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의 탄생 - 차가움을 달군 사람들의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
톰 잭슨 지음, 김희봉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이런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박민규의 소설 '카스테라'는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중고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다. 그처럼 냉장고는 사실 우리 일상에서 가장 무거운 실존이다. 365일, 단 한 번도 OFF 되는 일이 없는 존재. TV를 안 보는 하루는 있어도, 냉장고를 열지 않는 하루는 없다. 거기다 이제 스마트 냉장고의 시대가 열리면서 냉장고는 더욱 가정의 중심이 되었디. 박민규가 묘사했던 대로, 냉장고가 가정의 신으로 군림할 날도 머지 않은 것이다. 아니, 이미 현실인지도...


 이런 냉장고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매일 냉장고 문을 열면서도 이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걸 비로소 이번에 나온 톰 잭슨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제목은 '냉장고의 탄생'. 저자 톰 잭슨은 과학과 기술을 역사적 맥락으로 설명하는 것을 즐기는 영국 출신의 프리랜서 작가라고 한다. 냉장고 역시 그런 맥락으로 다루지만, 그의 설명은 단순히 냉장고의 발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가 담는 범주는 훨씬 넓어서, 아예 인류가 지금처럼 '차가움'을 지배하게 된 여정 전체를 망라한다. 그래서 책의 시작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얼음 창고에 대한 기록이 있는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8세기, 당시 시리아 국경 지역을 지배하던 짐리-림은 '테르카'에 가로 6미터, 세로 12미터의 얼음 창고를 지었다. 그것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얼음이 인간 문명 안으로 들어온 첫 걸음이었다. 목적은 지금과 똑같이 상하기 쉬운 음식물의 보존과 저장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나온 우리 나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조선 시대만 해도 얼음이 권력과 자본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인류가 얼음을 자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문명이 있는 곳 어디서나 얼음은 늘 그랬다. 그런 얼음이 자본과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차갑다'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그런 '차가움'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연구했던 과학자들 덕분이었다. '차갑다'는 것은 '뜨겁다', 즉 열의 반대이므로, 차가움의 정체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선 열의 정체와 원인을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열은 계속 '실체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학자들은 열을 일으키는 어떤 실체를 가진 입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플로지스톤'이라 불렀다. 차가움은 연소를 통해 바로 이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되었다.(데카르트의 이론이 대표적이었다.) 그것은 수은을 이용하여 최초로 만들어진 토리첼리의 온도계를 통해 공기의 압력으로 인해 열과 차가움의 온도가 변한다는 것을 밝혀낸 로버트 보일의 시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로버트 블랙은 물체의 온도가 변하는 이유를 특정 물질의 감소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물질을 '칼로릭'이라 명명 하기도 했다.(지금 흔히 사용되는 '칼로리' 단위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패러다임의 균열을 일으킨 과학자는 바로 프랑스의 라부아지에 였다. 바야흐로 공기가 이전처럼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여러 입자가 뒤섞인 '혼합물'이라는 것이 그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열을 공기 중의 산소가 다른 물질과 반응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그런 열을 일으키는 기체란 의미로 산소를 Oxygen(라부아지에는 '산을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물론 산소는 산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못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거기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오해가 낳은 산물이었다.)이라 불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열을 일으키는 공기 중의 미세 입자에 대한 연구가 계속 이뤄진 뒤, 비로소 제임스 프레스콧 줄에 의해 열은 에너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학창 시절 물리 교과서에서 '줄의 법칙'으로 흔하게 만났던 그 줄 맞다. 차가움은 이제 에너지가 공급되지 못한 상태로 정의된다. 


