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 지음, 박재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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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반윙클의 신부'는 영화 감독으로 더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소설이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은 참 많이 봤는데, 소설은 처음이다. 결국 이 소설도 슌지의 손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의 언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 지 궁금하다. 일단 이야기는 22살의 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름은 나니가와 미나미. 그녀를 단적으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선택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녀는 항상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거기에 떠밀리듯 삶을 살아온 존재다. 그래서 끝내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




 시작부터 그랬다. 처음은 미나미가 22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지만, 그 연애 역시 자신이 정말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22살까지 남자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초조해진 나머지 그만 SNS로 섣불리 데이트 약속을 하고 그러다 첫만남에 바로 연애까지 이어져버린 경우였다. 그녀는 사실 남자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남자가 연출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또 다른 자아를 나타내는 SNS의 다른 계정, 클램본은 이런 말을 남긴다.


 맞선 사이트에서 남자 친구를 발견했다.

 어쩐지 너무나도 쉽게 손에 넣었다.

 인터넷 쇼핑을 하듯이 간단히 한 번의 클릭으로.

 정말 이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도 되는 걸까?

 그 남자도 나를 손쉽게 손에 넣은 여자라고 생각할까? (p. 15)


 그녀의 삶은 내내 이렇다. 편승과 남들에게 조언 구하기의 무한 루프(loop)다. 파견제 교사인 그녀가 고작 교실에서 마이크로, 그것도 학생들이 요청해서 딱 한 번 수업했다는 사실로 학교에서 짤릴 때도 그랬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도 그랬다. 자신의 부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는 사실을 남자 친구에게 숨길 때도 그랬으며 결혼식장에 미나미가 초대할 손님이 많이 부족하자 신랑을 속이고 하객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그랬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의심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그랬고, 남편이 자신의 여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면서 낯선 남자가 찾아왔는데 그 사실을 숨기는 것에만 급급해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닥쳐 온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등 뒤로 피하려고만 했었다.


 어쩌면 그녀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삶의 발을 거는 어려움 앞에서 정면 승부 보다는 나 아닌 뭔가에 무임 승차 하여 넘어가기를 더 많이 바라는 편이니까. 그런 우리기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럴수록 더 커다란 어려움만 닥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미나미 역시 그렇다. 등 뒤로 피하면 피할수록 그녀에게 닥쳐오는 것은 더 춥고 어두운 혹한의 칼바람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에서 미나미를 '립반윙클의 신부'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립반윙클은 마지막에 미나미가 만나는 여배우 마시로의 SNS 닉네임이지만, 실제로 둘이 같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침대에 나란히 잠이 들기도 하지만, '립반윙클'이 정말 뜻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원래 '립반윙클'은 워싱턴 어빙이 쓴 단편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사냥을 떠났다가 우연히 만난 유령들의 술을 훔쳐 먹고는 20년을 자버린 사내. 그가 바로 립반윙클이다. 그는 잠으로 시간을 잃어버린 자다. 잠은 그대로 주체가 활동을 정지한 시간, 즉 주체가 주체로 있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 잠 속에서 립반윙클의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그저 고여서 썩고 결국은 부스러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시간. 계속 흐르긴 하나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 바로 한결같이 남에게 선택을 맡겼던 미나미의 시간과 똑같다. 그래서 미나미는 '립반윙클의 신부'인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들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하나는 '아무로'(닉네임으로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의 이름인, 그 '아무로' 맞다.) 다른 하나는 마시로다. 미나미와는 반대로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한 주체로서 영위하려는 존재들이다. 아무로는 돈만 내면 어떤 일이든지 다 처리해 준다. 그 어떤 의뢰든지 피하지 않고 맡아서 해낸다는 점에서 아무로는 미나미와 너무나 대조된다. 마시로도 그러하다. 그녀는 미나미보다 훨씬 더 어둡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일지라도 남에게 의탁하지 않으며 최후의 한 순간까지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살아내려 애쓴다. 사실 미나미는 이런 존재들의 생생한 존재감 때문에 변하는 것이다.


