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있다 - 세상을 보는 각도가 조금 다른 그들
가오밍 지음, 이현아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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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지만 

가슴속에는 모두 다른 마음

 각자 걸어가고 있는거야

 아무런 말없이 어디로 가는가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 N.EX.T '도시인' 중에서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다.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독서는 아니라고, 딴엔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라고 은근히 정당화 시키고 있다. 살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중엔 내가 가진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줄 알았는데 실은 저런 인간인 게 밝혀지는 반전을 선사한 이들도 다수였다. 사람은 양파껍질과도 같이 이 정도면 제법 다 파악했겠거니 싶다가도 또 전혀 새로운 유형이 나타나 내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니 알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보다 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고 싶었다. 범죄 소설은 거기에 제법 유용했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갖가지 형태의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소시오패스, 싸이코패스 까지도. 거기다 범죄를 매개로 한 것이라,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음험한 성격이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발현되기 마련이라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다. 이름은 가오밍.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저 사람에 관심이 많아서, 저마다 얼마나 다른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그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나와는 다르게, 픽션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들을. 그것도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마음에 커다란 병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누가 원한 것도 아닌데, 자신만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족족 중국 전역의 정신병원과 공안부 및 유관기관들을 찾아가 그들을 인터뷰했다. 이번에 나온 '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산다'는 바로 그 기록이다. 한 아마추어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위해 집념과 끈기로 이루어낸 산물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만난 36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것을 모두 6장에 나눠 담았다. 사람들이 정말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다중인격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남들이 귀신에게 씌었다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을 똑같이 모방하는 여자도 있으며 매리 셀리의 소설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죽은 자를 되살리겠다며 시체를 반복적으로 훔치는 남자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런 경우 흔히 그들이 어떤 망상이나 우연히 갖게 된 충동 때문에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나름 꽤나 논리 정연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그들의 입장에선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합리적인 행위였다. 저자는 자신의 판단은 가급적 접어둔 채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최대한 담아낸다. 그것도 자신에 대해서 차분하게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이들이 예외가 아니라 그저 나와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받아들이는 태도가 좀 다른 보통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점차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다.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내가 보는 그대로 그들도 보고 있겠거니 추정할 뿐이다. 그 추정을 살면서 배운 온갖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실로 과연 그럴까? 혹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인공 지능이 만든 가상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별안간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실은 타인들에게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만 그럴까? 많은 이들이 한 번은 나처럼 남도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을까? 타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 불안도 느껴보지 않았을까? 헤겔에 따르면 우리에겐 본래적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인정 욕구가 하나의 본성처럼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내 인식이 철저하게 내 육체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불안함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정이란 이름으로 타인에게로 끊임없이 가 닿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을 남도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 책도 저자의 그런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은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을까? 과연 그들도 나처럼 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보다 확실한 대답을 얻고자 그는 평범한 시야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이들의 시선까지 알려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떻게 하든 결국 '나' 혼자구나 하는 생각. 마주 보는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도, 이런 상념을 일으키는 것도 오직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 분명 천 명의 눈 속엔 천 개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이 천 개의 외로움으로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끝까지 외로운 존재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타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동병상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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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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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당신이 그 불가능에 속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 경우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첫째 너무 모범생으로 살아왔거나 둘째 정의감이 매우 투철하거나. 왜냐하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주된 매력은 반영웅을 그리는 데 있고, 그것을 잘 소화할 수 있어야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재미를 느끼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걷잡을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반영웅, 안티 히어로를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 거기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작가. 그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내가 그리면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악도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지 잘 보여주마!' 하고 쓴 작품이 바로 '액스'다.



 제목은 도끼를 뜻하는 '액스'이지만, 소설에 도끼가 나오진 않는다.

 책 뒷 표지에 실린 박찬욱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액스'는 박찬욱 감독이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에다 그가 늘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액스'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 당할 때, '도끼질 당했다'고 하는 영어 표현에서 기인한 제목이라고 한다. 맞다. 이 소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정리해고 된 실업자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버크 데보레. 그는 23년 동안이나 일한 제지회사에서 하루 아침에 정리 해고를 당했다. 느닷업는 도끼 날에 목이 휙 날아간 것이다.


