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난 이 작품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5월의 어느 날. 아버지 책장에서 두툼한 양장본에다 여러 권으로 된 '전쟁과 평화'를 발견했다. 그 때 내겐 두 가지가 왕성했는데,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도전 의식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그 둘 모두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로 줄에다 엄청난 분량의 그 소설을, 모르는 단어도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6월 초까지 다 읽고 말았다. '한 번 잡은 책은 무조건 끝까지 다 읽는다'가 당시의 내겐 금과옥조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을 주려 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주 어렵고 정말 글밥이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만 가득 남았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옆집에 사는 누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누나가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했다. 누나의 환심을 사려면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모조리 읽었던 것 같다. 따로 노트를 마련해 국어 공부를 하듯, 등장인물과 사건, 대사와 주제들을 정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시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걸 보면 당신도 이제 알 것이다. 문학을 가까이 하는 가장 좋고 빠른 길은 다름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걸. 여하튼 '전쟁과 평화'는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한 번은 호승심으로, 다른 한 번은 사랑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전쟁과 평화'를 세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멋 모르고 읽었고 두 번째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문학 자체로 순수하게 음미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또 손에 잡았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으로. 이번엔 '전쟁과 평화'를 그 자체로 감상하기 위하여.


['전쟁과 평화' 1권과 '톨스토이 미션 카드'의 모습]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구상하고 집필, 퇴고하는데 모두 24년이 걸린 작품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만 해도 무려 559명에 이른다. 문학동네에선 모두 네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1권의 이야기는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파블로브나 세레르가 주최한 야회로 시작한다. 이 야회는 마치 연극에서 개막을 하기 전에 미리 주요 등장인물들을 무대로 불러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앞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갈 인물들을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이기 위한 장치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 불콘스키 공작과 피예르를 만난다. 둘은 친구지만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극과 극이다. 안드레이가 유명한 불콘스키 공작의 첫째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와 결혼까지 하는 등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면 피예르는 비록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베주호프의 유일한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적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에다 용모는 뚱뚱하고 볼품이 없어서 사교계가 썩 환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위치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공평하게 둘 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던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을 맞아 왕정 중심의 구체제 수호를 위해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하고 자신도 자기가 부관으로 모시는 쿠투조프 장군(실존 인물이다.)을 따라 전쟁에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사생아란 신분과 가진 것도 별로 없어서 상류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피예르는 임종을 맞이한 베주호프가 자신을 적자로 인정하고 엄청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어주면서 상류 사회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바라던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운명은 돌연 그 표정을 바꾸고 먼저 주었던 기회가 마치 덫 안의 치즈이기라도 하듯 눈 앞에서 그들이 바라던 것이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보여 낭패를 경험토록 한다. 물론 피예르가 1권에서 그런 경험을 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안드레이 뿐이다. 그래서 1권의 진짜 주인공은 안드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권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 이후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유역과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이는 전투가 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우스터리츠 전투'란 말에서 눈이 번쩍 뜨일 것 같다. 나폴레옹의 유럽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세력에 비해 정말 약했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적을 함정으로 유도하고 자신이 창조했고 특기이기도 한 대포를 적극 사용하는 전술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대파한다. 결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함으로써 유럽에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안드레이의 운명 또한 크게 바뀌게 되니 이런 겹침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평소 안드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명예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혈육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자신이 곧 '명예의 한 순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운명이 변덕을 부려 명예는 커녕 나폴레옹의 포로가 된다.


 사실 포로가 된 게 그의 낭패가 되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낭패는 포화로 들판에 쓰러졌을 때 찾아왔다. 그 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하늘이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명예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오직 하나만 보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려왔는데 실은 이토록 공허한 것이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워졌다고 느낀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있던 콩깍지가 벗겨진 것처럼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현혹에서 벗어났으니까. 과연 그랬는지, 안드레이는 자신이 인간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겼던 나폴레옹을 직접 눈으로 대면하고 그에게 칭찬까지 받아도 심드렁하게 대한다. 이런 안드레이의 모습은 황제를 보고 그 빛나는 모습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한없이 그 권위를 동경하게 되는 로스토프와 대비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 로스토프의 모습은 각성을 하기 전의 안드레이와 같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다. 로스토프와 똑같이 안드레이 역시 황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를 만났으나 오히려 그가 본 것은 그만한 커다란 영광도 쉽게 가리지 못하는 허무였다.

 1권은 바로 이렇게, 속세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실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드라마였다.


 안드레이를 보니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안드레이에게 딸려있는 불콘스키는 사실 톨스토이의 어머니 쪽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작가였다. 아버지는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공작의 딸이었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불콘스키 공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안드레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 중 많은 부분에 톨스토이의 자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 역시 안드레이와 똑같이 장교로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5년이나.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되는 전쟁이 더없이 생생한 것도 이런 군대 경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군대에서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년 내내.

 그 전까지 톨스토이는 글과 먼 생활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내내 '전쟁과 평화'에서 나왔던 이폴리트 공작의 저택의 술 파티 못지 않게 방탕한 생활을 했다. 피예르가 거기서 한 위험한 내기도 어쩌면 톨스토이 자신 역시 했을 지 모른다. 그러다 성병에 걸렸고 병원 신세마저 졌다. 입원해 환자로 있으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톨스토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톨스토이가 방탕한 생활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일기 쓰기가 가져온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특히나 일기란 자신을 계속해서 되돌아보게 만드니까 말이다. 톨스토이에게 글은 구도의 여정이었다. 군대에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글을 통해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이 도달한 또 하나의 단계였을 것이다. 안드레이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마침내 세상이 가져다 준 현혹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엔 바로 이런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우러나 있다고 보인다.


 가장 정평이 난 톨스토이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내적 모순이 가득한 존재였으며 그 중 가장 격렬했던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모순은 '전쟁과 평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나니 탕자와 성자의 관계가 내겐 대립 보다 연속의 과정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탕자의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성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란, 방탕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 그대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유랑하는 존재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다. 현실 질서와 일상의 궤도에서 탈주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탕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탕자'로 가장 잘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되어보는 것으로 여자에 대해 글을 쓰면 '여자-되기'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쓰면 '동물-되기'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타자-되기'의 체험인 것이다. 나를 떠나 남이 되는 것. 그것은 그대로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본연의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안드레이가 거쳤던 과정 그대로 말이다.


