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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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품을 읽으면 난, 포만감이 든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흥미로우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으로만 이뤄진 만찬을 즐긴 기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작품을 하나 만났다.


 바로 영국 작가  M.W 크레이븐의 데뷔작, ’퍼핏 쇼’. 


 만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신뢰하는 골든대거 수상작. 다른 하나는 범행 방식. 이 소설의 연쇄살인마는 스톤 헨지를 일컫는 ‘환상열석’에서 자신의 잔혹한 범행을 전시한다. 그것도 방화로 태워죽인 시신을. 그리하여 작중에서는 이 연쇄살인마를 ‘이멀레이션(immolation) 맨’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특히나 후자가 내 눈길을 강하게 끌었는데, 그것은 지금껏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을 비롯하여 살해한 대상을 연극 무대처럼 드라마틱하게 전시하는 작품들을 수도없이 만났고 그것을 통하여 갖가지 방법을 봐왔지만 ‘퍼핏 쇼’ 같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소도 그렇고, 살해 대상에 대한 것도 그렇고. 그 기상천외함 때문에 이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갈 것인가 너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치 이색적인 간판에 호기심이 생겨 무작정 식당 안으로 들어간 손님과 다를 바 없이 ‘퍼핏 쇼’를 펼치게 된 것이었다. 그랬다가 앞으로 단골이 되어도 좋을 아주 괜찮은 맛집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제법 운이 따랐던 것 같다.


 각설하고,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점부터 말해 보고 싶다. 그건 바로 연쇄살인이라는 스릴러와 주연 등장인물들 간의 로맨스를 아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의미란, ‘퍼핏 쇼’가 추구하고 있는 주제에 맞게 그 둘을, DNA의 이중나선처럼 유기적으로 잘 맞물리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퍼핏 쇼’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연쇄살인마’란 존재에 집중하고 싶다.


 ‘연쇄살인마’란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존 E 더글러스의 ‘마인드 헌터’다. 거기서 존 E 더글러스가 어쩌다 연쇄살인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는 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연쇄살인마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떠한 탐침으로도 가늠이 불가능한,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지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체불명의 괴물(怪物)이었던 것이다. 그 ‘괴물’을 난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와 달리 표현하고 싶은데, 아마도 그렇게 하면  ‘타자(他者)’가 될 것이다. 이러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될 듯하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는 한 마디로 그 ‘타자’와의 대면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내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타자’를 마주 보게 하고 경험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비상식적이며 비인간적인 그들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유도하고, 내 경험과 이해가 닿지 않는 존재 자체로 혼돈과 불안을 조장한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연쇄살인마라는 타자는 그 존재와 행위의 무지막지함으로 우리 존재를 압도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 하듯이 소설 속 ‘타자’를 쉽게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서 우리는 경마장에서 뛰는 경주마가 그러하듯, 오직 그것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굴러가는 실타래 아래의 가는 실처럼 얽매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소설 속 연쇄살인마는 우리에게 현실에선 간단히 할 수 있었던 무시와 외면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거부할 수 없는 응시와 중지할 수 없는 사유로, 눈앞에 도래한 연쇄살인마가 초래했던 사회 혹은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대답할 - 그것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거나 종국적일 필요는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겠다는 정도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다 - 의무를 초래하는 소환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소환장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내 자의로 함부로 물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난 연쇄살인마가 개설한, 소설이라는 법정에 배심원으로 소환된 셈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바라봐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조금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연쇄살인마 소설은 이런 경험을 가득 선사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연쇄살인마에겐 단지 스릴러 소재로 소비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건 현실에서는 잘 경험할 수 없고, 행여나 한다고 해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타자’라는 존재의 무게를, 비록 허구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여도 현저히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를 보는 것만큼이나 타자를 보듬어 안고 내내 주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통로인 것이다. 


 뭐, 그래도 허구이니까 재미 이상의 의미를 주는 건 억지 아닌가 하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경험의 영역에선, 허구와 실재가 별 차이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허구의 경험이 실재의 것을 압도할 때도 있다. 우리가 가진 기억만 되짚어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화나 소설에서 체험했던 것이 현실의 일상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해 마음속에서 오래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의 경험으로 철학 혹은 사회윤리 문제를 음미한다고 하여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M.W 크레이븐의 ‘퍼핏 쇼’은 정말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치로 내가 말한 것을 체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단 ‘인형극’을 뜻하는 제목부터가 그렇고 유래가 없는 살인방식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범죄의 강도 높은 잔인함과 참혹성은 분명 독자의 의식을 연쇄살인마에게 붙잡아 놓기 위해서라고, 난 감히 추정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잘 경험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들에게 의식의 빈방을 더 많이, 더 오래 내어주는 편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부터 말 할 것이 내가 이 소설을 두고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부분이다. 나는 좀 전에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라는 존재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걸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짐 톰슨이 자신의 대표작, ‘내 안의 살인마’에서 했듯이 아예 연쇄살인마의 시점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내면까지 충분히 들여다보는 것만큼 더 밀도 높은 경험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독자는 오로지 수동적인 존재로 참여할 뿐이다. 대화의 참여자가 되기 보다는 길게 이어지기만 하는 살인마의 독백만 하염없이 듣는 청자로만 남을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재미도 떨어진다. 서스펜스도 덜하고 반전도 없을테니 말이다. 


