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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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나는 지금까지 오감 중에 미각을 가장 소홀히 여겼고 음식 역시 생존을 위한 섭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맞벌이인 부모님 아래서 외로이 자라 집밥의 기억이 별로 없는 탓인 지도 모른다. 황석영 작가는 과거 홀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느라 부엌에서 멀어지자 가게에서 사온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던데 나도 그랬다. 솔직히 잘 차린 밥상은 내게 식욕 보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마지못해 끼니를 때워야 했던 시간의 외로움을 먼저 상기시켰다. 상 위의 풍경이 풍성하면 할수록 생선가시만큼이나 앙상했던 내 과거가 더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음식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으려 했다. 내게 밥도둑은 없었다. 밥도둑이 즐거운 식사를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면 더욱 나와는 먼 존재였다. 내게 수저를 들게 만드는 진정한 신호는 식욕 보다는 허기였고 그것을 채우는 일도 정해진 시간에 태엽을 감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게 된 것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른다. 단지 황석영 작가의 책이라기에 손에 들었고 처음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를 읽을 때는 분명 그들만큼 곤궁했을 농부들의 닭과 돼지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서리해가는 추억 속 인물들에게 화부터 났었다. 게다가 이 책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본디 내가 음식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 책엔 생경한 음식들이 참 많이도 나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 페이지로 넘기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작가가 어찌나 하나의 음식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담과 그 음식의 정보 그리고 만드는 방법을 흥미로우면서도 절묘하게 엮어내는지 이야기가 가진 중독성이 상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를 타칭 '조선의 3대 구라'라고 하더니만 헛소문이 아니었다. 잘 몰랐던 황석영 작가의 개인사를 알게 된 것도 좋았으나 특히 낯선 음식을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컸다. 나는 홍어에게 생식기가 있다는 것도, 그것으로 가격 차이가 심히 나는 암수를 구별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러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 순간 다 읽어버렸다. 뚜렷한 동기는 없었으나 읽는 재미가 완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냥 재밌었다고 할 수만은 없다. 페이지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질투의 감정이 차츰 커져갔던 것이다. 그에겐 참으로 많은 음식에 대한 추억이 있었지만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음식은 매듭이라는 사실이다. 음식은 그저 끼니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같이 먹는 사람, 함께 한 시간도 묶어 분별 가능한 하나의 마디로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삶은 어떻게 보면 모래강과도 같아서 단단히 묶어두지 않으면 사람도, 시간도 흘러가다 어느 순간 모래 아래로 가라앉아 망각되고 만다. 하지만 음식은 그걸 통조림처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황석영 작가의 개인적인 시공간에선 그랬다. 음식이 단단한 매듭이 되어 마치 책에 꽂아둔 책갈피처럼 작가가 누군가, 어떤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쉽게 찾아내선 그 추억을 오롯이 재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매듭이 음식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더라도 내 기억의 창고는 빈약했다. 빈 독의 바닥을 구르는 쌀 몇 톨. 씁쓸했다. 절로 서문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그러나 배고픔은 어떤 먹을거리로든지 달랠 수가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었던 음식도 함께하는 이가 없으면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으며 넘쳐나는 풍성한 먹을거리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음식 프로가 부쩍 성행하는 것을 보며 음식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성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p.10~11)


 나는 홀로 먹는 것에 익숙했고 일부러 고수했다. 외로움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지레 음식의 매듭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 추억의 잔고가 별로 없는 것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들인 습관이었지만 나를 더 빈곤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제 깨닫는다. 진정한 풍요는 내 성의 견고함이 아니라 타인과의 결부에서 온다는 것을. 내게도 황석영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타인이란 존재가 있어아만했던 것이다.


 내게는 어쨌든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 셈이다.(p.48)


 어쩌면 깨닫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황석영 작가가 넌지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음식의 매듭은 그것이 유일무이할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타관 객지에서 그런 강렬한 토속 음식은 알지 못하게 시달렸던 다른 종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달래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p.197)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이 함께 한 사람과 시간을 한층 더 굳건하게 묶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작가가 다시 가 본 해남 땅에서 보았던 것처럼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읍내를 둘러보니 온통 순댓국, 삼겹살, 해물탕 같은 간판이 즐비했다. 어디나 어슷비슷한 식당이 전국화되고 있는 것이다.(p.207)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처럼 음식도, 맛도 양산화, 평준화 되고 있는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이 우리의 신경을 무디게 만들듯,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을 상실한 닮은꼴의 음식들은 경험의 선명도를 떨어뜨린다. 결국 그렇지 않았다면 강렬했을 추억도 흐릿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처럼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은 다만 먹는 순간을 즐겼다는 것 뿐이다. 시간의 소비만 있지 추억의 예금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이렇게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은 아이들, 현재의 나와 판박이인 어른들이 많다고 밝힌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정체도 모를 미국식 페스트푸드로 점심을 때우고, 어른들도 야외에만 나가면 그저 고기를 떡 벌이지게 지글지글 구워서 독주에다 실컷 마시고 쿵쾅거리는 가라오케 기계를 틀어놓고 법석댄다. (p.107)


 현실은 점점 타인과 더불어 오래 공유할 추억을 만들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인간 관계란 헤어질 때 버릇처럼 말하는 '언제 한 번 밥먹자'라는 말의 공허한 울림과도 같이 형식적이면서 파편화되어 버린지 오래다. 나는 정말로 뒤늦게 깨달았는 지도 모른다. 지금의 현실이 내가 뭔가 하기엔 너무나 버겁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런 내 모습이 과거의 나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의 나는 외로움을 무척이나 많이 느꼈지만 그 상황에 나를 수동적으로 길들이려했을 뿐,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하여 현재의 후회와 자책을 가졌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래. 상황 탓은 그만두자. 그렇게 하여 본들 황석영 작가에 대한 부러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외부에서 나를 의탁할 곳을 찾고 그런 곳이 없다며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그런 거점이 되자. 추억을 동냥하기 보다는 내가 먼저 나눠주기로 하자. 그것도 어디서도 대체가 불가능한 고유한 경험을. 이렇게 마음 먹는다. 앞에서 인용한 것에 바로 이어지는 말 그대로다.


