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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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신분석은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을 제대로 정신분석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에 대한 정신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은 그릇 속 물과 같아서 사회가 흔들리면서 만들어내는 파동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미 주체라는 것 자체가 '대타자'라는 상징 질서 안에 편입되면 더 이상 주체로써 기능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사회 속 '나'라는 주체는 사회가 짜놓은 의미망 위에 찍어 놓은 하나의 좌표와 같다. 그러니 그 좌표만 분석해서는 지금 개인의 처지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진정한 해석은 오로지 그 좌표가 찍혀 있는 지도 전체를 헤아려야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정신분석을 해야 한다. 이번에 나온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바로 이렇게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병리적 증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정신 분석을 해 보는 책이다.


 원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연재된 것을 모은 책으로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 소속 9명의 학자들이 각자 쓴 9개의 글들이 모여있다. 저마다 다루는 사회 현상이 다르다. 백상현은 최근 들어 한껏 늘어난 멘토 의존 경향을 다루고, 김소연은 공부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현상을 다루며, 이성민은 한국에서만 유독 엄격하게 자리잡은 선후배 관계를 초점으로 한국 특유의 수직적 관계를 분석하며, 정지은은 오포세대에 들어와 달라져 버린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정신분석적으로 되짚는다. 정경훈은 날로 극심해지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를 분석하며 김석은 현재 한국을 가장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그리고 이만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혐오와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홍준기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세대 갈등과 한껏 높아져만 가는 불안 속에서 추구해야 할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며 마지막으로 김서영은 이런 '헬조선'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각 글마다 분석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가 살면서 피부로 부딪히는 것들로 알고 보면 우리 역시 한 번은 이유나 가치 판단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렇기에 라깡이나 바디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인용되고 이론들이 전개되지만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살갑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이 평이하기에 이해에 요구되는 허들이 그리 높지 않지만 말이다. 이런 글들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달리 보기'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의 예로 멘토 열풍에 대해 분석한 첫 글은, 지그문트 바우만도 사람들이 삶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기 보다 누군가 대신 선택을 알려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 기대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한 바 있는데, 이 글 역시 비슷한 논지에서 오히려 불안과 우울이야 말로 진정한 주체가 탄생하는 장소라고 말하면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텅 빈 풍경을 그 공간의 예로 든다. 사람들은 확고한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해당 사회의 지식과 권위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p. 20)하며 '진리의 순간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던 정체성의 지식들이 우리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한 순간, 이러한 초과에 대해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파악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현'(p. 27)되며 그러므로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공포 증상을 통한 내 정체성 붕괴의 경험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실은 시작(p. 31)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텅 빈 시간 속에 고독하게 내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더욱 기댈 멘토를 찾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시간과 공간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환영해야 할 것이라며 이렇게 평소 우리가 근절하고 싶었던 불안, 우울 그리고 공포가 가진 긍정적 면모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지식과 해야 할 공부는 오로지 내 주체를 길들이거나 위축시킬뿐인 사회의 지식과 권위의 잔여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횡단하여 내재된 균열이나 그것이 미처 당도하지 못한 외부의 것들이며 진리를 주장하는 그들의 기만에 찬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계보들에 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정신분석이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정신분석이라는 조금은 색다른 도구로 그간 익숙한 한국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도록 하기에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 책은, 지금 '헬조선'에 누벼져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았다면 꼭 읽어볼 것을 감히 추천드리고 싶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게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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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정혁현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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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의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의 원래 제목은 '절대적 되튐'이다.

 되튐은 원래 화학 용어로 어떤 물체나 입자에 전자기파나 고속 입자가 와서 닿을 경우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물체 또는 입자가 도로 튀어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되튐이란 부정(否定)의 운동이다. 그 되튐에 지젝은 '절대적'이란 말을 붙였다. 절대는 헤겔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대표적으론 '절대 정신'이 있다. 헤겔에게 절대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되튐이란 절대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측면에서 부정이란 정립에 대한 반정립으로, 절대적 부정이라 함은 아무리 해도 종합적 정립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절대적 부정이란 메워질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다.


