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2월의 일주일은 잠을 정말 적게 잔 것 같다. 축제는 원래 그 빈자리에서 그것의 즐거움이 더 뼈져리게 각인되는 법이다. 어제까지 그런 공동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 어쨌든 난 승리만을 바랄 뿐이고 그 때까지는 이길 수 있는 말을 끝까지 응원하련다. 실망할 것도 알고, 배신할 것도 알지만 그냥 더이상 패배는 원치 않으므로, 이런 쓸데 없는 말은 신간 추천을 하는 자리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떤 마음으로 내가 신간을 고르는 것인지는 선택의 투명성을 위해 밝혀 놓아야 할 것 같아서 굳이 던져 놓는다.


 그럼, 2월의 신간들 중 내가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을 소개해 본다.

 2월의 신간을 훑어 보는데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띈다. 윤대녕과 김원일이다. 하지만 반가울 뿐이고 읽고 싶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윤대녕은 솔직히 그동안 많이 실망해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 김원일도 '불의 제전'까지 포함해서 많이 읽었고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왕이면 나중에 좀 차분해진 다음에 만나고 싶다.

 이번 필리버스터 기간에 나는 틈틈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었는데(그동안 너무 시간이 없어서 2월 후반에야 겨우 손에 잡을 수 있었다.), 다시 읽었는데도 너무 좋았다. 원래 난 이 작품을 통해 오츠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단언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그녀의 최고작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작중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낸 모린의 편지 두 장에 있다. 거기서 모린이 오츠를 비판했던 것, 정확히 오츠가 그녀가 전혀 되어보지도 못했고,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로레타와 모린의 삶을 담아냈던 소설 '그들' 자체에 대한 비판을 오츠는 어떻게 헤쳐나갔던가 하는 것이 '그들'의 '코어(CORE, 괜히 핵심이라는 말을 반복하기 싫어서 이렇게 쓴다)'다. 이것은 그대로 특히나 소외된 자들을 다루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매서운 질문이다. 계급적으로 절대 그들이 될 수 없는 작가들이 그들을 묘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츠는 말한다. 설령 내가 그들에 관해 아무리 써도 정작 그들은 내 글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그렇다면 문학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모사를 통한 자기 위안, 정당화일 뿐인가? 문학은 언제나 전위에 있는 실천을 질투하거나 무시하려는 자들의 비겁을 은폐시키고 있을 뿐인가? 이런 면에서 오츠의 '그들'은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건 사실 지금도 쓰고 있는 리뷰에 썼던 것인데 여기서 쓰고 있다. 아무튼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은 이런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래서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곱씹고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라가 안팎으로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안되는 것이다. 나 원, 리뷰 하나에 뭐 그렇게까지 말하나 싶겠지만 이건 '그들'에 대한 내 애정의 문제라서 그렇다. 정말 좋은 작품이기에 그 매력을 잘 보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욕심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자꾸 신경이 다른 쪽으로 가서... 그래서 되도록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나중에 만나고 싶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사설이 길어졌다. 이게 다 '그들'의 리뷰가 내 뜻대로 잘 써지지 않기에 그러는 것 같다. 어쨌든 바로 신간 추천으로 뛰어든다. 


 MOST WANTED


 1. 조 월튼, '타인들 속에서'

 조 월튼의 이 작품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아작에는 SF 덕후들이 서식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자기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출판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조 월튼의 이 작품 정말 대환영이다. 2012년에 발표되어 SF 상의 양대산맥인 휴고와 네블러를 휩쓸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국의 판타지 대상까지 먹어치운 무서운 작품이다. SF와 판타지 계가 이 작품에 이처럼 상을 몰아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인 열 다섯 살의 모리가 SF와 판타지 소설책 덕후이기 때문이다. '타인들 속에서'는 그런 그녀의 일기다. 그러니 책덕후로서의 면모가 얼마나 많이 나올 것인가? 그런 모습에서 SF와 판타지 독자들은 자신들의 초상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이 책에게 무서운 수상 경력과 인기를 가져다 준 것이다. 단적으로 워싱턴포스트지의 리뷰어 엘리자벳 핸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SF와 판타지 팬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동안 남다른 취향으로 외로움과 그 고독이 사무쳐 눈물을 뚝뚝 흘려본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위안과 격려를 받게 되리라. 그리고 확인받게 되리라. 당신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so so ...