 장아찌는 장독대가 사라지면서 백화점의 반찬가게로 옮겨갔고, 서로 담 너머로 장을 빌리거나 찬을 나누고 들밥을 함께 먹던 문화는 식구끼리의 외식문화로 바뀌었지만, 실천하기에 따라서는 회복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p. 107)


 동의한다. 실천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요리를 통해 해보려 생각한다. 이렇게 작정하게 된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책을 통해 음식이야말로 고유성의 발현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나 때문이다. 집밥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 내가 한 집밥을 누군가 먹고 즐거워한다면 그 때의 나에게도 위로가 될 것 같아서이다. 물론 내가 만든 음식으로 누군가를 즐겁게 만든다는 것이 지금의 내겐 턱없는 욕심이긴 하다만. 그래도 발걸음을 떼고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다. 언젠가 내가 만든 음식 때문에 누군가 추억을 밥도둑처럼 즐거이 맛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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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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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행복 강박 시대다. 작년에 한 신문이 젊은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세 명 중 한 명(33.9%)이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적이 있다고 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쳐지는 것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행복도 이제 경쟁 대상이다. 그만큼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뒤쳐지기 싫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현실 도피 심리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엔 개인적인 원인만은 아닌, 사회적인 원인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문제를 풀 때 내가 아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한 문제일수록 빨리 정답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해답을 향한 욕망의 크기는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의 강도에 비례했다. 행복 강박도 동일하다. 불안할수록 집착하게 된다. 불안이 소멸된 상태로써의 행복에 대한 희구가 갈수록 절박해지는 탓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 일컫는다. 북한은 연일 핵도발을 하고 있고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가계 부채 비율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이 2017년에 우리나라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 경고한다. 여기저기서 불길한 지표와 예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이니 아무래도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와도 같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천착도 높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복이어야 할까? 너무도 불안한 우리는 그저 어서 빨리 안정을 얻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야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따져 볼 여유가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파시즘은 언제나 사회가 한창 불안할 때 도래했다. 그처럼 우리는 커다란 불안 앞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다. 선택에 뒤따르는 위험 보다는 모방을 통한 안정을 취하려든다. 때문에 막연히 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모델로 여기고 뒤쫓는다. 그것은 또한 타인의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행복은 결국 기성품 같은 것이 된다. 치수는 미리 정해져있고 우리는 이제 자신의 기준을 그것에다 억지로 맞춰야 한다. 그런 우리들은 마네킹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며 외모는 근사해 보일지라도 내면은 공허하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타인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지는 몰라도 자기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보람 있었다고 느끼기 보다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p. 189)


 자전거를 탈 때, 우리 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느끼지는 못해도 흔들리는 자전거 위에서 계속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안과 행복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할수록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숙고일 것이다. ‘법륜스님의 행복’은 그런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30년간 법문을 강의한 내공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사회와 가족 내에서 만나는 모든 갈등에 있어서 내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관조하는 것이 왜 보다 현명한 방법이 되는지 그리고 현재에 충실할 것과 자신의 처지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조언한다. 그런 조언들이 이 책엔 참으로 넉넉하다. 때문에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기에 의탁해 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특별히 와닿는 조언이 있었다.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어요.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겨요. 그런데 현실의 자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하는 것이지요.(p. 34)


 그런 것이었나? 내 부족함의 감각이 실은 내 우월함의 반영이었다니! 난 늘 자신을 겸손하다 여겼는데 실은 그것도 우월이 굴절된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법륜스님의 조언이 균형점을 옮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제까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자리에서 나와 관계 그리고 삶을 응시토록 하는 것이다. 기성품화된 행복은 불안의 부정에 따른 반향으로써 성립한다. 품고 헤아리기 보다는 배척하기에 급급하다보니 행복마저 브랜드(brand)가 되어 버린다. 즐김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일뿐이고 실체도 없는 기호. 유토피아란 인간 실존이 가진 부정성을 부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찰스 틸리히의 말을 믿는다면 유토피아란 브랜드화한 행복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비롯하여 많은 유토피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나 늘 폭력적인 배제와 억압이 항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나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유태인을 생산했다고도 말한 바 있다. 즉 유토피아는 배제와 억압의 폭력으로 성립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축소판인 맹목적 행복도 그러하다. 뒤쳐지기 싫어서 행복을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했듯이, 여기에도 서열을 매개로 한 배제는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내 행복을 위해 희생된 타인을 먼저 고려하라고 말한다. 불안의 공포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 전에 함께 떨고 있는, 나보다 못한 타인을 먼저 보라고 하는 것이다. 외면이 아닌 직시, 배제가 아닌 배려의 요청이다. 그리고 참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불안이 전염시킨 오늘날 행복의 행태를 볼 때, 이런 법륜스님의 ‘낯선 자리’로의 인도는 내게 적절해 보인다. 낯선 자리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다양한 삶의 맥락 속으로 삽입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산포하여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어디든 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자에게 행복은 더 이상 어딘가에 있는 지점이 아닌, 지금이라도 당장 결심만 하면 되는 선택 사항일 것이다. 결과의 중시로 무시되었던 과정이 복원되고 미래 역시 현재 앞에 꼬리를 내릴 것이다. 이 비전을 법륜스님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정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법륜스님의 조언 옆에 나를 놓고 비교해 보니 솎아낼 것도 많고 용기도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당장 나의 바깥으로 첫 발을 내밀어 보려 한다. 법륜스님이 '자꾸 “내일부터” “모레부터” 하면서 미루지 말라(p.25)'고도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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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 강박..... 그러게요. 진짜 그래요.