 지젝은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의 코뮤니스트'로 평가 받는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하에 묻어 버린 거대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생명을 다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레닌 식의 대중 혁명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통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 전인 본래 모습의 '헤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헤겔의 진정한 유산을 아직 우리가 상속받지 못했다고 여긴다. 주체에 대해, 유물론에 대해, 혁명에 대해 헤겔은 우리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아니 이미 들린 말들도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지젝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언어를 찾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에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무엇보다 지우고자 하는 것. 그것은 악셀 호넷이나 로버트 피핀이 형성한 헤겔의 모습. 그러니까 '상호 인정'의 헤겔이다. 지젝은 그것을 '기가 꺽인 자유주의적 헤겔'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젝에게 헤겔의 생명은 인정이나 그 인정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종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이 아닌 적대, 영원히 종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부정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체부터 부정의 산물이다. 피핀의 상호 인정이 가능하려면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런 주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왜냐하면 피핀 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상징 질서 내에 있어야 하는데,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편입된 주체는 지젝이 보기에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상징적 좌표 들의 빽빽한 짜임 외부 뿐이다. 헤겔을 경유하여 지젝이 주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는 주체로 정립되는 순간 주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체는 결코 정립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행위를 통해 소급적으로 정립될 뿐이다. 현재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계기가 되어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젝의 주체다. 때문에 주체는 늘 완전한 자신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늘 자신에게 뭔가 빠져 있음을, 나 자신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렇게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그는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늘 과거로 소급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그 때 주체가 출현한다. 그 과거란 것은 언제나 소급하는 현재의 시점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소급을 통해 출현하는 주체도 한없이 임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체는 늘 부정에 의해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말하자면 되튐이야 말로 주체의 형성 작용인 것이다. 나아가 지젝은 그런 주체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 운동 역시 실은 부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상생을 말하고 조화를 말한다. 가진자들도, 가지지 못한 자들도 한결같이 서로에게 그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지젝은 그것이 그저 거짓 연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 인류학'에서 대서양 부족들 중 하나인 원네바고 부족 마을 건물들 공간적 배치에 대한 분석이다. 그 부족은 공교롭게도 '위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하는 집단과 '아래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 당하는 집단, 이렇게 두 집단으로 확고히 분리되어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두 집단에게 지금의 마을 공간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배하는 집단은 마을에 배치된 집들이 중앙을 둘러싼 하나의 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배 당하는 집단은  비가시적인 경계로 엄격히 분열된 두 개의 다른 마을로 보았다. 분명 같은 공간적 배치를 보았지만 해석은 이렇게나 달랐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인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시각에 좌우된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를 드러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실에다 투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은 일종의 바람(desire)이다. 그렇게 지젝은 두 집단의 시각이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외상적인 중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외상적인 중핵, '그것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를 조화로운 전체로 안정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상징화하거나 해명 혹은 내면화 하거나 그것과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적대'(p. 172)를 말한다. 지젝은 적대, 이것이야 말로 실재라 말한다. 주체는 외상을 통해 실재와 대면하는데, 바로 이 적대가 주체들의 외상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 조화, 상생 같은 단어는 사실 이런 적대를 교묘하게 위장한 가면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만 따져 봐도, 위에 있는 자들이 하는 조화나 상생의 진심은 사실 '우리가 하는 일에 제발 딴지 좀 걸지 마라. 네 놈들은 그저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돼!'인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에 있는 자들의 상생은 '너희들은 너무 많이 가졌어. 이제 그것을 나눠 줄 때야.'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분명한 적대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말로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젝은 본질이 이렇다면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진정 추구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구조적으로 가리워진 적대적 폭력을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내기 위해서다. 절대적 부정, 그것은 절대적 적대이기도 하다. 그 적대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상징적 조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물이다. 국가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어떻게든 그것을 세탁하려 하고 적대의 기를 꺾으려 하지만 지금의 백만 촛불처럼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단번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지젝은 그 출현의 순간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 많은 이들이 그의 믿음을 몽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당신은 잘못된 플랫폼에서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 뒤에 놓여 있는 압도적인 시간의 과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개인화 되었고, 인지 자본주의는 적대 보다는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주체란 어차피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과거의 그가 무엇이든 현재의 그에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주체가 되튐으로 형성된다고 믿고 있으니까.