 지위 혹은 신분을 가리키는 영어 'status'는 '서다'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에서 유래했다. 즉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사람들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다는 것이 단어 자체에 아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버크는 이제 설 수 있는 두 다리가 없는 셈이다. 2년간 열심히 구직 활동을 했으나 돌아온 것은 차디찬 거절 뿐이었고 쪼들리는 가계에다 아들은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하자 절도에 손까지 댄다. 현재도 미래도 암울할 뿐이다. 이대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버크는 중대 결심을 한다.

 자신이 재취업 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그는 잠재적 경쟁자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직종의 취업 광고를 거짓으로 신문에 낸다. 그래야 이력서를 자신이 받아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해가 될 경쟁자들을 선별하여 이력서에 나와 있는 개인 정보를 사용해 그들을 찾아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은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어 그는 결국 여섯 명의 경쟁자들을 골라내기에 이른다. 이들이 타겟이다. 그는 고인이 된 아버지가 남긴 유품에서 우연히 발견한, 무려 50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았던 루거 권총으로 미국 각지에 있는 그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서 죽이기로 한다. 제지 회사에서 일을 하며 누구보다 특수 용지에 관한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던 그는 이제 이것이 그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추호도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성공시켜야만 하는 프로젝트. 오직 그것만 중요할 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얼굴에 다짜고짜 권총을 쏘고 설령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데도 그에겐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시간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것은 합격 날짜가 정해진, 기한이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세상엔 살인 동기가 허다하게 있겠지만 '액스'의 주인공 만큼이나 기상천외하고 그래서 또 어이없는 동기가 과연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 어이 없음이 왠지 모르게 점점 공감으로 변해가니 이것이 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저력이다. 노조가 파업할 때마다 흔히 보게 되는 문구가 하나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 바로 이것이다. 소설은 정말 해고는 살인과 다름 없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꼭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묻곤 한다. 그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은연 중에 캐내려는 것이다. 처음으로 물어볼 만큼 거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크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내 자아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차지하는 자리를 통해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 역시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뼈져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가진 공포 중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공포는 없다. 소설은 그 공포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래서 그 압도적인 공포에 눌려 허우적거리다 보면 그런 선택도 할 수 있겠구나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된다. 버크의 이런 말이 그것을 거든다.


 그들이 앗아 간 건 내 인생입니다. 내가 아니고요. 그들은 내게서 융자를 갚을 능력, 아이들을 돌볼 능력,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여유를 앗아 갔습니다. 직장은 직장일 뿐입니다. 직장은 내가 아니라고요, 퀸란 씨. 지난 5개월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한때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내 온 동료들이었습니다. 나랑 같이 해고된 수백 명의 직원 말이죠. 우린 항상 그 신뢰를 앞세워 함께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내 적이 됐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카운슬러들은 절대 이런 얘길 하지 않죠. 우리가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는 것.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p. 252 ~ 253)


 해고를 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사회가 철저히 숨기고 있던 이 진실을 볼에 얼음을 대듯 선명히 깨닫는다. 지금과 같은 고도 경쟁 체제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적이라는 것을. 공교롭게도 이 소설은 1997년에 나왔다. 우리가 한창 IMF를 겪고 있을 무렵이다. 날마다 여기저기서 대량의 정리해고가 쏟아지던 IMF 시절. 소설 속 버크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현실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더 이기적이 되었을 뿐. 바로 그런 욕망이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괴물이 설치게 만들었다. 알고보면 버크의 진화형들을. 납득도 가고 악행을 통해 점점 더 강해지는 그를 보면 매력도 느끼지만 결코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은 버크의 그 길에, 그가 다다르게 될 종착역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버크의 길을 완전히 내칠 수도 없는 것이, 그가 취한 한 가지 삶의 태도는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한다는 것. 버크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누누이 자신에게 말한다.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고! 자신이 이런 진흙탕에 빠지게 된 것은 내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댔기 때문이라고.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반영웅을 자주 그리는 것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 만들어 준 삶에 무턱대고 안주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길 원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프론티어 정신. 반영웅은 바로 그런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위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순전한 자기에의 의지, 여기까지는 지지할 수 있을 듯하다. 정말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조차 태연하게 남에게 맡겨 버리는 이들이 많으므로. 그렇게 정말 고쳐야 할 사회 문제에 대해 무임승차 하려는 이들이 아직도 잔뜩 있는 세상이므로.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그래야 하는가? 그것이 지나쳐 타인을 그저 수단으로만 삼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선 나는 오리무중이다. 고민 거리로 남겨둘 수밖에.


