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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선언 -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 현실문화 / 2016년 12월
평점 :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역사를 크게 3 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1단계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로 대표되는 이른바 '평등 페미니즘'으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 '여성은 제 2의 성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성으로, 그렇게 오로지 부정과 결여의 존재로만 있어왔던 것에 반기를 들고 남성과의 동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이라면, 2단계는 그런 평등의 추구가 실은 여성을 중성적인 주체로 만든다는 것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남성과 독립적인 여성만의 가치, 문화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 혹은 여성성의 강조도 그것을 너무 본질로 또 실체로 간주하다 보니, 그조차 남성과 남성성의 대비에서 나온 것으로 그 근원엔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고 또 이런 이분법적 구도 자체가 오히려 페미니즘이 진화하는데 족쇄가 된다는 이유로 아예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구도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페미니즘이 뒤이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주장한 제 3 단계다. 이렇게 페미니즘은 단일하지 않고 이 속에도 종적으로는 겹으로 쌓인 여러 시대적 지층들과 횡적으로는 저마다 다양한 주장을 하는 지형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지층과 지형들을 무시하고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규정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잘못을 피하고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크리스테바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역사적인 접근은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주장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빚어졌으며 또 어떠한 반박과 재정립을 통해 진화했는지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무에서 바로 툭 생겨나지 않는다. 개념들도 저마다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온갖 갈등들을 통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마모되고 형태를 잡아가는 것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매일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자신이 서 있는 진지를 방호하기 위해 이론적 무장을 했어야 했던 페미니즘은 더욱 그랬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 걸어온 저 과거의 발자취도 마땅히 돋보기를 들이댈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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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그것에 도움이 되는 책이 하나 나왔다. 제목은 '페미니즘 선언'. 부제가 재밌다.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년들의 목소리'. 페미니즘 역사에 대해 지식이 많으신 분들은 이 부제가 모두 페미니즘에 중요한 분기점들을 이루거나 페미니즘 진영을 들끓게 만들었던 선언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하는 대로 그런 선언문들을 모은 책이다. '레드스타킹 선언문'부터 메갈리아 남성 혐오 발언에 치를 떠는 분들이라면 더욱 기겁할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까지 모두 9편의 선언문이 담겨 있다. 이 책은 60년부터 79년 사이에 미국에서 발표된 선언문을 모은 것이지만 원서가 있어 번역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직접 선별하고 번역해 모은 것이다. 저자가 이 시기에 주목한 것은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이 폭발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뿌리부터 파헤쳐 바꿔내려고 시도한 거대한 운동'(p. 18)이었다. 그만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아직 그 시기만 천착해 다룬 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 래디컬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핵심을 가장 잘 담아낸 9편을 선정하여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지금 우리들 앞에 가져온 것일까? 거기엔 한 때 엄청 뜨겁게 타올랐던 메갈리안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메갈리안을 '한국적 맥락에서 태어나 자생적으로 성장한 래디컬 페미니스트'(p. 21)로 보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기에 메갈리안의 미러링이 증오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메갈리안의 미러링이 별종이 아니라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도 했었던 보편적인 것이라는 걸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려고 이 책을 발간한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한국의 자생적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이 그냥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한국 페미니즘 계보에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기 위해서.(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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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스타킹 심벌