 연쇄살인마에게 독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와 대화하려는 마음을 낳게 하는 것은 역시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흥미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 열망을 무한정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연쇄살인마와의 대면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우리 일상 속 존재와 다를 바 없이 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는, 나와는 절대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객체로 만든다. 우리는 그와 대화는 할 수 있어도 내면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타나게 된, 1인칭일 때보다 부족해진 경험의 밀도는 스릴러의 재미로 채워야 한다. 전개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재미로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몰입이라는 형태로 밀도를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퍼핏 쇼’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다. 캐릭터들의 묘사는 생생하고 주연 커플이 빚어내는 앙상블도 흥미롭고 때로 흐뭇한 미소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거기다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되어 사건의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는 것도 능수능란하게 이뤄진다. 놀라운 반전 또한 존재하고 앞에서 뿌려놓았던 떡밥들까지 모조리 회수해 버리니! 이건 뭐, 중반을 넘어가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범인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질 때까지, 거의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여정 내내 연쇄살인마에 대해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멈추기가 어렵다. 그야말로 작가는 연쇄살인마라는 거대한 수영장 속에 독자를 던져넣어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1인칭 시점을 사용하거나 기교를 빌리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라는 스릴러의 근본 도구로만 1인칭 시점으로 읽을 때와 별 차이 없는 경험을 하게끔 만들고 있으니, 이 작품에 ‘뛰어나다’라는 표현을 써도 넘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진정 타자의 경험에 우리를 강도 높게 묶고자 한다면 남녀 주연 캐릭터들의 로맨스는 어떻게 된 것인가? ‘퍼핏 쇼’가 세공하고자 하는 어둠과 결이 너무나 달라보이는 로맨스는 오히려 그 매듭을 풀어버리는 형국이 아닌가?

 

 이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퍼핏 쇼’는 두 개의 차축이 중핵이 되어 움직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연히 ‘이멀레이션 맨’의 추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보기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알콩달콩해 보이는, 로맨스다.


 이 둘은 소설 속에서 함께 간다. 두 개의 차축이라 말한 것은 그래서다. 그만큼 작가는 ‘이멀레이션 맨’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이 둘의 로맨스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저 작품의 흥행을 위한 요소가 아니다. 주제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 그런 것이다.


 하지만‘이멀레이션 맨’ 이야기와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로맨스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은 배척의 관계가 아닌, 협력의 관계다. 서로 조력하여 ‘타자’의 경험 속에서 ‘타자’에 대한 제대로 된 윤리적 태도를 배양하려는 ‘퍼핏 쇼’의 주제를 위해 함께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내 글을 읽고 있는 상상 속 독자가 바로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어떻게?'


 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위해 제시하고 싶은 것은 연쇄살인마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공교롭게도 존재하는 공통점이다. 바로 앞서 언급했던 ‘절대적 타자의 경험'. 이것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마에게서 예고 없이 습격받듯이, 사랑 또한 느닷없이 엄습하는 것을 체험한다. 내게로 다가오는 연쇄살인마에게 눈을 뗄 수 없듯이,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도저히 눈을 거둘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연쇄살인마와 동일하게 연인이란 존재 또한 어느새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의 모든 시건과 상념을 마치 태양계 중심에 군림하는 항성처럼 그 외곽의 궤도로만 공전하도록 만든다. 더구나 한번 포획되고 나면 쉽사리 거부하거나 달아날 수 없는 것도 닮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내가 주관하는 우주 속으로 편입할 수 없고 오직 허용되는 것은 대등한 수준의 공존뿐이며 그런 관계조차도 타자의 협력을 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쇄살인마와 연인 모두 알고보면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양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타자’라는 대양 안에서 표류 중인 것이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나는 작가가 서로에게 차츰 애정을 느껴가는 두 캐릭터를 이 소설에 빚어냈을 것이라 본다. ‘이멀레이션 맨’과 똑같이 독자에게 ‘타자’와 제대로 대면시키도록.