 사실 마시로는 소설 앞부분에 미나미가 우연히 만난 대학 동창 니타도리와 연장선 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미나미에게 스스로 AV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마시로는 현역 AV 배우다.) 그 때 미나미는 고백하면서 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위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동화를 떠올린다.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던 빨간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릴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들은 오지 않고 계속 침울해져만 가는 빨간 도깨비를 위해 스스로 나쁜 짓을 하여 상대적으로 빨간 도깨비의 좋은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 결국 사람들과 친해지게 만드는 이는 파란 도깨비다. 한 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수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길 기다리는 빨간 도깨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의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파란 도깨비가 있다. 소설에는 그렇게 빨간 도깨비와 같은 존재와 파란 도깨비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미나미와 그녀에게 인터넷 과외를 받는 유일한 학생인 카논이 빨간 도깨비고, 아무로와 마시로 그리고 니타도리는 파란 도깨비다. 젊은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해 버린 미나미의 엄마도 파란 도깨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인생의 모습을 선택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면에서 보자면 카논은 빨간 도깨비인 미나미의 자아를 인격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카논은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존재다. 오직 화상으로 만나는 미나미만이 그녀를 자신의 바깥 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접점이다. 그런 카논은 미나미가 시키는 것을 묵묵히 하며, 모르는 것은 늘 미나미에게 질문한다.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모르는 것을 스스로 찾아 볼 생각을 않는다는 점에서 카논은 미나미의 판박이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 끝까지 작은 화상 안에서만 존재한다. 마치 미나미 의식의 크기와도 같이. 사실은 미나미가 그 화상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나미가 진정한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단한 순간, 카논 역시 도쿄로 가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더욱 카논을 미나미의 자아로 보도록 만든다.


 과연 어떤 도깨비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

 그것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시 파란 도깨비가 더 좋아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여기 마시로가 소설에서 직접 밝힌 팁을 공개하려 한다. 읽다보면 왠지 울컥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 따위를 위해서. 그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 준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꽉 조여 오면서 괴로워져서 울고 싶어져. 나에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찾아와. 그 한계가 개미보다 작아.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지. 비 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 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p. 266)


 이게 어째서 팁이야? 하고 묻는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엄마의 바람으로 너무나 쉽게 붕괴되어버리는 미나미의 가족과 그녀가 하객 아르바이트로 일원이 된 한 신랑의 가짜 가족이 보여주는 차이를 생각한다면 더욱 잘 느껴지지 않을까 한다.


 대가로 지불하는 돈은 정말로 타인의 기대에 아낌없이 부응하려는 그들의 친절과 노력이 그러지 못하는 내게 너무나 부끄러움으로 다가와 그런 나를 방어하기 위해 '그저 그들은 돈을 위해 저러는 것 뿐이야'로 쉽게 무마해 보려는 저의의 표현일 지도 모른다. 정녕 내가 부서질 지라도 그들의 친절과 노력에 순수하게 감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대가도 제대로 지불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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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10-1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이야기 봤어요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사람들은 빨간 도깨비를 무서워해요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빨간 도깨비한테 자신이 사람을 괴롭히는 척할 때 자신을 멀리 쫓아내는 척하라고 하죠 그 일이 있은 뒤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요 하지만 파란 도깨비는 멀리 떠나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 친구 하나와 친하게 지내기, 빨간 도깨비는 둘에서 하나만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지도 몰라요 그걸 알았다면 파란 도깨비가 꾸민 계획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행복하다면 괜찮다 생각한 거기도 합니다 이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만든 대로 살고, 누군가는 자기 뜻대로 산다고 볼 수도 있다니... 그냥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만 보고 싶기도 하네요

사람은 겉만 보고 빨간 도깨비가 무서울 거야, 했어요 그런 게 진짜 나오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겉만 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죠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와이 슌지가 그것을 봤을 때 한 생각이 이 책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일을 했을 때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하죠 그게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어도 안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은 쪽으로 흐르게 하면 안 될지...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서... 둘 다인 것 같기도 해요 어딘가에 묻어가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이건 더 안 좋은 걸까요 묻어가도 괜찮은 것과 그러지 않아야 할 것을 잘 구별한다면 좀 낫겠죠