 성자는 바로 그런 탕자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톨스토이의 삶 자체가 증거다. 그는 1878년에 영적인 각성을 하고 새로운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안나 카레리나'를 완성하고 난 뒤였다. 소설의 여정이 기반이 되어 성자의 삶이 구현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그런 '탕자의 여정'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경험토록 해 준다.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대에 거꾸로 거기에서 이탈하려는 흐름을 포착하고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누구나 정답으로 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삶에도 정답인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필 이 시점에 '전쟁과 평화'가 도래한 것은 어쩌면 운명의 손길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소설 속 나폴레옹 시대만큼이나 권력이든, 자본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시대이고 그 수렴이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는 물론이고 안에 속한자마저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수렴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탕자의 여정'을 통해 강조하는 산포(散布)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전쟁과 평화'이니만큼 '추천합니다' 같은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의 150년이 되는 과거의 작품('전쟁과 평화'는 1869년에 발표되었다.)이라 오늘날에 이런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굳이 말씀드려 본다면, 단언컨대 '전쟁과 평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에도, 아니 이런 현대이기에 더한층, 의미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작품인 것이다.


 특히나 이번 문학동네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고 거기다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예술문학출판사가 발간한 것을 원본으로 삼고 있는 데다 번역도 좋아서 더욱 읽어볼만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워서 한 번 탕자가 되어보려고 해도 그러기가 참 어렵다. 그럴 때는 '전쟁과 평화'가 딱이다. 육체는 비록 '방콕'을 하고 있더라도 내면 속에서 탕자의 여정을 거침없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부디 톨스토이가 선사하는 탕자의 여정을 깊이 체험해 보시기를. 어쩌면 안드레이가 그랬듯, 당신의 인생을 마구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을 만나볼 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미션 카드을 펼친 모습. 이렇게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느낌이 뭐랄까?, 어떤 역에 가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스탬프를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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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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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내게 마치 어릴 때 성탄절날 아버지에게 받았던 '과자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다양한 과자들이 하나로 담겨 있던 그 상자처럼 지금까지 내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부가 이 한 권에 투영되어 있었다.'  최근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을 읽은 소감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싶다. 정녕 내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와 무려 43년 넘게 그 도시의 온갖 골목을 걸어다니며 터키의 전통 음료 중 하나인 보자(boza)를 팔아온 메블루트란 남자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형 하산과 함께 6년 전에 먼저 이스탄불에 와서 정착했는데, 바로 그 형인 하산의 가족이 오르한 파묵의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의 제브데트 가족을 연상시킨다. 제브데트처럼 하산 역시 두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산을 비롯하여 두 아들, 코르쿠트와 쉴레이만은 민족주의자로 서구 문화를 동경하여 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제브데트와 거리가 있지만 잇속에 밝은 자본주의자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룬다는 점은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상주의자로 개혁 성향이 강했던 제브데트의 차남 레피크와 쉴레이만 역시 매우 다르다. 그런데 메블루트가 스스로 가장 고귀한 우정을 나눈다고 여기는 친구이자 개혁을 지지하는 쿠르드족인 페르하트는 레피크와 많이 비슷하다.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아내가 떠나버린다는 것 또한 유사하다.




 '내 마음의 낯섦'이 가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특히 메블루트를 비롯하여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아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미하를 둘러싸고 벌이는 얽히고 설킨 사랑의 행로는 압권이다. 그들 모두 정작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데, 이건 두 번째 작품, '고요한 집'과 닮았다.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두고 사랑의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선, 이스탄불 최고 미녀인 세큐레에게 똑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카라와 하산이 등장하는 '내 이름은 빨강'이 떠오른다. 쉴레이만이  갑자기 사라진 사미하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그대로 어느날 불현듯 실종되어버린 아내, 뤼야를 찾아다녔던 '검은 책'의 주인공 남편 갈립을 연상시키고,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메블루트의 모습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터키 전역으로 버스 여행을 떠나는, 소설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 '오스만'과 모든 것이 눈에 뒤덮인, 하얀 설원의 도시 카르스를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배회하는, 소설 '눈'의 주인공 시인 '카'를 떠올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마음의 낯섦'이 내게는 오르한 파묵이 여기까지 걸어온 문학적인 여정의 집대성으로 보인다고 말해도 그리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파묵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그 작품의 세부적인 것이나 하나의 문장에서 나온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이란 책에서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며,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만큼 소설의 정신에 충실한 작가도 또 없다고 하겠다. 또한 '내 마음의 낯섦'은 쿤데라의 언급처럼 그 전까지 나온 오르한 파묵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듣고 누군가 내게 '그렇다면 메블루트를 중심으로 1968년 9월부터 2012년 10월 25일까지 모두 635 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이들의 방대한 삶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대답은 과연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암흑의 포용(包容)'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어둠을 싫어한다. 그것이 불안정과 불확실함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빛을 원한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구분되어 그것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자신에게 뭐가 위험이 되고 이득이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그런 인간의 염원을 배신한다.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의 현대가 매우 유동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바다. 마치 가상화폐 시장 상황처럼 오늘의 삶은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국적이나 인종 등 태생적으로 타고난 정체성과 종교에 더욱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발밑이 허공 뿐이라고 느껴진다면 본능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듯이,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혼란과 불안이 생길 때마다 사람은 자연히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권위 있는 무언가나 늑대와 개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표식에 들러붙기 마련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쉴레이만이 속한, 우익이며 터키인 중심인 둣테페와 '페르하트'가 속한, 좌익이며 쿠르드족 중심신 퀼테페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극명하게 대립했듯이 말이다.