 그건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초반에 인식할 때, 무엇보다 서로 얼른 헤아리기 힘든 존재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따지고 보면, 워싱턴 포에게 있어 틸리 브래드쇼란 존재는 그가 추적해야 하는 ‘이멀레이션 맨’과 그리 다르지 않다. 둘 다, 존재도 사는 방식도 모두 수수께끼인 존재들이니까.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사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고를 헤쳐왔다. 워싱턴 포가 심리를 중시한 감성에 보다 가까이 서 있다면 틸리 브래드쇼는 수학에 기반한 이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워싱턴 포가 발로 뛰어다니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을 대면하는 존재라면 틸리 브래드쇼는 홀로 격리된 장소에서 오직 데이터만 상대하기를 바라는 존재다. 물과 기름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렇게나 다르고 서로에게 진정 낯선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연쇄살인마에게 가까이 접근해 갈수록 서로에게도 다가가게 된다. 연쇄살인마의 정체가 한꺼풀씩 벗겨 때마다 그들 또한 서로의 존재와 상황에 대해 헤아림의 지평이 넓어지게 된다. 맞다. 작가는 이 둘, 그러니까 연쇄살인마의 추적과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 사이에 이뤄지는 애정의 진척도를 병행시키고 있다. 그것도 비례관계로. 


 그러면서 서서히 연쇄살인마와 사랑이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부각시킨다. 연쇄살인마는 자신이 알았어야 할 진정한 진실들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사랑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기존의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존재였다. 그러니 우리는 작품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주제라고 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와 다르고 이해가 불가능한 타자라고 하여도 쉽게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됨을. 그럴수록 더 응시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더 헤아리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이르러 나는 주제와 관련하여 앞서 제기한 질문에 비로소 대답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퍼핏 쇼’의 주제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소설 후반은 이러한 태도와 노력이 얼마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워싱턴 포가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진실은 물론이고 오래도록 묻혀있었던, 차마 입 밖에 내기도 힘든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내막까지 모두 밝혀지니까 말이다. 사건만이 아니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 둘 다 척박한 현실 한 가운데서 늘 홀로 분투하느라 하나쯤 있었으면 했을, 의지할 만한 둥지를 찾게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다면 사건의 진실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는데, 타자와의 대면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 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헤아리려 노력한 결과, 그 둘 모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찌 이로써 책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은 한층 더 또렷해지는 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만하면 내가 왜 이 소설에서 포만감을 한껏 느꼈을 지에 관해 설명이 어느 정도 됐을 것 같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퍼핏 쇼’는 오늘날의 영국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 소설은 2018년에 발표되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그 2년 후인 2020년, 영국은 투표를 통하여 ‘브렉시트’를 감행했다. 그 결과,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얼마 전의 뉴스는 영국 대중이 압도적으로 브렉시트 철회를 원하고 있음을 알렸다.


 ‘퍼핏 쇼’가 들려주려 했던 대로 영국의 많은 이들이 타자를 무시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성을 먼저 허물고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노력했다면, 현재 엄청난 후회로 남은 ‘브렉시트’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사례도 있으니 ‘퍼핏 쇼’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 또한 브렉시트를 초래한 영국의 상황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문득 ‘작가가 왜 제목을 ‘퍼핏 쇼’라고 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퍼핏 쇼’가 뜻하는 ‘인형극’은 줄에 매달린 인형들로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저마다 매달고 있는 줄이 하나씩 있었다. ‘이멀레이션  맨'도 그렇고, 그에게 희생된 자들도 그렇고, 워싱턴 포도 그렇고, 틸리 브래드쇼도 그렇고. 그건 남들에게 쉽게 내어보일 수 없는 어둠이었다. 모두를 자기만의 골방 속에다 유폐시켜 버리는 어둠. 그 어둠에 지배 당하여 그들은 어둠이 이끄는 쪽으로 걸어 가 인간을 포기하고 인형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어둠에 지배당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줄을 끊어버려 인형이 되기를 그만둔 이들도 있었다. 어둠이 삶의 주인으로 내버려 둔 인형에서 스스로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 인간으로 거듭난 이들이 말이다. 


