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정혁현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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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의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의 원래 제목은 '절대적 되튐'이다.

 되튐은 원래 화학 용어로 어떤 물체나 입자에 전자기파나 고속 입자가 와서 닿을 경우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물체 또는 입자가 도로 튀어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되튐이란 부정(否定)의 운동이다. 그 되튐에 지젝은 '절대적'이란 말을 붙였다. 절대는 헤겔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대표적으론 '절대 정신'이 있다. 헤겔에게 절대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되튐이란 절대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측면에서 부정이란 정립에 대한 반정립으로, 절대적 부정이라 함은 아무리 해도 종합적 정립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절대적 부정이란 메워질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다.


 지젝은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의 코뮤니스트'로 평가 받는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하에 묻어 버린 거대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생명을 다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레닌 식의 대중 혁명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통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 전인 본래 모습의 '헤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헤겔의 진정한 유산을 아직 우리가 상속받지 못했다고 여긴다. 주체에 대해, 유물론에 대해, 혁명에 대해 헤겔은 우리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아니 이미 들린 말들도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지젝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언어를 찾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에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무엇보다 지우고자 하는 것. 그것은 악셀 호넷이나 로버트 피핀이 형성한 헤겔의 모습. 그러니까 '상호 인정'의 헤겔이다. 지젝은 그것을 '기가 꺽인 자유주의적 헤겔'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젝에게 헤겔의 생명은 인정이나 그 인정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종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이 아닌 적대, 영원히 종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부정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체부터 부정의 산물이다. 피핀의 상호 인정이 가능하려면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런 주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왜냐하면 피핀 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상징 질서 내에 있어야 하는데,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편입된 주체는 지젝이 보기에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상징적 좌표 들의 빽빽한 짜임 외부 뿐이다. 헤겔을 경유하여 지젝이 주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는 주체로 정립되는 순간 주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체는 결코 정립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행위를 통해 소급적으로 정립될 뿐이다. 현재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계기가 되어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젝의 주체다. 때문에 주체는 늘 완전한 자신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늘 자신에게 뭔가 빠져 있음을, 나 자신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렇게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그는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늘 과거로 소급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그 때 주체가 출현한다. 그 과거란 것은 언제나 소급하는 현재의 시점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소급을 통해 출현하는 주체도 한없이 임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체는 늘 부정에 의해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말하자면 되튐이야 말로 주체의 형성 작용인 것이다. 나아가 지젝은 그런 주체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 운동 역시 실은 부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상생을 말하고 조화를 말한다. 가진자들도, 가지지 못한 자들도 한결같이 서로에게 그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지젝은 그것이 그저 거짓 연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 인류학'에서 대서양 부족들 중 하나인 원네바고 부족 마을 건물들 공간적 배치에 대한 분석이다. 그 부족은 공교롭게도 '위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하는 집단과 '아래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 당하는 집단, 이렇게 두 집단으로 확고히 분리되어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두 집단에게 지금의 마을 공간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배하는 집단은 마을에 배치된 집들이 중앙을 둘러싼 하나의 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배 당하는 집단은  비가시적인 경계로 엄격히 분열된 두 개의 다른 마을로 보았다. 분명 같은 공간적 배치를 보았지만 해석은 이렇게나 달랐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인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시각에 좌우된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를 드러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실에다 투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은 일종의 바람(desire)이다. 그렇게 지젝은 두 집단의 시각이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외상적인 중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외상적인 중핵, '그것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를 조화로운 전체로 안정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상징화하거나 해명 혹은 내면화 하거나 그것과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적대'(p. 172)를 말한다. 지젝은 적대, 이것이야 말로 실재라 말한다. 주체는 외상을 통해 실재와 대면하는데, 바로 이 적대가 주체들의 외상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 조화, 상생 같은 단어는 사실 이런 적대를 교묘하게 위장한 가면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만 따져 봐도, 위에 있는 자들이 하는 조화나 상생의 진심은 사실 '우리가 하는 일에 제발 딴지 좀 걸지 마라. 네 놈들은 그저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돼!'인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에 있는 자들의 상생은 '너희들은 너무 많이 가졌어. 이제 그것을 나눠 줄 때야.'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분명한 적대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말로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젝은 본질이 이렇다면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진정 추구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구조적으로 가리워진 적대적 폭력을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내기 위해서다. 절대적 부정, 그것은 절대적 적대이기도 하다. 그 적대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상징적 조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물이다. 국가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어떻게든 그것을 세탁하려 하고 적대의 기를 꺾으려 하지만 지금의 백만 촛불처럼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단번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지젝은 그 출현의 순간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 많은 이들이 그의 믿음을 몽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당신은 잘못된 플랫폼에서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 뒤에 놓여 있는 압도적인 시간의 과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개인화 되었고, 인지 자본주의는 적대 보다는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주체란 어차피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과거의 그가 무엇이든 현재의 그에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주체가 되튐으로 형성된다고 믿고 있으니까.


 주체는 언제나 이미 그것의 재현 속에서 사라지는 X이다. (...) 물론 우리는 과거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가상적 차원 뿐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 새로 출현할 때, 이 새로운 것은 자신의 가능성 및 그 자신의 원인들과 조건들마저 소급적으로 창조한다. 하나의 잠재성은 과거의 현실 속으로 삽입될 수 있다.(p. 313)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하느냐를 통해 과거는 소급적으로 형성된다. 현재의 주체 행위에 되튀어 과거의 파장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고 그 시간과 함께 움직이는 상징 질서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는다. 그래서 되튐은 진정한 자유에 속한다. 지젝은 말한다. 칸트가 실천 철학에서 말한 자유는 사실 불가능한 실재라고.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는 우리가 한 행위가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였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로웠을 가능성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불안을 어떤 병리적인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이러한 외상을 길들일 가능성이다.(p. 527)


 병리적인 것, 불안, 우울증. 이것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 모든 적대적 증상들이야말로 내가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 말을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안정과 행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길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아닌 나가 되어 나인 것으로 알고 사는 가짜 나일 뿐이다. 절대적 되툄은 그런 가짜 나를 찢고 진짜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회가 은폐하고 왜곡하는 안정과 평화의 기만적인 가면 또한 찢는 과정이다. 그 기만의 언어와 정보 왜곡 속에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구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상처 입었던가. '박근혜 게이트'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를 길들인 대타자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민낯에 대해 많은 이들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적대의 불빛. 그것은 진정한 주체의 강물이었고 자유의 파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태어났고 역사도 태어났다. 바울의 이 말 그대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완전한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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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8-02-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