 그리고 1852년, 그는 형인 톰슨과 함께 하나의 법칙을 발표한다. 바로 압축된 기체를 좁은 관이나 구멍을 통해 팽창시키면 기체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법칙이다. 줄에 의해 온도는 이제 기체 안의 입자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나의 반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입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온도가 올라가고, 반대면 내려간다. 입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차가워진다. 그런데 압축된 기체를 일시에 팽창시키면 입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온도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발견이었다. 결정적으로 인류가 온도를 지배하게 된 계기였다. 결국 이 법칙을 통해 우리는 냉장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냉장고가 지금처럼 보편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880년대 미국에서만 얼음이 500만톤 소비되었으나, 대부분은 자연에서 얼음을 채취하며 냉장시켜 소비자들에게 배달하는 형식이었다. 당시는 자연에서 얻은 것은 순수하다는 믿음이 있어, 강물이나 호수에서 채취한 얼음을 그대로 먹었는데, 덕분에 장티푸스와 이질이 창궐하여 인공 얼음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다. 가정용 냉장고는 프랑스의 수도사 마르셀 오디프렌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는 와인을 시원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그러다 결국 냉장고까지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산화황을 사용한 것이었다. 전기를 사용하는 냉장고는, 1911년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처음으로 특허를 얻었다. 초기의 냉장고는 '모니터 톱'으로 냉장고 위쪽에 원통형 압축기와 응축기가 돌출되어 있는 형태였다. 냉각된 공기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덜 차갑게 되기 때문에 모니터 톱은 위쪽에 얼음을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양문형으로 냉각기가 별도로 설치된 냉장고가 보편적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냉장고 대부분은 냉동실이 가장 위쪽에 있는 형태였다. 이런 형식이 이미 냉장고 초창기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냉장고의 시작과 현재의 다양한 응용까지 설명한 다음 톰 잭슨은 이런 차가움을 만드는 기술의 미래까지 보여준다. 얼른 냉동 인간 정도는 예상할 수 있으나 저자가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 역시, 그가 서술한 기술의 과거만큼이나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그는 이 냉각 기술이 텔레포테이션(즉, 순간 이동이다.)까지 응용되리라 보고 있다. 왜냐햐면 냉각 기술이 양자컴퓨터를 실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컴퓨터는 연산을 순차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지만, 양자컴퓨터는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단번에 아주 많이 그리고 복잡한 연산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텔레포테이션'에서 순간 이동한 지점에서 인간을 출발하기 바로 전 상태로 다시 복원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텔레포테이션은 존재 그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시작 점에서 존재를 빔 상태로 만들기 위해 죽이고, 도착지에서 다시금 재생시키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죽음과 재생의 과정이므로, 죽기 전의 상태로 재조합 하기 위해 엄청나게 빠르고 복잡한 계산이 가능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빨리, 빈틈없이 이뤄져야 하므로 양자컴퓨터가 존재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그런데 양자컴퓨터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극저온의 냉각 기술이 필수적이다.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도록 입자를 아주 단단한 상태로 고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냉각 기술은 미래에 아주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새삼, 냉각 기술이 가져올 문명의 변화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그 때에 이르면 정말 우리는 박민규 소설처럼  냉장고 속으로 들어갈 지 모르겠다. 먹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톰 잭슨의 '냉장고의 탄생'은 멋진 책이다. 단순히 냉장고에 대해서만 들려주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차가움의 원인을 규명하고 정복하게 되었는지, 거기에 연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오늘의 냉장고를 위해 이렇게 저렇게 연구한 이들이 많았다. 지금의 편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얼음에 끼었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얼음의 무한 자유를 누리게 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냉장 과학과 기술의 역사와 미래를 알고 싶은 분들에겐 딱 좋은 안내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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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마지막 날. 잠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낮고 흐리다. 벨벳 언더드라운드의 'After Hours'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룹의 유일한 홍일점 드러머인 먼로 터커의 음성으로. 역시 이런 날엔 이 음악이 잘 어울린다. 동영상을 링크하려 했는데, 곡의 분위기를 음반만큼 전달하지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노래엔 이런 후렴이 있다. '당신이 그 문을 닫으면, 난 다시는 하루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이 사회엔 지금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문 닫는 일들이 많다. 닫힌 문 안쪽에 홀로 남게되는 이들에게 제발 나만 혼자라는 두려움, 잊혀진다는 두려움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이다. 문은 확실히 열어두는 게 좋다.


 장르 소설을 즐겨 읽는다. 리뷰로도 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쓰는 속도는 읽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 읽은 책과 리뷰로 쓰는 책은 압도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다. 더하여, 내 기억력엔 한계가 있고, 마치 후발 주자들이 계속 골인 지점으로 뛰어들듯 몰려오는 책들에게 다시 또 기억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리뷰로 복기하지 않은 책들은 어느 샌가 가물가물 해져 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이란 데이터베이스도 꼬이게 된다. '미스터 홈즈'란 영화를 보라. 기억력 하면 최고라 자부하는 셜록조차, 나이가 드니 자랑하는 기억의 궁전이 마구 엉클어지지 않았던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더라. 한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와 함께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1박을 같은 방에서 하게 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할머니가 방 중앙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면서 자리에 눕는다. 그러고는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선을 넘어가 널 안고 싶은데, 나이가 드니 그 짓도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거 너무 졸려서...'


 교훈은 뭐든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미루지 말고 체력이 받쳐줄 때, 열심히 읽자. 여력이 남는다면 쓰기도 하자. 그렇게 미처 리뷰로 쓰지 못한 책들을 이 자리에서 살짝 언급해 본다.


 먼저, 켄 브루언의 '밤의 파수꾼'이다.

 올해 가장 최고의 책 을 선택 하라면, 나는 아직 반도 안 지났지만 이 책을 꼽고 싶다.