 안 그래도 이러한 쌍방 대립 구도는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데뷔작을 포함하여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터키 자체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동양과 서양 문명 모두에게 그 영향을 부단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의 투사(投射)이자 역사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문명의 융합체였던 오스만 제국이 남긴 유산일 것이다. 소설 '눈'을 보면 이 대립이 현재의 터키에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잘 목도할 수 있다. 터키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주의와 거기에 반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립 사이에서 도시 카르스에 가득한 눈처럼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 즐비한데도 개인은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집단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 강의실에 여성이 히잡을 쓰고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치열하게 대립할 때 정작 당사자인 소녀들은 자살을 한다. 누구도 자신을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그 대립 속에서 자살만이 유일하게 진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은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자신이 탄 버스가 사고를 당하자 오스만이 얻게 된 깨달음과 유사하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천국의 빛처럼 환영하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비된 몸과 의식.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 p.72)




 오르한 파묵이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허무주의자라거나 죽음 예찬론자라서가 아니다. 죽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삶에 있어 죽음은 광막한 암흑이다. 죽음이 무엇이고 언제 찾아올지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압도적인 불확실함이고 그로 인해 삶은 불안정하다. 죽음이란 갑자기 눈 앞에 암막이 내려진 것과 같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진 것과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피하기 마련인 그런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포용하라고 권한다. 그것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권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 얼른 '내 마음의 낯섦'을 들춰봐야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을 특히 눈여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은 메블루트의 인생을 시간 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바로 메블루트의 진정한 사랑이 될 라이하와 단 둘이 몰래 도망치는 시간이다. 


 '스물다섯 살에 고향 처녀와 함께 도망쳤다. 이것은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이었다.'(p. 17)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 오르한 파묵은 몇 번이나 아주 어두웠다고 강조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만났다', '어둠 속에서는 여자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등. 메블루트가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알린다. '암흑'이다. 물론 이렇게 할 이유는 있다. 실은 지금 메블루트가 데리고 도망치는 여인이 원래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블루트는 셋째 딸, 사미하를 사랑했다. 그녀의 순수한 검은 눈에 매혹되어 군대에 가 있는 3년 동안 내내 사랑을 갈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름을 잘못 알았다. 둘째 언니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하와 도망치는 것을 유일하게 도와준 사촌 쉴레이만의 술책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미하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메블루트가 이름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로잡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메블루트는 쉴레이만이 운전하는 트럭의 밝은 빛 아래에서야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이 사미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어둠에 있었을 때 놀랍도록 충만한 사랑이 삽시간에 식고 그는 밝은 빛 속에서 '삶이 놓은 덫' 속으로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메블루트의 삶 속으로 평생토록 지니게 될 낯선 감정이 쓰윽 들어온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을, 그 낯선 감정을 자주 떠올릴 것이었다.(p. 22)


 보시다시피,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의 전모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여인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우연이 만든 그 인연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운명이 된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p. 635)


 그러므로 그 암흑은 메블루트에게 결코 방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도 몰랐던 진정한 사랑을 찾아준 큐피드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이처럼 '내 마음의 낯섦'은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 번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건 묘사에서 어둠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또 하나를 본다.

 그건 바로 '개 짓는 소리'다. 낯선 감정과 함께 메블루트가 평생 짊어지는 감정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도망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소리로 소설에 출현하여 소설의 중요한 계기마다 등장한다. 메블루트가 처음으로 보자 파는 일을 그만 둘 결심을 했을 때, 개 짓는 소리가 궁극적인 원인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이스탄불에 와서야 비로소 생겼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모든 개가 자신을 잘 알아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 짓는 소리란 메블루트에게 '넌 이방인이야! 우리와 달라! 넌 여기 섞일 수 없어!'하고 외쳐대는 것과 같다. 아니나 다를까 메블루트가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지혜를 빌리러 찾아갔던 선지자 에펜디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개들은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을 감지하고 안다네.(...) 이 모든 수난을 겪은 개들은 이제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를 깊이 감지하고 있다네.(p.50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 개 짓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메블루트가 가지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어쩌면 내내 이방인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오르한 파묵이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진실은 정반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소설 '눈'에서 주인공 카의 말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다.


  "나에게 시를 보내는 것은 신입니다. (...) 나는 모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군, 자네를 비난하고 싶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눈' 1권, p. 186)




 메블루트 또한 두려움이 많은 자다.

 그는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과감하게 쭉쭉 뻗어나갈 때,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그 어디에도 들러붙지 않고 홀로 남은 채로 제자리를 맴돈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메블루트가 여전히 거리에서 보자를 판다며 때로는 어리석다고도 하고 또 때로는 불쌍하다고도 하지만 삶 전체를 통해 끝내 승리한 사람은 메블루트라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누구도 찾지 못한 진짜 사랑과 행복을 그는 찾았고 누렸으며, 또한 이것이 더 큰 것인데, 그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문학에서 구원은 언제나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있을 때 찾아온다. 소설 '검은 책'의 2권 후반에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듯 말이다.


한때,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될 수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임을 발견한 왕자가 살았다.('검은 책' 2권, p. 259)


 이 이야기 속 왕자가 평생 추구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느냐가 작가에겐 중요하다.

 터키 사회에 종교, 정치, 문화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대립관계처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적대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타자에게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에만 기반하여 주체를 정립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암흑과 두려움은 귀중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는다. 모두 타자의 생각에 무분별하게 섞여드는 것을 막아주고 어떻게든 먼저 자신의 생각으로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보다 더 크고 위대한 뭔가에 들러붙은 껌이 되어 기생을 통해 성장하려는 생각을 차단하여 어디로든 기울지 않고 혼자 힘으로 우뚝 서는 오뚝이가 되도록 한다. '검은 책'에 나오는 왕자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자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울리는 기억의 음악에 저항해야 한다.('검은 책' 2권, p. 272)


 하지만 여기서 오해해선 안 될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된다고 하여 오르한 파묵이 오만과 독단까지 하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파묵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원한다. 바로 그것이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묵의 주체 정립 과정은 서양 철학이 말했던 주체 정립 과정과 다르게 어디까지나 겸허(謙虛)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구분과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고 그 타자의 입장에서 그를 헤아리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소설 '하얀 성'에서 이탈리아인 기독교도 '나'와 터키인 무슬림 '호자'의 관계가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눈'의 주인공 카도 자신의 말을 들려주기 보다는 먼저 많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에게 정체성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겸허를 통한 타자 중심이기에 정체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얀 성'에서 나와 호자가 정체성을 바꿔 호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나는 터키에서, 그렇게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상대방의 나라에서 잘 살아가듯 그리고 '검은 책'에서 주인공 변호사 갈립이 아내와 같이 사라진 자신의 사촌이자 칼럼니스트인 제랄과 아주 쉽게 정체성을 바꾼 것처럼.




