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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1. '크로스비'로 가는 길
회의론자로도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귀납법'을 두고 그것은 인간이 하루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으니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이 단순한 논리는 정말은 내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그 막연한 두려움을 과거의 사실을 통해 애써 잊어보려는 작위적 환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마치 이러한 흄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후일 버트란드 러셀은 귀납법이 가진 오류를 이렇게 말한다. '어제도 먹이를 주었고 오늘도 먹이를 주었다고 해서 닭은 내일도 주인이 먹이를 줄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내일은 주인이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지도 모른다'
인생은 변화무상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내일 일을 전혀 모르는 우리에겐 삶이란 문은 계속 불확실성으로 열려있다. 톨스토이의 우화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신의 물음에 그것은 바로 '미래를 아는 능력'이라고!
삶에 내재된 미래의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유한성을 직면했을 때의 반응이다. 그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의 말마따나 유한성의 자각이 무한성의 동경을 낳아 그렇게 종교적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처럼 오히려 그 무한성을 애써 잊도록 만들수도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도 같이 불가해한 것은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2009년의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또한 삶의 불확실성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이란 우리네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삶의 불확실성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건 바로 그 불가해함에 있다. 앞서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일찌기 이 무한성에 대해 사유했었다.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그 '무한성'이 바로 '타자'라는 존재 자체가 된다. 즉, 우리가 내일 내가 어떻게 될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나는 타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타자란 마주한 우리에게 있어 완전히 불가해한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 역시 '타자의 얼굴'이야 말로 우리를 무한성에게로 인도하는 체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란 그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있어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무한성의 체험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우리의 세계란 것이 그저 하나의 단일한 개체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환기 속에서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단순하게 말해서 두 가지 반응중의 하나를 하게 된다. 즉,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타자를 무시하여 내 세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이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와 같은 것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인 이유도 어쩌면 그것을 강조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소설은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해 그녀가 수없이 마주치는 타자와의 순간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가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리뷰란 일종의 '복기'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텍스트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서 작가가 걸어간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작가가 이리저리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아 놓은 사유의 편린들을 찾아다니며 헤아려 보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도 그저 따라가 보려 한다. 그려면서 되도록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을 충실히 재현하려 한다.
2. 스트라우트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여기,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키터리지는 오랜 교편 생활을 뒤로하고 이제는 은퇴하여 여유롭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조금 독선적인 성격으로, 남의 말을 들으려 하거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늘 아이들을 판단해 왔던 경험 탓에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한 눈에 파악하려든다. 그래서 어쩐지 그 시선이 차갑게 느껴지고 주눅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성격, 그녀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그녀는 인생이 늘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항구적이라고 여긴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누구에게나 늘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편 헨리처럼 말이다. 아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녀에게 하필이면 '수학교사'라는 직업을 주었던 것도 그러한 올리브의 인생관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소설 전부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남편 헨리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속마음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에게서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뒤에서 받아서는 다시 또 다음으로 넘겨주는, 뭐랄까 마치 바톤을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연쇄 작용들은 사실 올리브 키터리지의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올리브 키터리지가 어떻게 변화를 맞아들이게 되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된다.
2 - 1 : '약국'과 '밀물'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남편 헨리가 중심이 되는 '약국'으로 부터 시작해 올리브가 변화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강'으로 끝난다. 헨리가 처음에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는 헨리와 올리브가 살고 있는 해안가의 마을 '크로스비'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다. 헨리는 마치 그 마을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모습과도 같다. '크로스비'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육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육지는 고정적인 삶의 모습을, 바다는 '타자'와도 같이 어떤 불가해한 것이며,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이미지라는 정도로만 얘기해 두자.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두 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는 걸 뜻한다. 해안가의 모래사장이 늘 밀물과 썰물이 넘나드는 것 처럼.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해안가 마을 크로스비에 사는 주민들 또한 늘 마음 한 구석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약국에 새로이 들어온 종업원 데니즈 때문에 불현듯 불륜의 유혹에 시달리는 헨리와 뒤늦게 깨달은 데이즈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하먼이다. 데니즈와 데이즈. 이 두 여자는 이름도 비슷하지만 둘 다 모두 헨리와 하먼에게 그들이 걸어온 시간속에 쌓아왔던 안정된 세계로 부터 벗어나 새로이 낯선 변화속으로 뛰어들기를 갈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경계에 서 있는 마을'답게 그들이 쉽게 그러지 못하도록 붙잡고 육지로 이끄는 중력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며 그 세월동안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삶이며, 그 삶을 같이 꾸려온 '동반자'이다. 헨리에겐 올리브가, 하먼에겐 보니가 마치 깃대 처럼 그들을 매어 붙든다. 그렇게 헨리와 하먼은 간절히 바다를 꿈꾸지만 그들의 염원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그저 한 곳에서 나부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된다.