 2. 주노 디아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드라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이어 세번째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주노 디아스의 소설이다. 나는 이전에 나온 두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그래서 당연히 세번째 나온 이 소설도 읽고 싶다. 유니오르가 계속 등장한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옴니버스 단편집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내 만나온 등장인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니 현재는 어떤지 궁금해 손에 들고 싶어진다. 이렇게 썼지만 솔직히 선정되는 게 더 걱정이다. 전의 두 작품을 읽은 지가 오래 되어 벌써 내용이 가물가물한 탓이다. 지금 헤아려보니 거의 백지 상태나 다름 없어서(아, 참으로 빈약한 나의 메모리여...) 아무래도 이 작품이 선정되면 리뷰를 쓰기 위해서라도 앞의 두 작품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다.

 





 3. 마이클 코넬리 '파기환송'


 미키 할러가 돌아왔다. 그것도 변호사가 아니라 검사로.

 '탄환의 심판'에서 우리는 회심한 그를 보게 되었다. 검사가 그 회심의 결과다.

 검사로 일하는 미키 할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나인 드래곤'에서 슬쩍 예고되긴 했지만 '탄환의 심판' 때처럼 미키 할러와 해리 보슈의 콜라보가 펼쳐진다는 점도 이 소설을 펼치게 만드는 충분한 유혹 거리이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나로서는 나오면 읽고 싶은 게 마이클 코넬리 소설이다. 

 어차피 구입해서 읽을 거 신간평가단으로 읽으면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쓸고 돈줍고이지 않을까 해서 사심 가득 추천해 본다.







 4. 엘리너 캐턴, '루미너리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맨부커 상을 그것도 최연소의 나이로 탔다니 작품의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도대체 이 작품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영예를 안을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자꾸만 귀밑을 간질거린다.

 인생의 막장으로 내몰린 자들이 마지막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며 찾아온 금광에서 벌어지는 살인 이야기라니, 흥미를 끌만한 요소는 제법 다 갖춘 것 같다. 제목의 '루미너리스'는 빛을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들을 이끌고, 찾게 된 빛은 무엇이었을지 호기심이 인다.






 5. 도리스 레싱 '그랜드마더스'

 '

 




  2013년 한 편의 영화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바로 앤 폰테인이 감독한 '투 마더스'로, 평생 친구로 지내온 두 여자가 상대의 십대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미국에서 '퍼펙트 마더'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당연히 격렬한 논쟁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로 아래 포스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는 '마더'를 빼버린 'ADORE'가 정식 제목이 되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것이었고, 영화를 보면 원작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였다. '그랜드마더스'는 2003년에 나온, 표제작 '그랜드마더스'를 포함 네 개의 작품을 엮은 책이다. 도리스레싱의 마지막 소설집이기도 한데, 과연 말년의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이런 소설을 썼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꼭 한 번 읽어보고픈 소설이었는데 이렇게 나와주어 정말 반갑다. 이 기회에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 이 역시 내 빈약한 메모리 사양으로 영화의 자세한 내용들이 가물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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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3-05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주노 디아스 신작이라니!!!

ICE-9 2016-03-06 23:21   좋아요 0 | URL
오! 시이소오님도 주노 디아스 좋아하시나요? 와, 정말 반갑네요^^

시이소오 2016-03-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노 디아스 신작을 응원하는 의미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리뷰를 올렸죠. 이 책 읽으면 누구나 주노 디아스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

ICE-9 2016-03-06 23:36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오스카 와오`를 읽고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리뷰도 얼른 만나보겠습니다^^

2016-03-08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1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상암동 YTN 건물에서 폭탄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김종인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게 아닐지
박영선의 뻘짓만 아니었다면 오늘 일과
어제 이종걸의 분투로 필리버스터 중단이
오롯이 신의 한 수가 되었을텐데 아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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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필리버스터를 통해 그간 몰랐던 매력적인 정치인들을 쏙쏙 만나다보니, 갑자기 나의 세미갓,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났다.