만나는 많은 분들의 목표가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데, 저는 굳이 행복해야 하나? 라고 반문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전 이 책을 구매하지 않았어요, 제목에 행복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조금 불편했어요. 아하하.

행복한 기분이 즐거운 기분, 무엇인가 잘 되는 상태를 말한다면
그 반대의 균형점도 중요한 게 아닐가 싶었어요. 괴롭더라도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말이죠.

헤르메스님, 그런데 균형이요, 너무 어려워요... ㅠㅠ

ICE-9 2016-03-13 23:22   좋아요 0 | URL
와아, 마녀고양이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반가워요^^ 마녀고양이님은 저랑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저 역시 행복해야 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습니다. 실은 어떤 상태가 정말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복 때문이 아니라 정청래 의원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리뷰도 사실 그것을 중심으로 썼었는데 너무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것 같아 다시 썼어요. 저는 이 책, 정청래 의원 컷오프 되는 날 너무 상처를 받아 치유 용으로 찾아 읽었어요. 들끓는 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쉽고 차분한 어조가 필요했거든요. 원래 리뷰엔 정말 엄청 분노도 쏟아냈었는데^^ 어쨌든 지금 전 완전 절망 상태입니다. 더불어 민주당에 과연 미래가 있는지조차 의심할 정도로... 그런 가운데 행복을 생각해 보게 되었네요. 어떤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체가 어떤 모습이든 얼마든지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법륜스님의 말을 믿고 싶어졌어요. 그거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튼 현재 저는 그러네요. 어쨌든 마녀고양이님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마녀고양이 2016-03-14 21:14   좋아요 0 | URL
이렇게 격하게 반가와해주시다니! ^^

저도 정청래 의원 컷오프로 엄청나게 상심하고, 오늘 이해찬 의원 컷오프로 민주당을 계속 지지해야 하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를 믿고 있고, 그 분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은 그냥 따르려고 합니다. 선거 때 보면 알겠지요.... 김종인 대표의 능력인지, 오만인지 여부를요.

2016-03-15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6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라마 '시그널'이 오늘로 끝났다. 아니, 이젠 어제인가?

 원래 '싸인'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김은희 작가였지만, 보다 더 이 드라마를 특별히 챙겨 보게 만든 것은 우연히 예고편에서 본 이재한(조진웅 역)의 다음과 같은 대사 때문이었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왜 이렇게나 이 대사가 마음을 울렸을까? 분명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각 때문이리라.

 그것을 타파하고픈 변화의 갈구,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느껴져 1화 방영때부터 각잡고 지켜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좋은 드라마다. 이제 겨우 3월이지만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고도 부르고 싶다.


 포스터 역시도 역대급! 정말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시그널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대답이 아닐까 싶다.

 박해영과 이재한이 무전을 주고 받으며 한결 같이 하는 말, "포기하지 않으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끝까지 갑니다."


 라는 이재한 형사의 말이 뭉클한 것도 제발 그렇게 되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온전히 드러났으면 하는 우리의 간구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설정 또한 세월호 참사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혹시 드라마 보실 분들은 여기서 멈춰주세요.)


 일단 1화에서 부터 15년이 넘도록 경찰서 앞에서 자기 딸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잡아달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과 겹친다.



 과거의 이재한 형사와 현재의 박해영 경위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하필이면 무전기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의 눈물을 많이도 쏟게 했던 아이들의 핸드폰을 많이 연상시킨다.

 배터리가 닳은 무전기로 통신할 수 있게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결코 사건을 이대로 미제로 남겨둘 수 없다는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었다.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부모에게 보낸 문자에 담겨진 것도 그런 절박함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 무전기는 1화에서 유류품 상태로 박해영 경위에게 발견된다. 죽은 자가 남긴, 정작 그 장본인은 아직도 찾지 못한 그런 자의 유류품으로. 산자와 만나는 것이다.

 팽목항에서 아이들의 유류품으로 나온 핸드폰들과 똑같이 말이다. 이런 유사성으로 드라마의 무전기는 세월호 아이들의 핸드폰을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언제나 11시 23분에 일어난다.



 이 시간도 그대로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11시 23분.

 정확히 모든 공영 방송에서 공히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가 보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보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그것을 위해서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일어난다.(결국 미제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이재한 형사의 의지도 그런 마음의 연장이다.)

 이는 11시 23분에 일제히 전국으로 보도된 그 오보를, 과거가 바뀌어 그것이 사실 보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어진다.

 11시 23분은 비극적인 과거를 바꿔,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의 시간이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또한, 마지막 화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빨간 목도리도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한 장면이 인상깊었다.

 이재한 형사가 쓰레기 하치장에서 열심히 빨간 목도리를 찾고 있는데 박스 줍는 할머니가 그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 두른 모습, 가만히 보면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노란 리본과 비슷해 보이지는 않는가?




