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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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러(Keller). 주인공의 이름이다. 모음 하나만 바꾸면 킬러(Killer)가 된다. 주인공의 직업이다. 그는 살인청부업자다. 의뢰를 받으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간다. 나이는 중년, 일처리는 야무지고 뒷처리가 깨끗해서 업계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 덕분에 의뢰는 끊이지 않고 노후 대비도 튼튼하다. 하지만 능력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삶은 외롭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장거리 세일즈맨을 닮은 업무 특성상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어딘가에 도착할 때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기가 과연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인가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머물게 되기를 희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좋은 곳에 못처럼 박혀선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보통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직업이 별스럽다 뿐이지 그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어떤 뚜렷한 계기가 있어 살인청부업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버렸을 뿐이라고 한다. 생업으로 삼을 작정도 아니었고 관심은 물론 소질도 없었는데 그저 몇 번 하다보니까 어느새 직업이 되고 말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백에 결론을 내듯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진로는 준비하는 게 아니야. 중간에 우연히 그 일에 대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로는 선택하는 게 아니야.(p.158)


 지금의 모습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삶이 흐르는 곳으로 '어쩌다 보니' 배를 타고 떠내려가다 문득 정박하게 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대다수가 직업을 가질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켈러의 방황이나 고민 혹은 욕망에서 우리의 닮은 꼴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지금의 삶이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마치 한참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다 틀린 지도를 갖고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아이처럼 실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왔다고 느낄 때가. 그런 기분을 가져본 이라면 켈러에게 많이 공감할 지도 모른다. 로런스 블록은 켈러를 평범한 사내처럼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고 켈러의 이야기는 갑자기 삶이 공허를 느껴버린 중년의 이야기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이제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떨친 로런스 블록이 98년에 불현듯 내놓은 ‘살인해드립니다’는 그런 켈러의 이야기다. 장편은 아니고 열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단편집이다. 이 작품은 장르상 하드보일드로 분류된다. 그러고 보니 켈러의 이야기들의 뿌리가 되는 하드보일드도 실은 공허함의 발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드보일드는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해미트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의 입을 통해 자신의 하드보일드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 일러 준 적이 있다. 샘 스페이드는 자신이 언젠가 맡았던 한 사나이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는데 알고보니 그 사나이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길을 가다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겪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해미트는 현대인의 영혼을 좀먹는 공허와 불안은 다름아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의 협소에서 초래된다고 하면서 하드보일드를 통해 무엇보다 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강조해 갈 것이라 천명했다. 세상의 논리 보다는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는 샘 스페이드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 뒤를 이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에서도 그건 변함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살인해드립니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열 개의 에피스도가 모여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주제가 바로 '선택'인 것이다. 열 개의 에피스도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켈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 선택이 처음의 '제로'에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켈러는 첫 에피소드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이미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여, 살인을 그만두고 그의 정착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러는 켈러의 결정이 너무도 갑작스러운 지라 결말이 좀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 보면 왜 결말이 이렇게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로런스 블록이 켈러의 이야기를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로런스 블록이 그 이상향에 켈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이유, 그것은 켈러에게 아직 아무런 주체적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러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제거 대상인 '잉글먼'이란 남자는 정부가 증인 프로그램으로 보호하는 자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삶마저 바꾼 자였다. 켈러에게 완벽하게 이상향으로 보였던 그 곳은 실은 강제성으로 넘치는 곳이었다. 그는 잉걸먼의 바뀐 삶을 보면서 그런 독단성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향이지만 개인의 의지는 전적으로 배제된 공간. 이것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이는 그대로 개인의 의지가 전무하다는 것의 표명 아닌가. 사실 개의 이름이 하필이면 군인을 뜻하는 솔저라는 것도 이것을 나타낸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겉모습이 아무리 완벽하게 보인다 해도 그 곳은 켈러의 정착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겉모습에 현혹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켈러에게 정착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한 웨이트리스의 결혼 반지가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공허를 발견하는 순간은 동시에 그동안 세상이 내 두 눈에 콩깍지처럼 씌워놓았던 현혹이 벗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이런 순간이 많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 그런지 주로 의뢰인의 정체와 살인 의뢰의 진짜 목적이 밝혀질 때 잘 나타난다. 때로 의뢰인은 켈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며,(어떤 때는 목소리 변조로 성별마저 다를 때가 있다.) 의뢰의 이유도 의뢰인이 밝힌 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켈러는 자신의 의지로 현혹으로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다. 왜곡과 교정이 접점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어릴 때 켈러의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이라고 주었던 군인 사진은 사실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고 사진관에서 진열하기 위해 쓴 장식용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뿌리 없는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오가 그랬듯이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공허의 발견은 끝이 아니고 어쩌면 내 삶을 보다 더 진정하게 살기 위한 시작인 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결혼반지에 대한 진실을 안 켈러는 자신의 선택으로 바로 대상을 살해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선택할 의지가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를 말이다. 때문에 결론이 그렇게 난 것이다. 거기서의 살인은 세상의 현혹에서 벗어난 개인 의지의 자유로운 구현을 의미하고 있다. 의뢰인의 진짜 정체와 목적이 밝혀졌을 때 켈러의 살인이 그러했듯이.