 이렇게 정체성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화 무상하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곳이라는 생각과 이어져 있다. '새로운 인생'을 비롯하여 그의 소설이 자주 순례에 가까운 여행을 통하여 각성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세상이기에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거나 고집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또 없다. 그것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맞이할 수 있었던 삶 속에 내재된 무한의 가능성을 그대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메블루트가 이 소설에서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수많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삶과 인간 관계 속에서 느끼는 피로와 아픔을 거리에서의 상상력을 통해 치유한다. 골목마다, 방문하는 집마다 그가 마주하는 도시의 다양한 변모가 삶에 수많은 의미와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밤에 밖으로 나가 보자를 팔 때는 창문 하나 열리지 않아도, 아무도 보자를 사지 않는 텅 빈 거리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걸으면 상상력이 가동하고 메블루트에게 이 세상에, 사원 벽 뒤에, 무너져 가는 목조 가옥들에, 묘지들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p. 436)


 아마도 이러한 가능성을 독자도 느껴보라고, 파묵은 하필이면 많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보자 장수를 주인공으로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메블루트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거나 고정된 장소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나온다. 메블루트 자신이 시골에서 올라온 이방인인 데다 그가 오래도록 살고 있는 '게제콘두' 또한 실은 소유권을 등기할 수 없는 땅이다. 나라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는 퀼테페는 시골과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이방인들로 가득하다.


 2008년에 나온 '순수 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이 '퀼테페'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스탄불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순수 박물관'에선 그러한 이스탄불의 상류층 문화를 그렸다. 그것은 중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은 '퀼테페'가 잘 보여주듯이 그와 정반대인 주변의 이야기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망각의 존재가 되어가는 보자 장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도 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순수 박물관'에서 사라진 여성 퓌순은 주변적인 존재였다.

 주인공 케말은 중심에 있기위해 그녀를 배신했고 결국 그녀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부재로 중심의 허망함을 깨달은 케말은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거기에 남은 사물을 통해 이제 중심의 의미를 거꾸로 구현한다. 이러한 케말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 나는 지금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메블루트와 같은 주변적인 사람들은 그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 '해골'의 말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스탄불의 상류층이란 중심에서 잘 보이지 않거나 쉽게 무시되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결코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2010년에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으로 번진, 후에 '아랍의 봄'이라 불리게 된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다. 그것은 그동안 억압과 차별 속에 있었던 자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래 하나의 신체 같았던 그 곳에도 실은 '계급'이라는 분열의 지점들이 있었다는 게 전면으로 드러난 것과도 같았다. 신체는 '순수 박물관'에서 퓌순의 부재처럼 낱낱이 해체되었고 이제 더이상  하나의 신체로 묶어둘 수 없다는 것도 명약관화해졌다. 이러한 외부 사정이 파묵으로 하여금 더욱 메블루트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다. '순수 박물관'에 온당히 보존되어야 할 존재이니까 말이다.





 박물관에 보존되는 존재들은 '순수'해야 한다.

 여기서 순수란 있는 그대로 즉 인위적인 가공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존되는 것은 존재에 깃든 역사니까 말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 한 사람의 43년에 걸친 긴 삶의 시간을, 그것도 놀랍도록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내 이름은 빨강'과 유사한 소설의 형식에도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처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이어 받으면서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했으며 또한 행동했는지, 자신의 육성으로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각 개인들을 보존한다. 순수 박물관에 보존되는 사물과 같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등장인물이라 하여도 작가가 서사의 주도권을 가지지 않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전시되는 사물들 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저마다 홀로 침묵한 채, 감상자의 자의적 해석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많은 소설들은 작가의 주도권 아래 등장인물들이 수렴되지만, 이 소설은 거꾸로 등장인물 각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산포한다. 그리고 그 산포(散布)를 통해 생겨난 간격 속으로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 독자 스스로 작가가 주려는 것 이상으로 메블루트가 거니는 골목과 방문한 집만큼이나 다양하기 그지 없는 삶의 결을 체득하도록 만든다. 파묵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겸허의 태도를 독자에게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감정 이입을 자제한 채, 담담히 모든 이의 삶을 서술하는 것 또한 문학 보다 더 거대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겸허의 태도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기왕에 산포란 말이 나왔으니 이제 오르한 파묵의 진짜 주제로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왜 우리가 암흑을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산포가 바로 열쇠다. 산포는 틈을 만들어낸다. 파묵에겐 그 '틈'이 아주 중요하다. 분리는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분리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연인과 이별로 분리되는 것도 피하고 싶어하며 모두에게 분리되어 외톨이로 남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또 없다. 그러나 파묵에겐 그 분리가 오히려 구원이 발아되는 장소가 된다. 소설 '눈'에서 그동안 시를 쓸 수 없었던 주인공 카가 폭설로 완전히 격리된 '카르스'에서 시를 쓰게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틈이 바로 암흑이다. 이것은 파묵의 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건 '검은 책'처럼 아내의 실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얀 성'처럼 터키 함대에게 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새로운 인생'에선 한 권의 책, '눈'에선 돌연한 정전으로 도래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낯섦'에선 때로 지진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집에서 뛰쳐나온 메블루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건 예전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죽음 역시 그 틈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예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들은 사실 이전의 삶이 가동을 멈추는 정지(停止)의 시점이기도 하다. '검은 책'에 나왔던 왕자의 말을 다시 빌어 말하자면, 기억 속에 알알이 박힌 과거의 소음들이 침묵하는 정적(靜寂)의 시간이다. 죽음은 그 정적이 극대화된 형태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이 찾고 갈구하던 것이 바로 이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말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만이 자신이 되는 것에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왕자는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말해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에만, 과거와 책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억 그 자체를 잃어버렸을 때만, 그 깊은 정적을 들은 후에만, 자신을 자신이게 할 진짜 목소리가 허락될 것이다.('검은 책' 2권, p. 276)



 이렇게 하여 우리는 왜 이 소설이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어둠으로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어둠이 예전 삶과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 걸. 그 간격으로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존 사회의 모든 소음과 현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파묵은 강조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으면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말라고. 간격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박물관에 전시된 사물처럼 정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내맡기라고.