 주체는 언제나 이미 그것의 재현 속에서 사라지는 X이다. (...) 물론 우리는 과거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가상적 차원 뿐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 새로 출현할 때, 이 새로운 것은 자신의 가능성 및 그 자신의 원인들과 조건들마저 소급적으로 창조한다. 하나의 잠재성은 과거의 현실 속으로 삽입될 수 있다.(p. 313)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하느냐를 통해 과거는 소급적으로 형성된다. 현재의 주체 행위에 되튀어 과거의 파장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고 그 시간과 함께 움직이는 상징 질서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는다. 그래서 되튐은 진정한 자유에 속한다. 지젝은 말한다. 칸트가 실천 철학에서 말한 자유는 사실 불가능한 실재라고.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는 우리가 한 행위가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였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로웠을 가능성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불안을 어떤 병리적인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이러한 외상을 길들일 가능성이다.(p. 527)


 병리적인 것, 불안, 우울증. 이것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 모든 적대적 증상들이야말로 내가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 말을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안정과 행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길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아닌 나가 되어 나인 것으로 알고 사는 가짜 나일 뿐이다. 절대적 되툄은 그런 가짜 나를 찢고 진짜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회가 은폐하고 왜곡하는 안정과 평화의 기만적인 가면 또한 찢는 과정이다. 그 기만의 언어와 정보 왜곡 속에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구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상처 입었던가. '박근혜 게이트'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를 길들인 대타자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민낯에 대해 많은 이들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적대의 불빛. 그것은 진정한 주체의 강물이었고 자유의 파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태어났고 역사도 태어났다. 바울의 이 말 그대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완전한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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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8-02-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봤습니다
 
유령 작가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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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해리스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령 작가'가 개정판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원래는 대필 작가를 뜻하는 '고스트 라이터'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엔 '유령 작가'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개봉된 영화 제목에 맞춘 것 같다.


 

 영화는 보았으나 소설론 이번에 처음 만났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70년대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간직한 영화였다. 사건 보다는 분위기, 인물 보다는 공간을 적극 활용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 성범죄 전력으로 많은 국가에서 입국이 금지된(입국만 하면 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망명자 신분이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전직 영국 수상 아담 랭에 감정 이입하는 듯해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소설에서 아담 랭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한 현재 영국의 국방장관 라이카트는 '아담 랭은 CIA의 연금을 받고 은퇴해서는 장관님과 그 놈의 국제형사재판소를 향해 'fuck you'(번역은 다른 말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쓸만한 단어가 아니기에 이리 표현함.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완 맥그리거가 소설과 같은 대사에서 이 단어로 말함.)를 날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 작가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추방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로 생각했어. 그리고 이봐, 랭이 망명자가 될 수 있겠어? 세계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국제형사재판소가 뭔지도 모르는 개똥 같은 미개국 몇 나라조차 어려울 거야. 비행기라는 건 늘 엔진에 문제가 생기거나 연료 공급을 해야 하는 법이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에 착륙을 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 (p. 342)


 로만 폴란스키가 이 글을 읽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울린 문장이건만. 왜 여기서 이런 기분을 느꼈나 하면, 만일 지금 누군가 내게 '유령 작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무래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것은 두 개로 하나는 '대필'이고, 다른 하나는 '비선 실세'라고.


 때문에 이 소설은 원래 저널리스트로 유명했던 로버트 해리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의 퇴임에 맞춰, 토니 블레어를 모델(소설의 전직 수상 아담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다. 실제 로버트 해리스는 랭에 대한 묘사 때문에 토니 블레어 측으로부터 고소 당할 뻔 했다고 한다.)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왠지 영국만의 또 소설 속 만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꼭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최근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또한 대필과 비선 실세가 아니었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된 시점인데도 그것에 무한 책임이 있는 장본인인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퇴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성의 사생활 운운 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자신이 피의자나 다름 없으면서 자신에게 있는 권력을 빌미로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과 검찰 조사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안에서는 검찰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하는 둥 막나가고 있으니 절로 라이카트의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에 마음의 결기를 다시 돋우는 것과 함께 울컥할 정도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잡고 싶다'고



