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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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서 한 결혼도 행복하지 않았어.' 예전에 방영한 드라마 '불새'에서 이서진이 분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유하 감독의 데뷔작 영화의 제목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다. 소세키도 '문'에 나온 주인공 부부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다. 사랑 때문에 남자는 친구를, 여자는 애인을 배신하면서까지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을 뿐만아니라 배신당한 사내가 언제 보복해 올지 몰라 불안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결혼은 정말 유하의 제목처럼 미친 짓이었다는 것을 '문'은 여실히 알게 해 주었다. 

 이후에 나온 '행인'은 그 정도를 더 심하게 몰고 간다. '행인'의 주인공은 지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는 소설 속에서 그의 형 부부를 비롯해 많은 부부를 만난다. 마치 이 부부에서 저 부부로 여행하는 로드무비 같다. 그래서 제목도 쏘다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행인(行人)인가 보다. 부부가 주역(主役)이었던 전작 '문'만큼 단촐한 제목이다. 문은 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소설에서 문은 주인공 소스케에게 열리지 않았다. 종교에 귀의까지 하면서 구원을 찾았건만 그가 바란 구원은 끝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행인은 머무르기 위해 걷는 존재이지만, 이 소설에서 머무름은 허락되지 않는다. 똑같이, 지로는 참 많은 부부를 만나지만 다들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한 부부는 아이가 없어 허전하고, 다른 한 부부는 남편의 마음에 들려고 너무 애쓴 나머지 그것이 과도한 심적 부담이 되어 미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한 부부는 사랑할수록 고독과 불신만 깊어가 결국 죽음을 원하게 된다. 소설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살짝 인용하고 있는데, 지로의 여정도 그와 같다. 단테가 내려갈수록 더 끔찍한 지옥을 보게 되었듯이, 지로 또한 갈수록 사랑이 지옥이 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이다. '행인'은 그런 소설이다. 사랑을 해도 고독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은 남도 가두고 자신도 가두는 굴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느끼게 하는 소설.



 알려진 대로, '행인'은 소세키의 자전적 체험이 바탕 되었다. 그는 형수를 흠모했고, 소설에서 형이 지로에게 형수를 유혹해달라고 하는 부탁은 소세키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그의 결혼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영국 유학 시절, 아내가 있어도 고독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절히 체험했다. 그래서 소세키는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너와 나는.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일치할 수가 없어, 너와 나는.

 너는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

 나도 자신의 세계에 만족해.


  아무리 사랑해도 그녀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고독의 운명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결혼은 그에게 이런 것을 남겼다. 그것은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왜? 소세키는 대답한다. '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한 자는 결코 타인에게도 성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p. 375)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번뇌'다. 사랑은 결국 번뇌에 이른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번뇌는 이제 광기가 되어 간다. 형은 차츰 1장에 나왔던, 사랑을 아무리 해도 상대에게 이를 수 없어 결국 미쳐버린 여인처럼 되어간다. 그는 말한다.


 죽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종교에 입문하거나, 내 앞에는 이 세 가지 길 밖에는 없네.(...) 하지만 종교에는 아무래도 입문할 수 없을 것 같네. 죽는 것도 미련에 막힐 것 같고, 그렇다면 미치광이지. 그런데 미래의 나는 그만두고, 현재의 나는 제정신일까? 진작에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난 무서워 견딜 수가 없네.(p. 381)


 '행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타인에게 가 닿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끝까지 답사한다. 그러나 종착지는 없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고뇌할 뿐이다. 형수는 독신인 지로를 부러워한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울적한 어투로 "남자는 참 홀가분하네요." 하고 말했다.

 "전혀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싫어지면 어디든지 멋대로 날아갈 수 있잖아요." (p. 297)


 결국 사랑할수록 깊어지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진정 자유롭게 되는 길은 사랑을 그치는 것밖에는 없다. 자신에게 성실하다는 것의 의미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타인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자신의 고독에 충실해지는 것. 유폐된 자신의 내면으로 계속 침잠하는 것. 수영장의 수면 아래로 고요히 가라앉는 것처럼. 문득 하루키의 소설들이 생각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여자 없는 남자들'. 온갖 홀로의 내면 속으로 유폐되는 소설들이. 하루키는 건강한 고독이 타인과의 연대도 강고히 할 것이라 내다봤다. 쓰쿠르가 설계했던 역(驛)처럼. 소세키가 추구하는 것도 이것이 아닐까? 형의 입을 통해 말했던 향엄 스님이 보여주듯이.


 "이제 포기했다. 앞으로는 그저 죽이나 먹으며 살자."

 이렇게 말한 스님은 그 후 선(禪)의 'ㅅ'자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네. 선(善)도 버리고 악도 버리고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모습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말았지.(p. 408)


 모든 것을 버려라. 소세키는 되뇐다. 가 닿으려는 마음을 멈춰라. 행인이 되어라. 행인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행인은 어디에 머물기 위해 걷는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걷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과정에 온전히 충실해질 때, 그가 있을 목적지는 비로소 열린다. 아니, 스스로 정한다. 더이상 그는 어디에 가 깃들지 않는다. 그 자신이 깊은  뿌리가 되고, 넓은 가지가 되어 다른 이들을 깃들게 할 것이다. '행인'은 이것을 보여주는 여정이다. 그렇게 소세키는 백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하루키와 만난다. 고독의 참된 힘을 아는 소중한 동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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