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살라 시무카의 '백설 공주' 3부작 중 두 번째의 것이 드디어 나왔다.

 첫 권, '피처럼 붉다'가 내겐 너무나 매력적이었으므로 후속작이 얼른 나오길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길었다. 거의 1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으니.

 제목은 '눈처럼 희다(As White As Snow)'.



 시리즈의 제목은 모두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 첫 부분에서 따왔다. 주인공 이름은 루미키.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아, 혹시 이 작품을 이 글을 통해 처음 만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 시리즈는 핀란드 작가 살라 시무카에 의해 원래 핀란드어로 쓰여졌다. 1편에서 뜻하지 않게 거대한 범죄조직 북극곰과 관련된 범죄에 연루된 루미키는 그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고,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월의 여름을 이제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다.


 그녀는 홀로 관광을 위해 여기에 왔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온갖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타자들의 도시에.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었던 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를 괜히 이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백설 공주 3부작'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백설 공주 다시 쓰기(rewriting)'라 할 수 있다.



 (전작 '피처럼 붉다' 리뷰에서 소개했던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의 표지.

 '눈처럼 희다'의 루미키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부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동화 백설공주의 초기 부분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홀로 된 아버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새 왕비를 얻게 되고 그러다 결국 백설공주가 쫓겨나는 부분말이다. 백설공주가 가혹한 운명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과 고독에만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신이 정말로 돌보아야했던 딸을 밀어내고 모르쇠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읽어보면 아실테지만 이 부분은 얼개만 놓고 보자면 정말로 1권과 상당히 유사하다. 1권에서 우리는 루미키가 이름 그대로 백설공주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과거의 백설공주가 아닌 대안으로써의 백설공주 말이다.


 그렇다면 2부는?

 2부는 바로 태어나 처음으로 와 본, 한없이 낯설기만 한 숲에서 일곱 난쟁이를 만나는 부분을 리라이팅(rewriting)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가 처음 보는 낯선 국적, 인종들로 넘치는 프라하로 보낸 것이다. 숲으로 쫓겨난 백설공주와 똑같이. 거기서 루미키는 숲 속 백설공주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있다.


 루미키는 돌벽에 앉아 샌들을 벗고 다리를 끌어올렸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여자 둘이 킥킥 웃었다. 맨발 처음 보나? 안녕하세요. 난 무민의 나라에서 왔어요. 무민도 맨발이잖아요.(p. 10 ~ 11)


 그런 루미키는 프라하에서 정말로 일곱 난쟁이를 만난다. 물론 진짜 난쟁이는 아니고 그 난쟁이들이 이루고 있던 공동체와 똑같이 작은 규모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종교 공동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루미키를 그 공동체와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이다. 루미키는 마치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의 언니라 주장하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젤렌카. 그녀는 루미키의 아버지가 프라하에 왔을 때, 자신의 엄마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자신을 낳았다고 한다. 사실 젤렌카의 말대로 루미키의 아버지는 한 때 혼자 프라하에서 오래 머문 적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루미키를 대하는 젤렌카의 모습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아서 결국은 어머니가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버린 젤렌카를 가족으로 거둬준 종교 공동체까지 가게 된다. 젤렌카는 완벽에 가까운 가족 공동체라고 말했지만, 루미키가 활약하는 '백설공주 시리즈'에서 '완벽하다'는 말은 그만큼 불길하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과연, 그 공동체의 어둠을 한 기자에게 발설하려 했던 남자가 뜻하지 않게 죽고 그 남자를 우연히 알아 본 루미키에 의해 공동체에 서려있던 불길한 어둠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제 프라하에서의 시간은 루미키에게 전혀 다르게 변한다. 관광의 시간이 아니라, 언니일지도 모를 젤렌카를 음험한 공동체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눈처럼 희다'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또다른 삶의 의미를 주었던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백설공주'에서 일곱 난쟁이와 함께 한 삶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일곱 난쟁이와의 공동체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지배와 종속, 거짓과 착취 그리고 탐욕과 죽음의 공동체로. 공동체의 리더는 늘 순수를 말하며, 구성원들 또한 순수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며 스스로 순수하게 되리라 마음먹고들 있었지만, 실은 그 순수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또한 자신을 좀 더 손쉽게 착취하게끔 만들어주기 위한 이념적 도구일 뿐이었다. 여기서 제목의 '눈처럼 희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라 시무카의 '백설공주 시리즈'가 실은 백설공주를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쓰고 있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시무카가 리라이팅을 통해 동화 '백설공주'를 공격하는 것은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있다. 동화에서 백설공주는 가사 일에 전념한다. 백설공주는 혼자 그들을 위해 8인분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이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가면 여덟 명이 먹은 그릇들을 닦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한다. 난쟁이들은 먹는 것도 함부로 먹고 옷이나 도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며,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 별 신경도 안 쓰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난쟁이라 할지라도 백설공주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의 몫은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 어느 판본을 봐도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와 그 일을 함께 했다는 말은 없다. 알고 보면 일곱 난쟁이들은 귀찮은 가사 일을 대신 해 줄 식모를 그것도 급여 없이 들여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일곱 난쟁이들이 안전을 대가로 백설 공주를 착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들의 따스하고 사랑 넘치는 공동체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이뤄지며 유지되고 있었다. 동화에선 백설공주가 주체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볼모에 지나지 않았다. '눈처럼 희다'의 젤렌카처럼.