희선
 
불평등 경제 - L’economie des inegalites
토마 피케티 지음, 유영 옮김, 노형규 감수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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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성과연봉제가 이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성과연봉제는 업무능력과 성과를 등급별로 평가, 임금에 차별을 두고 저성과자는 해고시키는 게 방침인 제도다. 정부는 일단 공공기관부터 그것을 적용하려는 참인데, 현재 노조의 반발이 꽤나 거세다. 물론 취지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 서비스가 주목적인 공공기관에서 사기업처럼 업무 능력과 성과를 일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 기관의 무능과 부패는 대부분 권력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자행되는 낙하산 인사로 인한 것인데 그 책임을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하는 일반 직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연봉제는 임금 억제와 쉬운 해고가 골자다. 근본적으로 부자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 상황을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타개하려는 데 있다. 단적으로 소득 불평등 심화에 일조하는 정책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평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토마 피케티는 이렇게 되는 이유로 전체 소득에서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꼽는다. 그는 그것을 선명히 나타내기 위해 피케티 공식이라는 것을 고안했다. 공식에 대입하면 피케티 지수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 전체 소득 중 자본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1950년 이후로 계속 증가해 왔다고 한다. 즉 원래 가지고 있는 자본에서 얻는 소득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부의 획득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오로지 세습을 통해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단어인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정태인 교수가 피케티 공식에 따라 우리나라의 피케티 지수를 산출했는데, 우리나라 전체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무려 절반에 가까운 48%였다고 한다. 절반에 가까운 소득이 아무 노동 없이도 가능하다니, 정말 우리나라 불평등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라 본다. 당신이 흙수저라면 앞으로의 미래도 현재만큼이나 암울하다는 예언인 것이다.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케티는 조세 정책에 승부수를 띄운다. 


 무엇보다 오직 자본을 압박하는 조세만이 자본과 노동의 진정한 재분배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p. 91)


 지금까지는 경제 성장이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킨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피케티에 따르면 OECD 국가의 경우, 1983년부터 1995년까지 부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는데, 같은 시기 노동자들의 삶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실질 임금의 하락으로 삶의 질은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한 마디로 성장의 과실은 결코 노동자에게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들이 흔히 주장하듯, 경제 성장이 더 좋은 삶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한 마디로 넌센스에 불과하다. 때문에 기댈 곳은 오직 재분배 정책밖에 없다. 그것도 자본 소득에 집중된 재분배 정책이어야 한다. 거기에 가장 실질적이며 커다란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세 정책이다. '21세기 자본론'에서 피케티가 강조한 부유세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찰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인적 자본 성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불평등도 그렇지만 부국과 빈국 간 불평등의 핵심은 생산 수단의 불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인적자본의 불공평한 분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p. 112)


 이 인적 자본을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다. 피케티는 재분배 정책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높은 임금과 낮은 임금 사이의 격차를 완화시키는 '기초적 재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인적 자본 형성 과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개인의 학력간 능력간 차이를 없애는 '효율적 재분배'다. 이를테면 효율적 재분배란 로스쿨처럼 돈과 부모의 배경이 있어야만 배움의 기회가 허락되는 것을 근절하고,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 학제처럼 누구나 균등하게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부유층 못지 않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 같은 지원 제도를 정부가 광범위하게 마련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라 할 수 있다. 즉 부유세를 통해 확충된 재정이 효율적 재분배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의 인적 자본의 성장 주도가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심한 불균형을 해소할 것이라 보고 있다.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여기저기서 보다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을 보게되는 요즘, 피케티의 이런 조언은 아무래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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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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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흥미로운 책이다. 진화의 과정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다. 바로 '경계'라는 책이다. '경계'는 EBS 다큐 프라임의 '진화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자, 그 완결편이다. 특히 부제가 흥미롭다. 이 책의 부제는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다. 부제대로,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완전히 바꿔 준다. 우리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진화가 정확히 양육강식 논리의 점철이라 생각했다고 고쳐 말하겠다. 즉 진화를 선도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강자로,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주류가 진화를 이끌어왔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생존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정말 부제대로 배제된 생명이자 그래서 한없이 약자였던, 아감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호모 사케르'와 같은 존재들이 지금까지의 진화를 이끌어온 장본인들이었다고 말이다. 정말 놀라웠다. 이제까지 진화에 대해 가졌던 내 생각에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생물 교과서의 진화 과정을 그대로 담는다. 식물에서 인류에 이르기까지 다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듣게 되는 내용은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진화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부터 다르니까 말이다. 이 책을 보면, 진화의 강자는 자연의 강자와 전혀 다르다. 자연의 강자는 강한 것이 이긴다. 그러나 진화의 강자는 약한 것이 이긴다. 강하고 약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얼마나 변화를 잘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환경 앞에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히 그 조건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화의 강자였다. 사실 진화의 정의마저 정녕 그것이었다. 책은 진화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적응하고 변화하는 것(p. 8)


