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추는 남자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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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나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가질 수 없는 직업도 많고 조금이라도 나름의 개성을 표현할라치면 그 나이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잇값 못한다는 핀잔도 듣기 일쑤다. 사람은 너나없이 언제든 늙기 마련인데다 고령화 사회로 곧 진입한다고도 하는데, 나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정녕 옳은 일일까? 마치 그러한 세태에 반기를 들듯, 아무리 많은 나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해 나가는 것을 응원하는 작품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제 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허태연 작가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라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26년 동안 굴착기 기사로 일만 하다가 67세에 이르러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허남훈이란 노인이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한다면 종종 자식이나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만 하는 것 아니냐?'라면서 '이기적이다!'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작가도 이것을 의식했음인지 아내의 상황을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요양병원에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허남훈은 그런 상황에서 이제 자기 혼자만 더 이상 생계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려니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남훈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쫓도록 이끈다. 왜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엔 어떤 의미가 있고 종국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소설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삶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늦은 나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 궤적을 이제 조금은 상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소설은 허남훈이 ‘굴착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굴착기는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굴착기를 팔 때 구매자를 더없이 꼼꼼하게 따지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굴착기는 26년 동안 가장(家長)의 책임을 다하려는 밥벌이 수단이었기에 곧 삶의 중심이었다. 굴착기가 곧 허남훈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굴착기에서 떠나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곧 삶의 지축이 흔들리고 그 중심점이 이동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이동하는가? 그건 허남훈이 굴착기로 한 일을 따져보면 유추할 수 있다. 허남훈은 말했다. 굴착기는 타인이 거주하게 될 공간의 기초를 다지는 도구라고. 이런 굴착기 작업은 그대로 가족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한 허남훈의 생애를 집약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굴착기에서 헤어나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인, 바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이동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이것을 두 가지 소재로 한층 더 명확하게 세공한다. 그 두 가지란, 하나는 ‘스페인어’라는 새로운 말을 익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스페인의 전통춤인 ‘플라멩코’를 배우는 일이다. 언어의 습득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걸 은유한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통을 위한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는 걸 상기해 보면 이는 곧 이해가 가는 바다. 그렇지 않아도 허남훈의 스페인어 강사인 카를로스는 이런 말을 한다.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 형식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듭니다.”(p. 56)


 

 지금까지 허남훈의 인간관계는 가장(家長)만 있었을 뿐, 자신은 없었다. 작가가 소설 초반에 허남훈이 국수에 들어갈 계란 지단을 두고 아내와 딸, 선아에게 가부장적인 모습을 취하도록 한 것은 세상이 규정한 가장(家長)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살아왔다는 걸 독자에게 선명하게 부각하려는 의도이다. 그렇게 허남훈에겐 가장의 자신만 있었을 뿐, 고유한 허남훈의 정체성은 없었다. 그건 그가 마흔한 살 때, 죽을 고비를 운 좋게 넘긴 뒤에 그것을 계기로 더 이상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 순전히 개인적인 소망으로 이뤄진 버킷 리스트를 적어놓았던 ‘청년일기’라는 노트를 오랫동안 뒷전에 방치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랬던 그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19'사태가 계기가 되어 장식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청년일기’를 다시 꺼낸다.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더 늦기 전에 거기 적힌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루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가장에서 자신으로의 지축 이동은 이렇게 이뤄졌다. 비록 전적인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흔들림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실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맞먹는 전복적인 옮김이었다. 이 말은 절대 비유가 아니다. 작가 자신이 그만한 규모의 이동인 것을, 허남훈이 하필이면 배울 언어로 스페인어를 고르는 과정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데, 단적으로 허남훈이 스페인어를 선택한 것은 그 언어가 지금 쓰고 있는 언어에서 가장 멀어져 보이는, 가장 이국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페인어의 의미를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명확하게 제시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사-주어-목적어’ 순의 언어 대신 ‘주어-동사-목적어’ 순의 언어를 택하기로 했다.(p. 58)


 

  코페르니쿠스가 했듯이, 지구 중심에서 태양 중심으로 바뀌면 그동안 접했던 세상 또한 전혀 다르게 보이고 느끼게 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온전히 새로운 삶이 자신 앞에 펼쳐지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는 그 변화를 독자의 의식 속에 확연하게 부상시키는 두 개의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그것은 우선, 허남훈이 스페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바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타난다. 이는 ‘플라멩코’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춤이란 것도 본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자신이 한껏 발현되는 광장이라 일컬을 수도 있는 ‘플라멩코’의 몸짓 언어는 허남훈이 26년간 해왔던 ‘굴착기’의 몸짓 언어와 얼마나 분명하게 대비되는가! 플라멩코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춤이고 굴착기는 나 아닌 남만을 위한 노동이었다. 이는 그대로 플라멩코는 자신이 직접 추지만 굴착기는 기계가 대신 하는 구도의 대비로 이어져 허남훈이 자기 삶에 주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여실히 형상화한다.