 이제보니 소설 전체는 작가가 그렇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녕 인간일까, 인형일까? 인형이라면 현재 내 목을 감고 있는 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하여 타자의 삶을 함부로 짓밟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점점 더 만연해가는 가운데 그들과 닮은 인형이 아니라 그들마저 태워버릴 바람직한 인간으로 남는 길은 정녕 무엇일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핏 쇼’를 초롱불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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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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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엘리자베스 문이라는 이름은. 나는 그 이름을 '어둠의 속도'란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2002년에 발간 되었을 때. SF 팬덤 사이에서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해서 만나게 된 작품이었다. 벌써 거의 20년 전에 읽은 것이라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래도 자폐아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이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 살짝 엿보는 것 같았던 기분은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런 작가였다. 자폐가 정말 꼭 치료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도록 이끌었듯이,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내면과 동조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작가. 그렇게 하여 기존의 나라는 한계에 갇혀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거기서 훌쩍 벗어나, 너머를 보고 헤아리도록 하여 더 넓은 범주에서 나와 타자를 가늠하도록 하는 것으로 내적인 성장을 가져다 주는 작가였다. 그런 작가이기에 그녀의 새로운 소설이 이번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잔류 인구'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이다. 노년의 여성, '오필리아'는 '심프스 뱅코프 콜로니'라는 한 식민지 행성에서 회사 소속이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개척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에서 막 도착한 함대가 정체 불명의 외계인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하자 컴퍼니는 식민지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다들 함선에 올라 극저온 수면 장치에 들어가 동면한 채로 이주할 것을 명렴 받았지만 할머니 오필리어는 그 장치에서 살아남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모두가 떠나버린 그 곳에서 자의로 '잔류 인구'가 된다. 하지만 그 별에 존재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잔류 인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별에서 원래 살았던 원주민들. 그녀는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오필리아는 마침내 그들에게 존경 받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러다 다시 지구에서 다시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원주민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접촉하려 하는데, 군인과 과학자인 그들은 오필리아의 말에 전혀 귀기 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오필리아는 단지 쓸모없는 할머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원래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다. 그녀는 햄릿의 연인이었지만 햄릿이 만든 사건 앞에서 주체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오필리아는 다르다. 결말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르쳐 주니까 말이다.


(초판본 표지}



 노년은 효용성을 점점 더 중요하게 따지는 지금 사회에서 가장 그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게 가장 뚜렷한 증거다. 예전엔 노년이 그 때까지 살면서 체득한 지식과 정보를 아주 중요한 정보로 간주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경로사상은 바로 그것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경험과 지식은 '꼰대'로 취급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옛것은 쉽게 도태되고 새것은 과장되게 환영받는 세태에서 '잔류 인구'는 참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나게 만든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쳐든다'를 썼던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들의 기록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주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그것들 대부분은 살아있는 할머니의 기억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무시되고 버려져서 기록할 수 없었던 기억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것이 오늘날 여성 운동의 목표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잔류 인구' 또한 그 흐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쓸모'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그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 본, 그것도 잠정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을 쉽게 규정하고 가치 또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점점 더 횡행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경향인지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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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이 소설 리뷰가 종종 올라와서 호기심 업 시키네요^^

ICE-9 2021-11-18 21:5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의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라 다들 많이 기다렸나 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지라 이번 작품이 무척 반가웠어요^^

2021-12-16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5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뭇잎처럼 2023-03-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보긴 하였지만 헉슬리 책 때문에 여기까지 왔네요. 쓰신 글 보고 무작정 읽고 싶어졌습니다.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꾸욱.
 
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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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나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가질 수 없는 직업도 많고 조금이라도 나름의 개성을 표현할라치면 그 나이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잇값 못한다는 핀잔도 듣기 일쑤다. 사람은 너나없이 언제든 늙기 마련인데다 고령화 사회로 곧 진입한다고도 하는데, 나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일까? 마치 그러한 세태에 반기를 들듯, 아무리 많은 나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해 나가는 것을 응원하는 작품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제 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허태연 작가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라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26년 동안 굴착기 기사로 일만 하다가 67세에 이르러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허남훈이란 노인이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한다면 종종 자식이나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 아니냐?'라면서 '이기적이다!'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작가도 이것을 의식했음인지 아내의 상황을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요양병원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허남훈은 그런 상황에서 이제 자기 혼자만 더 이상 생계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려니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남훈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쫓도록 이끈다. 왜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엔 어떤 의미가 있고 종국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소설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삶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늦은 나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 궤적을 이제 조금은 상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소설은 허남훈이 ‘굴착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굴착기는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굴착기를 팔 때 구매자를 더없이 꼼꼼하게 따지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굴착기는 26년 동안 가장(家長)의 책임을 다하려는 밥벌이 수단이었기에 곧 삶의 중심이었다. 굴착기가 곧 허남훈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굴착기에서 떠나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곧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그 중심점이 이동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이동하는가? 그건 허남훈이 굴착기로 한 일을 따져보면 유추할 수 있다. 허남훈은 말했다. 굴착기는 타인이 거주하게 될 공간의 기초를 다지는 도구라고. 이런 굴착기 작업은 그대로 가족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한 허남훈의 생애를 집약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굴착기에서 헤어나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인, 바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이동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이것을 두 가지 소재로 한층 더 명확하게 세공한다. 그 두 가지란, 하나는 ‘스페인어’라는 새로운 말을 익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코’를 배우는 일이다. 언어의 습득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걸 은유한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통을 위한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는 걸 상기해 보면 이는 곧 이해가 가는 바다. 그렇지 않아도 허남훈의 스페인어 강사인 카를로스는 이런 말을 한다.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 형식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듭니다.”(p. 56)