 시무카는 자신의 소설에서 일곱 난쟁이와 비슷하게 만든 공동체를 통해 그것을 공박한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루미키에게 내내 자신들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화의 장소이다.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것들 중 아주 많은 부분이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인간형이라면 그 역시 토대는 가족을 통해 형성된다. 시무카는 그런 가족을 두 번째 소설에서 가져왔다. 바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여성성이 기초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소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1권, '피처럼 붉다'와 비교해 보자면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버지에서 가족으로. 그것은 그대로 여성성이 조직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착취가 수월한 여성성을 설계하고, 그것을 가족 제도로 유포하는 경로인 것이다.(어려서부터 읽는 동화들 역시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 동화작가였던 살라 시무카는 가장 대표적인 백설공주를 삼부작을 통해 리라이팅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시무카는 삼부작의 각 권마다 그 내부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기워놓았다. 1부는 엘리사였고, 2부는 젤렌카였다. 3부는? 3부도 물론 있다. 그것은 2권에 와서 비로소 있는 것으로 밝혀진 '언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이 바로 진짜 백설공주들이다. 왜냐하면 동화 속 백설공주와 똑같은 아픔을 겪으니까 말이다. 루미키는 바로 이런 존재들을 구해낸다. 마치 새로 쓰인 백설공주가 옛날에 잘못 쓰인 백설공주를 구하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다시 쓰기(rewriting)'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눈처럼 희다'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내처 읽게 되는 재밌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홀로 있지 않다. 은근슬쩍 동화 백설공주를 끌어들이며(무엇보다 '눈처럼 희다'에서 진정한 배후로 드러나는 사람은 백설공주의 그 분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어디를 가나 주체가 되지 못한 공주들이 문제다. 그러고 보면 백설공주의 영원한 악역 여왕도 이제는 달리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성의 구현체가 되었을 백설공주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어 자신만의 주체성을 만들도록 해 준 사람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일 때마다 여왕은 나타나서 백설공주를 그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예전부터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하려는 여성들은 자주 마녀라든지 괴물이라는 외피가 씌워졌다. 여왕도 그런 매커니즘으로 악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여성성이라든가, 여성의 현실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시무카의 본심은 분명 여기에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주제가 서사를 해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주제는 주제대로 잘 균형을 이루면서 빠져들고, 들여다 보는 깊이에 따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한 마디로 꽤 읽을만한 소설이다. 얇고, 십대 소녀가 활약한다고 해서 허투루 볼 작품이 아니다.


