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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ㅣ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책이다. 진화의 과정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다. 바로 '경계'라는 책이다. '경계'는 EBS 다큐 프라임의 '진화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자, 그 완결편이다. 특히 부제가 흥미롭다. 이 책의 부제는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다. 부제대로,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완전히 바꿔 준다. 우리라고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진화가 정확히 양육강식 논리의 점철이라 생각했다고 고쳐 말하겠다. 즉 진화를 선도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강자로,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주류가 진화를 이끌어왔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생존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정말 부제대로 배제된 생명이자 그래서 한없이 약자였던, 아감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호모 사케르'와 같은 존재들이 지금까지의 진화를 이끌어온 장본인들이었다고 말이다. 정말 놀라웠다. 이제까지 진화에 대해 가졌던 내 생각에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생물 교과서의 진화 과정을 그대로 담는다. 식물에서 인류에 이르기까지 다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듣게 되는 내용은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진화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부터 다르니까 말이다. 이 책을 보면, 진화의 강자는 자연의 강자와 전혀 다르다. 자연의 강자는 강한 것이 이긴다. 그러나 진화의 강자는 약한 것이 이긴다. 강하고 약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얼마나 변화를 잘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환경 앞에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히 그 조건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화의 강자였다. 사실 진화의 정의마저 정녕 그것이었다. 책은 진화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적응하고 변화하는 것(p. 8)
지구라는 행성은 죽어있지 않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아주 역동적인 행성이다. 당연히 지구의 생태계 또한 이런 지구의 변화 때문에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지구라는 별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45억년 내내 이런 과정이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과거와 다른 새로이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했다. 어제의 좋은 환경이 오늘 악조건이 되는 일도 흔치 않았다. '로머의 간격'이라는 게 있다. 고생물학자 알프레드 로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석탄기 3억 6천만년전 부터 3억 4천5백만년 전까지, 고생물학적으로 텅 빈 시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대멸종의 시대'다. 왜 이 시기에 갑자기 생물들이 멸종해버렸는가? 거기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게 되어 대기에 산소 농도가 높아지자, 온실 효과가 일어났다. 그러자 수온이 상승했고, 냉대의 바다가 온대의 바다로 되어가자 이전처럼 차가운 온도에 살 수밖에 없었던 생물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산소는 모든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모든 생명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정작 산소가 많아지자 오히려 파국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환경은 늘 가변적이었고 예측이 불가능했다. 자신의 강한 힘만 믿고 환경에 맞춰 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던 종들은 모두 멸종을 피할 수 없었다. 공룡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로지 스스로의 한계를 잘 자각하고 환경의 요구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종들만 미래의 지속이 허락되었다. 지금도 아주 소수이지만 잠자리처럼 수 억년에 나타났던 종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종들 모두가 멸종을 피하고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환경 변화에 발맞춰 자신을 기꺼이 바꿨기 때문이었다. '경계'는 그 여정을 충실히 보여준다. 쉽고도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쫓겨난 이들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화려한 지구의 생태계를 만들어낸 것이다.(p. 9)
원래는 수중에만 있었던 식물이 육지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말에 닥친 빙하기로 인해 식물들이 적도로 몰려들게 되자, 한정된 공간에서 홍조류, 갈조류 그리고 녹조류들 간의 생존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는데, 그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육지 가까이에서 겨우 잔존하던 녹조류 중 일부가 아직은 블루오션으로 남아 있던 육지로 눈을 돌리고 당시 풍부해진 산소를 이용하여 표피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큐티클과 지금의 식물 물관을 형성하는 리그닌 그리고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분을 일정 정도 보관할 수 있는 액포를 스스로 합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식물의 모습과 조직 대부분은 가혹한 생활 환경 변화에 기존 방식의 고수 보다는 과감한 탈바꿈으로 대응했던 것의 결과였다. 식물만이 아니었다. 어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다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물이 부족한 민물에서 살게된 물고기들이 부족한 산소 때문에 아가미 이외에 래버런스 기관과 폐를 만들었고 결국 그 폐가 진화하여 수중 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만드는 부레가 되었다. 그렇게 민물에서 살 수 있게 된 이들은 대멸종 시대인 로머의 간격에서도 살아남아 지구에 생명이 다시금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폐를 가진 물고기들에게서 미치아강이란 사지가 달린 생물이 생겨났고 양서류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식물이 육지로 올라간 과정과 어류가 육지로 올라간 과정은 비슷했다. 주체의 처지도, 이유도 말이다.