 지구라는 행성은 죽어있지 않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아주 역동적인 행성이다. 당연히 지구의 생태계 또한 이런 지구의 변화 때문에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지구라는 별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45억년 내내 이런 과정이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과거와 다른 새로이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했다. 어제의 좋은 환경이 오늘 악조건이 되는 일도 흔치 않았다. '로머의 간격'이라는 게 있다. 고생물학자 알프레드 로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석탄기 3억 6천만년전 부터 3억 4천5백만년 전까지, 고생물학적으로 텅 빈 시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대멸종의 시대'다. 왜 이 시기에 갑자기 생물들이 멸종해버렸는가? 거기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게 되어 대기에 산소 농도가 높아지자, 온실 효과가 일어났다. 그러자 수온이 상승했고, 냉대의 바다가 온대의 바다로 되어가자 이전처럼 차가운 온도에 살 수밖에 없었던 생물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산소는 모든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모든 생명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정작 산소가 많아지자 오히려 파국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환경은 늘 가변적이었고 예측이 불가능했다. 자신의 강한 힘만 믿고 환경에 맞춰 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던 종들은 모두 멸종을 피할 수 없었다. 공룡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로지 스스로의 한계를 잘 자각하고 환경의 요구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종들만 미래의 지속이 허락되었다. 지금도 아주 소수이지만 잠자리처럼 수 억년에 나타났던 종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종들 모두가 멸종을 피하고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환경 변화에 발맞춰 자신을 기꺼이 바꿨기 때문이었다. '경계'는 그 여정을 충실히 보여준다. 쉽고도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쫓겨난 이들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화려한 지구의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p. 9)


 원래는 수중에만 있었던 식물이 육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말에 닥친 빙하기로 인해 식물들이 적도로 몰려들게 되자, 한정된 공간에서 홍조류, 갈조류 그리고 녹조류들 간의 생존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는데, 그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육지 가까이에서 겨우 잔존하던 녹조류 중 일부가 아직은 블루오션으로 남아 있던 육지로 눈을 돌리고 당시 풍부해진 산소를 이용하여 표피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큐티클과 지금의 식물 물관을 형성하는 리그닌 그리고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일정 정도 보관할 수 있는 액포를 스스로 합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식물의 모습과 조직 대부분은 가혹한 생활 환경 변화에 기존 방식의 고수 보다는 과감한 탈바꿈으로 대응했던 것의 결과였다. 식물만이 아니었다. 어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다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물이 부족한 민물에서 살게된 물고기들이 부족한 산소 때문에 아가미 이외에 래버런스 기관과 폐를 만들었고 결국 그 폐가 진화하여 수중 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만드는 부레가 되었다. 그렇게 민물에서 살 수 있게 된 이들은 대멸종 시대인 로머의 간격에서도 살아남아 지구에 생명이 다시금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폐를 가진 물고기들에게서 미치아강이란 사지가 달린 생물이 생겨났고 양서류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식물이 육지로 올라간 과정과 어류가 육지로 올라간 과정은 비슷했다. 주체의 처지도, 이유도 말이다.