 

 그는 이제 스페인어처럼 전과는 아주 다른 문법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자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혼한 전처 사이에서 생긴 딸, ‘보연’이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미안한 마음은 늘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에 충실하느라 적극적으로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이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기를 실천하고 있는 그는 내내 아픈 손가락이자 또 하나의 버킷 리스트였던 보연을 다시 만나려 한다. 

 

 

 과제 7. 보연을 만나 사과하기.(p.198)


 

 삶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면 허남훈은 분명 보연과 대면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허남훈이 굴착기를 팔기 위해 가장 처음 만났던 ‘늙다리 청년’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그 반응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남훈의 가족과 보연 이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중요한 조연들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이 세 사람을 중요한 조연으로 생각한다는 건, 소설 후반에 달라진 허남훈이 그 세 사람을 특별히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자기가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대접한다는 것(요리 또한 허남훈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감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치로 쓰인다.)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이 세 사람이 그냥 나오는  아니라 각각 허남훈의 과거 - 현재-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제 가장으로 허남훈에게서 임차한 굴착기로 자신의 모든 시간을 집안 생계에 바쳐야 하는 ‘늙다리 청년’은 가장이었던 허남훈의 과거 상황과 참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볼 때, 과거의 허남훈을 나타낸다. 작가가 허남훈이 늙다리 청년에게 굴착기를 팔지 않고 임대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둘을 굴착기로 계속 이어지도록 만들어 우리가 허남훈과 늙다리 청년을 더욱 상호 연결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말이다. 아무래 새롭게 살기고 단단히 결심하더라도 과거와 쉽게 단절할 순 없다. 늙다리 청년의 존재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걸음에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이나 미련 혹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애잔함 같은 것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허남훈이 늙다리 청년에게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이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이름이 밝혀지는 플라멩코 강사, 강남훈은 허남훈의 어떤 시간을 암시하고 있을까? 그건 바로 현재다. 강남훈은 허남훈이 플라멩코를 배울 때, 춤만 가르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허남훈이 새롭게 주체적인 삶을 엮어가는 과정에서 흐트러질 수 있는 마음을 계속해서 스스로 다잡고 있는 것의 투영일 수도 있다. 거기다 춤은 추고 있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현재라는 과정에만 있을 수 있는 의 속성을 고려하자면 아무래도 강남훈을 허남훈의 현재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카를로스는? 당연히 마지막으로 남은 허남훈의 미래 모습을 암시한다. 카를로스는 여러모로 허남훈이 이대로 계속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지니게 될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아버지가 스페인 사람이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살았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낯선 타자의 정체성을 가졌고 그랬기에 더욱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삶을 꾸려가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늙다리 청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했으며 ‘늙다리 청년, ‘강남훈’과 다르게 사랑하는 여자와 미래의 세대로 이어질 가정까지 이루었다. 모두 스스로 선택한 삶에 충실하며 그러면서도 변화 앞에 가장 많이 열려 있었고 그만큼 타인을 기꺼이 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소설의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허남훈이 나아 갈 항로(航路)이니 이만하면 카를로스가 허남훈의 미래 모습을 암시한다는 내 말이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본다.


 그러면 앞서 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늙다리 청년’의 반응이 어땠는지 보려 한다. 그는 보연을 다시 만나려는 허남훈에게 그녀가 돈을 요구할 지 모른다는 부정적 견해를 전한다. 버려진 딸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행여 내 안정된 생활을 해칠 수 있는 위험이 있지 않을까부터 염려한다. 이런 늙다리 청년의 모습은 가장의 정체성으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 허남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요양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 아내에게 자기가 왔는데도 밥할 생각 안 한다고 막무가내로 성을 내며 끝까지 국수에 올린 계란 지단을 요구하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미래 모습의 반영인 카를로스는 이와 전혀 다른 권유를 한다.