진화는 이렇게 어디까지나 생존 경쟁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던 약자의, 자신과 과거를 철저히 버리는 행위에서 이뤄졌다. 여기엔 결코 큰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부제에서 '작은 승리'라고 한 것은 부단히 변하는 지구 생태 환경에 있어서 항상 과거의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화란 그러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과 무수히 많은 시도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들은 지구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그침' 속에 단 하나 '이어짐'의 역사다. 하지만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멸종했다고 해서 그들은 그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유전자의 이어짐을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유전자 중 운 조게 이어진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p. 9)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소화기관의 한계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다. 과일과 동물밖에 없었다. 하지만 딸 수 있는 과일은 늘 턱없이 부족했고 초식 동물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인간의 다리가 너무 느렸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육식 동물에 덤빌 수도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생존 능력으로 인간은 결국 무리지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손을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인간들은 육식동물이 사냥하면 그 주위에 있다가 배불리 먹은 육식동물을 돌을 던져 쫓아내 그 동물이 먹다 남긴 것을 모여 앉아 먹는 것으로 연명했다. 인간은 꼭 육식동물이 배가 부른 뒤에야 돌을 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공격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포식자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약자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직립 보행도 바로 이런 약자로서의 위치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었다. 결국 두 팔이 자유로워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인류 자체가 여타 모든 생명들에게 가혹한 환경이 되고 있다. 그것을 '경계'는 특히 고래와 바다소 그리고 물개를 통해 잘 보여준다. 모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 당하여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대표적인 생물들이다. 바다소는 인간에게 너무 사냥 당한 나머지 아예 '목(sirenia)'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모두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이 자행한 결과다. 그래서 책은 지금 유럽과 미국이 이누이트 족과 일본에 대해 고래 잡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을, 취지는 이해하지만 어불성설이라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지금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 유럽과 미국 백인 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략 3세기에 걸쳐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았다. 그랬던 그들이 고래잡이를 그만두었던 것도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잡을 고래가 정말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고래잡이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석유 때문에 고래보다 더 싼 값에 기름을 얻을 수 있었기에 포경 산업은 자연 도태되고 말았다. 그저 상황의 변화였을 뿐, 자성의 실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래 멸종 위기의 주범인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이누이트 족과 일본만을 탓하고 있으니, 일본 포경 산업이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선뜻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태도는 40억년 지구 역사에서 도태되고 멸종되어 버린 모든 자연의 강자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강한 힘 때문에 단기에는 군림할 수 있었지만 장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모습들을. 결국 오만했기에,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인정할 줄도 몰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없었던 존재들을. 진화의 역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존재들에겐 멸종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 역시 아무런 반성 없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다간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 생존 환경의 경계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지극히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진화는 오히려 그렇게 내몰린 존재들에게서 태어났다. 닥쳐온 고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거꾸로 생존을 위해 고난을 돌파하려 노력한 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진화의 역사마저 일구어냈다. 이런 진화의 궤적은 정말 많은 것을 달리 보게 만들었다. 무엇이 정말 강하고 약한 존재인가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지 일깨워주었고 내게 닥친 고난의 의미와 강도 역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들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진화만큼 실감한 경우도 또 없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생명에게도 거대한 진화의 역사를 태동시킬 역량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생명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자신의 종을 보다 많이 번식시키고 오래 지속시키는 것에 있다고 볼 때, 그런 진화를 만들어 내는 힘은 생명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거대한 힘은 크기와 능력에 상관없이 지구 위 모든 생명에게 대등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보니 절로 모든 생명이 숭고하게 보였다. 여기서 숭고란 어디까지나 칸트의 정의를 따른 것이다. 칸트는 숭고를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존경'이라 정의했다. 존재에 당위로 주어진 사명을 꿋꿋이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 받는 감정인 것이다. 진화의 역사는 숭고의 역사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숭고의 감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숭고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기에, 인간은 훨씬 쉽게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그리고 그게 또 연장되어 같은 인간마저도 그렇게 보도록 만들고 또 그렇게만 다른 존재와 타인을 보다 보니 자기 자신마저 한낱 사는 게 다인 존재로만 여기게 된 것은 아닌지.
'경계'는 이 숭고의 감정이야 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인류 차원으로 보자면, 인간의 탈출이 기존 생태계에 대한 공습이 되어 생태계마저 지구에 태어난 이래 최초로 그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p. 267) 현 상황에 있어 그것이 지구와 자신의 멸종마저 막는 길이고, 나 개인에 있어서는 그저 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삶의 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찾아온 고난도, 가지고 있는 불안도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