 왜 하필이면 결정적인 증거가 목도리인 것일까? 그것이 세월호 리본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 하지만 이재한이 미국에서 받은 증거 사진에 담겨진 빨간 목도리의 모습이라든지,


(이것을 거꾸로 놓고 보면 세월호 리본과 비슷하다)

 

 할머니가 두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확대 해석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이 빨간 목도리는 박해영의 형 박선우가 죽었을 때 그를 죽인 경찰이 가지고 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박선우는 그야말로 세월호 참사 때 죽은 아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이렇게 만난다.

 그것이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점과

 하필이면 그것을 주도했던 것이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나 박선우의 경우, 그를 죽인 경찰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방관한 해경을 나타내고 있다. 경찰이 고등학생을 살인한다는 설정이 그냥 나온 것 같지는 않다. 해경을 연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죽인 박선우는 해경이 죽인 세월호 참사 아이들이다. 빨간 목도리는 바로 그 방에서 발견되었다. 이 희생자와 현장 때문에 빨간 목도리는 세월호 리본으로 보인다.



 여기에 박선우를 죽인 경찰을 찾아온 이재한 형사가 하는 말이 더욱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아이는 어딘가 자신을 지켜 줄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 어른을 찾았던 거야. 자기 가족을 지키려고."


 어른... 자신들이 언제 익사할지 모르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해경들을 보면서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 애타게 찾지 않았을까? 자신들을 지켜줄 어른을...

 그런 마음이 선우에게도 있었고, 때문에 선우는 그대로 세월호의 아이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붕괴된 가정을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키고 싶다는 선우의 열망은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도 가지고 있었으리라.


 이렇게 드라마 '시그널'은 설정과 주제 모두에서 강력하게 세월호 참사를 환기하고 있으며 보는 우리들에게 포기하지 말 것을, 미제로 남겨두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 비분강개가 내게 더욱 와닿았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그래서 더욱 작가는 이재한 형사의 뚝심을 두드러지게 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하나의 푯대가 되어 포기하려 하고 마음 다잡지 못하는 우리들이 보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마지막 화에 나온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와 자신의 옛 사진을 바라볼 때 배경에 있었던 빨간 등대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또 그 장면은 팽목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팽목항에서 유가족이 아이들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과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다시 보면 훨씬 더 상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드라마 '시그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더우기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응답은 처음이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결말 부분,

 역시나 김은희 작가의 작품답게 한껏 열려있다. 예상은 했었다. '싸인'도, '유령'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재한 형사가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 모호해서 마치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처럼도 보인다.

 (나오려나? 나오면 정말 좋겠지만...)

 

 나는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었던 무전기 때문에 이게 혹 김은희 작가의 특기인 언해피 엔딩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었다. 무전기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불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절대 자신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오지말라고 했던 문자.

 이것은 분명 미래의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무선이 이뤄진다는 말.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는 무전기가 미래의 누군가에게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과거와의 무선은 어디까지나 이재한 형사의 무전기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오직 하나밖엔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이재한 형사가 죽어야만 가능하다. 과거가 바뀐 후, 15년동안 이재한 형사가 계속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장면에서 보듯 이재한 형사가 살아있을 경우 박해영은 무전기를 가지지 못한다. 무전기는 늘 이재한 형사에게만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요양 병원엔 장의원이 보낸 조폭들이 이재한 형사를 수색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장의원의 도시 재개발 비리를 인터넷으로 폭로한 것도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 오프라인 언론이 침묵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주로 많이 말했던 것은 인터넷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그 때, 이재한은 납치되어 실종되거나 죽었고 뒤늦게 도착한 차수현과 박해영이 무전기만 수습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요양 병원에 오지말라고 한 것일까?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썩 편한 결말은 아니다.

 

김은희 작가답게 연애엔 별 배려가 없다. 

(이래서 공중파는 아예 생각 안했는 지도)

흑...보면 볼수록 불쌍한 차수현 경위...

하긴, 이재한 첫사랑도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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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그널에 홀릭해서, 금토를 기다렸는데..... 어제 끝났네요.
시그널 시즌 2를 논의 중이라는데, 나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열린 결말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라는 메시지는 잘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포기하지 말아요. 쪼옥~

ICE-9 2016-03-13 23:24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이재한 형사를 따라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겁니다^^
시즌 2도 포기하지 말고 제발 나와주세요... 치지직... 치직...
 
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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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러(Keller). 주인공의 이름이다. 모음 하나만 바꾸면 킬러(Killer)가 된다. 주인공의 직업이다. 그는 살인청부업자다. 의뢰를 받으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간다. 나이는 중년, 일처리는 야무지고 뒷처리가 깨끗해서 업계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 덕분에 의뢰는 끊이지 않고 노후 대비도 튼튼하다. 하지만 능력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삶은 외롭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장거리 세일즈맨을 닮은 업무 특성상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어딘가에 도착할 때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기가 과연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인가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머물게 되기를 희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좋은 곳에 못처럼 박혀선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보통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직업이 별스럽다 뿐이지 그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어떤 뚜렷한 계기가 있어 살인청부업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버렸을 뿐이라고 한다. 생업으로 삼을 작정도 아니었고 관심은 물론 소질도 없었는데 그저 몇 번 하다보니까 어느새 직업이 되고 말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백에 결론을 내듯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진로는 준비하는 게 아니야. 중간에 우연히 그 일에 대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로는 선택하는 게 아니야.(p.158)