 원래 제목은 'THE GUARD'. 아일랜드 경찰을 뜻하는 말이다. 켄 브루언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작가다. 51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93년에 데뷔한 그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시리즈가 두 개나 있는 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을 제외하고 '런던 대로' 하나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콜린 파렐 주연의 영화로 만든다기에 그 바람을 타고 나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켄 브루언의 작품을 영영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와 그동안 켄 브루언의 소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해갈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그조차 영화가 망하고 소설 역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탓에 켄 브루언의 차기작 도래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게 201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불쑥 켄 브루언의 다른 책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자꾸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 하퍼 리의 '파수꾼'이 연상된다.) 언급을 자제하고 싶은데, 여하튼 '밤의 파수꾼'은 켄 브루언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책이다. 잭 테일러 라니, 주인공 이름을 막 지은 티가 난다. 이것만 봐도, 켄 브루언은 이 작품을 쓸 당시만 해도 여기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작가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이런 사실은 직접 읽어보기만 해도 확연히 다가온다. 소설은 하드보일드에 속한다. 그러나 탐정이 나오고, 의뢰를 받아 수사를 하는 것말고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드보일드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한 서사, 서스펜스 제로. 게다가 탐정은 신념과 활력 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의기 소침에 빠져들어 '도대체 수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하는 독자의 푸념을 절로 일으킨다. 때문에 소설은 재미를 더 치중하는 이들에겐 확실히 허들이 높다.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지?' 하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분위기, 실존적 고뇌 이런 것을 원한다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기꺼이 열게 만들 것이다. 여기엔 부조리한 고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이해하지도, 치유를 주지도 못하는, 왜소하고 무기력한 존재의 내면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문체와 캐릭터로 재현된다. 때로는 진한 블루스의 감성으로, 때로는 프리 재즈적인 감성으로 켄 브루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여기에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있다고.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나 혼자 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버틸 힘을 얻는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영혼의 이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잭 테일러는 당신의 이웃이다.


 다음은, 마에카와 유타카의 '크리피'



  '절규'를 끝으로 공포 영화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모처럼 다시 만드는 공포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현재 일본 호세이 대학 국제문화부 교수로 재직 중인 마에카와  유타카. 켄 브루언과 똑같이 51년 생이다. 물론 일본인. '크리피'는 7회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웃집 가장이 실은 겉보기와 전혀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데, 기요시가 공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서 공포물인 줄 알았지만 공포물은 아니었고 스릴러에 가까웠다. 읽은 느낌을 간단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그런 소설이 있다. 반전의 효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전의 설정과 이야기가 붕괴되는. '크리피'가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핍진성이 부족해 보인다. 범인도, 피해자도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작가 뜻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인물과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장르 소설일 경우 독자에게 "과연 이렇게 될까?" 하는 의문을 자꾸 가지게 하는 것은 실패작이라 생각한다. '크리피'는 그렇게 만든다. 혹시 나만 그렇게 보이나? 정녕 내가 프로불편러라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기요시 감독은 소설과 다른 형식을 취했다. 주인공의 입장이 바뀐 것인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구경꾼 역할이었다. 소설이 묘사하는 비극에 그는 간접적으로만 연루되었다. 하지만 기요시는 직접 당사자가 되도록 했다. 소설을 읽어본 결과, 나는 기요시의 입장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소설 초반에 묘사된 주인공의 불륜과 뒤이어 겪게 되는 사건의 의미가 전혀 맞물리지 않아, 도대체 왜 불륜이란 설정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기요시의 설정대로라면 불륜이 의미를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크리피'는 기요시가 자신의 공포 영화를 통해 꾸준히 천착해 왔던 것, '괴물이 나타났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라는 노선을 여전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화 '크리피'의 예습으로 읽어 본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가노 도모코, 일곱 가지 이야기.



 가노 도모코의 데뷔작이라고 하던가. 과연, 신인다운 풋풋함이 넘쳤던 작품이었다. 가노 도모코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인 '유리 기린'을 비롯하여 여러 권 소개된 것 같은데, 정작 읽어 본 것은 '손 안의 작은 새'밖에 없다. 그 역시, 차가운 미스터리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감성으로 풍부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가노 도모코의 이름은 내게 마쉬멜로 같은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는데, '일곱 가지 이야기'도 그랬다. 액자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일곱 가지 이야기'란 그림책이 중심인데, 그것을 읽고 이야기에 반한,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성이 작가에게 보내는 팬레터와 그에 대한 작가의 답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일을 편지에 적어 작가에게 보내면, 작가가 답장에서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때, 여성은 일상의 미스터리를 꼭 '일곱 가지 이야기'의 그림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와 결부시키므로, 그 내용이 소개되기도 하여 액자 소설 같아 보인다는 말을 참 시시콜콜 잘도 하고 있구나.

 어쨌든, 편하게 읽었다. 사소한 미스터리에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듯 진행되는 소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부담이 없어서 오히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사족처럼 붙여두는 나는 음흉한 사람이려나. 어쨌든 신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으면 일상 미스터리로써 괜찮은 축에 속한다. 신인만이 받을 수 있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받았다. 92년에.