 어쨌든 일단 이야기부터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자. 남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하는 전문 대필 작가, 즉 '고스트 라이터'인 주인공에게 이제 막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아담 랭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2주 전, 원래 회고록 집필을 맡고 있던 마이클 맥아라가 익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렸다. 정치인 회고록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쓸모 없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던 주인공은(계속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소설에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가 화자가 되어 말하는 1인칭 시점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완 맥그리거의 배역 이름은 그의 직업인 'The Ghost'로만 표기 되었다. 소설에서 그는 아담 랭을 처음 만날 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령입니다."라고. 이것이 소설 속 그의 진실이기도 하다. 로버트 해리스는 고유한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이름을 일부러 지워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진정 유령이다. 유령은 개입이 금지된 존재. 그렇게 관찰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바로 여기에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유령이란 한계를 통해 소설의 결말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종 업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이 말을 하여 그 일을 떠맡게 된다.


 요점인즉슨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우린 혹독한 시련을 통해 그 진리를 터득했죠. 책을 팔고 영화와 노래를 파는 건 이 심장입니다.(영화에서는 '가슴'이라 번역되었다.)(p. 35)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집필 기간이 겨우 한 달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 랭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그 집에서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맥아라가 써 놓은 초고가 마치 일급 기밀이라도 되는 듯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담 랭의 집에 가보니 과연 검색이 엄격하고 맥아라의 원고 역시 금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엄중히 관리하지? 고작 원고 아닌가?' 그런데 집필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에서 아담 랭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취임 시절 영장 없이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파키스탄인 네 사람을 미국이 불법 납치하도록 도왔다는 혐의였다. 퇴임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아담 랭. 그마나 자신이 협조한 미국의 지지로 간신히 일상을 버텨 간다. 한편 원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아담 랭을 정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하는 그의 아내 루스는 아담 랭이 비서 아맬리아와 바람을 피고 있다고 의심해 그에게 냉담하게 군다. 이런 비상 시국에 그것도 영 찜찜하기 그지 없는 대기 속에 홀로 놓이게 된 주인공은 심기가 영 편치 않다. 영화에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그가 일하는 방의 커다란 창문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흐린 날씨를 담아내는 것으로 표현한다.



 작업에 집중할 수 없던 그는 산책을 나가는데 그러다 우연히 맥아라의 시체가 발견된 해변에서 전날 밤 수상한 불빛들이 목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설마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맥아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맥아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된 주인공은 아담 랭과 회고록 집필을 하는 한편, 맥아라의 원고와 자료를 더욱 집중해 살피게 되고 그러다 맥아라가 비밀리에 남겨 놓은 단서들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맥아라의 자동차에 있는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그가 죽기 직전에 찾아간 장소에서 뜻밗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폴 에미트.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담 랭의 케임브릿지 대학의 연극 동아리 시절 아담 랭과 함께 연극을 했던 사람이었다. 맥아라는 바로 이 사람을 만난 뒤 돌아가다 죽은 것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 때부터 주인공은 아담 랭이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미국의 정책에도 반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조해 온 흑막에 연루되어 맥아라처럼 목숨마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아담 랭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하지만 소설은 우리의 예상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파국은 갑자기 찾아오고, 진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충격과 함께 밝혀지게 된다.



 소설의 원제는 'THE GHOST'다. 소설에서 유령 작가가 책을 쓰는 진짜 작가이듯, 여기서의 유령 역시 육체를 움직이는 실세 아니 실체를 뜻한다. 주인공이 아담 랭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고스트'라고 소개 한 것은 실은 해리스가 심어 놓은 아주 강한 단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담 랭은 정말로 '고스트'가 없는 존재로 밝혀지니까 말이다. 이 아담 랭은 앞서도 말했듯,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출신 수상으로 처음엔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을 주된 노선으로 걷겠다 천명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갈수록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강고한 협력 국가가 되어주는 등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부시의 푸들로 전락한 토니 블레어의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쟤 영혼(ghost)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길라임(이라 쓰고 박근혜라 읽는다.)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둥,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 운운할 때마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로버트 해리스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의문을 스스로 소설로 재밌게 풀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길라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나 정책에 대해 최순실을 넣으면 다 납득이 되는 것처럼, 로버트 해리스도 이해 안 되는 토니 블레어의 행태에도 그런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나왔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지는 '비선 실세'는. 그 비선 실세의 존재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라 섣불리 믿기지는 않는다 해도.