 진화는 이렇게 어디까지나 생존 경쟁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던 약자의, 자신과 과거를 철저히 버리는 행위에서 이뤄졌다. 여기엔 결코 큰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부제에서 '작은 승리'라고 한 것은 부단히 변하는 지구 생태 환경에 있어서 항상 과거의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화란 그러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과 무수히 많은 시도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들은 지구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그침' 속에 단 하나 '이어짐'의 역사다. 하지만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멸종했다고 해서 그들은 그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유전자의 이어짐을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유전자 중 운 조게 이어진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p. 9)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소화기관의 한계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다. 과일과 동물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 수 있는 과일은 늘 턱없이 부족했고 초식 동물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인간의 다리가 너무 느렸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육식 동물에 덤빌 수도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생존 능력으로 인간은 결국 무리지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인간들은 육식동물이 사냥하면 그 주위에 있다가 배불리 먹은 육식동물을 돌을 던져 쫓아내 그 동물이 먹다 남긴 것을 모여 앉아 먹는 것으로 연명했다. 인간은 꼭 육식동물이 배가 부른 뒤에야 돌을 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포식자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약자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직립 보행도 바로 이런 약자로서의 위치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었다. 결국 두 팔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인류 자체가 여타 모든 생명들에게 가혹한 환경이 되고 있다. 그것을 '경계'는 특히 고래와 바다소 그리고 물개를 통해 잘 보여준다. 모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 당하여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생물들이다. 바다소는 인간에게 너무 사냥 당한 나머지 아예 '목(sirenia)'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모두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이 자행한 결과다. 그래서 책은 지금 유럽과 미국이 이누이트 족과 일본에 대해 고래 잡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을, 취지는 이해하지만 어불성설이라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지금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 유럽과 미국 백인 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략 3세기에 걸쳐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았다. 그랬던 그들이 고래잡이를 그만두었던 것도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잡을 고래가 정말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고래잡이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석유 때문에 고래보다 더 싼 값에 기름을 얻을 수 있었기에 포경 산업은 자연 도태되고 말았다. 그저 상황의 변화였을 뿐, 자성의 실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래 멸종 위기의 주범인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이누이트 족과 일본만을 탓하고 있으니, 일본 포경 산업이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선뜻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태도는 40억년 지구 역사에서 도태되고 멸종되어 버린 모든 자연의 강자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강한 힘 때문에 단기에는 군림할 수 있었지만 장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모습들을. 결국 오만했기에,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인정할 줄도 몰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없었던 존재들을. 진화의 역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존재들에겐 멸종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 역시 아무런 반성 없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다간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 생존 환경의 경계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지극히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진화는 오히려 그렇게 내몰린 존재들에게서 태어났다. 닥쳐온 고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거꾸로 생존을 위해 고난을 돌파하려 노력한 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진화의 역사마저 일구어냈다. 이런 진화의 궤적은 정말 많은 것을 달리 보게 만들었다. 무엇이 정말 강하고 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일깨워주었고 내게 닥친 고난의 의미와 강도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진화만큼 실감한 경우도 또  없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에게도 거대한 진화의 역사를 태동시킬 역량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생명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자신의 종을 보다 많이 번식시키고 오래 지속시키는 것에 있다고 볼 때, 그런 진화를 만들어 내는 힘은 생명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은  크기와 능력에 상관없이 지구 위 모든 생명에게 대등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보니 절로 모든 생명이 숭고하게 보였다. 여기서 숭고란 어디까지나 칸트의 정의를 따른 것이다. 칸트는 숭고를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존경'이라 정의했다. 존재에 당위로 주어진 사명을 꿋꿋이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 받는 감정인 것이다. 진화의 역사는 숭고의 역사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숭고의 감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숭고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기에, 인간은 훨씬 쉽게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그게 또 연장되어 같은 인간마저도 그렇게 보도록 만들고 또 그렇게만 다른 존재와 타인을 보다 보니 자기 자신마저 한낱 사는 게 다인 존재로만 여기게 된 것은 아닌지.


 '경계'는 이 숭고의 감정이야 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인류 차원으로 보자면, 인간의 탈출이 기존 생태계에 대한 공습이 되어 생태계마저 지구에 태어난 이래 최초로 그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p. 267) 현 상황에 있어 그것이 지구와 자신의 멸종마저 막는 길이고, 나 개인에 있어서는 그저 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삶의 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찾아온 고난도, 가지고 있는 불안도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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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만찬
올렌 슈타인하우어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저녁 만찬을 나눈다. 한 때는 연인이었다. 지금은 따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헤어진 뒤, 오래도록 만나지 않았다. 대략 6년. 서로 연락조차 없었다.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이별의 말 한 마디 없이 남자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아이도 둘 낳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여자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 자신은 여지껏 혼자이고, 아직도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데. 