 (비록 로런스 블록은 이 에피소드를 쓸 때만 해도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지 이어갈 작정은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서 열 개의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에 있어서 대립하고 있는 두 지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하나는 선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선택을 막는 현혹이다. '살인해드립니다'에서 정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어떻게 대상을 제거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현혹과 선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가 나아갈수록 켈러의 선택 강도도 높아져 간다. 그저 의뢰 대로 대상만 착실하게 제거했던 그가 이제는 자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제거 대상이나 제거를 할지 말지까지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현혹도 교묘해져 간다. 마치 어릴 때 오락실에서 했던 슈팅 게임에서 한 라운드의 보스를 물리치면 뒤의 라운드에서 더 강한 보스가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제거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보다 주체적인 된 켈러에 뒤이어 나오는 세번째 에피소드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세상의 현혹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진짜 아버지는 아니다. 켈러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켈러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상담 치료사가 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분석가가 실은 저항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질서를 다시금 강요하는 자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디이푸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이며 이 때 상담 치료사는 사회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보는 형이상학 이론이 있어요. 사실은 태어난 부모도 우리가 선택했고,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사고도 우연도 없다는 겁니다. (p. 106 ~ 107)


 마치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의 논지를 짧게 요약한 것만 같은 이런 말로 아버지이자 사회 자체이기도 한 상담 치료사는 켈러에게 실은 그 어떤 것도 강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이 다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현혹한다. 켈러는 이 말에 혹하며, 그를 진심으로 믿고 갱생의 기회를 가져보려 하지만 결국 그 마음은 배반당하고 만다. 여기서 배반의 계기가 실로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하나의 개 때문이었고 또 그 개가 매개가 된 불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개의 이름이 '넬슨'이다. 유명한 영국의 해군 제독의 이름인 것이다. 처음 나온 개의 이름은 '솔저'였다. 솔저와 넬슨 모두 군인인 것은 같다. 하지만 솔저는 명령을 받는 자고, 넬슨은 명령을 내리는 자다. 개의 이름이 솔저에서 넬슨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대로 선택으로 나타나는 켈러 개인의 자유 의지가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한다.(물론 유혹할 당시에는 켈러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에피소드가 주로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임을 생각한다면(아디사시피 정신분석학에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는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키는 강력한 기제(機制)로 모든 사회화의 기반이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것은 그대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의 중대한 위반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사회의 중대한 기반을 허무는 행위이기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개인의 저항 행위이기도 하다. 로런스 블록은 이 정도로 커다란 반항이었기 때문에 개의 이름을 하필이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 중의 하나인 '넬슨'으로 지었는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넬슨이라는 개는 개인의 의지가 충만한 주체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로런스 블록은 그 개를 상담치료사를 죽인 뒤에 가지도록 한다. 억압하는 사회가 붕괴되어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을 되찾은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뒤이은 에피소드에서 개는 켈러가 가장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이제 켈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저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발휘하는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그는 이제 단순한 살인 기계가 아니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때로는 대상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면서 탐문하며 스스로의 추리를 통해 사회가 강요한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 지점에서 그의 암살 여정은 일종의 영토 전쟁이다. 세상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하나하나 확장해 나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점점 더 허약한 모습을 보인다. 켈러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실제 아버지라고도 할 만한 화이트 플레인스의 노인이 제거 대상을 혼동하거나 쌍방 의뢰를 받는 등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자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언제나 켈러다. 그만큼 그는 내적으로 성장한다.


 마지막에 켈러가 열의를 담아 하게 되는 우표수집은 거기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에 그는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 수집되려는 욕망이었다. 거기서 주체는 세상이었고 그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의 우표를 모은다. 그가 스스로 선별한 시기와 대상에 따라 세계가 수집되는 것이다. 관계는 전복되었다. 이만큼 강고해진 그의 주체성을 잘 드러내는 비유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표가 된 세계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더 이상 개인에게 현혹의 힘을 뻗칠 수 없는 민낯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작고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야만 하는 얇은 우표는 그대로 내가 공허에 눈을 뜨고 내 자신의 의지를 믿고 써보리라 결행한 순간 현혹의 힘을 잃어버린 세계가 어느정도까지 허약해질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제 더이상 세계는 개인에게 아무런 불안도 고통도 주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켈러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는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야기를 들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행복하니까." (p. 444)


 '살인해드립니다'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근저엔 우리도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공허에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와 그랬을 경우 놓이게 되는 세상의 현혹과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의 갈등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소재야 덥석 손잡아 주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해도 충분한 공감과 함께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최근 내가 켈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역시 요즘 자꾸만 알 수 없는 허무에 젖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안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켈러를 만났고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마치 친구의 고백을 읽듯 그의 이야기를 살갑게 읽었고 그의 고민에 내 고민을 투영해 나갔다. 어쩌면 여기서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말은 그토록 안정과 희망을 갈망했던 켈러만큼이나 절박했던 내 마음이 걸러낸 언어일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켈러가 보여준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고 싶다. 공허의 깊은 늪에 빠진 지금, 거기서 무력감과 불안만 길어내기 보다는 이 순간이 실은 보다 더 제대로 내 삶을 정비할 순간이라 생각하면서 중단없는 모색과 꾸준한 노력을 향한 의지를 돋우고 싶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길, 싸움은 직접 맞부딪쳐서 자신과 상대가 가진 힘과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회라고 했다. 그와 똑같이 나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켈러를 믿고 두터운 연막처럼 무럭무럭 나를 덮쳐오는 세계라는 것에 부딪쳐 볼 생각을 한다. 지금 내 불안을 초래하는 세상의 힘이 실은 현혹에 불과하다는 켈러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말이다. 정말로 힘껏 부딪혀본다면 지금은 커다랗게만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이 한 장의 우표처럼 작고 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켈러의 마지막 말을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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