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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만찬
올렌 슈타인하우어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저녁 만찬을 나눈다. 한 때는 연인이었다. 지금은 따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헤어진 뒤, 오래도록 만나지 않았다. 대략 6년. 서로 연락조차 없었다.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이별의 말 한 마디 없이 남자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아이도 둘 낳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여자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 자신은 여지껏 혼자이고, 아직도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데.
남자의 이름은 헨리. 여자의 이름은 셀리아.
언뜻, 로브라이너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주인공의 이름이 해리, 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비록 서로 미련이 남아 있다 해도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둘은 원래 미국의 첩보원이었다. 근무지는 오스트리아의 빈. 남자는 현장 요원, 여자는 연락책이었다. 혹시 '본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헨리를 맷 데이먼으로, 셀리아를 파리 지부에서 비슷한 일을 했던 줄리아 스타일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그 둘이 주인공 커플이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남자는 아직도 현직이지만 여자는 전직이다. 여자는 남자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첩보원 일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만남이니 만큼, 오늘의 만남이 순수한 만남일 리는 없다. 첩보원 일을 떠났어도 여자는 잘 알고 있다. 남자가 옛 추억 따위에 젖어 자신을 찾아 올 리는 없다는 것을.
맞다. 남자에겐 남자에겐 꿍꿍이가 있다. 그들을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만들었던, 6년 전 사건. 여객기 하나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빈 공항에서 대치 중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그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그 변절자로 인해 피랍 여객기 안에서 범인들의 정보를 알려주던 요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비극으로 끝났다. 요원은 머리에 총을 맞아 죽고, 여객기에 인질로 잡혀 있던 120명의 승객도 전원 사망해 버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둘은 영영 갈라졌다. 그런데 6년 후, 바로 그 사건이 다시금 과거의 심연에서 현재의 수면으로 불쑥 부상했다. 배신자를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 하나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그 정보가 나타내는 주요 용의자는 두 명. 하나는 여자의 직속 상사 빌이고, 다른 하나는 셀리아, 즉 여자다. 그렇게 남자는 순서대로 찾아 온 것이다. 먼저 빌을 만나고 이젠 여자 차례다. 남자는 여자가 배신자라 생각한다. 오늘의 만찬은 그 진실을 확인하는 자리다. 하지만 단순한 만찬은 아니다. 사실상 재판이나 다름없다. 여자가 배신자라는 게 확인되면, 첩보부의 관례에 따라 바로 즉결 처분 당할 테니까. 첩보부에 관타나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 과연 이 만찬의 종막은 어떻게 될까?
미국의 스릴러 작가 올렌 슈타인하우어의 2015년 발표작, '배신의 만찬'은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만찬으로만 이뤄지는 작품이다. 독자는 그 만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일단 만찬이 시작되면, 작품의 현실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찬 장소를 떠나지 않는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나 '로프'처럼.) 서로에게 유일했던 사랑이 어떻게 고통과 죽음만을 낳은 배신에 이르게 되었는지, 세밀한 내면 묘사(책은 남자와 여자의 내면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우리는 남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다가, 그와 똑같은 상황을 여자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와 거듭된 반전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냐?"
왜냐하면, 이 모든 배신과 비극의 기저(基底)엔 바로 사랑이 있었으므로. 사랑이 그들의 모든 고통을 가져 오고, 죽음마저 불러 왔던 것이다. 사랑, 그것이 유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들이 사랑을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러겠는가? 아무리 대의를 위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운명의 연인을 죽도로 내버려 두거나, 등 뒤에 차디찬 배반의 단검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 때문에 가문과 신분 그리고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오히려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며 칭송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처럼.
이성으론 아무리 알아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이었다. 그들의 비극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오직 사랑한 것이 죄였고, 그것에 이미 파국은 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설로 깊이 깨닫는다. 사랑이 가진 비극성과 그것에 결부된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 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잘라 버려야 할 것이 이다지도 많은 것을. 마음이 연약하기에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헨리와 셀리아. 알고보면 그들은 햄릿의 후예들이다. 햄릿은 자신의 복수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감행했다. 많은 사람과 자신마저 파멸될 것을 알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하랴? 그것이 인간인 것을.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나중에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만들어진)에 나오는 주인공이 생각난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당한 여인이. 그녀는 신의 믿음을 통해 범인을 용서한다. 자신의 용서로 범인을 구원할 것이란 생각에 감옥에 있는 범인을 면회한다. 하지만 범인이 먼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감옥에서 신을 믿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신의 용서로 새 삶을 살게 된 그는 반드시 여인을 만나 사죄를 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빛은 정말 신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평온해 보인다. 그녀는 절망한다. 용서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었다. 범인으로 아들을 잃은 자신이. 반드시. 하지만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비극의 당사자인 자신은, 그로 인해 지금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은 정작 신과 범인의 협잡에 의해 소외되어 버렸다. 여인은 절절히 깨닫는다. 자신이 믿었던 신에게 배신 당했음을.
우리는 여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녀는 이미 그를 용서하려 했다. 그 용서의 마음 밑엔 그가 과거의 잘못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시금 삶을 새로이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비심이 있을 것이다. 자비심이 주가 되었다면 누가 용서하든,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에겐 누가 용서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반드시 자신이어야 했다. 그녀가 믿었던 신은 여인에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이웃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부재에 있었다. 하지만 여인도, 우리도 자신을 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바디우도 그런 이웃사랑을 불가능한 명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감정따라, 마음따라 흐를 수밖에 없는 미약한 벌레이기에.
겸허히 인정하자. 그러므로 헨리든, 셀리아든 누구의 잘못이라 단죄하는 건, 오롯이 자만일 뿐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우리는 그들을 그저 연민해야 한다. 같은 햄릿으로서, 같은 벌레로서, 그들과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동포로서. 그 연민의 눈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서로에 대한 위로와 격려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믿도록 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로 거기서 우리 고통의 대부분이 나오는 것 같다. 할 수 있다 생각하기에 못하면 질책부터 하고, 가능하다 믿기에 닥달부터 하고 본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지닌 자질, 개성은 쉽게 묵살되고 목표가 절대이자 그것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전부가 된다. 그가 아무리 열악한 처지에 있든,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상관없다. 이루지 못하면 모조리 무능한 자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겪는 아픔마저도 그리 치부되어 우리가 그를 배려하지 않고, 돌보지 않아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어땠을까? 이와 반대의 상황에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우리가 겪는 아픔의 절반 정도는 줄지 않았을까? 우리가 강하다는 생각은 이 불안정하고, 예측불가의 세상에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란 달콤한 환상을 준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마저 상하게 할 달콤한 독약에 불과하다. 허세란 독이 든 음식인 것이다.
내 생각 대로, 믿음 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삶은, 정녕 '배신의 만찬'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헨리와 셀리아가 그랬듯, 삶이 발 밑에서 붕괴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못나서, 더 잘난 나가 될 수 있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아니다. 인간이 약한 것이다.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의 단점도, 약점도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허히 우리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 한계 안에서 나와 똑같이 버둥거리며 범위를 좀 더 넓히려 애쓰는 우리들만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한다.
연민으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절로 내미게 되는.
'배신의 만찬'은 이런 걸 돌아보고, 자주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알고 보면 헨리와 셀리아, 그들에게 더욱 필요했던 존재의 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