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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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렌델은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난해합니다..
 씌여진 문장 하나하나는 마치 동 터오는 아침 햇살을 흠뻑 머금은
 이슬 처럼 영롱하건만, 전체를 놓고보면 그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찬 암호문을 받아든 셜록 홈즈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렌델은 마치 사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아서
 스스로 미로일 것 알면서도 기꺼이 그 곳에서 헤메이게 만드는군요.
 그것도 열정적으로...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난 가드너가 촘촘히 짜 놓은 거미줄 같은
 그렌델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출구로 보이는 듯한 길들이 각각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저의 앞에 유혹적으로 열려있더군요

 저는 얼른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영원히 의미를 잃고
 헤매이게 될 것을 알기에...
 그 엄습하는 두려움 으로 테세우스를 미궁 속에서 건져내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습니다.

 여러 번 서성이는 걸음 속에서 불현듯 어둔 밤, 등대불에 우연히 포착된 어선과도 같이
 그런 실 같은 것을 잡았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걸음을 뗍니다. 그것이 이 미로속에서 날 빠져나가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내가 잡은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시(詩)'입니다.
 그렌델로 하여금 매혹시켜버렸던 셰이퍼가 읊조리던 바로 그 '시'...
 
 그런데 시란 무엇입니까?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를 떠올립니다. 하이데거는 시를 '진리의 현현'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지었고 존재란 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존재자들에게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 존재가 유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존재자들 너머 오로지 타자의 영역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렇게 '시'라는 것 역시 절대적으로 타자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죠.
 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아서 유한한 의미망으로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죠.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미끌어지듯 빠져나가는 작은 물고기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소설 그렌델에서 그의 어미가 '물고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것. 마치 고운 모래처럼 손에 쥐면 쥘 수록 빠져나가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특성을 동일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의 특징 때문에 오로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철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테면 레비나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들이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특히 이런 시의 기능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죠.(빈곤한 기억력 탓에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란 정체성을 동일화시키려는 외부의 강요로 부터 벗어나려는 언어적 투쟁이다.'라고...

 저는 바로 이것이 그렌델을 매혹시켰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렌델은 인간의 기준에서 타자입니다.
 그건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라 숙명적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압니다. 그건 인간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그래서 그건 그에게 유혹이 됩니다.
 그렌델은 고독합니다. 어미와 함께 자신의 종족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입니다.
 고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태.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인간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구요.  농구 골대가 너무 높으면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지만
 낮으면 누구나 던져보려는 유혹을 가지듯이 그건 엄청난 유혹이죠.
 하지만 그도 압니다. 그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을 영원히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그는 서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에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히 타자인 용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계이죠.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완벽히 구분됩니다. 용의 세계는 동굴로 표상되고 인간 세계는
 연회장으로 표상됩니다. 동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연회장은 더불어 같이 있는
 공간이죠.
 용은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기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너 자신을 고립시키고 너만의 정체성 속에 머물러라. 그렇게 널 인간에게
 있어 완벽하게 타자의 영역에 두고 너 자신을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용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구별되는 이 경계는 자신만의 주체성과
 타자와 동일하려는 욕구 사이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렌델에게 이것이 양자택일적으로 선택이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의 말이 이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죠.
 "가치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지켜라."라고
 그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우연일 수 밖에 없으니 너무 타자들에게
 연연해하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물론 그렌델은 이 용의 말이 이성적으로 납득됩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그는 셰이퍼의 '시'를 이미 들어버렸으니까요.

 셰이퍼의 시를 듣고 그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자는 세상을 바꿔놓았고, 과거를 그 그 두껍고도 비틀어진
  뿌리까지 송두리째 들어내어 변화시켰다.'라고...

 저는 여기서 그렌델이 바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시의 힘을 느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부로 부터 양자택일적으로 강요되어지는 선택으로 부터 스스로를
 미끌어지게 하고 탈주시키는 그 힘을...
 양 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 모두에게 속할수도 있는 그리고 그 둘을 오히려
 초월할 수도 있는 그런 힘을 말이죠...

 그래서, 그렌델은 이제 스스로 시를 씁니다.
 셰이퍼가 하프를 켜며 그의 입을 통해 시를 말하듯이...
 그렌델은 그 자신의 이빨과 손으로 사지를 찟고 낭자한 선혈을 내뿜는
 잔혹의 시를 쓰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렌델의 인간 사냥은 일종의 인간이라는 타자와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셰이퍼의 시에 오르내리게 됨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죠.

 이 기이한 교감 방식...
 제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가드너의 '그렌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매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그렌델이 셰이퍼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최후를 맞이하는가가
 이해됩니다. 바로, 셰이퍼로 상징되어지는 '시'가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셰이퍼의 최후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시대의 종말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혼자다. 버림받은 채로...'

 시가 있음으로 해서 그렌델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타자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셰이퍼의 죽음과
 더불어 시는 소멸했고 그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한 타자로만 남게되죠.
 물론 시가 사라진 이상 그는 더이상 하이데거가 말하는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인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인간에게 포획된 타자이고 따라서 그는 동일화의
 욕구를 가진 존재자들에게 살해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자가 된 것입니다.
 존재자들은 동일화시키지 못하는 대상은 그냥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가진 '아리아드네의 실'입니다.
 시를 통해 그렌델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게 얼마나 설득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출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렌델은 어마어마한 미로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숨겨져있는 무궁무진함... 걸을 수록 새롭게 변화하는 그 의미들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또 다른 가느다란 실을 찾아 헤메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말했듯이 좋은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 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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