 여기까지 오면, 이제 우리는 왜 소설에서 메블루트와 쉴레이만 그리고 페르하트가 똑같이 사미하를 사랑하고 또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사미하를 잃어버리는 것은 '검은 책'의 뤼야와 '순수 박물관'의 퓌순이 그러하듯 갑작스럽다. 불현듯 자기 삶에 드리워진 암막 같다. 그것은 소설 처음에 메블루트를 찾아온 암흑 그대로다. 그렇게 틈이 생겼다. 그런데 셋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르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려 한다. 문득 가지게 된 간격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사미하를 끝까지 찾아다닌다. 페르하트는 더 심하다. 그는 사미하와 같이 살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녀만 찾아 다녔다. 그러다 결국 사미하도 떠나가게 만들고 말았다. 한 번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시도가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그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잘못을 반복했다. 페르하트는 끝내 살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은, 살해라는 점에서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집착이 종국에는 무엇을 가져오는 지에 대한 작가의 불길한 예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블루트만은 달랐다. 그는 메우려 들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히려 그 틈에다 자신을 길들인다. 오직 메블루트만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행복을 경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틈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광장으로, 자신만이 가득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타인들을 널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메블루트가 자신을 내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의 차이'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보자 장사를 하면서, 후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이들을 단속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알지 못해 곤란을 겪는다. 페르하트는 사적인 관점과 공적인 관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가 흐르는 삶의 시간 속에서 축적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이윽고 깨닫게 된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의 의도는 의도대로, 말의 의도는 의도대로, 그냥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이다. 그 후, 그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면서 페르하트가 가르쳐준 온갖 꼼수들을 전혀 쓰지 않는다. 누가 되었건, 그저 정직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판단은 운명에 맡긴 채로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운명이라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삶의 궤도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왜 자신이 사미하가 아니라 라이하와 도망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다리는 물론 운명이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운명은 이 두 가지를 합치할 수 있다. (...) 라이하와 함께 발견한 행복은 메블루트의 인생에서 커다란 운명이었다. 그것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p. 534)


 운명은 삶이 간직한 신비다. 그것의 운행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삶에 내재된 신비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문명은 과학으로 이러한 신비를 가급적 제거해 왔다. 진리는 비밀스런 빛처럼 감춰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되었고 그러자 자기가 바로 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며 주장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그런 그들의 선동과 이데올로기로 일어난 전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지금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터키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동양에선 원래 진리는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것이었다.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고 부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소로 화답했다. 신비는 대립을 낳지 않았다.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누구도 진리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월도 배척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묵은 신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 메블루트가 말한 삶의 존경은 거대한 삶이 포용하고 있는 신비에 대한 겸허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은 '검은 책'에서 F.M. 위췬지의 말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난 바 있다.

 "동양과 서양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던 각 시기는 우연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승기를 잡은 쪽은 세계를 비밀과 이중적 의미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장소로 보는 쪽이었다. 세계를 단순하고 단일한 의미로, 신비스럽지 않는 곳으로 보는 사람들은 패배했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검은 책' 2권, p. 106)

 위췬지는 문명이 '신비'의 개념을 상실하는 것은 사고의 '중심'에서 박탈되어 그 질서를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계는 신비를 잃어버렸으며, 우리의 얼굴도 글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얼굴은 공허하고, 과거와 같이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우리의 눈썹, 눈, 코, 눈길, 표현, 공허한 얼굴은 무의미하다."(같은 책, p.107)


 얼굴을 잃어버림은 진정한 자신으로 만드는 고유한 개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연결된다. 암흑의 포용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왔던 삶의 신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런 수용을 통해 우리는 누가 가르쳐 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길어올린 자신의 고유한 모음(母音)으로 말할 줄 아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이걸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메블루트가 끝내 몰개성과 획일화의 공간인 아파트를 거부하고 끝까지 골목 순례를 선택하는 것처럼 마음에 깃든 낯섦을 낯익은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암흑을 포용하듯이,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서야 우리는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삶의 모든 어귀와 순간마다 깃들어 있는 운명과 신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신(神)'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저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아름다운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세상의 은밀한 균형을 주시하고, 인간을 더욱 더 문명화하고, 더 섬세하게 만들 신은 있습니다."

 "물론 있지."

 "하지만 그 신은 이곳 당신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밖에, 텅 빈 밤에, 어둠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눈 속에 있습니다."('눈' 1권, p. 148)


 다치바나 다카시가 우주로 나갔던 경험이 있는 이들과 인터뷰 한 바에 따르면, 한 번 우주에 갔다 왔던 이들은 한결같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광막한 우주의 크기에 압도되어 신이 아니고서는 이런 거대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기 때문이란다. 이는 곧 먼 우주에서 보면,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이런 왜소함은 우리 역시 굳이 우주를 나가지 않아도 현실 속에서 매번 경험하는 바다. 


 왜소하기에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왜소하기에 나보다 더 거대한 것에 착 달라붙어 호가호위 하듯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 왜소함이 만들어내는, 삶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암흑들을 무작정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것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함께 어울리며 천천히 동행하라고 권한다. 어떤 암흑이 삶이 감춘 또 어떤 신비와 연결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에 오스만이 본 천사처럼, 신은 자신의 것을 모두 내려놓은 순간 문득 도래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다양한 가능성들을 큼직한 자루에 넣어 산타클로스처럼 등에 지고서.

 이래도 파묵의 조언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버트란드 러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떨까?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왜소함에 직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은 당신에게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위대한 여정이다. 아니, 앞서 내가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인용한 것처럼 실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의 여정을 이룬다. 밀란 쿤데라의 말 그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특히 연속성이 강하고 전과 후의 작품들이 상호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뷰도 비록 '내 마음의 낯섦' 한 권에 대한 것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소설들을 아우르며 썼다. 덕분에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게 다 내가 느낀 파묵의 진심을 당신에게 잘 전하기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파묵을 본받아, 내 필요에 따라 그의 주제를 재단하지 않고 가급적 그가 주려고 했던 말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나름 작가에 대해 내 겸허의 태도를 보이려 한 것이니 더욱 아량를 베풀어주길 빈다.


 새벽 내내 이 글을 썼다. 그렇게 파묵과 동행했다. 문득 커피가 그리워 부엌으로 가보니 창으로 아침이 어느새 찾아와 있고 바깥 풍경이 하얀 설원으로 변해있다. 문득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카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렸던 '눈의 정적'이란 말이 생각났다. 파묵에게 있어 정적은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다. 과연 그런 것처럼, 눈 앞의 하얀 세계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한동안 틈을 두고 풍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순수 박물관'의 사물이라도 된 듯.



