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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1월
평점 :
로버트 해리스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령 작가'가 개정판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원래는 대필 작가를 뜻하는 '고스트 라이터'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엔 '유령 작가'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개봉된 영화 제목에 맞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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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았으나 소설론 이번에 처음 만났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70년대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간직한 영화였다. 사건 보다는 분위기, 인물 보다는 공간을 적극 활용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 성범죄 전력으로 많은 국가에서 입국이 금지된(입국만 하면 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망명자 신분이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전직 영국 수상 아담 랭에 감정 이입하는 듯해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소설에서 아담 랭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한 현재 영국의 국방장관 라이카트는 '아담 랭은 CIA의 연금을 받고 은퇴해서는 장관님과 그 놈의 국제형사재판소를 향해 'fuck you'(번역은 다른 말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쓸만한 단어가 아니기에 이리 표현함.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완 맥그리거가 소설과 같은 대사에서 이 단어로 말함.)를 날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 작가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추방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로 생각했어. 그리고 이봐, 랭이 망명자가 될 수 있겠어? 세계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국제형사재판소가 뭔지도 모르는 개똥 같은 미개국 몇 나라조차 어려울 거야. 비행기라는 건 늘 엔진에 문제가 생기거나 연료 공급을 해야 하는 법이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에 착륙을 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 (p. 342)
로만 폴란스키가 이 글을 읽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울린 문장이건만. 왜 여기서 이런 기분을 느꼈나 하면, 만일 지금 누군가 내게 '유령 작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무래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것은 두 개로 하나는 '대필'이고, 다른 하나는 '비선 실세'라고.
때문에 이 소설은 원래 저널리스트로 유명했던 로버트 해리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의 퇴임에 맞춰, 토니 블레어를 모델(소설의 전직 수상 아담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다. 실제 로버트 해리스는 랭에 대한 묘사 때문에 토니 블레어 측으로부터 고소 당할 뻔 했다고 한다.)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왠지 영국만의 또 소설 속 만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꼭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최근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또한 대필과 비선 실세가 아니었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된 시점인데도 그것에 무한 책임이 있는 장본인인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퇴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성의 사생활 운운 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자신이 피의자나 다름 없으면서 자신에게 있는 권력을 빌미로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과 검찰 조사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안에서는 검찰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하는 둥 막나가고 있으니 절로 라이카트의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에 마음의 결기를 다시 돋우는 것과 함께 울컥할 정도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잡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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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일단 이야기부터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자. 남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하는 전문 대필 작가, 즉 '고스트 라이터'인 주인공에게 이제 막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아담 랭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2주 전, 원래 회고록 집필을 맡고 있던 마이클 맥아라가 익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렸다. 정치인 회고록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쓸모 없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던 주인공은(계속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소설에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가 화자가 되어 말하는 1인칭 시점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완 맥그리거의 배역 이름은 그의 직업인 'The Ghost'로만 표기 되었다. 소설에서 그는 아담 랭을 처음 만날 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령입니다."라고. 이것이 소설 속 그의 진실이기도 하다. 로버트 해리스는 고유한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이름을 일부러 지워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진정 유령이다. 유령은 개입이 금지된 존재. 그렇게 관찰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바로 여기에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유령이란 한계를 통해 소설의 결말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종 업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이 말을 하여 그 일을 떠맡게 된다.
요점인즉슨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우린 혹독한 시련을 통해 그 진리를 터득했죠. 책을 팔고 영화와 노래를 파는 건 이 심장입니다.(영화에서는 '가슴'이라 번역되었다.)(p. 35)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집필 기간이 겨우 한 달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 랭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그 집에서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맥아라가 써 놓은 초고가 마치 일급 기밀이라도 되는 듯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담 랭의 집에 가보니 과연 검색이 엄격하고 맥아라의 원고 역시 금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엄중히 관리하지? 고작 원고 아닌가?' 그런데 집필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에서 아담 랭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취임 시절 영장 없이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파키스탄인 네 사람을 미국이 불법 납치하도록 도왔다는 혐의였다. 퇴임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아담 랭. 그마나 자신이 협조한 미국의 지지로 간신히 일상을 버텨 간다. 한편 원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아담 랭을 정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하는 그의 아내 루스는 아담 랭이 비서 아맬리아와 바람을 피고 있다고 의심해 그에게 냉담하게 군다. 이런 비상 시국에 그것도 영 찜찜하기 그지 없는 대기 속에 홀로 놓이게 된 주인공은 심기가 영 편치 않다. 영화에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그가 일하는 방의 커다란 창문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흐린 날씨를 담아내는 것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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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집중할 수 없던 그는 산책을 나가는데 그러다 우연히 맥아라의 시체가 발견된 해변에서 전날 밤 수상한 불빛들이 목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설마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맥아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맥아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된 주인공은 아담 랭과 회고록 집필을 하는 한편, 맥아라의 원고와 자료를 더욱 집중해 살피게 되고 그러다 맥아라가 비밀리에 남겨 놓은 단서들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맥아라의 자동차에 있는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그가 죽기 직전에 찾아간 장소에서 뜻밗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폴 에미트.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담 랭의 케임브릿지 대학의 연극 동아리 시절 아담 랭과 함께 연극을 했던 사람이었다. 맥아라는 바로 이 사람을 만난 뒤 돌아가다 죽은 것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 때부터 주인공은 아담 랭이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미국의 정책에도 반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조해 온 흑막에 연루되어 맥아라처럼 목숨마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아담 랭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하지만 소설은 우리의 예상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파국은 갑자기 찾아오고, 진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충격과 함께 밝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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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원제는 'THE GHOST'다. 소설에서 유령 작가가 책을 쓰는 진짜 작가이듯, 여기서의 유령 역시 육체를 움직이는 실세 아니 실체를 뜻한다. 주인공이 아담 랭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고스트'라고 소개 한 것은 실은 해리스가 심어 놓은 아주 강한 단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담 랭은 정말로 '고스트'가 없는 존재로 밝혀지니까 말이다. 이 아담 랭은 앞서도 말했듯,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출신 수상으로 처음엔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을 주된 노선으로 걷겠다 천명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갈수록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강고한 협력 국가가 되어주는 등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부시의 푸들로 전락한 토니 블레어의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쟤 영혼(ghost)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길라임(이라 쓰고 박근혜라 읽는다.)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둥,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 운운할 때마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로버트 해리스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의문을 스스로 소설로 재밌게 풀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길라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나 정책에 대해 최순실을 넣으면 다 납득이 되는 것처럼, 로버트 해리스도 이해 안 되는 토니 블레어의 행태에도 그런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나왔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지는 '비선 실세'는. 그 비선 실세의 존재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라 섣불리 믿기지는 않는다 해도.
스릴러 소설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문장이나 플롯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는 '유령 작가'는 오늘의 한국 현실을 대입해 읽어보면 더욱 재밌는 작품이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소설은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부디 승리로 끝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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