 

 지금까지 허남훈의 인간관계는 가장(家長)만 있었을 뿐, 자신은 없었다. 작가가 소설 초반에 허남훈이 국수에 들어갈 계란 지단을 두고 아내와 딸, 선아에게 가부장적인 모습을 취하도록 한 것은 세상이 규정한 가장(家長)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왔다는 걸 독자에게 선명하게 부각하려는 의도이다. 그렇게 허남훈에겐 가장의 자신만 있었을 뿐, 고유한 허남훈의 정체성은 없었다. 그건 그가 마흔한 살 때, 죽을 고비를 운 좋게 넘긴 뒤에 그것을 계기로 더 이상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 순전히 개인적인 소망으로 이뤄진 버킷 리스트를 적어놓았던 ‘청년일기’라는 노트를 오랫동안 뒷전에 방치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랬던 그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19'사태가 계기가 되어 장식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청년일기’를 다시 꺼낸다.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더 늦기 전에 거기 적힌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루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가장에서 자신으로의 지축 이동은 이렇게 이뤄졌다. 비록 전적인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흔들림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실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맞먹는 전복적인 옮김이었다. 이 말은 절대 비유가 아니다. 작가 자신이 그만한 규모의 이동인 것을, 허남훈이 하필이면 배울 언어로 스페인어를 고르는 과정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데, 단적으로 허남훈이 스페인어를 선택한 것은 그 언어가 지금 쓰고 있는 언어에서 가장 멀어져 보이는, 가장 이국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페인어의 의미를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명확하게 제시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사-주어-목적어’ 순의 언어 대신 ‘주어-동사-목적어’ 순의 언어를 택하기로 했다.(p. 58)


 

  코페르니쿠스가 했듯이, 지구 중심에서 태양 중심으로 바뀌면 그동안 접했던 세상 또한 전혀 다르게 보이고 느끼게 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온전히 새로운 삶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는 그 변화를 독자의 의식 속에 확연하게 부상시키는 두 개의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그것은 우선, 허남훈이 스페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바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타난다. 이는 ‘플라멩코’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춤이란 것도 본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자신이 한껏 발현되는 광장이라 일컬을 수도 있는 ‘플라멩코’의 몸짓 언어는 허남훈이 26년간 해왔던 ‘굴착기’의 몸짓 언어와 얼마나 분명하게 대비되는가! 플라멩코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춤이고 굴착기는 나 아닌 남만을 위한 노동이었다. 이는 그대로 플라멩코는 자신이 직접 추지만 굴착기는 기계가 대신 하는 구도의 대비로 이어져 허남훈이 자기 삶에 주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여실히 형상화한다.

 

 그는 이제 스페인어처럼 전과는 아주 다른 문법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자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혼한 전처 사이에서 생긴 딸, ‘보연’이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미안한 마음은 늘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에 충실하느라 적극적으로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이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기를 실천하고 있는 그는 내내 아픈 손가락이자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였던 보연을 다시 만나려 한다. 

 

 