 남자의 이름은 헨리. 여자의 이름은 셀리아.

 언뜻, 로브라이너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주인공의 이름이 해리, 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비록 서로 미련이 남아 있다 해도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둘은 원래 미국의 첩보원이었다. 근무지는 오스트리아의 빈. 남자는 현장 요원, 여자는 연락책이었다. 혹시 '본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헨리를 맷 데이먼으로, 셀리아를 파리 지부에서 비슷한 일을 했던 줄리아 스타일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그 둘이 주인공 커플이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남자는 아직도 현직이지만 여자는 전직이다. 여자는 남자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첩보원 일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만남이니 만큼, 오늘의 만남이 순수한 만남일 리는 없다. 첩보원 일을 떠났어도 여자는 잘 알고 있다. 남자가 옛 추억 따위에 젖어 자신을 찾아 올 리는 없다는 것을.

 맞다. 남자에겐 남자에겐 꿍꿍이가 있다. 그들을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만들었던, 6년 전 사건. 여객기 하나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빈 공항에서 대치 중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그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그 변절자로 인해 피랍 여객기 안에서 범인들의 정보를 알려주던 요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비극으로 끝났다. 요원은 머리에 총을 맞아 죽고, 여객기에 인질로 잡혀 있던 120명의 승객도 전원 사망해 버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둘은 영영 갈라졌다. 그런데 6년 후, 바로 그 사건이 다시금 과거의 심연에서 현재의 수면으로 불쑥 부상했다. 배신자를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 하나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그 정보가 나타내는 주요 용의자는 두 명. 하나는 여자의 직속 상사 빌이고, 다른 하나는 셀리아, 즉 여자다. 그렇게 남자는 순서대로 찾아 온 것이다. 먼저 빌을 만나고 이젠 여자 차례다. 남자는 여자가 배신자라 생각한다. 오늘의 만찬은 그 진실을 확인하는 자리다. 하지만 단순한 만찬은 아니다. 사실상 재판이나 다름없다. 여자가 배신자라는 게 확인되면, 첩보부의 관례에 따라 바로 즉결 처분 당할 테니까. 첩보부에 관타나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 과연 이 만찬의 종막은 어떻게 될까?


 미국의 스릴러 작가 올렌 슈타인하우어의 2015년 발표작, '배신의 만찬'은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만찬으로만 이뤄지는 작품이다. 독자는 그 만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일단 만찬이 시작되면, 작품의 현실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찬 장소를 떠나지 않는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나 '로프'처럼.) 서로에게 유일했던 사랑이 어떻게 고통과 죽음만을 낳은 배신에 이르게 되었는지, 세밀한 내면 묘사(책은 남자와 여자의 내면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우리는 남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다가, 그와 똑같은 상황을 여자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와 거듭된 반전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냐?"

 왜냐하면, 이 모든 배신과 비극의 기저(基底)엔 바로 사랑이 있었으므로. 사랑이 그들의 모든 고통을 가져 오고, 죽음마저 불러 왔던 것이다. 사랑, 그것이 유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들이 사랑을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러겠는가? 아무리 대의를 위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운명의 연인을 죽도로 내버려 두거나, 등 뒤에 차디찬 배반의 단검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 때문에 가문과 신분 그리고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오히려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며 칭송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처럼.