 [소설에서 메블루트를 매혹시켰던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여 페르하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가계 벽에 걸어두기까지 하면서 바라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묘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묘지란 대표적인 정적의 장소다.  소설 '검은 책'에서 왕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속의 고요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될 수 있는 황량한 사막에 있는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 사이에 있는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에 있던 나무를 부러워한다고도 말했다. 메블루트 또한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가고 이 그림을 바라본다. 정적을 두고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을 통해 영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자신이다앞으로 무엇이 그려질지 모르는,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순백의 영혼이다.]


 긴 겨울은 내면의 순례를 떠나기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 안내자요 동반자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권해 본다. 당신도 이 겨울의 어느 순간, 당신의 신을 만나게 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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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12-1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반칙, 헤르메스님. 이건 리뷰가 아니잖아요. 한 편의 버젓한 평론이지.....

도대체 헤르메스님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헤르메스님이 리뷰를 쓰신 책을 syo는 절대 리뷰하지 않겠습니다......

ICE-9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앗! syo님!! 이런 졸문을 감히 평론이라 추켜세워주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빨리 댓글로 인사드려야 했는데, 요즘은 너무 바빠서 이렇게나 늦었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댓글에 진짜로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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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 결말에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도진기 작가의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읽고 난 뒤 든 첫 소감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 있군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도진기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붉은 집 살인사건'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그것이 이번에 새로이 '황금가지'에서 나왔네요. 눈길을 확 잡아끄는 노란 표지로.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제목이기도 한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잃어버린 여인'을 뜻합니다. 살해된 정유미를 뜻하는 것일까요? 표지의 열쇠는 사라진 104호의 현관 열쇠입니다. 그 곳은 정유미와 함께 발견된 시신의 남자가 거주하는 곳이죠. 아마도 범행 방법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라 표지에 나온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가지 시리즈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활약하는 시리즈고, 다른 하나는 해결사 '진구'가 활약하는 시리즈죠. 그동안 진구 시리즈는 제법 많이 만나봤는데, '고진'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아, '진구' 시리즈에서 그가 한 번 까메오처럼 출연한 것을 본 적도 있군요. '가족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말이죠. 어쨌든 그렇게 '라 트라비아타'로 고진 시리즈와 첫 대면을 해봤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진구에겐 미안하지만 '진구' 시리즈 보다 더 좋았어요. 아마도 제가 '본격파'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순도 100%의 본격 미스터리이니까요.


 아, 본격이라는 말은 순수하게 추리로 트릭을 풀고 범인 찾기에만 집중하는 소설을 말합니다. 그동안 도진기 작가의 본격 미스터리를 안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모두 단편이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처럼 장편으로 만나본 것은 처음인데, 정말 잘 썼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잔뜩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은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등장한 이유현이 법정에서 커다란 실망감을 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초구의 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아 재판에 넘겼는데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것이죠. 그 방법이 실로 절묘했기에 이유현은 그 변호사가 누군지 능히 짐작합니다. 바로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것을 깨달은 이유현이 고진에게 전화로 연락하면서 이야기는 이제 독자를 그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피해자는 정유미라는 25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인 204호 거실에서 목에 송곳이 박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시신 한 구가 더 있습니다. 남자로, 그는 나중에 바로 아래층인 104호에 사는 사람이고 살해된 정유미를 예전부터 스토킹해 오던 인물로 밝혀집니다. 이 사건을 경찰이 발견하게 된 것은 정유미의 애인 김형빈의 신고였습니다. 김형빈은 정유미와 통화하다 '강도다'라는 말을 듣고 얼른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이제 서초경찰서 강력반 팀장 이유현의 수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 난해하기 그지 없습니다. 정유미의 현관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도어락이 걸려 있는데, 그 비밀번호는 정유미와 애인 김형빈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집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할머니도 한 분 드나들고 계셨는데 정유미는 자신에게도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녀가 먼저 열어줘서 들어갔다고 진술합니다. 살해된 현장엔 그 어디도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확인된 김형빈을 용의자에서 제외하면 침입 경로는 오직 베란다 하나 뿐입니다. 이것은 아파트 입구 CCTV를 확인한 결과 다른 외부 침입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혹시 동기를 가진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여 정유미 주변 인물을 샅샅이 탐문했지만 너무나 깨끗하여 결국 동기가 아니라 범행 방법에 치중하여 베란다 침입이 가능한 물품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자를 체포합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고진의 조력으로 풀려난 것입니다. 따지듯 자신을 찾아온 이유현에게 고진은 범인이 정말 흥미로운 존재라며 자신의 추리를 들려줍니다. 이 때부터 고진의 추리쇼가 3회에 걸쳐서 상연됩니다. 한 번에 그 세 가지를 다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씩 풀어놓는데 그 하나만 듣고 이유현이 수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히고 그러면 고진이 두 번째 가능성을 들려주고 또 막히면 세 번째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마치 3막으로 된 추리극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고진의 추리 정말 탁월합니다. 그 방법에 나름 놀랐습니다. 이 사건엔 두 가지 트릭이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트릭'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차 트릭'입니다. 이 트릭을 하나하나 논파해 내는 고진의 추리가 정말 절묘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려운 트릭을 정교한 추리를 통해 아귀가 딱딱 맞게 해결하는 것을 보는 쾌감 때문이죠. '라 트라비아타'는 그런 쾌감을 충분히 선사합니다. 소설에서 고진은 이유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의 기술 앞에 범죄의 설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고들 말하지. 지문, DNA, 혈흔 분석 같은 거야 물론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은 사건 생기면 딱 세 가지만 보면 되잖아? 휴대폰, 이메일, 그리고 통장 계좌. 이거만 뒤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 나와.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트릭은 대부분 현대에는 성립이 안 돼. 하지만 말이야. 난 좀 생각이 달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트릭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진 거야. 수사 기관을 속일 수단도, 기발한 범죄의 여지도 얼마든지 더 생겨난 거야. 그런 내 이론을 범인이 그대로 실현해 보여 줬어. 정말 재미있지 않나? 하하하."(p. 160 ~ 161)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그야말로 그런 고진의 생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놀라운 반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이 또 전혀 뜬금 없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전에 단서가 다 제시되어 있으며 꼼꼼하게 읽고 잘 추리했다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한 번 도전해 보시죠. 당신은 과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런 점까지 더해 도진기 작가가 왜 초기에 발표한 두 작품만으로도 명성을 얻었는지 잘 알겠더군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분명 어릴 때 셜록 홈즈나 엘큘 포와로의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정작 도진기 작가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고 미스터리계에 입문했다고 하지만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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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리브 콘스탄틴의 '마지막 패리시 부인'을 읽었습니다.