 그냥 재밌게 읽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해고와 실직을 늘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머리에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 깊이 실리고 현재와 미래의 나를 생각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냉정한 분석 보다 내가 이렇게 되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내겐 이보다 더 무서운 게 없는 공포 소설이기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목에 해고의 도끼날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누구에게나 정녕 소름 돋는, 서늘한 소설이지 아닐까? 무더운 여름밤에 딱 읽기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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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2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 정말 대단하더군요.

딱 20년 된 소설인데도 작금의 상황과 어떻게 이
렇게 맞아 떨어지는지...

ICE-9 2017-07-25 11:5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로 읽힌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ㅠ ㅠ
모임 분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신간 <하우스프라우>를 읽고 서평을 작성해 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대담한 성(묘사와 섬세한 심리 묘사가 교차하는 소설!

낯선 나라 스위스에 갇힌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





여성의 삶과 내면을 다룬 강렬한 소설 『하우스프라우』 출간


미국의 작가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데뷔 소설 『하우스프라우』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시인으로만 활동했던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인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독일어로 가정주부, 기혼 여성을 뜻한다. 주인공은 스위스인과 결혼해 그곳에서 사는 미국인 안나이다.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 안나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파국으로 빠져드는 한 여성의 삶과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상당히 높은 수위의 성행위 장면 역시 눈에 띄는 특징이지만, 문학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출간 즉시 10여 개 언어로 번역 계약이 이루어졌고,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전 세계 15개국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소설로서 흔한 일은 아니다. 단순히 불륜이 소재라서, 또는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대담한 성(性) 묘사에 섬세한 심리 묘사가 어우러졌기에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절묘한 사건들의 배치, 영어와 독일어 단어들을 이용한 세련된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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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겉으로는 완벽하게 보이지만 실은 내부에 점점 차오르는 소외와 공허에 대한 느낌 때문에 자신의 삶에 뭔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는데, 이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하우스프라우'도 그런 이야기 같네요. 제목에 일부러 독일어를 쓴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여성이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시도한 게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라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바에 자신을 맞춰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건 곧 세상의 언어에 자신만의 언어를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시도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한 것 같네요. 과연 그녀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함께 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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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1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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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역사일수록 단단히 기억에 새겨두어야 한다. 망각은 언제나 비극의 반복을 부르기 때문이다. '군함도(하시마 섬)'. 지하 1.000m까지 내려간 갱도는 해저보다 더 깊은 곳이었기에 언제나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여건상 통로의 위 아래가 아주 좁을 수밖에 없어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채굴을 해야했다. 그래서 현지 일본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으로 불렸고 당연히 갖은 인명 사고가 뒤따랐다. 태평양 전쟁 말기 노동력이 부족하자 일본은 조선인 남자들을 강제 징용하여 끌고 갔다. 처음엔 돈을 벌게 해 준다고 꼬드겼지만 나중엔 그런 것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그렇게 강제로 군함도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마주한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갱도와 최소 12시간에서 최대 16시간에 이르는 탄광에서의 노동이었다. 그것도 몸에 걸친 곳이라고는 고무줄 속옷 하나에 머리에 쓴 헬멧 뿐이었으며 식사라고 주어지는 보통 비료로 사용되는 콩기름을 짜고난 찌꺼기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군함도'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상 가장 참혹한 강제 노동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선 잊혀진 기억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한 소설이 그것을 발굴하고 있다. 바로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이다.