 그의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얼간이인가?'란 제목의 글이 있다.



  제목대로 얼간이에 대한 이야기다.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하는 얼간이는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 타인의 말을 검증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고 따라하는 사람이다. 커트 보네거트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KBS,MBC,SBS를 비롯한 조중동, JTBC를 제외한 온갖 종편 기자들, 필리버스터에서 박근혜 이름만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왈왈 짖어대는 새누리 의원들, 그리고 자신을 쉽게 해고하고 통신이든, 금융이든 마구잡이로 사찰하겠다고 하는 여전히 묻지마 지지를 보내고 있는 35%의 지지자들과 같은 얼간이들로 넘쳐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얼간이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과서에까지 등장하여 우리도 잘 아는 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은 종교 탄압을 거행했다. 때문에 아시다시피 거기엔 종교는 없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아마 스탈린과 중국이 해석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인민을 부당한 현실에 수동적으로 길들이고 저항 의지를 앗아가는 '백해무익(실제, 중국에서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안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커트 보네거트는 그런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본다.


*****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중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종교 탄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런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재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들이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걸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금언이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그런 얘길 썼던 당시 우리 쪽에서는 아직 노예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자비로운 신으 눈으로 과거를 되돌아볼 때, 카를 마르크스와  미합중국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스탈린은 마르크스의 언급을 법령으로 바꿔치면서 좋아라 했고 중국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나 그들의 목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도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사회주의자들은 종교와 신을 부정하며 그러기에 지독하게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주장해왔다."

*****


  솔직히 커트 보네거트의 몇 배 이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했을 스탈린이나 중국 독재자들이 마르크스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썼는지 몰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성직자나 종교 세력들을 몰아내려고 그 말을 이용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의 원저를 읽지도 않고 단지 그 말만 듣고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이 성직자들과 종교 세력들을 일소할 때 모른 척 하거나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실은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에게 농락당한 것 뿐이었다. 한 마디로 얼간이가 된 것이다.

 종교와 신을 부정한다며 사회주의자들을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공격한 미국인들도 얼간이인 것은 다르지 않다. 솔직히 그들에게도 마르크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뇌리엔 오직 저 잡놈의 사회주의자들을 제대로 공격해서 지지자들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테니까.


 힘을 가진 권력의 말에 진실은 없다.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약자를 보호할 때 뿐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이 약자를 내몰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 한들 술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화뇌동하는 것은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무섭다. 펜은 정말 칼보다 강하다. 언론이 장악되고 한없이 한 편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우리나라. 지금의 필리버스터는 그 사실을 등골이 오싹하도록 알리고 있다. 4년 동안, 그들의 저 많은 노력들이 우리의 눈과 귓가에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니! 경악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많은 이들이 필리버스터를 보고, 국회까지 찾아가 방청하는 것은, 이명박 시절 나꼼수에 열광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명박 시절에도 그랬다. 분명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디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들을 수 없었다. 세상은 순탄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왜 이럴까? 이상하다. 나만 괜히 삐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한다. 그래, 나 혼자 이런 생각가져서 뭐 하겠어? 내가 뭐라고? 자포자기와 자학도 한다. 약한 나, 외로움만 커져 간다. 그 때, 나꼼수가 나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우리는 바로 그런 지지와 응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위축과 소멸을 향해가는 신념을 굳건히 하고, 결기를 돋울 지지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길로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도 된다라는 응원. 우리는 정말 그런 게 필요했던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몸은 편하다. 하지만 의식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괴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 경사 아래로 내려가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지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 정체성마저 좌우할만큼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도.

 그 본질적인 것을, 그것이 없다는 삶의 의미마저 부정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래도 비탈을 오르려 매달린다. 손으로 단단히 흙을 거머쥐고 매달린다. 힘들다. 그런 나를 비웃고 내려가는 이들 사이에서 외롭다. 그 때, 나꼼수가 나타나 같이 올라가자며 내 엉덩이를 밀어주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나꼼수는 그랬다.


 비탈길을 오르려 애쓰는 이들에겐 정말로 그런 게 필요하다.