 이성으론 아무리 알아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이었다. 그들의 비극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오직 사랑한 것이 죄였고, 그것에 이미 파국은 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설로 깊이 깨닫는다. 사랑이 가진 비극성과 그것에 결부된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 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잘라 버려야 할 것이 이다지도 많은 것을. 마음이 연약하기에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헨리와 셀리아. 알고보면 그들은 햄릿의 후예들이다. 햄릿은 자신의 복수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감행했다. 많은 사람과 자신마저 파멸될 것을 알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하랴? 그것이 인간인 것을.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나중에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만들어진)에 나오는 주인공이 생각난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당한 여인이. 그녀는 신의 믿음을 통해 범인을 용서한다. 자신의 용서로 범인을 구원할 것이란 생각에 감옥에 있는 범인을 면회한다. 하지만 범인이 먼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감옥에서 신을 믿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신의 용서로 새 삶을 살게 된 그는 반드시 여인을 만나 사죄를 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빛은 정말 신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평온해 보인다. 그녀는 절망한다. 용서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었다. 범인으로 아들을 잃은 자신이. 반드시. 하지만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비극의 당사자인 자신은, 그로 인해 지금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은 정작 신과 범인의 협잡에 의해 소외되어 버렸다. 여인은 절절히 깨닫는다. 자신이 믿었던 신에게 배신 당했음을.


 우리는 여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녀는 이미 그를 용서하려 했다. 그 용서의 마음 밑엔 그가 과거의 잘못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시금 삶을 새로이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비심이 있을 것이다. 자비심이 주가 되었다면 누가 용서하든,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에겐 누가 용서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반드시 자신이어야 했다. 그녀가 믿었던 신은 여인에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이웃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부재에 있었다. 하지만 여인도, 우리도 자신을 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바디우도 그런 이웃사랑을 불가능한 명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감정따라, 마음따라 흐를 수밖에 없는 미약한 벌레이기에.

 겸허히 인정하자. 그러므로 헨리든, 셀리아든 누구의 잘못이라 단죄하는 건, 오롯이 자만일 뿐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우리는 그들을 그저 연민해야 한다. 같은 햄릿으로서, 같은 벌레로서, 그들과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동포로서. 그 연민의 눈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서로에 대한 위로와 격려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믿도록 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로 거기서 우리 고통의 대부분이 나오는 것 같다. 할 수 있다 생각하기에 못하면 질책부터 하고, 가능하다 믿기에 닥달부터 하고 본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지닌 자질, 개성은 쉽게 묵살되고 목표가 절대이자 그것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전부가 된다. 그가 아무리 열악한 처지에 있든,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상관없다. 이루지 못하면 모조리 무능한 자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겪는 아픔마저도 그리 치부되어 우리가 그를 배려하지 않고, 돌보지 않아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어땠을까? 이와 반대의 상황에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우리가 겪는 아픔의 절반 정도는 줄지 않았을까? 우리가 강하다는 생각은 이 불안정하고, 예측불가의 세상에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란 달콤한 환상을 준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마저 상하게 할 달콤한 독약에 불과하다.  허세란 독이 든 음식인 것이다.

 내 생각 대로, 믿음 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삶은, 정녕 '배신의 만찬'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헨리와 셀리아가 그랬듯, 삶이 발 밑에서 붕괴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못나서, 더 잘난 나가 될 수 있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아니다. 인간이 약한 것이다.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의 단점도, 약점도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허히 우리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 한계 안에서 나와 똑같이 버둥거리며 범위를 좀 더 넓히려 애쓰는 우리들만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한다.
 연민으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절로 내미게 되는.

 '배신의 만찬'은 이런 걸 돌아보고, 자주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알고 보면 헨리와 셀리아, 그들에게 더욱 필요했던 존재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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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시작부터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질문이 있다. 혹시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좋아하시는지? 물론 아예 영화 자체를 못 보신 분들도 있고, 2003년에 나왔으니 봤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잠시 제쳐두고, 오직 영화를 아시고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 '미스터 보쟁글스'도 정말 좋아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 두 작품이 다 마음에 드신다면 당신은 나의 동지(同志)라고.(물론 이 자격은 얼마든지 사양하셔도 된다.)



 '빅 피쉬'와 '보쟁글스'는, 읽어보면 바로 아시겠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한 단어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상상의 전복'이라고! 해산물 전복(全鰒)이 아니라 뒤집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이다.