 

 “아시죠? 스페인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오늘에야 너를 찾았네. 미안하다.’ 이게 아니라, ‘내가 미안하다. 오늘에야 너를 찾아서.’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예요.(p. 153)


 

 아마도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 있었기 때문인지, 카를로스는 먼저 버려진 딸의 마음부터 헤아린다. 나중에 허남훈이 보연과 화해하고 미래로 계속 이어지는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카를로스의 조언을 진심으로 따른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내 삶을 형성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의 삶을 환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을. 허남훈이 자신만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받았던 성추행 때문에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던 보연 마저 다시금 그것 모두를 가지도록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치수가 맞지 않는 옷과 같았던 가장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고유한 자신으로 삶의 주인이 된 허남훈은 결국 어떤 정체성의 옷을 입게 되었는가? 그건 동반자를 이성으로 보는 바람에 여성과 파트너가 되어 플라멩코를 잘 출 수 없는 허남훈에게 강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플라멩코를 출 때 말이죠. 가장 중요한 건 사랑입니다. 그건 이성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게 아녜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거죠. 그것이 타지를 떠돌며 살고 사랑한 집시의 정신입니다.(p. 255 ~ 6)


 

 집시는 부평초와 같은 존재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떠돈다. 한국에서의 카를로스처럼. 그러나 카를로스가 그러하듯, 그걸 비관으로 여기지 않는다. 타자로 살기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타자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먼저 나서서 상처를 보듬어줄 줄 안다. 주변에 있으면 중심의 인정을 받으려 어떻게든 그들이 원하는 옷을 입으려 애쓰기 마련이지만 그는 인정의 구걸을 위해 원하지 않는 옷을 입기보다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이 되어 그 자체를 긍정하고 그 힘으로 타인을 더 많이 인정하고 품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 가득한 집시'의 모습이다. 그 때문에 난 카를로스를 더욱 허남훈의 미래 모습이라 여기는 것이며 소설 후반에 허남훈이 세비아의 스페인 광장에서 허남훈이 플라멩코를 추는 장면이 나온 이유라 생각한다. 거기서 허남훈은 온갖 국적과 인종의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완벽하게 집시가 된다. 가장(家長)의 정체성에서 탈주한 그가 마침내 사랑 많은 집시의 정체성에 도달한 것이다. 

 

 경쾌하게 읽혀서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점점 새겨들을만한 삶에 대한 묵직한 조언들이 쏟아져 나와서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그것들을 툭 던져놓듯이 제시했더라면 설득력이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내 딴에는 구구절절 설명한 바와도 같이, 작가가 세세한 설정과 적절한 연출로 독자를 물 흐르듯이 이야기에 섞여들도록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해시키고 있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주인공 캐릭터가 꽤 생생하게 빚어져 있었다. 묘사가 너무나 잘 되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넘쳐났다. 작가는 후기에서 마흔둘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속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상상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주인공 이름이 허남훈이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진득하게 스며든 그토록 넘치는 생명력을 갖고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으니 내 아버지의 삶도 절로 떠오르면서 더욱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것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이 소설의 생명은 이 한 번의 독서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 인생에도 분명히 선택의 순간은 찾아 올 것이다. 남들이 다 다니는 편안한 대로(大路)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고행(苦行)이겠지만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협로(狹路)로 걸어갈 것인가를 결정할 순간이 말이다. 소설은 노년에 이른 사람을 무대 중심에 내세웠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이란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한 고민과 갈등은 늘 존재하니까 말이다. 이와 관련된 허남훈의 숙제는 곧 내 숙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허남훈 보다 운이 조금은 더 좋은 편이다. 이 소설로 비록 좁고 힘든 길이라 하여도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이 소설을 계속해서 소환할 작정이다. 좁고 힘든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나눠받기 위하여. 설령 그 순간이 아무리 늦게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문득 아버지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으실까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지나 온 삶의 여정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해서 대화를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거기에 대해서 말을 두런두런 나눠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도 당신의 인생이 있었고 그만큼 하시고 싶으신 것들도 많았을 터인데 아버지라서 아버지로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그동안 당신의 희생에 너무 무심했다. 죄스러움이 사무치는 것을 금할 수 없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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