 희망은 상상만으로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필리버스터가 그 일을 하고 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내 몸과 엉덩이를 밀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랜 시간 사막을 횡단하다 가까스로 오아시스를 찾은 이와도 같이, 반갑고 기쁘다.

 커트 보네거트도 그랬다. 너무나 냉소적이었던 그 사람, 아주 회의적이었던 그 사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도, 변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우리의 필리버스터 처럼 자신의 엉덩이를 밀어 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그 사람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파워스 햅굿(Powers Hapgood).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데,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

 나는 그들과 동시대인 사회주의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인디애나 폴리스의 파워스 햅굿이다. 햅굿은 전형적인 촌뜨기 이상주의자였다. 사회주의는 이상주의다. 데브스처럼 햅굿도 중산층 출신이었고 이 나라에 경제적 정의가 더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좋은 나라를 원했다. 그뿐이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햅굿은 탄광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자 형제들에게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1927년에는 메사추체츠 주에서 무정부주의자 니콜라 새코와 바살러미오 반체티의 처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햅굿의 부모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통조림 공장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파워스 햅굿은 공장을 물려받자마자 그것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주었고 얼마 후 공장은 파산하고 말았다.

 우리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간부였다. 노동쟁의가 가벼운 싸움으로 번졌을 때 햅굿은 증언을 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했다. 판사는 그를 보자 이렇게 물었다.

 "햅굿씨, 나와주셨군요. 당신은 하버드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버젓한 사람이 왜 그런 삶을 택하셨소?"

 햅굿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그건 예수의 산상수훈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팀 파이팅! (p. 22 ~ 23)

*****


 이렇게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우리들에게도 당신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감독 파솔리니가 말했던 반딧불 같은 것들이...



   그가 한 젊은이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1975년. 2월에 그는 한 글을 발표한다. '반딧불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거기서 그는 반딧불을 무솔리니와 같은 서슬 퍼런 독재 치하에서도 비록 반딧불처럼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멸되지 않았던 민중들의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다. 결국 그 반딧불은 그보다 훨씬 광막했던 무솔리니 체제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래서 반딧불은 파솔리니에게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희망과 저항 의지는 추상적인 상상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무엇이든 감각할 수 있는 실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실제 목적하는 바는, 파솔리니가 논문에서 했던 절망, 그러니까 무솔리니 체제 아래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았던 반딧불이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소멸되어 버렸다는 절망에 반박하는 글이지만 말이다. 그는 파솔리니의 체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끈질기에 남아있는 반딧불의 계보를 여기서 들려준다.

 커트 보네거트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말로 경고한 것처럼, 그저 지배적인 해석과 현상에 함몰된 나머지 스스로 애써 찾아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타협하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놓쳐버린 희망과 저항의 흔적들을 말이다.

 위베르만은 말한다. 이미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


 희망도 그럴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이렇게 찾아온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기에 포기 역시 이르다'는 말을 이 순간, 단단히 새겨 두련다.

 그리고 커트 보네거트처럼 희망의 반딧불이 되어 준 필리버스터에 나온 의원들에게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우리 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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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29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100개정도 누르고 싶은 글..

ICE-9 2016-03-05 00:41   좋아요 0 | URL
앗, 기네스님 이런 격한 공감, 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팀 파이팅!!

ICE-9 2016-03-05 00:42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도 우리 팀이죠? 함께 파이팅 외쳐주기로 해요^^

2016-03-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5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 원, 자야하는데 홍종학 의원이 워낙 마성의 필리버스터라 잘 수가 없네. 초반 우리나라 경제 실상에 관한 상세한 논의로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구 경각심을 갖게 하고 7년동안 130일에 걸친 고강도 세무조사를 3차례나 받은 다음카카오 사태를 통해 정부가 어떻게 말 안 듣는 포털을 통제하는지 보여줘서 그동안 궁금했던 포털의 꼬리내리기가 확. 이해됨. 그것도 모르고 세월호 참사 때 다음 카카오 행위에 대해 욕만한 것이 좀 미안했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새로운 문건으로 자꾸만 내 뇌리에 카페인을 들이부어주심.