 스릴러 소설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문장이나 플롯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는 '유령 작가'는 오늘의 한국 현실을 대입해 읽어보면 더욱 재밌는 작품이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소설은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부디 승리로 끝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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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정유라 특혜 감사 결과 보도를 보면서 말이 안 나왔고 도대체 이대의 어떤 교수가 저렇게 파렴치 하고 치욕스런 일을 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중에 이인화도 있었군.

참 나, 그의 책을 읽었다는 게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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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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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책이 있다. 한 번 읽게 되면 굉장히 재밌는 것은 아닌데 어쩐지 중도에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책이.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가 그랬다. 왜일까? 끝까지 읽으면서도 이유는 잘 알 수 없었다. 뭔가 독특한 분위기 탓일까? 어쨌든 이 소설 상당히 음습하다. 세인의 상식 같은 것은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여성 세쓰코는 고다 기이치로라는 육십대 노인의 아내다. 머릿속으로 남편과 아내의 나이차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더 놀라운 사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고다 기이치로는 원래 세쓰코 엄마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엄마의 정부로 있었던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와 관계를 가졌다. 그렇다고 세쓰코가 남편에게만 충실한 여자도 아니다.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회계 사무실의 운영자 사와키. 그녀는 자주 사와키에게 안긴다. 하지만 남편에게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문득 유하 감독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세쓰코는 그 영화에서 엄정화가 분했던 캐릭터와 비슷하다. 그녀는 불륜의 상대인 감우성이 분한 남자가 이렇게 두 집 살림 하는 거 괜찮은 거야?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아. 그냥 조금 더 바쁘게 산다는 느낌 뿐이야." 세쓰코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남편과의 관계도 사랑이 아니라 돈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남편 기이치로가 뭔저 권했다. 스물 셋의 세쓰코에게 평생 돈 걱정 없이 여유롭게 살도록 해 줄테니 자신과 결혼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는 객실이 열 두 개인 모텔 '호텔 로열'의 사장이었다. 세쓰코는 결국 노인의 아내가 되었고 그 대가로 여유와 안정을 얻었다. 세쓰코에겐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가 있다. 바로 단가다. 그녀는 마을의 단가 짓는 모임에 다니고 있다. 남편의 종용에 자신이 지은 단가를 모은 책도 하나 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유리 갈대'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유리 갈대'란 제목을 가진 단가는 이러하다.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p. 44)


 단가의 앞 부분은 그대로 소설의 비유 같다. 세쓰코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의 세계란 정말로 축축한 땅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음습하게 축축하다. 일단 남편이 세쓰코가 사와키에게 안긴 날, 교통 사고를 당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다. 내리막길 커브를 직진으로 달렸다고 한다. 세쓰코는 남편을 병문안 온 엄마를,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까지 데려다 주었다가 거기서 실은 남편이 여기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가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추궁하자, 엄마 리쓰코는 세쓰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결혼한 뒤에도 우리 사이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어!'