 '빅 피쉬'는 허풍선이 남작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허풍을 떠는 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다. 아들은 처음엔 아버지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이라 믿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것이 결국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영화는 그런 아들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려 부모님 집으로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주의깊게 그런 아들의 귀환이 현실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관하는 환상 세계로의 전입임을 표현한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거짓말이 생명력을 얻고,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것이 정녕 환상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 최후의 순간 제대로 목도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그렇게 영화는 상상에게 최종 승리를 건네주며 끝마친다.


 '보쟁글스'는 최종 승리 따윈 없지만, 상상과 현실이 치열하게 대립한다는 점에서 '빅 피쉬'와 맥을 같이 한다. 소설은 '빅 피쉬'와 마찬가지로 아직 아이인 아들이 화자 역할을 맡는다. 아들은 아직 미성년이란 점에서 더욱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게 두드러지는데, 그 두 세계란 다름아닌 그의 가족이 중심을 이루는 환상 세계와 학교가 중심이 되는 현실 세계다. 여기서의 환상이란, 문자 그대로의 환상은 아니다. 정말은 작위적인 환상이다. 즉 주인공의 가족들이 현실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이 창조한 환상에 푹 빠져 그 환상을 진짜 현실로 여긴다는 의미다. 이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도, 미쳤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투철한 신념에 따른 결과일 뿐. 그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거짓 역시 진실과 얼마든지 등가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상상이 그들에겐 곧 진정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반면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다. 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질서는 학교에서 아무런 힘을 못쓴다. 아들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정신 나간 녀석이 된다. 가족 사이에선 왕자님이나, 학교에선 얼간이에 불과하다. 매일 마다 다양하게 바뀌는 어머니의 이름이, 학교에선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되듯이, 가족에선 온갖 거짓과 상상으로 풍성했던 현실도 학교에선 생선 가시처럼 좁고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버린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딱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다. 바로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각대장 존'이다. 



아침 학교 등교길에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존재감이 한없이 컸던 존이 현실 질서를 뜻하는 학교에 편입되자 더없이 작고 초라해져 버리는 모습은 그대로 '미스터 보쟁글스'의 아들과 같다. 그래서 아들은 이 두 세계의 충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제 아들의 부모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상이냐, 현실이냐? 무엇을 택할 것 같은가? 나는 바로 이 선택 때문에 이 소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올해의 인상적인 소설 중 한 편으로 기꺼이 꼽고 싶을 정도다.


 부모는 상상을 택한다. 아들이 학교를 당장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미스터 보쟁글스'는 이렇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기꺼이 상상의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현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선 상상이 압도 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선 현실이 오히려 상상에게 압도된다. 물론 현실이 상상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세금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조차 상상은 굳건히 자리를 보전하며, 성인이 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려 한다. '빅 피쉬'의 아들과 똑같이.


 '미스터 보쟁글스'는 원래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으로, 거기서는 고독과 피로에 찌들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현실에 춤으로 기분 좋은 혈색을 되찾아 주는 존재다. 경쾌한 스텝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주고, 율동으로 묘지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삶에 만발한 화원의 생기와 숲의 활력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상상이 하는 일의 은유다. 우리는 언제부터 거짓을 그냥 거짓으로만 생각했을까? 왜 거짓이 지닌 다른 가능성, 이 꽉 막히고 무조음의 현실 세계에 창문을 만들어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하며, 다양한 변주의 선율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상상 없는 현실은 그저 한없이 초라하고 빈약할 뿐인데.


 '미스터 보쟁글스'는 어느새 우리가 잊었거나 외면해 버렸던 상상의 힘을 다시금 복권시키려 한다. 그리고 설득한다. 기꺼이 그 힘에 도취되어도 좋다고.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보쟁글스'를 한 번 더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상상의 전복(全福)'이라고. 이 전복은 해산물도, 뒤집는다도 아니다. 완전한 행복을 뜻하는 전복(全福)이다.



 p.s 원래는 '상상의 전복(顚覆)'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나 쥘베르 뒤랑이 말한 상상의 힘에 대하여 죽 썼지만 본말전도일 정도로 쓸데없이 사설만 길어져 생략하고 말았다. 굳이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혹시 상상이 어떤 힘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두 분 학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보시라는 뜻에서다. 말하자면, 동지의 배려(同志)랄까. (그 자격을 사양하셨다면 포교의 일환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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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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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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