 네, 92년 입니다. 90년대 초에 소설이 나왔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래서 소설엔 휴대폰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백과사전을 꺼내 봅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드디어, '종의 기원'이구나. 그래, 읽었다. 그것도 나오자마자. 양장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리뷰로 쓰지 않았다. 실망했거든. 안 좋은 점을 줄줄 쓰는 게 싫어서. 어쩌면 그래서 이 페이퍼를 쓰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팬심으로 하는 불만 토로의 장 비슷하게. 맞다. 이게 진짜 이유다.

 나는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28'도 읽었다. '종의 기원'에서 작가가 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려했다고 해서 혹시 전작과 비교해 보면 처음 읽었을 때에 든 실망감을 긍정으로 바꿀 소지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시간을 들여 재독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반전은 없었다.여전히 '종의 기원'은 읽은 것 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종의 기원'의 유진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그려내고 싶었던 악의 원점일 것이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악이라는 '어두운 숲'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했는데, 그것의 온전한 초상이 잘 잡히지 않아 '7년의 밤'의 오영제로, 또 '28'의 박동해로 다양하게 변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종의 기원'에서 악인의 진정한 기원이자 실체로서의 유진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내게는 성과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일단 인간 포식자로 설정된 유진조차 그 악행에 있어서는 '28'의 동해보다 떨어져 보인다. 아마도 정유정 작품 중 최고의 악인은 유진이 아니라 바로 이 동해라고 생각한다. 설령 포식자라는 살벌한 닉네임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28'을 읽을 땐 동해의 악행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얼른 심판 받기를 속으로 바랐다. 나의 이런 반응은 작가가 악의 묘사에 성공했다는 것의 증거다. 하지만 유진은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은 커녕 유진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소설 초반 자신의 살인을 모조리 잊었다. 팔에 엄마가 물어서 남긴 분명한 상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망각은 자신의 악행을 대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소설 장치로만 기능하는 것일까? 유진은 자신의 악행이 들통날 위기의 상황마다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도 못했고, 스스로에게마저 악행을 변명했으며,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가책에 빠지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로부터 포식자로 분류되어 집중 관리를 받아온 존재로서는 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미리 알고 관리를 해왔는데도 엄마와 이모는 정작 유진의 악행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대처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엄마는 유진의 첫 살인을 목격한 날에 유진을 다짜고짜 죽이려들고(이것은 과거에 유진 때문에 남편과 형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얼마나 다른가. 그 때도 엄마는 유진의 고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인간으로 만들려 한다. 너무 어려서 그랬나? 그렇게 오랜 세월 관리 했는데도 결국 살인자가 되었기에 절망해 버린 것인가? 그럼, 형의 대리자인 해진은? 입양한 아들이니까 관계없다고 생각했나? 엄마는 벌써부터 유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 그래서 동생에게 상담도 한 것 같은데 왜 해진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뒀을까? 솔직히 해진은 이 소설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다. 초반, 유진에게 살인이 들킬지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주는 것 말고는.), 이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유진을 감시하던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유진을 경계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내게는 어긋나 보였다.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마리오네트 같다고 여겨졌다. 작가가 원하는 자리로 무조건 가야 하는 존재들. 그렇게 보였다. 이야기가 확고하게 설정된 대로 흘러가도록 복무하는 것말고는 아무 역할이 없는 존재들. 그래서 이야기도 재미없었다.

 사실 '종의 기원'은 너무 늦게 나왔다. 우리는 악의 초상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정본으로써,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가 있고, 프레데터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내면을 헤아리고 싶으면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를 읽어도 된다.


 

거기서의 악은 유진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태연히 악을 저지른다. 망각도 회의도, 번민도,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 같은 존재는 그 어떤 연민의 개입도 없이 제거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악의 순수한 초상을 본다. 케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내 이성을 모조리 초월한 그 존재 앞에서 우리가 짓는 것은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 뿐이다.