여기서 굳이 헨리와 하먼을 인용하는 까닭은 결국 이 둘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반복이며 사실은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헨리와 데니즈의 관계는 '굶주림'에서의 하먼과 데이지의 관계로 반복된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다. 남은 건 그들의 선택 뿐이다. 거기에 한 사람의 죽음이 끼어든다. 그것도 같다. 여기서 타인의 죽음은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았던 삶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더욱 더 확실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계기들은 주인공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의도된 장치들이다.(의도는 이미 반복에 개입되어 있으니까, 이 장치들 또한 의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하먼은 데이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개심술 수술 뒤에 살아서 깨어날지 죽어서 깨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던 머크 루핀을 떠올린다. 여기서 보듯, 하먼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하지만 같은 걸 깨달았던 헨리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변명을 해대면서 데니즈에 대한 미련으로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결국 '올리브'란 깃대에 매어달리는 인생을 택해버리고 만다. 헨리가 그야말로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이 선택은 왠지 수긍이 간다. 크로스비는 아주 유래가 깊은 마을로 그 기나긴 세월동안 이렇다 할 변화없이 그저 세월속에 웅크려 왔었던 마을이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늘 바다를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속으로 삭이면서 버텨왔던 마을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헨리가 안주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스트라우트가 깔아놓은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다. 우리는 헨리의 눈을 통해 올리브 키터리지의 단단한 인간성을 본다. 유악한 헨리의 눈인지라 그 단단함은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헨리가 속한 소우주의 중심이었고 어마어마한 인력으로 헨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력은 사실 헨리 자신의 어머니로 부터 그대로 이어져온 인력이다. 올리브는 자신의 시어머니 플린을 싫어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기에 플린과 올리브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도 헨리가 올리브와 같이 사는 건 자신의 어머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 오래도록 길들여져 버린 인력 탓에 헨리는 갈망을 속으로 삭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약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등대처럼 높고 강인한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이어져온... 하지만 이제 작가는 이 단단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자아를 서서히 깨뜨려 갈 것이다.
마치 그런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번째의 단편 제목이 '밀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여기서 앞에 '크로스비'의 마을을 설명하면서 단순하게 얘기했던 바다가 가지는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에서 바다가 전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이것 밖에 없다. 여기서 오래도록 고향을 떠났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고향을 찾아온 케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성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유전적으로 결정되어졌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똑같이 고정불변의 삶이라는 심연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앞서 헨리 역시도 그가 떠나지 못했던 건 사실은 '어머니의 우주'였음이 드러났다. 어쩌면 케빈은 그렇게 헨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유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케빈이 끝내 다다른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케빈과 올리브는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눈다. 자살의 결심은 삶이라는 육지의 끝에 서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수도 있으리라. 기이하게도 올리브 역시도 계속 자살한 아버지를 얘기한다. '약국'에서 보던 올리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독자들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생경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어떤 변화이다. 그리고 제목인 '밀물'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바다가 몰려옴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임' 것임을 보여준다. 가장 고정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바다 앞에서 죽음을 읊조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작가가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 역시 주목을 끈다. 그녀는 바다를 소용돌이 치는 아주 변화무상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바다는 그렇게 한점의 고정적인 모습도 가지지 않는 곳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그런 변화무상한 모습은 케빈이 구하게 되는 패티가 입고 있는 치마의 휘몰아치는 모습으로 까지 강조된다. 그렇게 케빈은 결국 패티를 구하게 된다. 그가 힘차게 잡고 있는 패티의 팔뚝은 바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듯 하다. 그리고 작가는 아울러 패티의 팔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는 것으로 케빈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앞의 두 에피소드를 일부러 길게 얘기한 것은 이 두 에피소드가 올리브 키터리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삶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변화를 상징하는 바다의 이미지이다. 이건 이 소설에서 일종의 기초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기초 작업을 다진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그 단단했던 삶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2 - 2 :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 까지
'피아노 연주자'에서 안젤라 오미라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현재의 삶과 유사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그녀가 연주하는 래퍼토리 만큼이나 그녀의 삶은 완벽한 하나의 경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그녀가 느닷없이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뒤이은 '작은 기쁨'에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앤'을 며느리로 맞게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자신의 품에서 있을 줄만 알았던 크리스토퍼가 어느날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앤'과 결혼한다는 것은 오미라가 뺨을 맞는 충격과 맞먹었을 것이다. 이건 그녀가 오미라처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던 그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오미라는 다시 그 경계안에 안주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앤'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시작이다. 올리브의 훔치는 행위 즉, 일종의 범죄는 이 소설에서 올리브가 둘러쓰고 있는 단단한 삶의 외피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범죄'에 내포된 의미 그대로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질서를 유린하고 넘나드는 것이 바로 범죄의 본질 이니까. 