 그건 그렇고, 세쓰코는 남편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남편이 죽기 전에 집을 나가버린 전처의 딸 고즈에와 만나게 해주려 한다. 사와키를 시켜 고즈에를 찾고 보니 고즈에는 생계가 궁지에 몰려 대마를 키우고 파는 일을 거들고 있다. 세쓰코는 고즈에에게 당장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며 앞으로 생활비 일체는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직 축축한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세쓰코의 단가 모임 중에 미츠코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에겐 남편과 마유미라는 일곱 살의 딸이 있는데, 하루는 미츠코가 세쓰코에게 딸을 맡기고 사라져 버린다. 알고 보니 딸 마유미는 아빠 그러니까 미츠코의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미츠코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세쓰코에게 맡긴 것이었다. 세쓰코는 마유미를 고즈에에게 돌보게 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축축한 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쓰코는 꿋꿋하게 버텨내려 한다. 해야 할 일은 하고 맡아야 할 책임은 도맡으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지 않고 굴러가도록 만든다. 쓰러지지 않는 도도한 갈대처럼. 그래서 유리 갈대는 세쓰코 자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녀를 흔들어대는 바람을 쉬이 그칠 줄 모른다. 더 기막힌 사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실은 남편이 6개월도 채 살지 못하는 시한부 생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내리막길의 커브를 직진한 것도 자살하려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드러난다. 붕괴는 이미 막을 수 없다. 마유미의 가족이 그랬듯, 벌써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버린 것이다. 이 소설이 세쓰코가 불에 타 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축축한 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것처럼. 애초부터 그녀의 삶은 그녀가 쓴 단가처럼 끝없는 유리관을 흐르는 모래 소리처럼 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그녀의 엄마 리쓰코에게 있었다. 엄마 리쓰코는 세쓰코에게 이런 삶을 내내 선사했던 것이다.


 "난 네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했어. 열다섯 살 나이에 엄마를 떠났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멀쩡한 엄마가 아니었거든. 시도 때도 없이 남자 출입이 끊이지 않았어. 동시에 양다리, 세다리 걸치고.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몰라. 술집을 하는 건지 매춘을 하는 건지. 내가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 못 본 척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돈까지 가로챘던 여자야. 딸을 쓰러뜨리는 남자 뒤에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 그래서 열다섯 살에 바로 집을 나와버렸어. 이런 내가 엄마인 척하면 너도 싫었을 거야."(p. 142 ~ 143)


 이토록 커다란 과거의 상처를 지닌 자가 어떻게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으려면 딱 하나, 과거와의 진정한 결별 뿐이다. 정녕 과거를 딛고 전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소설의 처음이 그녀의 죽음인지도 모른다. 불새처럼 죽음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소설은 그런 순간을 준비한다. 이 소설엔 이상한 연대가 있다. 부모 세대로부터 갖은 상처를 받은 자들이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가. 자신의 상처를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내어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소통으로 만들어지는 연대가. 그것이 마유미를 떠 안은 고즈에의 집에서, 그리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반전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유리 갈대'는 파격의 소설이다. 이런 내용의 소설에 흔히 나오는 용서라든가 화해 같은 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신 '유리 갈대'는 '썩은 것은 붕괴되어야 한다'고, '완전히 절멸시킨 뒤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소설엔 당신을 섬뜩하게 만드는 순간이 두 번 존재한다. 바로 그 순간에 소설은 진심을 내비친다. '당신도 이런 삶을 살고 있어? 그러면 끝내! 그 용기를 내가 빌려주겠어.'라고. 이것은 남성과 여성 관계에도 통용된다. 왜냐하면 소설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 세계에서 남성은 지배자로 군림한다. 여성은 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신체와 영혼에 지속적으로 새겨지는 아픔을 감내한다. 소설 속 남성들은 때로는 자비 없는 폭력을 또 때로는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지만 주체인 여성들을 여전히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똑같다. 여성들은 늘 식민지로 존재한다. 소설은 그들의 독립은 그들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결국 그녀들은 남성들의 식민지를 탈주하여 진정한 주체가 되어 강고한 연대로 독립과 자유의 영토를 만들고 꾸려 나간다. 아마도 내가 끝까지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이 정도로 단호하고 굳건한 의지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리 갈대'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네 번째로 소개되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이다. 난 이것 말고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만 읽었는데 그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이 작가 뭔가 심상치 않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유리 갈대'를 읽은 지금은 이 작가가 거의 기리노 나쓰오 급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사쿠라기 시노나 기리노 나쓰오 모두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평범한 주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이 가진 파격이나 전복성을 생각하면 그저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던 주부가 이력의 전부라는 게 얼른 믿겨지지 않는다. 공포 만화가로 유명한 이토 준지는 언젠가 자신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것은 일본 여성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기리노 나쓰오에 이어 사쿠라기 시노까지 만나고 보니, 왠지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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