 (이왕 여왕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생각나는 그림책 하나가 있다. 바로 트리나 샤트 하이만의 '백설공주'다. 하이만은 칼데곳 메달상까지 받은 유명한 작가인데, 이 그림책이 이채로운 것은 여왕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백설공주의 이야기라기 보다 여왕의 이야기라도 보아도 무리 없을 정도로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하이만은 여왕이 왜 백설공주를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그림책에서 여왕은 자신의 늙음을 서러워하다 우울증에 빠져버린 보통의 중년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아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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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출판사 열린책들 알라딘 서재지기입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단 두 작품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요나스 요나손의 신작 장편 소설이 출간됩니다.
바로,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입니다.

이 도서를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도서명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Mördar-Anders och hans vänner (samt en och annan ovän)

지은이  요나스 요나손 Jonas Jonasson

옮긴이  임호경

장르   스웨덴 문학 / 장편소설


□ 줄거리
삼류 여관 <땅끝 하숙텔>에서 우연히 만난 리셉셔니스트 페르와 전직 여목사 요한나.
이 두 젊은이는 또 다른 투숙객 킬러 안데르스를 이용해서 무슨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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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위 네 가지 모두 지켜야 합니다.


* 모집 인원: 10명

* 모집 기간: 10월 24일~31일(7일 간)

* 도서 발송: 11월 1일 화요일 예정


* 서평단 활동 방법

도서를 받으신 후, 11월 10일까지

알라딘 서재와 개인 블로그(또는 타 SNS: 인스타/페이스북 등)에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남겨 주신 리뷰는 당첨자 발표 페이지 아래에 댓글로 주소를 남겨 주세요.

★ 도서 수령 후 리뷰를 올리지 않으신 분들은 이후 열린책들 이벤트 당첨이 제외됩니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구매 안내
10월 26일 수요일부터 예약 판매가 시작됩니다.
예약 구매하신 분들에게는 특별한 선물도 있으니 기대해 주세요!

구매는 알라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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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나의 스파이크(카우보이 비밥) 구자형 성우님이

원래 직썰에서 자막판으로 만든 것을

동료 성우분들까지 가세하여 멋진 더빙판으로 만들어주셨군요.

더빙으로 들으니까 그 분의 심경이 정말

귀에 쏙쏙 마음에 퍽퍽, 절박하게 들려오네요^^

링크, 소스 퍼기가 환영이시라니까 여기에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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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민주주의
김종철.조기숙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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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참 안타까운 것이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그 순간엔 정작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지나고 나서야 혹은 놓치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금 이재명 성남 시장의 표현에 따르면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국정이 함부로 유린된, 막장의 정점을 찍기 바쁜 현 정부의 모습을 보니 노무현 정부 시절이 얼마나 좋았었던 가를 반면교사처럼 거듭 되새기게 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런 마음으로 잡게 된 책이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이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서문에 자신들에 단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2008년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희망이 뒤섞인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적 정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한 싱크탱크로 구성'(p. 11)되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 단체가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2012)에 이어 두 번째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안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갔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을 다루고 있으며, 2장은 대통령 권한을 너무 약화시키는 것으로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비판을 많이 받은 사정 기관을 비롯한 권력 기관 정상화 노력에 대해 다룬다. 이것을 읽으면 지금 박근혜 정부의 행태와 너무나 비교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이 너무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진정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구나 생각되기도 한다. 3장은, 이 역시 현재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나 대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론'을 다룬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고, 가장 지지율을 떨어뜨린 사안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근혜 개헌론은 어디까지나 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것이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론은 마침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20년만에 똑같은 해에 이루어져, 그 호기를 이용하여 대통령 단임제의 부작용(특히 정책을 꾸준하게 해 나갈 수 없다는)과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 주기가 불일치하여 일어나게 되는 양당간의 극단적 대결 정치로 인한 국정의 불안과 비효율 그리고 책임 정치의 실현 곤란을 막고자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을 골자로 한 '원포인트 개헌론'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4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 내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정부 혁신론을 다룬다. 이 정부 혁신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조직 내에 민주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런 노무현 정부의 혁신론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면 오늘날처럼 많은 국민들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최순실 게이트라든가, 문고리 3인방 혹은 우병우 사태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4장을 읽으면서 새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권력 기관에 정말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큰 그림을 그렸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이 정부 혁신론은 당시에 최장집을 비롯 진보 지식인들에게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지금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보면서 과연 어떻게 입장 표명을 할까 참 궁금하기도 하다. 당시 국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 혁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약한 정부' 운운하는 반대편 공격에 더 지지를 보냈다. 아마도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2장에서 보듯 권력을 내려놓은 탓도 클 것이다. 그 때 국민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태주었다면, 오늘날의 충격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5장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 강하게 추진한 대통령의 당정 분리론을 다룬다.  그는 당정 분리가 되어 정당과 국회가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강화되길 원했고 대통령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 정책 중심의 대화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자율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꿈꿨다. 이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만한 부분이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과 완전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집권 정당은 대통령의 거수기가 된지 오래이며, 행정부와 국회가 불통으로 일관한지도 오래이다. 자율과 책임은 휴지조각이 되고 나라는 만인지상 일인지하로 굴러가고 있다. 더구나 그 일인마저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그냥 일개 민간인이다. 개그라기 보다는 악몽에 가까운 현실이다.