여기서 시작된 균열의 조짐은 훨씬 뒤의 에피소드인 '불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다음에 헨리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먼이 등장하는 '굶주림'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정신적으로)갈라지게 되는'다른 길'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에피소드들이 분명한 의도하에 배치되었음이 드러난다. 작가는 앞의 두 에피소드로 기초 공사를 끝낸 다음,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까지, 올리브의 세계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바다의 이미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다는 '굶주림'에서 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굶주림'은 마리나 카페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이자 '밀물'에서 케빈이 변화를 받아들였던 바로 그 곳이다. '굶주림'의 시작이 바로 마리나 카페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역시 자신의 삶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커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애정을 가지게 되는 데이즈가 사는 곳 역시 바닷가에 위치한 '휴가용' 별장(얼마나 세심한 설정인가)이다. 이렇게 바다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하먼 역시 케빈처럼 헨리와는 다르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가 가진 의미는 뒤이은 '다른 길'에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서로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 곳이 바로 하필이면 '바다 위'라는 것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만큼 이르면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바다의 이미지를 무시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바다는 변화를 의미하고 바다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헨리 역시 바다 위에서 올리브와 결별하지 않는가! 그렇게 바다 위에서 올리브 역시도 이제 지금의 세계가 예전과는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절감한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헨리 역시 이제는 멀어져 버렸다. 그 바다 위에서 올리브는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했던 한 아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2 - 3 : '겨울 음악회' 부터 '불안' 까지
'겨울음악회' 부터 '불안'까지 이제 그녀는 아주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마치 늪에서 헤어나려면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봐야 한다는 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다른 길'에서 올리브가 느끼는 헨리와 이제는 결별했음에 대한 예감은 '겨울 음악회'에서 제인의 남편 '밥'의 외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밥의 외도로 의심되어지는 장소가 '마이애미'에서 드러나듯이 밥 역시 헨리처럼 바다를 통해 변화를 마주한 것이 암시된다. 밥이 그러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음악당 지붕이 언제 무너질 지 모른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삶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제인은 밥의 고백을 듣고도 그의 곁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헨리와 완전히 떨어져 버렸음을 예감한 뒤의 올리브 마음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책망하느라 흘려보내기 싫기 때문이라고 제인은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힌다. 헨리와 밥의 고백은 그녀들의 삶에 변화의 계기를 줄 수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제 그러기엔 너무도 늙어버렸음을 탓하며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짧은 여생 동안 남은 건 서로 밖에 없다고 자위하며... 그런데 그것은 '약국'에서 헨리가 데니즈를 포기했었던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겨울이야기'에서 헨리가 했던 것을 올리브로 하여금 반복하게 만든다. 그렇게 헨리가 데니즈가 포기하며 걸었던 길을 올리브도 똑같이 걷도록 만든다. 물론 의도적이다. 그렇게 포기했었던 헨리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것이다. 헨리의 결심을 올리브가 반복했다는 것은 올리브 역시 헨리와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 암시한다. 그렇게 뒤이어 '튤립'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튤립'은 소설에서 가장 육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리브가 가꾸는 정원의 '튤립'은 더욱 더 육지적인 그렇게 '고정적인 삶'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가장 육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제목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곳이 인상적이다. 자녀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집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라킨 부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야먈로 육지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고립된 라킨 부부는 올리브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심지어 라킨 부부는 한 집에서 일층과 이층으로 서로 따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에피소드 내내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홀로 고립된 올리브이다. 헨리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낸다. 육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단편이 보여주고 있는 게 오로지 고립이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거기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 보다 더 고립된 라킨 부부에서 위안 받으려다 오히려 조롱까지 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강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고 묘사한다. 변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 그녀는 가장 고립된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거기에서 그녀가 듣게되는 건 욕 뿐이었다. 물로 상징된 변화의 이미지와 육지로 상징된 고립의 이미지가 선명히 대조를 이루며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뒤의 에피소드의 제목인 '여행바구니' 처럼 희망을 가지려 애쓴다. 그리고 희망은 두번째 결혼으로 뉴욕으로 이사한 아들의 부름으로 나타난다. 올리브는 희망에 차서 뉴욕으로 떠난다.(떠남은 그 이전 에피소드인 '병속의 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배는 아무 곳으로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뒤이은 '불안'에서 올리브의 여행이 아무런 결과를 얻게되지 못하리란 걸 암시한다.) 하지만 결국 올리브가 마주하게 된 것은 '여행바구니'가 그저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듯이 아들과의 완전한 결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절감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불안'의 끝장면이 떠나려는 '공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제 그녀에게 떠나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떠남일까? 단순히 크로스비...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있을 수 있었던 그 곳으로? 아니다. 작가는 여기서 그 떠남이 바로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떠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으로의 떠남'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보안요원의 말을 과감히 무시하는 일종의 '공무집행방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여준다.