도중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홍종학 의원 플리버스터 하는데 계속 방해하던 조원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홍종학 의원이 조원진 의원과 좋은 추억이 있다면서 함께 술마신 이야기를 함.
그 때가 공무원 연금 개혁 할 때로 여야 공무원 사회 대타협이 이루어져 기뻐 술마셨다고 함.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로 여야 합의고. 사회대타협이고 나발이고 뭐고 다 날아가버림. 정말 우리나라 민주주의 맞는지- -)

그 여파로 조원진은 자신의 지역구 사람들을 이끌고 당시 같이 합의에 참여했던 강기정 의원의 지역구로 감.
아시다시피 강기정 의원의 지역구는 광주.
조원진은 5.18. 광주 묘역을 참배했고 거기서 강기정 의원 옆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신나게 열창함.

그 이야기를 다 하자,
갑자기 그 뒤로 지금까지도 몇 시간이 지났는데
방해 잡음이 하나도 안 나옴.
조원진 뿐만 아니라 같이 계속 방해했던 하태경도
잠잠,
입을 어떻게 닫게 만드는지 좋은 방법을 배움.
좋은 추억이라 하면서 상대에겐 치명적 약점이 되는
을을 공개해버리는 것임.

이러니 마성이라 할 밖에. . .
필리버스터가 참 좋다.
이렇게 매력적인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많다는 걸
알게되었으니.
몰랐던 여러가지 일도 상세히 배우고. 꿀잼.
지금 보니 조원진 나가고 없네.

이 좋은 걸 자주 좀 하시지.
슈퍼스타 K. 보다 재밌구만
그러고 보니 필리버스터와 슈퍼스타 K가
비슷한 것 같네

그런데 나 빨리 자야하는데 말이지. . .
(그런데 북플로 쓸 때 제목은 어떻게 적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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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어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작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이가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책들을 헤아리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실은 우리 불안의 응답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책을 구매하려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불안을 긍정하게 만들고 정당화시켜 주는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내용이 있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며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경쟁의 고도화와 유연화로 관계가 파편화되고 개인이 점점 고립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인, 바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대해서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불안은 사회에서 당연하며 그러므로 부정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위적 체험이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미움을 받으라고 말해주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불안을 가진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던 대답, '넌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넌 네 자신을 긍정해도 돼!'를 그 책이 쉽고 설득력있게 들려주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해 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자르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말해주는 것을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그 응답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것이 원인이 된 불안 속에 끊임없이 떨고 있냐고 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야마다 히로키에게 묻는다면 거대 이념의 종말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대 이념의 퇴조로 이제 모든 평가를 오롯이 개인이 감내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하와 불안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자면 이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거대 이념의 붕괴 이후 패권을 차지해버린 신자유주의가 명확히 의도한 결과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목적이 오로지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시장에서 당하는 결과에 대해 그것이 의도든 불운이든 사회가 전혀 책임지지 않듯이 그렇게 한 개인이 당하는 모든 위험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또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듯 개인 역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이다. 즉 개인은 이제 사회에게도, 노조에게도 기댈 수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오로지 홀로 파악하고 관리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와 같은 푸코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덩달아 불안도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우리를 너무도 옥죄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긍정해 줄 무언가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상적이거나 허약하지 않다. 생생한 힘으로 구체적이면서 물리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문 또는 그것을 주로 만나게 하는 통로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호사가의 취미라든가 정보 축적만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는 말을 낳은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고대 문헌 학자가 그랬듯이 몇 백년간 지속된 중세의 어둠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낼 힘도 얼마든지 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자기 정당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호 심화되는 이런 질곡이 힘겹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기대야 할 것도 오로지 언어, 담론 밖에 없다. 언어가 불안과 절망을 가져왔으나 구원 역시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수록 읽어야 한다. 그 언어들을 매개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지금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전을 만나야 한다. 탈옥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주인공이 감옥 전체의 지도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이렇게 탈출에는 내가 지금 갇혀 있는 장소를 전체로 조감할 수 있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것을 고전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많이 다르거나 혹은 지금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유인 지라 동시대의 담론들 보다 훨씬 더 내가 갇힌 이 시대의 외곽을 잘 드러내어 그 안에 담긴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우리에게 자유 정신의 힘을 준다'라고. 그 자유의 힘이란 바로 현실이 가진 중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바깥으로 데려가는 힘, 그리하여 객관적인 시야로 시대를 조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우리를 넘어서 나아감과 해방된 공간에서 홀로 던지는 시선이 이하준이 말하는 '대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유를 향한 월담과 해갈을 위한 대화를 체험해 보기에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일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 책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사랑', '관계' 그리고 '삶'인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연속성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나'에서 나아가면 '타인'이 있고, 그 '타인과의 함께'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연쇄와 집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확장의 경로인 것이다.