 나는 '종의 기원'이 가진 근본적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종의 기원'은 작가 말대로 내 안에, 내가 몰랐던 어두운 숲을 내가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는 그런 악이 인간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자 역시 유진을 별개의 존재로 여기지 않도록 원해서 그렇게 구성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접근이 유진과 유진의 살인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깊은 어둠이 아니라, 우연의 상황이 초래한 개인의 특별한 비극으로 더 보도록 만든다. 유진이 그렇게 선명한 악도 아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할만큼 악랄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해는 그렇게 보였다. 유진은 포식자라기 보다는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다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두려워서 살인을 저지르는. 차라리 포식자 설정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조금은 유진을 납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쓰면서 정말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엄마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설정은 얼마나 쉽고도 그래서 조악한 장치인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이모와 해진은 또 어떤가? 그들의 무력함은 그대로 작가의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익은 결과물을 내기 보다는 좀 더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아쉬움이 더 커진다. '28'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현재 작가는 '7년의 밤'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서사의 정돈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28'은 이야기가 흘러 넘쳐 작가 자신조차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고, '종의 기원'은 이야기에서 작가가 어디에 자신의 포지션을 정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일반화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서사의 통제력을 키우고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잡는다면, 다시금 '7년의 밤'처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 원, 그냥 가볍게 그리고 적당한 길이로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진이 빠진다. 나조차도 이야기를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 꼴인데 감히 누구를 충고한단 말인가? 짧게 자조하고 길게 반성한다. 어쨌든 이것으로 채 리뷰로 옮기지 못한 책들에 대해 끄적이는 것을 마친다. 그래도 아직 좀 남았다. 그것은 다음에 또 정리하기로 하고(원래 종의 기원 때문에 쓴 것이라 과연 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000 GUN GUN(이런 표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을 지도. 웬 병맛?)...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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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6-3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의 기원 그냥 그랬는데,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니 제 머리속도 정리가 되는것 같아요.
`케빈에 대하여`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ICE-9 2016-06-30 21:16   좋아요 0 | URL
앗, 보슬비님, 말씀 감사드려요. `케빈에 대하여`는 정말 괜찮더군요. 저는 틸다 스윈튼이 엄마로 분한 영화도 봤는데, 그것도 잘 만들어졌어요. 유진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그러니까 괴물을 낳아버린 엄마의 처절한 현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눠져야 하는 책임으로 인한 고통 같은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16-07-0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걸
메리 쿠비카 지음, 김효정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제목은 '굿걸'. 작가는 '메리 쿠비카'. 미국 시카고 교외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라는 것말고는 별다른 이력이 없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다. 어쩐지, 비슷하게 작가가 되었던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메리 쿠비카 역시 기리노 나쓰오처럼 굉장한 작가로 성장할 여지는 충분한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얘기인데 이리 사설이 길어?'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바로 이야기의 소개로 넘어가 보자면,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가을. 이브 데닛은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걸어 온 사람은 자신의 둘째 딸 미아가 교사로 일하는 학교의 동료. 미아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미아가 그대로 미아(迷兒)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재 개그 해서 미안. 형사 게이브 호프만이 미아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이브의 집으로 파견된다. 이브의 남편은 시카고에서 이름 높은 판사 제임스.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이름은 그레이스로, 현재 변호사로 일한다. 남편과 언니는 둘 다 안하무인. '부전여전'의 뜻을 알고 싶다면 이 둘을 보면 될 것 같다. 덕분에 미아는 자주 소외되었다. 그레이스와 달리 미아는 아버지 뜻을 자주 거슬렀다. 아버지와 미아가 결정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미아의 장래. 아버지는 미아가 자신을 따라 법조계에 투신하기를 원했으나, 미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하길 원했다. 미아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미아는 제임스가 군림하는 가족에게 'Bad Girl'이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아는 사라진 것이다.



 이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가? 언뜻 그동안 허다하게 나온 실종 관련 미스터리들이 그랬듯이, 그녀를 실종으로 만든 범인이 있고, 가족은 지옥의 고통으로 빠져들며, 형사들은 온갖 단서를 모아 범인 추적에 나서고, 그런 와중에 범인과 가족 그리고 형사 사이에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펼쳐지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메리 쿠비카는 그런 우리들의 기대를 단번에 저버린다. 소설이 시작한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러니까 불과 24 페이지에서 느닷없이 미아가 납치되었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밝히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으로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들었던 그런 이야기는 아니며, 자신은 이런 장르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선언한다. 그대로 미아는 돌아왔는데 미아는 아니다. 본인은 납치 당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미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며, 자신의 이름은 클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미아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 주장한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는 이제 범인의 정체나 실종자의 생사 여부 등, 비슷한 장르 소설에서 중점을 두고 읽었던 것과는 다른 초점(바로 그 질문!)으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을 종용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미아가 클로이라고 주장한 뒤에 바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도 바로 범인의 시점으로.


 시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은 세 명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바로 미아의 어머니인 이브의 시점, 그리고 형사 게이브의 시점, 마지막으로 범인 콜린의 시점이다. 이렇게 분산된 시점은 소설의 흥미를 위해서가 아니다. 실은 다양한 시점으로 현재 미국의 가족을 임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굿걸'은 최근 길리언 플린 이후로 더욱 주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Domestic Noir'다.


 Domestic Noir에서 범죄는 여타의 범죄 소설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범죄는 사회가 범죄로 잃어버린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지속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평온을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깊이 은폐하고 있었던 부정(不正)이 비로소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통로다. 범죄는 가면으로 가리워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며, 그렇게 밝혀진 민낯의 직시(直視)를 통해 현상된 부정의 온전한 대면으로써 제대로 된 대안을 찾도록 이끄는, 그것을 위해 범죄 스스로는 해결로 소거되어야 하기에, 한 마디로 '사라지는 매개자'다. 동시에 드러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더 두터운 진흙을 발라 다시 가리기에 급급한 지금까지의 사회적 대처에 일침을 놓는 존재다. '굿걸'의 범죄 역시 그러하다.