 과제 7. 보연을 만나 사과하기.(p.198)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면 허남훈은 분명 보연과 대면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허남훈이 굴착기를 팔기 위해 가장 처음 만났던 ‘늙다리 청년’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그 반응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남훈의 가족과 보연 이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중요한 조연들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이 세 사람을 중요한 조연으로 생각한다는 건, 소설 후반에 달라진 허남훈이 그 세 사람을 특별히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자기가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대접한다는 것(요리 또한 허남훈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감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치로 쓰인다.)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이 세 사람이 그냥 나오는  아니라 각각 허남훈의 과거 - 현재-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제 가장으로 허남훈에게서 임차한 굴착기로 자신의 모든 시간을 집안 생계에 바쳐야 하는 ‘늙다리 청년’은 가장이었던 허남훈의 과거 상황과 참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볼 때, 과거의 허남훈을 나타낸다. 작가가 허남훈이 늙다리 청년에게 굴착기를 팔지 않고 임대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둘을 굴착기로 계속 이어지도록 만들어 우리가 허남훈과 늙다리 청년을 더욱 상호 연결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말이다. 아무래 새롭게 살기고 단단히 결심하더라도 과거와 쉽게 단절할 순 없다. 늙다리 청년의 존재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걸음에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이나 미련 혹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애잔함 같은 것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허남훈이 늙다리 청년에게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이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이름이 밝혀지는 플라멩코 강사, 강남훈은 허남훈의 어떤 시간을 암시하고 있을까? 그건 바로 현재다. 강남훈은 허남훈이 플라멩코를 배울 때, 춤만 가르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허남훈이 새롭게 주체적인 삶을 엮어가는 과정에서 흐트러질 수 있는 마음을 계속해서 스스로 다잡고 있는 것의 투영일 수도 있다. 거기다 춤은 추고 있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현재라는 과정에만 있을 수 있는 의 속성을 고려하자면 아무래도 강남훈을 허남훈의 현재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카를로스는? 당연히 마지막으로 남은 허남훈의 미래 모습을 암시한다. 카를로스는 여러모로 허남훈이 이대로 계속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지니게 될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아버지가 스페인 사람이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살았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낯선 타자의 정체성을 가졌고 그랬기에 더욱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늙다리 청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했으며 ‘늙다리 청년, ‘강남훈’과 다르게 사랑하는 여자와 미래의 세대로 이어질 가정까지 이루었다. 모두 스스로 선택한 삶에 충실하며 그러면서도 변화 앞에 가장 많이 열려 있었고 그만큼 타인을 기꺼이 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소설의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허남훈이 나아 갈 항로(航路)이니 이만하면 카를로스가 허남훈의 미래 모습을 암시한다는 내 말이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면 앞서 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늙다리 청년’의 반응이 어땠는지 보려 한다. 그는 보연을 다시 만나려는 허남훈에게 그녀가 돈을 요구할 지 모른다는 부정적 견해를 전한다. 버려진 딸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행여 내 안정된 생활을 해칠 수 있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부터 염려한다. 이런 늙다리 청년의 모습은 가장의 정체성으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 허남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요양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 아내에게 자기가 왔는데도 밥할 생각 안 한다고 막무가내로 성을 내며 끝까지 국수에 올린 계란 지단을 요구하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미래 모습의 반영인 카를로스는 이와 전혀 다른 권유를 한다.


 

 “아시죠? 스페인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오늘에야 너를 찾았네. 미안하다.’ 이게 아니라, ‘내가 미안하다. 오늘에야 너를 찾아서.’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예요.(p. 153)


 

 아마도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 있었기 때문인지, 카를로스는 먼저 버려진 딸의 마음부터 헤아린다. 나중에 허남훈이 보연과 화해하고 미래로 계속 이어지는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카를로스의 조언을 진심으로 따른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내 삶을 형성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의 삶을 환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을. 허남훈이 자신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받았던 성추행 때문에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던 보연 마저 다시금 그것 모두를 가지도록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치수가 맞지 않는 옷과 같았던 가장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고유한 자신으로 삶의 주인이 된 허남훈은 결국 어떤 정체성의 옷을 입게 되었는가? 그건 동반자를 이성으로 보는 바람에 여성과 파트너가 되어 플라멩코를 잘 출 수 없는 허남훈에게 강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플라멩코를 출 때 말이죠. 가장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그건 이성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게 아녜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거죠. 그것이 타지를 떠돌며 살고 사랑한 집시의 정신입니다.(p. 255 ~ 6)


 

 집시는 부평초와 같은 존재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떠돈다. 한국에서의 카를로스처럼. 그러나 카를로스가 그러하듯, 그걸 비관으로 여기지 않는다. 타자로 살기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타자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먼저 나서서 상처를 보듬어줄 줄 안다. 주변에 있으면 중심의 인정을 받으려 어떻게든 그들이 원하는 옷을 입으려 애쓰기 마련이지만 그는 인정의 구걸을 위해 원하지 않는 옷을 입기보다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이 되어 그 자체를 긍정하고 그 힘으로 타인을 더 많이 인정하고 품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 가득한 집시'의 모습이다. 그 때문에 난 카를로스를 더욱 허남훈의 미래 모습이라 여기는 것이며 소설 후반에 허남훈이 세비아의 스페인 광장에서 허남훈이 플라멩코를 추는 장면이 나온 이유라 생각한다. 거기서 허남훈은 온갖 국적과 인종의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완벽하게 집시가 된다. 가장(家長)의 정체성에서 탈주한 그가 마침내 사랑 많은 집시의 정체성에 도달한 것이다. 

