가 주인공도 아니고 루 아처라는 사립탐정이 주인공입니다만 풀어가는 스타일이 사사키 조와 유사합니다. 로스 맥도널드는 주로 당시 미국 가정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갈등들을 드러내는데 주력하는 작가인데 역시나 그 불안과 갈등등은 범죄로 표출되지만 맥도널드 역시도 누가 그것을 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가정이 왜 이렇게 불안과 갈등을 안게 되었느냐는 것이며 바로 그 이유의 탐색을 위해서 당대의 미국 사회를 풍경을 온전히 드러내는데 주력합니다. 말 그대로 로스 맥도널드의 소설도 과정의 소설인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폐허에 바라다'의 주인공 센도의 역할이 기묘합니다. 그는 형사이지만 어쩐지 사립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참여했던 사건의 비극으로 PTSD, 즉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센도는 이 때문에 그 마음의 상처 부터 치료하고자 휴직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요양을 하는 가운데서도 자꾸만 과거의 인연으로 사람들이 사건을 의뢰해 와서 할 수 없이  계속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폐허에 바라다'는 그런 식으로 뛰어든 사건들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휴직 상태이기 때문에 멋대로 경찰의 신분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찰이지만 사건 탐문 때는 경찰신분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보를 얻기위해 할 수없이 사람들에게 경찰임을 드러낼 때는 명함을 건네줍니다. 이건 그대로 사립탐정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 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그렇게 센도는 경찰이지만 경찰이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는 외양만 보자면 사립탐정과 같습니다. 더구나 사건을 탐문할 때 마다 늘 스스로나 타인들이 자꾸만 휴직 상태임을 일깨웁니다. 그렇게 경찰로 일한다기 보다는 사립탐정으로 일한다는 것을 내내 일깨워주는 것만 같습니다.
 
굳이 사사키 조가 왜 이런 번거로운 방식을 택한 것일까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찰이지만 왜 자꾸 사립탐정의 역할을 연기하게끔 하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에 대한 대답이 사사키 조가 '페허에 바라다'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의 주된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역시 센도에게 PTSD를 가져다 준 사건의 성격입니다. 그 사건의 내막은 마지막 에피소드인 '복귀하는 아침'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는데 센도가 PTSD를 가지게 된 것은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제대로 대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저 고지식하게 수사 원칙을 지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극적 사건(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사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원칙 따위는 무시해 버려야 하는 것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죠. 그러므로 결과만 좋으면 과정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훗설이 말하는 에포크, 즉 판단중지가 필요한 것이죠. 제대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키고 다시금 처음부터 되새겨 볼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폐허에 바라다'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바로 센도가 지금 안고 있는 그 의문에 대한 탐문인 셈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사키 조가 왜 이 소설을 과정의 소설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하드보일드 장르의 사립탐정으로 만들었는지가 이해되는 것이죠. 사립탐정의 역할은 경찰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경찰이 질서의 복원이라면 사립탐정의 역할은 폐허가 되어버린 질서를 관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기에 대해서 좋은 말을 했었죠. 아시다시피 그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광팬입니다. 그 소설을 말하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립탐정은 어떤 진실을 추적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는 그것이 변질되고 말았다는 사실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립탐정은 변화의 목격자이며 바로 이 때문에 사사키 조는 굳이 센도에게 사립탐정의 외양을 취하게 한 것입니다. 센도에게 폐허의 관찰자가 되기를 바랐던 사사키 조의 의중은 에피소드 곳곳에 나타나는 세월에 변해버린 공간의 묘사에서 두드러집니다. 훗카이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건의 무대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들어오거나(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폐허에 바라다)이거나 좋았던 전통이 몇몇의 협잡으로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 곳(오빠 마음)이거나 한 곳들이죠. 그렇게 변화의 와중에 있는 곳입니다. 센도는 바로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건을 탐문합니다. 그리고 확인합니다. 공간이 변한 만큼 사람들 역시도 변해 버렸다는 것을. 그것도 현실적인 욕망의 추구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센도가 가지고 있었던 PTSD를 불러온 의문에 해답이 되는 셈입니다. 즉 사사키 조는 정당한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변화에 임기응변으로 임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그 모든 공간과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결국은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 하더라도 원칙을 고수함이 올바른 것이라고. 이는 센도와 공간의 대비로 인해 두드러집니다. 즉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공간과 사람들과는 달리 센도만은 PTSD마저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고지식하고 남들이 보면 안지켜도 될 것 같은 것도 충실히 지키려들죠. 그 세세한 원칙의 고수를 사사키 조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지킬 것은 지키는 것. 센도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사키 조의 '폐허에 바라다'의 독특한 매력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현실적 타협을 위해 신념을 져버리거나 원칙을 무시하는 것쯤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시대에 고지식하게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꿋꿋이 지켜나가는 것을 작가가 마음으로 부터 지지하는 소설이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사키 조는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산책자의 소설로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던 것은 이러한 센도의 신념에, 사사키 조의 지지에 공명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사키 조의 작품은 '경관의 피'와 '제복 수사'를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있는 것 같던데 차후의 여정이 어떻게 될 지 또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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