 그런 범죄의 의미를 필터로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 정말 '굿걸'인가?'를 묻는다. 보통 '굿걸'은 어른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에게 썼다. 달리 말하면,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아무런 저항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바로 '굿걸'이었다. 소설에서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물론 아버지 제임스로 대표된다.(그러므로 진정한 굿걸은 아버지와 꼭 닮은 존재가 되어버린 그레이스라 하겠다.) 이 소설은 가부장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군림하는 가족 안에서 그의 권위와 질서를 따르지 않는 여성이 당하는 고통을 세 명의 시점으로 임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Domestic Noir 이자 여성주의(페미니즘) 소설이다. 세 명이 서 있는 자리가 의미심장하다. 이브는 과거의 굿걸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타고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기 보다는 그 미모를 이용해 남성 질서에 깊이 종속되길 원했다. 부와 안정을 누리기 위하여. 그녀는 어머니로서, 미아가 아버지에게 당하는 고통을 목격하지만, 너무나 종속되어 이제 독립하는 것마저 두려워진 그녀는 미아의 고통을 모른 척 했다. 그런 이브에게 미아의 실종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브는 남자지만, 공감 능력이 탁월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용의자 콜린의 모친을 만날 때 한껏 증명된다. 콜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간 것이었지만, 병환이 위중한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요양소로 데려간다. 콜린의 거처가 알려져 콜린이 경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게이브는 콜린을 살리려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것은 제임스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제임스는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친딸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게이브는 설령 자신이 잡아야 할 용의자라 해도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을 멈추지는 않았다. 게이브와 이브가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콜린은 제임스 같은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콜린은 미아와 같았다. 콜린은 미아를 아무도 모르는 숲 속의 오두막으로 데려가는데, 그 곳은 제임스가 대변하는 남성 중심의 질서로 부터 독립된 영토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이 찍고자 하는 방점이 소외가 아니라 독립에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독립의 영토에서 진정한 유대는 이뤄지고 결국 그들을 내몬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전복된다. 이렇게, 이브와 게이브 그리고 콜린은 제임스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 하거나 한 존재들이었다. 오로지 그들의 시선만이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 모든 것이 가장 먼저 제임스의 세계에 도전한 미아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게 이 소설, '굿걸'은 아직까지 여성 차별만큼 끈질기게 잔존하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직시와 성찰을 촉구한다. 결코 재미로만 흘려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감히 추천할만한 좋은 소설이라 생각한다. Domestic Noir 라는 범주가 생겼을만큼 최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런 취지의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가부장적 질서의 문제점을 깨닫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한다. 좋은 현상이다. 보다 많은 작품들이 나와서 위기를 넘어 붕괴마저 초래했으면 좋겠다. 종속과 그것의 연장으로써 타자에 대한 혐오로 존속하는 '굿걸'이 아니라, 독립과 그것이 바탕이 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로 공존하는 '굿걸'이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그것도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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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도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1
신시은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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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표지가 인상적이라 읽게 된 소설. 신시은 작가의 '해무도'다.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를 보니 놀랍게도 94년생. 현재 나이 23. 나중에 알았는데, 스무 살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것도 장편. 헐! 잠깐 나는 그 나이 때 뭘했더라 생각한다. 술과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누군가는 세상에 내놓을 한 권의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작고한 콘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이 떠오른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소년의 밝고 맑은 에너지로 가득했던 애니메이션. 거기에, 학업도 포기하고 남들은 놀기 바쁜 여름방학마저 온전히 소설 쓰기에 바친 여자 아이가 있었다(그녀가 쓴 소설은 나중에 '고양이의 보은'이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은 츠키시마 시즈쿠. 그리고 일찌감치 바이올린 장인이 되기로 결정하고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는 타카하시 잇세이. 아직 뭘해야 될 지 모를 시기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라 일찍 자신의 꿈을 확정하고 일직선으로 달려나가는 이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 동경을 내내 '컨츄리 로드~'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대신했었지. 하는 리뷰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시즈쿠와 이 소설의 작가 신시은이 겹쳐보인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해무도'는 표지만 보면 호러 필(feel)이 난다. 사실 그렇다. 프롤로그부터 해무가 끼면 사람을 데리고 가는 귀신 노파가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례식. 주인공이 되는 현직 교수인 치수는 자신의 스승인 정교수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20년 전 정교수가 살았던 섬에서 겪은 살인 사건을 떠올린다. 그 섬이 바로 '해무도'다. 두 사람이 죽었는데, 섬 사람들은 다들 귀신 노파 짓이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도 그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너무나 공포스러웠던 기억인지라 치수는 그 섬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정교수의 장례식장. 그의 유일한 혈육인 두 딸이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시신이 머리가 사라진다. 몸은 그대로 놔두고 머리만 없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 주연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아버지 죽음을 두고 해무의 짓이라고 말했다. 이제 머리가 사라지자 그 심증이 더욱 굳어진 동생은 분명 머리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곳인 해무도로 갔을 것이라고 하면서 섬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무서웠던 언니 주경마저 주연과 함께 해무도로 가게 된다.