 지금의 모습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삶이 흐르는 곳으로 '어쩌다 보니' 배를 타고 떠내려가다 문득 정박하게 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대다수가 직업을 가질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켈러의 방황이나 고민 혹은 욕망에서 우리의 닮은 꼴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지금의 삶이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마치 한참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다 틀린 지도를 갖고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아이처럼 실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왔다고 느낄 때가. 그런 기분을 가져본 이라면 켈러에게 많이 공감할 지도 모른다. 로런스 블록은 켈러를 평범한 사내처럼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고 켈러의 이야기는 갑자기 삶이 공허를 느껴버린 중년의 이야기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이제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떨친 로런스 블록이 98년에 불현듯 내놓은 ‘살인해드립니다’는 그런 켈러의 이야기다. 장편은 아니고 열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단편집이다. 이 작품은 장르상 하드보일드로 분류된다. 그러고 보니 켈러의 이야기들의 뿌리가 되는 하드보일드도 실은 공허함의 발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드보일드는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해미트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의 입을 통해 자신의 하드보일드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 일러 준 적이 있다. 샘 스페이드는 자신이 언젠가 맡았던 한 사나이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는데 알고보니 그 사나이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길을 가다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겪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해미트는 현대인의 영혼을 좀먹는 공허와 불안은 다름아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의 협소에서 초래된다고 하면서 하드보일드를 통해 무엇보다 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강조해 갈 것이라 천명했다. 세상의 논리 보다는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는 샘 스페이드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 뒤를 이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에서도 그건 변함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살인해드립니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열 개의 에피스도가 모여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주제가 바로 '선택'인 것이다. 열 개의 에피스도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켈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 선택이 처음의 '제로'에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켈러는 첫 에피소드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이미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여, 살인을 그만두고 그의 정착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러는 켈러의 결정이 너무도 갑작스러운 지라 결말이 좀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 보면 왜 결말이 이렇게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로런스 블록이 켈러의 이야기를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로런스 블록이 그 이상향에 켈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이유, 그것은 켈러에게 아직 아무런 주체적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러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제거 대상인 '잉글먼'이란 남자는 정부가 증인 프로그램으로 보호하는 자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삶마저 바꾼 자였다. 켈러에게 완벽하게 이상향으로 보였던 그 곳은 실은 강제성으로 넘치는 곳이었다. 그는 잉걸먼의 바뀐 삶을 보면서 그런 독단성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향이지만 개인의 의지는 전적으로 배제된 공간. 이것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이는 그대로 개인의 의지가 전무하다는 것의 표명 아닌가. 사실 개의 이름이 하필이면 군인을 뜻하는 솔저라는 것도 이것을 나타낸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겉모습이 아무리 완벽하게 보인다 해도 그 곳은 켈러의 정착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겉모습에 현혹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켈러에게 정착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한 웨이트리스의 결혼 반지가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공허를 발견하는 순간은 동시에 그동안 세상이 내 두 눈에 콩깍지처럼 씌워놓았던 현혹이 벗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이런 순간이 많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 그런지 주로 의뢰인의 정체와 살인 의뢰의 진짜 목적이 밝혀질 때 잘 나타난다. 때로 의뢰인은 켈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며,(어떤 때는 목소리 변조로 성별마저 다를 때가 있다.) 의뢰의 이유도 의뢰인이 밝힌 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켈러는 자신의 의지로 현혹으로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다. 왜곡과 교정이 접점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어릴 때 켈러의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이라고 주었던 군인 사진은 사실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고 사진관에서 진열하기 위해 쓴 장식용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뿌리 없는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오가 그랬듯이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공허의 발견은 끝이 아니고 어쩌면 내 삶을 보다 더 진정하게 살기 위한 시작인 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결혼반지에 대한 진실을 안 켈러는 자신의 선택으로 바로 대상을 살해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선택할 의지가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를 말이다. 때문에 결론이 그렇게 난 것이다. 거기서의 살인은 세상의 현혹에서 벗어난 개인 의지의 자유로운 구현을 의미하고 있다. 의뢰인의 진짜 정체와 목적이 밝혀졌을 때 켈러의 살인이 그러했듯이.


 (비록 로런스 블록은 이 에피소드를 쓸 때만 해도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지 이어갈 작정은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서 열 개의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에 있어서 대립하고 있는 두 지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하나는 선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선택을 막는 현혹이다. '살인해드립니다'에서 정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어떻게 대상을 제거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현혹과 선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가 나아갈수록 켈러의 선택 강도도 높아져 간다. 그저 의뢰 대로 대상만 착실하게 제거했던 그가 이제는 자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제거 대상이나 제거를 할지 말지까지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현혹도 교묘해져 간다. 마치 어릴 때 오락실에서 했던 슈팅 게임에서 한 라운드의 보스를 물리치면 뒤의 라운드에서 더 강한 보스가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제거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보다 주체적인 된 켈러에 뒤이어 나오는 세번째 에피소드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세상의 현혹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진짜 아버지는 아니다. 켈러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켈러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상담 치료사가 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분석가가 실은 저항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질서를 다시금 강요하는 자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디이푸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이며 이 때 상담 치료사는 사회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보는 형이상학 이론이 있어요. 사실은 태어난 부모도 우리가 선택했고,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사고도 우연도 없다는 겁니다. (p. 106 ~ 107)