 원래 이 소설은 2003년에 '까마귀'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군함도'의 비극이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그런데 이 '군함도'가 지닌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작가가 우리들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도 '전두환의 군부 독재'라는 어둡고 아픈 우리네 역사 때문이었다.


 한수산. 그는 원래 70년대부터 잘 나가던 작가였다. 전두환이 군부 독재를 하던 1981년. 그는 한 신문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1년째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 중 어떤 인물이 전두환을 암시한다는 것과 군복 입은 이들을 비하했다는 단 두 가지 이유로 그는 당시 집필을 하고 있던 제주도에서 갑자기 보안사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그렇게 당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당시 연재를 한 신문사의 담당 기자들까지 모조리 연행되어 작가와 똑같이 심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시인 박정만도 한수산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끌려갔는데 역시나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박정만 시인은 그 때의 고통으로 늘 괴로워했으며 매일 소주 두 명을 마셔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때로 이유없이 사라지는 일도 잦았는데 그러다 결국 전두환이 전 세계에 자신의 위세를 떨치려 개최한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던 날, 화장실 변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수산 작가의 필화 사건은 독재 권력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쉽게 그리고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수산 작가 역시 끝내 그 때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여 88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는 일본에 한 4년 정도 머물렀는데 바로 거기서 일제 식민지 시절, 실제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다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피폭까지 된('군함도'는 '나가사끼' 인근에 있다.) 재일동포들을 만났고 바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군함도'에 대해 알게 된다. 당시는 '군함도'에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당한 아픔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작가는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꼭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93년, '군함도'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고 10여 년만에 '까마귀'란 제목의 장편 소설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난 현재, 그 '까마귀'를 다시 전부 개작하여 두 권의 책으로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군함도'이다.


 소설은 '군함도'가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지옥이며 죽음의 땅인지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대로는 죽겠다 싶어서 탈출을 감행하는 조선인들이 있고 그 중 하나였던 태복은 도중에 체포되어 다시 군함도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다 고문하던 일본인 사이또오를 살해한다. 한 마디로 '군함도', 그 곳은 화해와 공존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암시다. 그것은 군함도만이 아니라 조선도 마찬가지다. 뒤어이 등장하는 지상과 서형은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부부다. 하지만 곧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상의 아버지는 친일파로 가진 재산도 꽤나 많은 이였는데, 그런 그 역시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해갈 수 없어 장남을 대신하여 둘째 지상을 징용에 보내기로 한다. 지상은 아버지의 친일이 민족에게 큰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죄값을 자신이 강제 징용을 당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치를까 하여 기꺼이 응한다. 원래 지상의 아버지는 군수에게 돈을 써서 지상을 보다 편한 보직으로 보낼 심산이었으나 그렇게 뒷돈을 준 보람도 없이 지상은 결국 군함도로 오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군함도의 실상이 펼쳐진다.  가혹한 노동 환경과 늘 당하는 죽음의 위협 그리고 일본인들의 갖은 폭행과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가 늘 지옥이었던 지상은 뜻이 맞는 조선인들과 탈출을 결심하고 1권의 끝에서 조선인 여자 금화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탈출에 금화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곧 들통나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잡혀가고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죽게 된다. 한 편, 지상과 함께 탈출을 모의했고 금화에게 마음까지 준 우석은 탈출에 실패하고 섬에 남게 되는데 그러다 금화의 죽음을 알고 복수를 맹세한다.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의 폭압에 대한 조선 징용자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이르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들이 퍼져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모처럼 벌인 거대한 저항은 이전부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일본과 내통하는 조선인들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예전부터 군함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탈출마저 초연해 있던 명국을 더욱 회의에 젖게 한다.