 그 확장의 경로를 따라 철학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철학자의 담론에 저자 자신의 담론을 가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의 담론은 삶에서 우리가 가지거나 만날 수 있는 질문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세계와 윤리에 대해 대부분의 의문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다고 현학적이진 않으며 담론이 추상적 차원에 갇히지 않도록 구체적인 현실 문제와 연계되도록 하고 철학자의 언어도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급적 일상적인 어투로 순화하고 있다. 초심자를 많이 배려하는 책이며 그러므로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입문에 그치진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써의 완결성을 엄연히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으로 고전의 대화가 어디로 데려갈 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을 확장의 경로인 네 파트의 제목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는 주체로 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찬양은 고독의 향유를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즐겨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뒤이은 니체의 '초인'은 초인의 의미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정과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라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엄습하는데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동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강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동경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 이런 식으로 왜 먼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밀의 '용기와 관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스의 '외부의 자극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내심의 평정' 마지막으로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숙고'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랑'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먼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롬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적 사랑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이 양자의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체'로 서기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타자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왜곡된 애착에 있다(P. 10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은 칸트와 마지막 아도르노에게서도 확인되며 특히 울리히 벡 부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계를 파현화 시키는 지금 사회의 유연화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때문에 저자는 독립된 주체의 성립을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의 긍정을 통해 자신을 먼저 내려 놓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나 자신의 긍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은 '관계'와 '삶'까지 주욱 이어진다. 현실적인 관계 양상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거기에 과연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재검토되고 '삶'에 가서는 누구나 겪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과 '노년' 그리고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경험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의미 짓는다. 그리하여 경로 전체를 통해 온전히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나로 하여금 그토록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줄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 확고한 자리로 우리를 넌지시 데려간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제안은 꽤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신자유주의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 스스로 항상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데 있고 그런 관리는 우리도 경험상 잘 알고 있듯이 많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의 소비는 어디까지나 과시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 바 있듯이 실제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라캉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조차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비극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견주어 날 볼 수밖에 없고 항상 나보다 뛰어난 존재들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내 모자람과 부족으로 인한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또한 이런 시선은 언제나 우열의 휘장을 두르기 마련이다. 나와의 높낮이에 따라 질시와 경멸의 시선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서 사회적 보호막을 벗겨내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으로 이끌어가려 하는데 이런 개인의 '기업가화'는 그것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그들의 눈이 아니라 온전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층위에서의 나와 만나는 타인에 대한 차이의 긍정 또한 진정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면 기필코 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이런 태도와 노력의 당위성을 조용히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쉬운 내용과 평이한 서술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감 같은 것이 떨어지길 바란다. 언제나 감처럼 부와 성공 같은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것들이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 자신 보다는 늘 외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에 종속되었고 점점 기울어진 중심으로 인해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 지를 고찰한다면 언어가 오히려 현실과 물리적인 것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법만 봐도 자명하다. 지금 우리의 절망을 낳은 것도 기실은 언어고 구원을 위한 진정한 힘도 언어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이 고전이 만능 열쇠인 것은 아니다.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상식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의 내면을 신선한 시야와 사유로 가득찬 처녀지로 바꾸는 데 있어 고전만큼 좋은 자극은 없는 것 같다. 고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시대상의 간격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과학적 진리라고 해도 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형성한다는 것을. 간격은 그 패러다임의 막을 찢고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그리로 자유로운 상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오래된 생각'은 그런 자유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 정당화를 향한 목마름을 진정 가시게 해 줄 우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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