2 - 4 : '범죄자' 와 '강'
그리고 이 범죄의 단초는 이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엄격한 도덕적 질서를 강요받아오던 레베카가 처음으로 물건을 도둑질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범죄자'란 규정된 사회적 질서를 가로지르는 자를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를 넘나듬이고 올리브가 '불안'의 끝에서 했던 것도 바로 이 넘나듬이었다. 레베카는 이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 단편의 말미에 레베카의 집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우리는 여기서 '불안'에서 끊임없이 올리브를 괴롭히던 소리를 떠올린다.)로 가득차는 것은 바로 이제 올리브와 레베카가 단단히 서 있던 육지가 완전히 유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레베카의 과거 역시 올리브의 세계 만큼이나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었음을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뒤이어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 '강' 이 나타난다.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두 번째의 제목이다. '밀물'에서 자살까지 각오했던 케빈이 다시 '패티'라는 변화를 받아들였듯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올리브,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않았음을 깨달아버린 올리브가 이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이 제목에서 부터 감지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규칙적으로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를 한다. 헨리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매일 바다를 마주하고 달리고 있다. 산책로, 달리기, 바다... 이 에피소드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게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세상과 자신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바로 그 산책로에서 그녀와 인연이 될 잭 케니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올리브는 하게 된다. 일찌기 경멸해 왔었고 거기다 산책로에서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데이트 비슷한 자리에서 알게 된 바 대로,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부시에게 표를 던진 공화당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브는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변화가 전혀 낯설지 않다. 앞서 얘기한 대로 작가가 아주 공을 들여 세심하게 올리브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불안'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한다. 그녀는 아들의 집에서 세입자로 인해 한때 자신 역시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려 했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거의 기억으로 부터 이어지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그녀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어쩐지 헤세의 '데미안'에서 그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아브락사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 소리는 기억의 환기이자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신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에서 '범죄자' 그리고 '강'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는 보기에 따라 어쩌면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강'에서 나타나는 올리브의 변화가 그저 속절없이 늙어감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에서 끊임없이 울려나오는 이 '소리'는 그 때부터 이미 올리브가 변화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미리 감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강'에서의 그 변화가 타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올리브 스스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범죄자'에서 레베카가 자신의 의지로 가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장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 또 다른 시작
'강'에서 변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모습 처럼 그렇게 자신의 단단하고도 완고한 껍질을 깨고 변화를 받아들이듯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작가가 타자의 얼굴로 체현되는 무한성에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열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달리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우기 주제를 위해 일련의 의도를 가지고 세심하게 아로 새긴 암시와 상징들은 이 소설 전체가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분석해 왔던 것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것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엮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것에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아무튼, 내가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많이 읽었지만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공감의 깊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한 상찬은 많은데도 막상 이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세밀하게 연출되어 있는지, 그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들에 담긴 설정, 묘사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쓰여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읽어 보면 스트라우트가 이 소설을 꽤 공을 들여 세공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느낀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흔적들을 찾아 밝혀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화에만 왜 하필이면 굳이 저렇게 장면을 찍었을까 궁금증이 있으랴? 문학도 영화처럼 결국은 작가의 연출이고 보면 왜 작가가 그렇게 설정이나 연출을 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은 그래도 세세히 일러주는 평론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외국소설의 경우에는 그나마도 없는 형편인지라 아마도 이런 리뷰만이 소설을 읽다가 생긴 궁금점들을 유일하게 해소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리뷰를 썼다. 혹시나 소설을 읽고 '좋다. 훌륭하다. 하지만 왜 좋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라고 의문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서정적인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처럼 뭔가 세세한 짚어보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서... 그렇게 이 리뷰를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더욱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대화'라는 건 타인을 받아들이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올리브 키터리지'로 부터 느꼈던 것을 내면화하는 복기의 과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