 한편, 군함도에서 무사히 탈출한 지상은 운좋게 한 일본인 노인의 도움으로 나가사키 항구에 이제 막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조선에서도 '상록회'에 소속되어 조선의 계몽을 위한 교육에 힘썼는데,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의 첨병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이 지상의 삶은 한 역사를 살아가는 삶을 다룰 때 한수산의 시선이 좀 더 어디에 가 닿는지 느끼게 한다. 특히나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한 경우, 그것에 대해 오늘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어떤 선험적 잣대를 가지고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삶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이 한 선택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는 면이 좀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군함도에서 모처럼 일어난 봉기가 실패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솔직히 한국 독자로서 이 장면은 뭔가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소설은 그런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설의 성공을 바란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라 바로 그런 면에서 작가의 신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인기 소설을 여럿 발표한 그가 어떻게 써야 독자들이 좋아할 것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실망을 줄 지도 모를 구도를 택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소설 '군함도'의 사명을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묻혀진 비극적 역사의 온전한 복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 어떤 문학적 과장이나 왜곡 없이 있었던 혹은 있음직한 사실 그것만의 재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맥락에 맞지 않는 대사들이 뜬금없이 튀어 나오는 지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현실은 이야기처럼 매끄럽지 않고 다양한 군상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니까 말이다. 역사적 현장의 진실된 재현과 그것을 통한 독자의 생생한 체험. 바로 이것이 저자가 부여한 '군함도'의 사명이며, 소설은 그것을 훌륭히 완수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군함도'가 어떤 곳이었으며, 반드시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비극의 장소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가사키에서 일하게 된 지상은 결국 원폭 투하까지 경험한다. 그러나 '군함도' 보다 더한 지옥의 현장에서도 그는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엔 아마도 역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아직 고향에 오지 못한 상태라 볼 수 있는 '군함도'의 비극적 역사를 이 소설을 통하여 비로소 환향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비원(悲願)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역시 한동안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적이 있었던 지라 그 귀향의 염원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으리라. 부디 그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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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 : 주사위는 던져졌다 레오나 시리즈 The Leona Series
제니 롱느뷔 지음, 박여명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 스웨덴 산 노르딕 느와르는 다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읽은 에밀리에 셰프의 '마크드 포 라이프'도 그랬는데, 이번에 나온 제니 롱느뵈의 '레오나'도 그러하다. 지킬과 하이드 처럼 법과 불법 사이의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린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경우, 주인공은 어릴 때 세뇌되어 암살을 한 과거가 있다. 현재 그녀는 그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져 법을 수호하는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잊혀졌던 과거가 점점 현실로 고개를 쳐드는 일이 발생한다. '레오나'의 경우는 형사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남편과 자녀도 있다. 겉으론 가장 안정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녀는 심한 도박 중독자다. 그것도 영화 '타짜'에서 딸의 수술비를 도박으로 날렸던 교수처럼 아들의 수술비마저 도박으로 탕진할만큼 중독이 심하다. 때문에 그녀는 날마다 남편이 잠들면 몰래 일어나 데스크탑으로 가서 온라인 포커를 친다. 낮에는 법을 수호하고 밤에는 불법을 자행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킬과 하이드로 부를 수밖에. 




 결국 도박 때문에 그녀는 끔찍한 범죄까지 감행하고 만다. 우리는 이 소설의 처음에서 심하게 학대 받은 아이를 통하여, 아이가 지닌 미리 녹음된 테이프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가 더 심한 학대를 받을 것이라고 은행원에게 협박하여 돈을 가져가는 것을 본다. 너무나 잔인한 수법의 범죄라 이 사건은 삽시간에 스웨덴 전역의 관심을 모은다. 바로 이 수사를 레오나가 맡는다. 그러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레오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주인공 보정을 받기 힘들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녀는 살인까지도 저지르지 않는가!