 리브 콘스탄틴은 원래 필명으로 실은 린 콘스탄틴과 발레리 콘스탄틴 자매가 함께 썼다고 하네요. 얼른 사촌이 함께 썼던 '엘러리 퀸'이 생각납니다. 이야기가 워낙 재밌고 구성도 탄탄하기에 기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하네요. 하지만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와 비슷한 몇 작품이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한 번 열거해 볼까요? 아이라 레빈의 '죽기 전의 키스', 아가사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많은 리플리씨' 등. 그 중 가장 많은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아이라 레빈의 것입니다. 레빈이 23세 때 썼던 이 작품은 '버드 콜리스'란 남자가 주인공 입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야심은 너무 큰 이 남자는 소시오패스이기도 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대학 때 우연히 만나 도로시란 여자가 구리 재벌로 유명한 사업가 킹쉽의 딸인 것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쪽으로 머리 회전이 빠른 그는 계획대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제 결혼한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도로시가 임신을 하고 맙니다. 혼전 임신은 엄격한 청교도인 킹쉽이 결코 용서하지 않아서 도로시와 결혼해도 원하는 돈을 전혀 얻지 못하리라 생각한 콜리스는 도로시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둘째 언니 엘렌을 유혹할 계획을 세우죠. 이처럼 콜리스에겐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신경쓰는 야수일 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는 자신을 포식자로 여기니 야수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주연 중 하나인 '앰버'도 이와 같습니다. 주연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이 각 부마다 화자를 달리하여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소설의 주연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부의 화자, '앰버'이고 다른 화자는 2부의 화자, '대프니'입니다. 3부는 1인칭 주관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던 1부, 2부와 다르게 3인칭 객관적인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3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네요. 아무튼 앰버와 대프니는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입니다. 앰버는 가진 것이 오로지 몸밖에 없는 존재인 반면, 대프니는 아름다운 미모에  엄청난 재산, 거기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편을 비롯 귀여운 두 딸까지,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존재이죠. 앰버에게 있어 대프니는 거의 아무리 손을 뻗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하지만 앰버는 그 별에 닿고자 합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은 대프니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여기니까요. 앰버는 그 자리로 가기 위해 일단 대프니부터 공략하기로 합니다. 콜리스가 도로시부터 공략했던 것처럼 말이죠.



 대프니는 예전에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 때 겪은 상실감이 하도 커서 지금도 여동생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지금의 남편 잭슨과 결혼하게 된 것 결정적인 계기도 여동생과의 이별 때문이었죠. 앰버는 바로 그런 대프니의 상실감을 공략해 들어갑니다. 자기에게도 대프니와 똑같이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시작으로 앰버는 대프니의 마음을 차례 차례 얻어갑니다. 사전에 대프니의 취향이나 가치관등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종종 방해되는 인물도 나타나지만 그 때마다 술수와 거짓말로 능수능란하게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잭슨과 단 둘이 있게 될 기회를 얻습니다. 1부는 그런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앰버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더욱 읽는 이의 기분을 쫄깃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욱 쫄깃하게 만드는 전개가 펼쳐집니다. 바로 2부, '대프니' 입니다. 대프니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반전들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게 유감이네요.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이렇게만 말하겠습니다. 끝까지 계속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고. 거기다 결말 또한 시원, 상쾌하다고. 그 통쾌함 때문에 저는 이 글의 제목을 하마터면 '악인이여, 지옥행 특급 열차를 타라!'라고 적을 뻔 했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결핍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앰버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는 대프니와 그녀의 남편 잭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만족에는 절대 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오로지 상대 평가 입니다. 자신의 만족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비교해 우월해야만 이뤄지니까요. 아무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더라도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 만족감이 덜하거나 사라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정되기에 인간은 늘 결핍을 느낍니다. 세상엔 자기보다 잘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즐비하기 마련이니까요. '엄친아'란 말이 존재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듯 질투도 늘 그림자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결핍과 질투는 사이좋은 연인처럼 꼭 붙어 다니는 한 쌍과도 같습니다. 사실 결핍이 없으면 질투할 것도 없겠죠. 때로 이것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결핍과 질투 또한 양날의 검이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죠. 현재의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르고 가진 것이 많아져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지존무상'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말이죠. 아니, 그런 자리에 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우리는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다."


이처럼 결핍과 질투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죠.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도 막상 갖고 보면 얼마안가 그 뿌듯함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살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요. 갈증의 끝에 허망함이 있다는 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핍과 질투의 끝없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을 당신도 가지고 있다면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인물 하나가 그것을 넌지시 알려주니까요.


 각설하고, 이 자매 작가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이곳저곳에 미리 던져 놓았어요.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길에 조금씩 빵조각을 흘린 것처럼 말이죠. 일단 제목의 '패리시 부인'에서 '패리시'가 그러합니다. 제목의 패리시는 철자가 'PARRISH'이지만 이와 같은 발음이 나는 'PERIS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이 참 재밌습니다. '몹시 괴롭히다', '멸망하다'란 뜻이거든요. 분명 이 'PERISH'란 단어 때문에 '패리시'란 이름을 썼을 것 같아요. 소설을 읽어보면 '패리시'가 단순한 이름만이 아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주연의 이름 또한 재밌습니다. '앰버'는 얼른  'AMBITIOUS'의 야심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선 아이가 유괴 되었을 때 전국적으로 경보를 내는데, 그것을 바로 '앰버 경고'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경고'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앰버'란 이름은 그 존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대프니'란 이름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이 영향 받았을 작품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는 '레베카'란 소설 말입니다. 그 소설의 작가가 바로 '대프니 듀 모리에'였죠. 아마도 소설 속 '대프니'란 이름은 바로 그 작가 이름을 따온 것 같습니다. 소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주인공이 생각했던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거든요. 그처럼 '대프니 패리시'도 앰버가 생각하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이런 것을 보노라면 이 자매가 소설의 디테일을 무척 공들여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재미를 더욱 돋궈주는군요. 앞에서 열거한 '죽기 전의 키스', '끝없는 밤' 그리고 '재능 많은 리플리씨'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만나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어쩌면 자신의 결핍과 질투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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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이런 상상, 한 번 해 봅니다.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옥을 정상적인 세계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옥에서 갑자기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까요? 과거를 모조리 잊고 새로운 삶을 마냥 껴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새롭게 가지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자신이라 여기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정체성을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성별이 그러하죠. 국적이나 지역,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살아가면서 형성하는 정체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저런 지위를 갖거나 경험을 하게 마련이고 거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가치관과 신념도 갖게 됩니다. 이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지요.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된 것이지만 살면서 만드는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체성이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타고난 정체성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일까요? 혹시 살면서 이런 의문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그러셨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미국 작가 카렌 디온느의 소설, '마쉬왕의 딸'은 흥미롭게도 이런 질문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으니까요.