 마치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의 논지를 짧게 요약한 것만 같은 이런 말로 아버지이자 사회 자체이기도 한 상담 치료사는 켈러에게 실은 그 어떤 것도 강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이 다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현혹한다. 켈러는 이 말에 혹하며, 그를 진심으로 믿고 갱생의 기회를 가져보려 하지만 결국 그 마음은 배반당하고 만다. 여기서 배반의 계기가 실로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하나의 개 때문이었고 또 그 개가 매개가 된 불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개의 이름이 '넬슨'이다. 유명한 영국의 해군 제독의 이름인 것이다. 처음 나온 개의 이름은 '솔저'였다. 솔저와 넬슨 모두 군인인 것은 같다. 하지만 솔저는 명령을 받는 자고, 넬슨은 명령을 내리는 자다. 개의 이름이 솔저에서 넬슨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대로 선택으로 나타나는 켈러 개인의 자유 의지가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한다.(물론 유혹할 당시에는 켈러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에피소드가 주로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임을 생각한다면(아디사시피 정신분석학에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는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키는 강력한 기제(機制)로 모든 사회화의 기반이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것은 그대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의 중대한 위반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사회의 중대한 기반을 허무는 행위이기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개인의 저항 행위이기도 하다. 로런스 블록은 이 정도로 커다란 반항이었기 때문에 개의 이름을 하필이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 중의 하나인 '넬슨'으로 지었는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넬슨이라는 개는 개인의 의지가 충만한 주체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로런스 블록은 그 개를 상담치료사를 죽인 뒤에 가지도록 한다. 억압하는 사회가 붕괴되어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을 되찾은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뒤이은 에피소드에서 개는 켈러가 가장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이제 켈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저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발휘하는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그는 이제 단순한 살인 기계가 아니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때로는 대상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면서 탐문하며 스스로의 추리를 통해 사회가 강요한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 지점에서 그의 암살 여정은 일종의 영토 전쟁이다. 세상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하나하나 확장해 나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점점 더 허약한 모습을 보인다. 켈러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실제 아버지라고도 할 만한 화이트 플레인스의 노인이 제거 대상을 혼동하거나 쌍방 의뢰를 받는 등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자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언제나 켈러다. 그만큼 그는 내적으로 성장한다.


 마지막에 켈러가 열의를 담아 하게 되는 우표수집은 거기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에 그는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 수집되려는 욕망이었다. 거기서 주체는 세상이었고 그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의 우표를 모은다. 그가 스스로 선별한 시기와 대상에 따라 세계가 수집되는 것이다. 관계는 전복되었다. 이만큼 강고해진 그의 주체성을 잘 드러내는 비유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표가 된 세계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더 이상 개인에게 현혹의 힘을 뻗칠 수 없는 민낯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작고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야만 하는 얇은 우표는 그대로 내가 공허에 눈을 뜨고 내 자신의 의지를 믿고 써보리라 결행한 순간 현혹의 힘을 잃어버린 세계가 어느정도까지 허약해질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제 더이상 세계는 개인에게 아무런 불안도 고통도 주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켈러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는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야기를 들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행복하니까." (p. 444)


 '살인해드립니다'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근저엔 우리도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공허에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와 그랬을 경우 놓이게 되는 세상의 현혹과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의 갈등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소재야 덥석 손잡아 주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해도 충분한 공감과 함께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최근 내가 켈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역시 요즘 자꾸만 알 수 없는 허무에 젖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안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켈러를 만났고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마치 친구의 고백을 읽듯 그의 이야기를 살갑게 읽었고 그의 고민에 내 고민을 투영해 나갔다. 어쩌면 여기서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말은 그토록 안정과 희망을 갈망했던 켈러만큼이나 절박했던 내 마음이 걸러낸 언어일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켈러가 보여준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고 싶다. 공허의 깊은 늪에 빠진 지금, 거기서 무력감과 불안만 길어내기 보다는 이 순간이 실은 보다 더 제대로 내 삶을 정비할 순간이라 생각하면서 중단없는 모색과 꾸준한 노력을 향한 의지를 돋우고 싶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길, 싸움은 직접 맞부딪쳐서 자신과 상대가 가진 힘과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회라고 했다. 그와 똑같이 나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켈러를 믿고 두터운 연막처럼 무럭무럭 나를 덮쳐오는 세계라는 것에 부딪쳐 볼 생각을 한다. 지금 내 불안을 초래하는 세상의 힘이 실은 현혹에 불과하다는 켈러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말이다. 정말로 힘껏 부딪혀본다면 지금은 커다랗게만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이 한 장의 우표처럼 작고 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켈러의 마지막 말을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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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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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내게 라틴어를 가르친 한 스페인인 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여기에 대해 처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완전히 바꿔 주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직접 만나기 전의 나는 그것을 로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아주 재밌는 소설이겠구나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아니었다. 산만함을 용납하지 않는 달변의 화술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는 소설로서의 재미도 월등했지만 더 나아가 뛰어난 역사서로써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2부, '풀잎관'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로마를 다룬 역사서에서 겨우 몇 개의 문장, 좀 더 나아가봐야 기껏 서너 페이지 정도로만 접했던 사건을 1권은 519페이지, 2권은 595페이지, 3권은 400페이지로 무려 세 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놀랐는 지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제목인 '풀잎관'의 뜻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설에서 콜린 매컬로가 묘사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대나 군단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 받은 이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명예로운 훈장이다. 다시 말해, 풀잎관은 어디까지나 한 단체를 커다란 위기에서 구해내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로 이 소설에서 로마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선 '동맹시 전쟁(BC 91 ~ BC 88)'으로 기록된, 자신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는 로마를 상대로 이탈리아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사실 이 전쟁은 로마에게 미증유의 위기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이 때까지 계속 로마와 거의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니발이 침략했을 때, 로마가 지금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니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탈리아였다. 그만큼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함께했기에 이탈리아는 많은 면에서 로마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이 말은 이탈리아가 로마와 똑같이 싸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로마가 지금까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군대 편성, 전술의 덕이 컸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그 이점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도 똑같은 로마의 군대 편제로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며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로마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로마 자신과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찌 위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시간을 2부, '풀잎관'은 담는다. 그 전쟁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경과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그 과정을 세 권에 걸쳐 조목조목 아주 상세하게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역사서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겨우 몇 줄 혹은 몇 페이지로 밖에는 만나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로 이만한 분량으로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놀랐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풍부하게 쓸 수 있었을까 하고.