이런 의도로 모인 9개의 선언문은 크리스테바의 구분에 따르면 모두 제 2 단계에 속한다. 남성과의 단순한 평등이 아닌 여성만의 독립적인 가치, 문화를 강조하고 구현하는 흐름에 있는 것이다. 9개의 선언문은 연대기 순이 아니다. 순서가 왜 이렇게 되어있는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나도 모른다. 그냥 내 생각엔, 가장 온건한 것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순서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있는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제목에서 받는 인상 그대로 정말 가장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레드스타킹 선언문'은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선언문 중 하나다. 이 선언문을 발표한 레드 스타킹 단체 자체가 래디컬 페미니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이 스스로를 '레드 스타킹'이라고 했던 것은 당시 남성 지식인들이 글을 쓰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해 조롱의 의미로 '블루 스타킹'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강하고 혁명의 색깔이기도 한 '레드'를 그녀들은 들고 나왔다. 사실 그들은 혁명을 지향했다. 그들은 현 사회가 모든 권력이 남성에게 집중된 남성 지배 사회라고 규정했고 모든 제도와 물리력을 동원하여 여성들을 열등한 자리에 묶어두기 위해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단적으로 '여성들은 억압받는 계급이다'라고 선언했다. 지금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모두 남성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들은 그런 개인 경험이 모두 정치적인 것이며 그런 경험들을 여성들 모두가 공유하여 여성의 계급 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남성 지배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그런 계급 의식을 지양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성은 더이상 남성보다 부족하거나 남성이 결여된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런 자기 검열까지 강요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부당한 권력 관계에 더 주목했다. 이렇게 '레드 스타킹 선언문'이 하나의 계급으로써의 여성을 확고하게 정립했다면 뒤이어 나오는 '드센년 선언문'은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 본 여성성이 아닌, 여성 고유의 여성성을 강조하고 정립하는 선언문이다. '드센년(bitch)'은 남성 지배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모든 여성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남자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는 모든 여성의 면모가 실은 가장 여성적인 것(true woman)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드센년 선언문'인 것이다.
드센 년은 여성을 노예로 부리는 사회 구조를,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적 가치를 위협한다.(p. 58)
드센 년은 여성이기전에 인간이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사회적 압박에 굴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아웃사이더가 된다.(p. 59)
'드센 년 선언문'은 남성의 시각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 남성 문화가 길들일 수 없는 여성 문화를 구현하려고 한다. 그렇게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이전에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간 존재로써의 여성을 강조한다. 이어서 나오는 '강간 반대 선언문'과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멈춰라' 선언문은 모두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뒤이어 나오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제 2 단계 페미니즘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 중 하나로 '레드스타킹'이 선언한 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은 본질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존재들의 해방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동성애, 인종 차별과도 맥이 닿는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과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한 때, 페미니즘 진영에서 레즈비언과 흑인은 거기서도 차별 받는 존재들이었다. 아무리 같이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있어도 레즈비언이나 흑인은 거부당하기 일수였다. 보다 더 열등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야는 오히려 더 넓어졌고 그들 때문에 페미니즘은 좀 더 넓게 확장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사회라면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범주는 사라진다.'는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을 점차 완화시켜 나갔고, '흑인 페미니즘 운동'은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흑인 남성 역시 차별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 차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더 넓게 포용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쏜 것으로 유명해 영화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 밸러리 솔래너스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아마도 이 책에 실린 선언문들 중 남성들에게 가장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 같은데, 그것은 아예 남성 자체를 여성 보다 열등한 존재로 재정립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솔래너스는 단적으로 남성이 실은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존재로, 남성이란 정말은 불완전한 여성이라고 정의한다.
불완전한 여자로서 남자는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즉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일생을 보낸다. 끊임없이 여성을 찾고, 여성과 친하게 지내며, 여성에게 녹아들어가기를 원한다.(p. 176)
그러므로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며, 현재의 남성 중심 사회를 모조리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신랄하게 설명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읽어보면 이 선언문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이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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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을 그린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이렇게 대략적으로 선언문들을 소개해 보았다. 글이 다소 길어졌기에 여기서 총평을 해 보자면, 저자가 의도한 대로, 당시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생각해 보면, 혐오는 편견에서 비롯되고 오해는 고정관념이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혐오와 오해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대상이 되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오랜 시간 종으로 횡으로 참으로 많은 변화와 다양한 맥락이 여기엔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선언'은 분명 그 변화와 맥락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한층 더 넓히도록 만든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지나칠 수 없는 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