 

 경쾌하게 읽혀서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점점 새겨들을만한 삶에 대한 묵직한 조언들이 쏟아져 나와서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그것들을 툭 던져놓듯이 제시했더라면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내 딴에는 구구절절 설명한 바와도 같이, 작가가 세세한 설정과 적절한 연출로 독자를 물 흐르듯이 이야기에 섞여들도록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해시키고 있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 캐릭터가 꽤 생생하게 빚어져 있었다. 묘사가 너무나 잘 되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넘쳐났다. 작가는 후기에서 마흔둘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속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상상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주인공 이름이 허남훈이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진득하게 스며든 그토록 넘치는 생명력을 갖고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으니 내 아버지의 삶도 절로 떠오르면서 더욱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이 소설의 생명은 이 한 번의 독서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 인생에도 분명히 선택의 순간은 찾아 올 것이다. 남들이 다 다니는 편안한 대로(大路)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고행(苦行)이겠지만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협로(狹路)로 걸어갈 것인가를 결정할 순간이 말이다. 소설은 노년에 이른 사람을 무대 중심에 내세웠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이란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한 고민과 갈등은 늘 존재하니까 말이다. 이와 관련된 허남훈의 숙제는 곧 내 숙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허남훈 보다 운이 조금은 더 좋은 편이다. 이 소설로 비록 좁고 힘든 길이라 하여도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소설을 계속해서 소환할 작정이다. 좁고 힘든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나눠받기 위하여. 설령 그 순간이 아무리 늦게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문득 아버지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지나 온 삶의 여정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해서 대화를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거기에 대해서 말을 두런두런 나눠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도 당신의 인생이 있었고 그만큼 하시고 싶으신 것들도 많았을 터인데 아버지라서 아버지로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그동안 당신의 희생에 너무 무심했다. 죄스러움이 사무치는 것을 금할 수 없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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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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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엔 사라진 여러 도시들이 존재한다. 

 어떤 도시는 화산 폭발로 삽시간에 사라졌고 또 어떤 것은 어떻게 사라졌는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도시도 있다. 그런 도시들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책이 이번에 나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애널리 뉴위츠가 쓴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주로 네 개의 도시를 다룬다. 하나는 신석기 시대 대표 정착지인 '차탈회윅', 다른 하나는 소설과 영화까지 만들어져 유명하게 된 '폼페이'.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로 유명해진 '앙코르'.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우리들에겐 가장 덜 알려진,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원주민이 세운 대유적인 '카호키아'다. 책은 작가가 그 도시들을 직접 탐방하여 그 곳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견해들을 엮어넣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멸망한 도시를 기반으로 고고학적 내용들을 다루지만 별로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오히려 평소에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최신 고고학적 이론와 방법들을 경험할 수 있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제법 빠른 편이다. 단적으로 경쾌하며 재밌는 책이다. 우리도 학창 시절 익히 들었던 신석기 혁명은 차탈회윅 때문에 생겼다. 차탈회윅은 인류 역사상 첫 정착지로 왜 신석기인들이 유목을 버리고 정착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현재도 우리들에게 남기고 있다. 호주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가 1936년에 발표한 책에서 처음으로 말한 '신석기 혁명'이란 말 또한 그걸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차탈회윅에서 무려 25년간 연구했던 이안 호더는 별명이 인디애나 존스의 라이벌이라고 한다. 유물에 대하여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인디애나 존스와 정반대라 그런 별칭이 붙여진 것인데, 인디애나 존스는 유물 중심주의자이지만 이안 호더는 정황고고학의 선구자다. 유물이 발견되면 그 유물의 가치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대 사회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먼저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 연구를 통해 이언 호더는 당당하게 선언한다.차탈회윅은 성차별도, 계급차별도 전혀 없었던 사회였다고.




[차탈회윅의 모습]