 치수는 섬의 선착장에서 20년 전 같이 살인 사건을 겪은 선장을 만난다. 그는 치수에게 내내 귀신의 짓이라면서 돌아가라고 종용한다. 그래도 기어이 가려는 치수에게, 선착장에서 정교수의 집까지 가려면 중앙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자정에는 절대 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귀신에게 죽는다면서. 그래도 치수가 말을 듣지 않자(원 이 사람 고집도 참~), 산길을 잘 아는(정해진 루트로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을 길잡이로 붙여준다. 소설 전반부의 이야기는 치수와 선장 아들의 산을 넘는 이야기가 차지한다. 아들은 계속 겁을 주고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런 길을 안내 하겠다고 나선 선장 아들이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를 무렵,


 주경과 주연이 섬에 도착한다. 아버지 시신이 사라졌다며 얼른 자신의 집으로 가야한다는 이들의 말에 선장은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아들이 치수와 산으로 떠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 슬슬 걱정이 되던 참의 선장은 자신의 배로 가자고 말한다. 알고 보니, 정교수의 집으로 가는 루트는 산길말고 물길도 가능했던 것. '아니, 이런 길이 있었으면 진작 이리도 데려다 줘야 하는 것 아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을 사지로 내몰다니, 선장, 당신은 잔인한 아버지로세.' 이런 생각이 자막처럼 소설 장면 아래로 지나간다.


 어쨌든 이들은 정교수의 집에서 만난다. 치수는 정교수 집에 오고나서야 장례식장이 그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 다시 하게 되는 헐~! '아니, 전화로 장례식장이 어딘지도 안 알려준단 말이야?' 하는 한편, '치수 이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그 무서운 곳으로 바로 직행할 생각을 한 거야?'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거듭 어쨌든, 호러 아닌가?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세계다. 납득을 강요한다. 지금까지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은 더 이 세계에 빠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람을 들어주듯, 사랑채 가장 안쪽의 방에 있는 침대 위에서 정교수의 머리가 발견된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누군가 남겨 놓은 글이 예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는 살인 또 살인. 그것도 밀실에서. 선장은 이것이 이 집에 얽힌 귀신 노파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면서 20년 전 사건도 그것과 관련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과연 정교수의 머리와 뒤이은 연속 살인은 귀신 노파의 짓인가? 아니면 그것을 가장한 사람의 짓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치수는 뜻하지 않게 탐정의 역할을 맡게 된다.


 줄거리 소개가 너무 길었다. 소설은 이렇게 괴기와 미스터리가 혼합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소설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일본의 국민 탐정이라 할 만한 긴다이치 코스케가 데뷔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 이다. 그것도 괴기로 잘 가다, 밀실 미스터리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해무도'도 유사하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혼진 살인사건'은 미스터리 사건의 무대로 일본 전통 가옥을 가져왔는데,  '해무도'도 우리나라 전통 가옥인 한옥을 미스터리의 중심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진 살인사건'처럼 공간 자체의 구조를 트릭의 장치로 이용하지는 않고 다른 것을 사용했다(무엇인지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는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다른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트릭 자체가 어쩐지 좀 반칙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왕 아쉬운 점을 말한 김에 하나 더 부언해 본다. 앞에서 너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는 바람에 결말이 과도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부분의 한껏 고조된 공포스런 분위기 때문에 결말이 더 맥빠지게 느껴진다는 말이다.(그럼, 앞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하실 것 같다. 하하...) 그래도 흡인력 하나만은 높이쳐 줄 만하다. 어쨌든 약관의 나이에 이만한 작품을 쓰는 것도 대단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작가 오즈 이치는 십대 때 데뷔 했다지. 신시은 작가도 오즈 이치처럼 우리 나라 장르 소설계를 든든히 바쳐 줄 등뼈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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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
나카지마 교코 지음, 승미 옮김 / 예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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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지마 교코의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를 읽었습니다.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가족의 가장 류타로 입장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그는 70대의 전직 치과 의사로,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아내 하루코와 함께 느긋하게 노후를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근심거리가 하나 있는데요. 그건 바로 막내이자 장남인 가쓰로 입니다. 가쓰로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른인 지금까지 내내 방에만 칩거하고 있는, 흔히 말하는 히키코모리 입니다. 류타로는 그런 가쓰로를 자기 인생의 오점이라 여기고 있지요. 늘 생각하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집에서 내쫓고 싶다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가쓰로와 얼굴을 마주하면 그 말이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내일은, 내일은...' 하면서 뒤로 미루기만 하고 있지요. 그러나 곧 그것마저 약과에 불과한 상황이 류타로에게 닥쳐오고 맙니다. 가쓰로의 두 누나들이, 그러니까 출가시켰던 그 딸들이 갑자기 모조리 이제 집에서 살겠다면서 들어온 것입니다. 첫째 딸, 이쓰코는 남편의 사업이 망했어요. 그래서 모든 걸 잃었고 가족 모두가 갈 곳이라는고는 아버지 집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둘째 도모에는 이혼을 했습니다. 그토록 아이를 가지려 노력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부부 사이도 소원해진지 오래여서 그만 20살의 개그맨과 잠깐 바람을 폈는데 그것이 결국 이혼으로 이어지고만 거죠. 도모에는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해버렸는데요. 남편과는 그렇게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잠깐의 외로움을 달래려 만났던 남자와는 단번에 생겨버렸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하지만 진짜 아이러니는 류타로와 하루코입니다. 이제 좀 자녀 부양에서 벗어나 그동안 못했던 것을 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는데 느닷없이 다시 또 자식들에게 치이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것을 대변하듯, 부부의 침실까지 자식들에게 내어줬습니다.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의 조용한 일상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집안 내 사람들이 늘어난만큼 그들이 만들어내는 바람으로 류타로와 하루코의 일상은 정말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으니까. 류타로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이탈리아어, 'Troppo tardi'의 뜻처럼, 그가 바라는 노후를 즐기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죠.


