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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걸
메리 쿠비카 지음, 김효정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제목은 '굿걸'. 작가는 '메리 쿠비카'. 미국 시카고 교외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라는 것말고는 별다른 이력이 없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다. 어쩐지, 비슷하게 작가가 되었던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메리 쿠비카 역시 기리노 나쓰오처럼 굉장한 작가로 성장할 여지는 충분한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얘기인데 이리 사설이 길어?'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바로 이야기의 소개로 넘어가 보자면,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가을. 이브 데닛은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걸어 온 사람은 자신의 둘째 딸 미아가 교사로 일하는 학교의 동료. 미아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미아가 그대로 미아(迷兒)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재 개그 해서 미안. 형사 게이브 호프만이 미아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이브의 집으로 파견된다. 이브의 남편은 시카고에서 이름 높은 판사 제임스.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이름은 그레이스로, 현재 변호사로 일한다. 남편과 언니는 둘 다 안하무인. '부전여전'의 뜻을 알고 싶다면 이 둘을 보면 될 것 같다. 덕분에 미아는 자주 소외되었다. 그레이스와 달리 미아는 아버지 뜻을 자주 거슬렀다. 아버지와 미아가 결정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미아의 장래. 아버지는 미아가 자신을 따라 법조계에 투신하기를 원했으나, 미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하길 원했다. 미아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미아는 제임스가 군림하는 가족에게 'Bad Girl'이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아는 사라진 것이다.
이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가? 언뜻 그동안 허다하게 나온 실종 관련 미스터리들이 그랬듯이, 그녀를 실종으로 만든 범인이 있고, 가족은 지옥의 고통으로 빠져들며, 형사들은 온갖 단서를 모아 범인 추적에 나서고, 그런 와중에 범인과 가족 그리고 형사 사이에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펼쳐지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메리 쿠비카는 그런 우리들의 기대를 단번에 저버린다. 소설이 시작한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러니까 불과 24 페이지에서 느닷없이 미아가 납치되었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밝히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으로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들었던 그런 이야기는 아니며, 자신은 이런 장르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선언한다. 그대로 미아는 돌아왔는데 미아는 아니다. 본인은 납치 당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미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며, 자신의 이름은 클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미아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 주장한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는 이제 범인의 정체나 실종자의 생사 여부 등, 비슷한 장르 소설에서 중점을 두고 읽었던 것과는 다른 초점(바로 그 질문!)으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을 종용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미아가 클로이라고 주장한 뒤에 바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도 바로 범인의 시점으로.
시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은 세 명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바로 미아의 어머니인 이브의 시점, 그리고 형사 게이브의 시점, 마지막으로 범인 콜린의 시점이다. 이렇게 분산된 시점은 소설의 흥미를 위해서가 아니다. 실은 다양한 시점으로 현재 미국의 가족을 임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굿걸'은 최근 길리언 플린 이후로 더욱 주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Domestic Noir'다.
Domestic Noir에서 범죄는 여타의 범죄 소설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범죄는 사회가 범죄로 잃어버린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지속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평온을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깊이 은폐하고 있었던 부정(不正)이 비로소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통로다. 범죄는 가면으로 가리워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며, 그렇게 밝혀진 민낯의 직시(直視)를 통해 현상된 부정의 온전한 대면으로써 제대로 된 대안을 찾도록 이끄는, 그것을 위해 범죄 스스로는 해결로 소거되어야 하기에, 한 마디로 '사라지는 매개자'다. 동시에 드러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더 두터운 진흙을 발라 다시 가리기에 급급한 지금까지의 사회적 대처에 일침을 놓는 존재다. '굿걸'의 범죄 역시 그러하다.
그런 범죄의 의미를 필터로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 정말 '굿걸'인가?'를 묻는다. 보통 '굿걸'은 어른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에게 썼다. 달리 말하면,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아무런 저항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바로 '굿걸'이었다. 소설에서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물론 아버지 제임스로 대표된다.(그러므로 진정한 굿걸은 아버지와 꼭 닮은 존재가 되어버린 그레이스라 하겠다.) 이 소설은 가부장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군림하는 가족 안에서 그의 권위와 질서를 따르지 않는 여성이 당하는 고통을 세 명의 시점으로 임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Domestic Noir 이자 여성주의(페미니즘) 소설이다. 세 명이 서 있는 자리가 의미심장하다. 이브는 과거의 굿걸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타고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기 보다는 그 미모를 이용해 남성 질서에 깊이 종속되길 원했다. 부와 안정을 누리기 위하여. 그녀는 어머니로서, 미아가 아버지에게 당하는 고통을 목격하지만, 너무나 종속되어 이제 독립하는 것마저 두려워진 그녀는 미아의 고통을 모른 척 했다. 그런 이브에게 미아의 실종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브는 남자지만, 공감 능력이 탁월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용의자 콜린의 모친을 만날 때 한껏 증명된다. 콜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간 것이었지만, 병환이 위중한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요양소로 데려간다. 콜린의 거처가 알려져 콜린이 경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게이브는 콜린을 살리려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것은 제임스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제임스는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친딸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게이브는 설령 자신이 잡아야 할 용의자라 해도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을 멈추지는 않았다. 게이브와 이브가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콜린은 제임스 같은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콜린은 미아와 같았다. 콜린은 미아를 아무도 모르는 숲 속의 오두막으로 데려가는데, 그 곳은 제임스가 대변하는 남성 중심의 질서로 부터 독립된 영토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이 찍고자 하는 방점이 소외가 아니라 독립에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독립의 영토에서 진정한 유대는 이뤄지고 결국 그들을 내몬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전복된다. 이렇게, 이브와 게이브 그리고 콜린은 제임스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 하거나 한 존재들이었다. 오로지 그들의 시선만이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 모든 것이 가장 먼저 제임스의 세계에 도전한 미아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게 이 소설, '굿걸'은 아직까지 여성 차별만큼 끈질기게 잔존하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직시와 성찰을 촉구한다. 결코 재미로만 흘려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감히 추천할만한 좋은 소설이라 생각한다. Domestic Noir 라는 범주가 생겼을만큼 최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런 취지의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가부장적 질서의 문제점을 깨닫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한다. 좋은 현상이다. 보다 많은 작품들이 나와서 위기를 넘어 붕괴마저 초래했으면 좋겠다. 종속과 그것의 연장으로써 타자에 대한 혐오로 존속하는 '굿걸'이 아니라, 독립과 그것이 바탕이 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로 공존하는 '굿걸'이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그것도 얼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