 6장은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 이것이야말로 가장 많은 역풍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대연정 제안'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것을 발표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지탄을 늘어 놓았다. 대연정은 지금도 완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노무현 대통령의 고육책이었으나, 그 진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진의는 지금까지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포용과 상생의 정치를 도모하는데 있었다. 진심은 정당했으나 너무 이상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저자 역시 아직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때가 아니라며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이제 그것을 학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을 믿었다. 경험하게 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달라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모두 6장에 걸쳐,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공과 과로 첨예하게 논쟁 중인 여섯 가지 사안들을 담는다. 하나하나가 사안을 철처히 분석하고 깊이있게 해석하고 있어,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전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추구했던 것은 첫째, 제왕적 대통령의 탈피였고 둘째는 포용과 상생으로 가기 위한 설득과 협상의 정치였으며 셋째는 통치의 공정성과 운영의 투명성 보장이었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여섯 가지 사안을 두고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당리당략을 위한 음모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저 어떻게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빨리 뿌리내리게 하려는 그의 충심이 느껴질 뿐이다.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안과 관련한 생전 어록을 많이 담고 있는데, 무엇보다 바로 거기서 그런 게 느껴진다. 그것은 누구와 달리 녹화된 것도 아니며 누가 비밀리에 받아보고 수정한 것도 아니다. 그가 직접 말한 것이다. 이제는 대통령에게서 그런 허심탄회한 진심조차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고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더욱 그리워진다.


 맞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섯 가지 사안들은 어떤 의미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이라 할 만하다. 아무래도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무엇보다 아직은 연약한 묘목에 불과한 민주주의를 보다 튼튼한 나무로 육성시키는 데 있다고 본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그는 그 나무의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땅을 다져주려 했으며, 보다 높이 자랄 수 있도록 그 세포가 될 국민 개개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 경험시키려 했다. 물론 이런 그의 마음이 누군가의 말마따나 너무 국민의 수준을 모르는 이상주의 놀음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런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 때문에 혼란만 가중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우리는 자신에게 한 번 솔직히 물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시절 좌우 가릴 것 없이 많은 공격을 받았다. '사면초가'였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 당선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의 정당인 민주당이 주도하여 탄핵 위기까지 겪었으니 말이다. 그는 어디서나 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말투 때문에 조롱 받았고, 솔직한 표현 때문에 그 진의가 헤아려지기도 전에 공격부터 당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대통령으로서 그가 정말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 내막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저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 쏟아낸 말에 휘말려 정작 그의 진실한 초상은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이렇게 무슨 연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것들이 나왔는지, 그 온전한 내막과 해석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면 여기에 실린 제안들 하나하나가, 지금에 와서 더욱 절박해지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 보인다. 오늘의 현실이 더없이 치욕적이고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민주주의야 말로 무임승차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과 실천 없이는 결코 거둬들일 수 없는 과실이다. 그런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은 중요한 유산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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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이 좋은 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ICE-9 2016-10-28 12:08   좋아요 0 | URL
오거서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오후를 맞네요^^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 홍지수 옮김,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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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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