 물론 여기에 대해선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니 소설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만한 분량쯤은 어렵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럴 경우 위험이 따른다.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력은 쉽게 허황과 그것을 설득력있게 만들려다가 장황의 늪에 빠지고 그러다 그만 설득력을 잃고선 오히려 독자들의 차디찬 외면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풀잎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연설에서와 똑같이, 두말할 것도 없이 설득력이다. 그것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한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설득력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이든, 로마 원로원의 어떤 연설이든, 중요 인물들의 어떤 심리이든, 모두 있음직하고 그럴만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솔직히 실제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만한 설득력이 그저 콜린 매컬로의 상상력, 필력으로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와 충실한 검토, 그 의미에 대한 숙고가 있었으리라. 그래야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이 소설이 그 어떤 사건이든 인물의 초상이든지 간에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또 감히 이 소설을 뛰어난 역사서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동맹시 전쟁'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풀잎관'을 읽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아주 개략적인 소개만 있다. 설령 인물이 등장해도 '어디가서 무엇을 했고 결과가 이렇다'라는 정도의 '행위와 결과'만 있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잘 나오지 않는다. 행여 나와도 깊이 서술하진 않는다.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오히려 거기에 더 주안점을 둔다. 이 인물이 어떤 연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고 행위했는지 그 과정을 더 충실히 복원하여 독자를 깊이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마리우스와 술라만이 아니다. 필리푸스, 카이오스, 루푸스, 드루수스, 술피키우스 그리고 킨나만이 아니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인 율리아, 리비아 그리고 아우렐리아만도 아니었다. 3편에서 마리우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작은 도시 민투르나이의 일개 촌부의 마음마저도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에게 깊이 체험토록 한다.(아아, 이 장면은 '풀잎관'에서 가장 멋진 장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저마다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독립적 인격으로 다가오고 그런 까닭에 마리우스의 성공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예언에 대한 집착도, 술라의 질투와 고독도, 루푸스의 정치에 대한 환멸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기 위한 드루수스의 절박함도, 미트리다테스의 학살로 문득 자신이 가야할 길에 눈을 뜨게 된 술피키우스의 회심도 다 생생하게 다가왔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풀잎관'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대의 역사를, 역사란 무엇보다도 생생한 인간들이 활약하는 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역사라는 말을 쓰니까 문득 영화 '변호인'에도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역사학자 E.H 카아가 떠오른다.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가 '대화'란 말을 쓴 것은 과거의 사실이라고해서 고정불변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늘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풀잎관'이었다.(아마도 그래서 갑자기 그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제 동맹시 전쟁을, 당시 주된 행위자였던 마리우스와 술라를,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과거와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콜린 매컬로의 이 책을 통해 바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나 예전엔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권력에 눈이 먼 이들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와 이탈리아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 역시도 그것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되어 그것도 모르고 마냥 로마 편만 들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카아의 '대화'는 과거의 역사가 동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풀잎관'은 여기에도 해당되었다. 솔직히 이것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풀잎관'은 당대의 긴급하면서도 긴요한 문제에 대해서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풀잎관'을 한 번은 꼭 벗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주(移住)의 문제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로 최근에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로 유럽 곳곳이 격한 논쟁과 갈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더욱 난민을 통크게 받아들인 독일에선 올 새해 첫날에 난민들이 일으킨 쾰른 대성상 집단 성폭행 사태로 더욱 찬반양론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 일찍 이주민을 유입시킨 유럽 사회에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어왔다. 실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의 우익화는 늘어나는 이주민과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주민이 유럽의 정치 지형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가 현재의 미국일 지도 모른다. 이주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모두 알다시피 고령화 사회로 착착 나아가고 있고 심각한 저출산을 겪고 있다. 유럽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도 있다. 만일 통일이 되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풀잎관'의 문제를 겪을 것이다.