 정의감이 투철한 독자에겐 인내를 요구할 수 있는 소설이다. 더구나 레오나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 상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직 문제가 있는 것은 그녀 뿐이다. 바로 도박.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반복하며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어린 아이마저 범죄에 이용한다. 남편은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부부로 있는 것 뿐이며, 아이들만은 사랑의 감정을 다소 느끼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만큼 자신의 욕망에 더없이 충실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그녀 스스로도 보통 사람들이 공감이라 부르는 감정들이 차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인공의 면모 때문에 이 소설은 더없는 독특함을 가진다. 이런 여성 주인공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르 소설에서 등장한 악녀 중에서도 상급이라 할 만하다. 대개 주인공이 악녀일 경우 악행을 저지르는 데 있어선 그래도 뭔가 대의라고 할 만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자식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녀는 가정을 기꺼이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돈을 챙겨 도박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로 홀로 떠나는 것이 목적이다. 너무나 색다른 모습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뭐, 그렇게 만드는 동기는 어쩌면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서 처벌 받는 것을 보려고 읽을 것이며,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떻게 법망에서 벗어나는지 보기 위해 읽을 것이다. 또 어떤 누군가는 여성 주인공이 너무나 정도를 벗어났기에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려고도 할 것이다. 보통 악녀라는 낙인은 가부장제 사회가 정한 상궤에 벗어나는 여성의 이마에 찍혀지므로 악녀는 페미니즘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로 많이 여겨졌다. 레오나 역시 아이에 대한 것이나 자식에 대한 것이나 모두 전통적인 여성상에 극명하게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악녀의 형성은 바로 가부장제의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레오나는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차별을 많이 당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남자인 오빠만을 위했고 레오나가 그 서열에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곧장 지하실에 홀로 가둬버렸다. 그 때의 경험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녀는 늘 무의식의 공포로 자리잡은 지하실의 격리와 어둠으로부터 달아나려 애쓴다. 그녀가 경찰이 되고자 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가뒀던 그 질서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키는 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 중독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균열을 일으킨다. 알고 보면 그녀에겐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아버지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강요로 주입된 욕망이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도박 중독은 순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난, 오직 자신만의 것이다. 도박 충동,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독립된, 고유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그녀가 형사와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 보다 더 남성 사회에 편입될 수록 마치 거기에 반발하듯, 도박 충동이 거세지는 것도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한 편, 아버지와 레오나의 관계는 다시 아빠와 올리비아의 관계로 반복된다. 올리비아는 사실 어린 시절 레오나의 분신이다. 재밌는 것은 반복된 올리비아와의 관계에서 레오나가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나는 이중적이다. 올리비아를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에 거듭 종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레오나에게 왜 이런 이중적 지위를 가져다 준 것일까? 그러고 보면 형사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다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직 이것의 의미는 내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데 이야기가 좀 더 진전되면 분명해지지 않을까 한다. 현재 나온 레오나의 이야기는 삼부작 중 1부에 불과하다.


 레오나 외에 다른 인물까지 눈을 돌리면 페미니즘적으로 볼 여지는 더욱 많아진다. 일단 여자 검사 니나가 그러하다. 그녀는 처음에 원칙주의자로 나오는데, 소설 중반에서 레오나의 유혹에 넘어가 레오나와 한 편이 된다. 바야흐로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난 '악녀들의 연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 또는 가부장제 질서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두 여성 약자들의 모습은 악녀가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의 유화적 혹은 타협적인 제스쳐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여성 약자들이란, 하나는 범죄에 이용되는 학대 받는 어린 여자 아이 올리비아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 권력자들에게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했던 매춘부 디나이다. 올리비아는 주로 아빠에게 당하는 소외와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사회의 가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관료들에게 당하는 디나의 고통과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디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게 뭔지는 내가 더 잘 알아요. 뭐 하나라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처지에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결국은 내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말 테니까. 젠장, 지금 이 문제를 놓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요.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요."(p. 355)


 디나는 남성 중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뭐든 해 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소용 없었다고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이 당했다고. 디나의 행위엔 오직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녀가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디나의 절망이 악녀들의 연대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디나가 말한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문득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바로 '에이리언'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다. 델마와 루이스는 평범한 주부로 그들끼리 여행을 떠났다가 남성들의 부당한 처사를 경험하고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범죄자가 되는데,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들이 남성 중심 사회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차로 절벽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리들리 스콧은 절벽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화면을 멈춰 그들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해방의 비상을 하는 것이라 암시한다. 나는 레오나와 니나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섣부른 단정일 수 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읽은 '레오나'는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것의 첫 부분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지금 내가 한 말은 완전히 허황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고, 들어맞을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그 최종 확인을 위해서라도 얼른 3부까지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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