 소설은 2008년에 나왔습니다. 2007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참 어려웠던 시기에 쓰여진 소설인 것입니다. 당시 일본엔 류타로 가족처럼 갑자기 당하게 된 파산, 주거지와 늘어난 생활비의 압박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걸 일본에서는 '불황형 대가족'이라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바로 그런 상황을 소설은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다 대가족'은 한 시대의 단면을 그린 세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네요. 라고 했지만, 이것은 100% 제 창작. 원래는 편집부가 나카지마 교코에게 대가족 이야기를 하나 주문해서, 현대 일본에서 대가족이 생길 만한 상황을 상정하다 보니 이렇게 쓰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역자 후기에서.


 그럼,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뚜렷한 경향은 1인 가구의 증가 입니다. 지금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7% 정도 된다고 해요. 2020년에는 무려 30%에 육박하게 될 것이란 예측도 있더군요. 지금 젊은 세대가 스스로 '오포세대'라고 한다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죠. 하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이것마저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합니다. 소득 대비 주거 비용이 계속 치솟고 있는 데다, 물가 대비 소득 격감으로 아무래도 독립에 따르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어쩌겠어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죠, 뭐. '캥거루 가족'은 부모의 자식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라, 이렇게 점점 더 암흑의 핵심 가까이 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이 가져온 결과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읽으니 결코 남의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더군요. 저야 물론, 현재는 독립 유지 상태 입니다만 앞으로도 죽 그렇게 되리라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죠. 인생엔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반전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 집은 어떨까 상상하니 조금은 더 소설 속 상황에 몰입하게 되더군요.


 류타로 가족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암담 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지마 교코는 이전에 우리나라에 나온 나오키 수상작 '작은 집'이 그랬듯이 소설의 분위기를 전혀 어둡게 몰고 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밝고 긍정적으로 그리죠. 특히 히키코모리 가쓰로(이름이 비슷해서 자꾸 '가쓰오'로 치게 되네요. 여름이라서 다행이에요. 늦가을이나 겨울에 읽었다면 계속 가쓰오 우동이 먹고싶어졌을테니)의 로맨스는 오돌뼈마저 오들오들할 정도였어요.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겉모습으로는 류타로 부부가 자식 복이 없어 말년에 고생하는 것 같지만 실상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특별히 나쁜 사람도 없고, 다들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척척 잘 헤쳐 나가는 타입(type)입니다. 류타로가 가장 오점이라 여기는 가쓰로 조차 그래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자기 앞길을 잘 닦아나가고 있지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가족 중에서 가장 착실하게 노후 대비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그러니 류타로의 근심은 근거가 없고, 이런 면에서 소설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믿어주는 것이겠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가능성을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그들도 자신의 삶의 어엿한 주체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 뭐, 지극히 짧은 제 소견으론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부디 제가 집으로 귀환할 때도 제 부모님이 이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책 싸들고 나가라면 심히 난감할 것 같습니다. 이사할 때, 사다리차도 도망가는 책 짐이라.


 어쨌든 나카지마 교코 특유의 소란 가운데 평정, '풍파 중심에서 웃다'가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부담없이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죠. 가족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이 주는 덤이구요. 요즘은 '어쩌다'라는 말이 유행이더군요. 내가 상대하는 세계가 너무 커져버렸고, 그것에 휩쓸리다 보니 준비도 없이, 대책도 없이 지금의 상황에 맞딱드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세상 일이든, 가족 일이든 예습해 보는 것처럼 필요한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굳이 읽어야 할 이유를 대라고 하신다면, 그런 예습을 하는데 마춤한 책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캥거루 가족이 이제 곧 보편이 될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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