 뒤이어 나올 폼페이와앙코르 등과 같은 도시에서도 이러한 정황고고학 분야는 중요해진다. 요즘은 이렇게 그 때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알아보는 곳으로 고고학적 연구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우린 앙코르에서 최신 고고학 기술인 '라이다'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건 레이저를 지구 표면에 대고 쏘아서 거기서 반사되는 광자를 측정하는 기계다. 그걸 이용하면 아주 오래전에 사람들이 도시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관측 가능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인위개변지형학 연구에 이상적인 도구다. 그것을 통해 수 백년간 풀리지 않았던 앙코르 와트의 수수께끼도 풀렸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와트엔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지금 보여지는 도시 규모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다로 측정해 보니 보이는 부분보다 도시의 크기가 훨씬 더 거대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인원도 충분히 수용 가능할 정도로. 그것을 통해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가 당대의 유명 도시에 버금가는 거대 도시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최신 고고학적 이론과 기술들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폼페이처럼 이름만 들었던 유명 도시들에서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아주 잘 알수 있게 한다. 폼페이의 유적 대부분은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시인의 집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유일하게 이름이 확인된 집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폼페이가 어떤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사람들은 어떤 소비 행태를 하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당시의 도시 서민의 삶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독서를 즐겁게 한다. 총평하자면 가독성 좋고 읽고나면 지적 충만과 더불어 상상력 또한 왕성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차탈회윅이나 폼페이 또는 앙코르와 카호키아의 이 골목, 저 골목의 모습을 한껏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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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1-09-3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서평보니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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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갇힌 여인'.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5권의 부제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종종 그러한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일 것이다. 남편에 의해 갇혀졌던 그 여인은 자신의 너무 강한 독립적인 개성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 개성이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히길 거부하였기에 내면의 갈등이 광기로 치닫게 된 것이다. 로드킬은 도로라는 인간 문명이 만든 공간에서 일어난다. 야생 생물이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를 뛰어넘어 인간이 만든 공간에서 자신의 야성을 드러낼 때 로드킬의 운명은 뒤따른다. 


 이러한 로드킬의 궤적은 여성에게도 있다. 여성 또한 남성중심사회가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할수록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처럼 광기의 존재로 치부되어 '로드킬'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드킬은 독립적인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만나게 되는 항존하는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아밀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로드킬'을 가져 온 것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편집, '로드킬'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소개를 하기 보단 이 단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 먼저 주목하고 싶다. 일단 여성이 있다. 그들을 가두는 사회 주류 세력이 있다. 주인공 여성은 그런 사회에 위화감을 가지며 그들에게 규정 당한 존재로 남는 것을 거부한다.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저항하다 끝내 그런 사회와 단절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로드킬'처럼 아주 비극적인 결말도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다. 두 번째 단편, '라비'의 결말처럼.


 그런데도 잔류를 거부한다. 마치 결과야 어떻게 되든, 탈주하려는 몸짓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실은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남으려는 존재에겐 더없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지는, 철저한 이분법적 체제다. 지배와 순종만이 유일하게 통하는 규칙이다. 그런 세상에서 여성 같은 약자들은 강자가 규정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드킬'에선 남자에게 간택될 수 있는 전형적인 신부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외시경'의 아내는 작가로 등단까지 했지만 책 읽는 것조차 남편에게 금지 당한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그러는 이유로 '보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건 보기에만 좋은 허울이고 정말은 오히려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외시경'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립한 여성들의 강한 자의식 아래에서 희생당할 것임을.



아밀의 '로드킬'을 읽으면서 마치 BGM처럼 떠올렸던 노래는 

루신다 윌리엄스의 'CAR WHEELS ON A GRAVEL ROAD'였다.


Can't find a damn thing in this place
Nothing's where I left it before

(....)

There goes the screen door slamming shut
You better do what you're told. (가사 중에서)



 하지만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의 강시병처럼 막을 수는 없다. 이솝 이야기에도 잘 드러나듯이, 억지로 길들이려는 건 더 강한 반발만 부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날조해 유포한다. 그들이 보호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그것을 통해 납득시킨다. 스스로 호랑이가 아니라 생쥐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강자들이 만든 이야기의 목적이다.


 그래서 작가에겐 담론이 중요해진다. 이건 여섯 단편 모두에게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이다. 이야기에 이야기로써 맞서는 것.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규정과 강요를 통해 주입되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직접 이야기를 창출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신화에 고백으로 대항한다. 그 분투 속에서 자신을 빚어나간다. 소설에서 탈주의 성공 여부는 도달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발을 선 밖으로 내딛는 자체에 이미 탈주는 완성되는 것이다. 육체가 아니라 내면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에 말한 '갇힌 여인'으로 돌아가 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 소설에서 갇힌 여인은 알베르틴을 말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정말 갇힌 사람은 누구인가를 서서히 드러낸다. 그건 바로 갇혀 있다고 여겼던 주인공 마르셀 자신이라는 것을. 알베르틴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마르셀은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영화로 새롭게 풀어간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가두고 억압할수록 정작 더 그렇게 되는 건 행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로드킬'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무단횡단을 하라! 아밀의 '로드킬'은 이런 선포로 무장하고 있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 '갇힌 여인'의 포스터. 정말 시선과 감금의 대상이 되는 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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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9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어쩌면 그런 게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연휴는 17일부터였을지...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코로나19는 여전하지만...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