 '풀잎관'은 바로 그럴 때 능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서 일어난 갈등이 지금과 진정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3부에 걸쳐 내내 재현된다. 리키니우스-무키우스 법이 발단이었다. 이 법은 '마스터 오브 로마 가이드 북'에 따르면 'BC 96년 인구조사에서 가짜 로마 시민 발각 사례가 급증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라 높아지자(p. 124)' 이에 대응하여 가짜 시민을 가려내어 신규 등록자를 처벌할 것을 목적으로 한 법이었는데 그렇게 가짜 시민으로 등록한 대부분이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 도시들의 사람인 지라 특히 처벌 조항 때문에 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가 원로원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법을 옹호하는 자들, 즉 차별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 법을 반대하는 자들, 즉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언설이 지금의 논쟁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포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포용 편에 섰던 루푸스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디 리키니우스-무키우스의 법의 처벌 조항을 더 진지하게 들여다봅시다! 어떻게 우리가 군대와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우리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을 매질할 수 있습니까? 이 의사당의 일부 방종한 무리가 이곳 동료들의 혈통에 대해 비방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가 이탈리아인들과 그렇게 다른 존재입니까? 이 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여러분이 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때려서 아들을 훈육하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입니다. 그 아들을 자란 후에 아버지를 증오하지, 사랑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반도에 사는 우리의 이탈리아인 친족을 매질한다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로마 시민권 획득을 막는다면, 속물적인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막대한 벌금으로 벌한다면, 탐욕스러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에서 쫓아낸다면, 냉담한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얼마나 큰 증오일까요? 원로원 의원 여러분, 퀴리테스 여러분,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품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증오입니다.”(1권, p. 373~374)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면 증오만 부추기는 수단 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루푸스의 말은 우리의 현실에서 증오만 부추기는 정책을 폈던 국가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비근한 예로 과거 일본이 재일한국인에게 했던 '외국인지문등록법'이 있다. 범죄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필요한 지문을 그것도 하필이면 재일한국인만 등록하게 했던 그 법은 재일한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하여 일본의 재일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마저 엄청난 공분을 자아내어 그 여파로 일본 사회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2005년 프랑스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이주민들의 폭동은 이주민들에게만 가혹한 경찰이 처사와 그것을 정책적으로 방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사회들이 이렇게 이주민들을 배제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오직 안정이었다. '풀잎관'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 주는 것을 결사적으로 거부했던 필리푸스와 카이오스가 내내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정책이 가져다 준 것은 더 커다란 혼란 뿐이었다. 특히나 독일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반대 증거가 되고 있다. 독일도 프랑스와 비슷한 규모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같은 혼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범국가였던 독일은 노동력이 되는 남성들이 아주 많이 사망하여 전후 독일 경제 부흥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자 바깥 국가에서 이주민들을 대폭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때부터 이미 그들을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이 독일 사회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루푸스 말로 하자면 독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도와 제도에 있어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서 그것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정비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모습은 루푸스의 방법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풀잎관'이 좋은 참조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뜨거운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풀잎관'에서 그 문제를 두고 등장하는 다양한 주장들을 우리가 있는 현재의 실제 사례들에 비추어 어느 것이 어리석고 또 어느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판단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풀잎관'은 결코 한 번의 감상으로 그치는 작품이 아니다. 반드시 오늘의 문제와 결부하여 몇 번씩 곱씹게 만든다. 카아의 '대화'엔 역사적 사실이 수동적인 습득의 대상이 아니고 적극적인 사유 참여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면에서도 '풀잎관'은 합당한 면모를 보인다. 누구의 주장이든 그것은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콜린 매컬로는 뛰어난 필력으로 그 주장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담아내고 있기에(2권에서 필리푸스가 로마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현상들을 증거로 내세우며 드루수스를 공격할 때조차 그렇다. 거기서 필리푸스가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은 설령 그것이 스카우루스의 말마따나 조작된 것임을 안다 해도 전혀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긴 목록은 그야말로 콜린 매컬로를 대단하게 보도록 만든다. 특히 그 목록을 빼곡히 채운 상상력과 왠지 납득하게 만드는 필력을. 소설에서 가장 증오를 받을 인물의 말조차 그렇게 세심하게 구성하다니, 이런 존중과 배려를 보면 콜린 매컬로야 말로 루푸스와 드루수스의 정신을 진정 실천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절로 거기로 이끌려 들어가 자신의 사유를 가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콜린 매컬로가 은근히 초대한 대화에 어느 순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푸스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든 포용의 이유를, 2권의 드루수스는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밝히는데,


 “우리 로마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내에서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왕처럼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느끼는 기분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우리의 높은 콧대 밑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하려면 무슨 핑계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그 어떤 자연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2권, p. 120)


“이제는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악을 없애야 할 때입니다! 이 악이란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간주되는 것, 우리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로마는 이탈리아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로마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줍시다!”(2권, p. 123)


 이것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우열의 기준은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한없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일 뿐인데 우리 역시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타협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최근에 필리버스터로 더욱 우리들의 관심을 달군 '테러방지법'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도 '풀잎관'은 1권에서 루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우리의 사유를 요청한다.

 “유급 정보제공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을 무기력하게 만들 질병을 수십 년 동안 확산시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첩자들, 옹졸한 공갈범들, 그리고 친구는 물론이고 친척에 대한 끝도 없는 의심이라는 질병말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자들은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할 때나 억압적인 법이 제정될 때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제발 이런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대로 로마인이 됩시다. 공포에서 해방된, 외국 왕의 술수 위에 있는 존재 말입니다.”(1권, p. 376)


 이렇게 '풀잎관'은 과거의 죽은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들을 단순한 감상자로 놔두지도 않는다. 소설에 있는 어떤 말이든, 사건이든 어느 순간 그와 비슷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슬쩍 다가와서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은근히 묻는다. 발터 벤야민은 진리를 향한 읽기란 잠들려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풀잎관'의 독서가 정녕 그러하다. 되씹고, 곱씹다 어느새 사유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 지도는 어쩌면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소마에 준이치라는 일본의 역사학자는 '상실과 노스텔지어'라는 책에서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그 자체는 담론이며 우리의 관념에서 상기됨으로써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상기 책, p. 21)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념 속으로 지속적으로 들어와 집요하게 대화를 요청하는 콜린 매컬로의 '풀잎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로마 역사를 처음 만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된다. 지금까지 겨우 몇 줄이나 얼마 안 되는 페이지 속의 초라한 실체로만 보았던 로마의 인물들인데, 이토록 풍성하고 자세하게 만나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어 마치 처음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로마의 역사 또한 어떻게 처음처럼 다가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동맹시 전쟁'을 둘러싼 제반 상황을 '풀잎관'을 통해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더욱 이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다. '풀잎관'은 로마 역사의 신대륙으로 인도한다. 인물도, 사건도, 과정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것도 지금 나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하여. 그러니 사유 역시 일신(一新)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소마에 준이치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을 기점으로 역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 자신 안에 과거라는 어둠이 스며들어 내가 해체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같은 책, p. 33)'이라고. 이 말대로 역사는 현실을 상대화시켜 지금의 내가 가진 생각을 해체하고 전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를 느낀다면 '풀잎관'은 한층 더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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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