 먼저 제목인 '마쉬왕의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쉬왕의 딸'은 서양의 유명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합니다. 이집트 공주가 하루는 백조로 변하는 깃털 옷을 입고 늪지대에 놀러왔다가 그만 늪을 다스리는 마쉬왕에게 납치됩니다. 그 후, 공주가 늪 아래로 끌려간 자리에 꽃봉오리 하나가 자라납니다. 그 꽃봉오리 아래엔 여자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마쉬왕의 딸'인 것이죠. 이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것을 본 황새는 근처 바이킹 왕비가 자식이 없어 슬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갖다 줍니다. 아이는 바이킹 왕 부부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비치는 낮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인데, 밤만되면 개구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운 사람의 모습일 때는 성격이 그야말로 악하며 난폭하기 그지 없고 개구리일 때는 한없이 온순하고 착한 것입니다. 마치 외면과 내면이 작정하고 서로 반대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운 외모는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외모는 사랑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이 아이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 과정과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화 '마쉬왕의 딸'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마쉬왕의 딸'은 한 마디로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입니다.


 

삽화는 마쉬왕에게 끌려가는 이집트 공주를 그린 것입니다.


 카렌 디온느의 소설 주인공 헬레나 역시 그야말로 '마쉬왕의 딸'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십대 때 아버지에게 늪지대로 유괴되었고 자신은 그 유괴범 아버지와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녀는 12살이 되어 거기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늪지대의 오두막을 세상의 전부라 여겼습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에게 인정받으려 애썼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이 그에겐 진리였고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뭐든지 의심하지 않고 쏙쏙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사냥하는 법과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 있어 그 세계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물론 바깥 사람들에겐 오로지 비정상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다 동화 속 '신부'와 같은 자가 나타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어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비정상이라 말하는 세계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입혀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듯 내재된 정체성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문득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늪지대의 삶이 그립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현재 헬레나는 결혼하여 두 딸까지 있는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쉬 지워지진 않습니다. 때로 그리움이 사무치면 2 주일 정도 야생으로 홀로 가서 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헬레나는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새로 입게된 정체성에 완전히 동화하지도 못한 채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경계선 상의 존재입니다. 동화 속 '마쉬왕'의 딸과 같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외면과 그 외면과 상반되는 내면 속에서 커다란 갈등을 겪는 동화 속 '마쉬왕의 딸' 그대로 헬레나 역시 어디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요.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가 닥쳐옵니다. 자신이 탈출할 때 체포된 아버지가 간수를 죽이고 감옥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다가온다는 것은 과거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조여오는 과거 앞에서 헬레나는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마쉬왕의 딸'은 이런 심리적인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된 드라마입니다. 그 생생함의 정도를 아버지와 같이 살던 과거와 홀로 삶을 꾸리고 있는 현재로 이야기를 서로 교차하며 전개시키는 것으로 한껏 높이고 있죠. 상이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이란 테마로 읽으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란 얼른 미국의 트럼프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타고난 정체성을 한없이 강조하는 시대이니까요. 타고난 정체성에 관대했던 유럽 연합조차 시리아 난민 사태를 맞아 다시금 타고난 정체성에 집착하며 영국 민중은 아예 '브렉시트'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혈통과 국적 그리고 성별의 원본을 중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자꾸만 뚜렷해지는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타고난 '원본'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라는 화두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타고난 정체성'에서 쉽게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있게 들려왔구요. 오늘의 시대 흐름과 관련하여 그저 스릴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특히나 페미니즘과 관련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헬레나의 과거 세계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 전부를 오로지 아버지 혼자 결정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일은 사실 신이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그 아버지란 지금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처럼 남성중심문화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이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실현된다는 것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으로 읽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이 남성중심문화가 마녀로 치부하여 배제하려 했던 모습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네요.


 생각해 보면, 동화 '마쉬왕의 딸'은 무엇보다 같은 작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와 대비되는 작품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쉬왕의 딸'은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실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같은 작가가 쓴 이 두 동화는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1843년, 그러니까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이 전체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한창 민족주의를 형성해 가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은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미운 오리 새끼'는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한 것이지요. '마쉬왕의 딸은 그보다 15년 후인 185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아마도 '마쉬왕의 딸'이 '미운 오리 새끼'와 완전 다른 얘기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바로 1848년에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잘 분석했듯이 계급 투쟁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국가 내부의 문제가 그로 인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2월 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한 나라 안에도 계급이란 분열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따라 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쉬왕의 딸'은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육체가 상이한 정체성으로 분열되어 있고 각 자의 모습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후자의 외면과 내면의 상반은 2월 혁명 이후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이데올로기'를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데올로기는 보이는 외면과 그 안에 깃든 내면이 실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것이었죠.


 

 이 소설은 그러한 '마쉬왕의 딸'이 가진 의미에 집중하고 그것을 스릴러로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텍스트 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런 역량이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또 발현될 지 기대 되네요. 차기작을 얼른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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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7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헤르메스님의 리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잘 쓰셔서 내가 직접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 분 글을 보는 쪽이 훨씬 남는 게 많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거예요......

양철나무꾼 2017-12-08 18: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로 어찌표현해야 좋을지 몰랐거든요.
이런 글을 쓰는 분도, 이런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도 완전 멋지십니다~^^

ICE-9 2017-12-09 19:51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나 과분한 칭찬의 댓글을 받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syo님, 양철나무꾼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 주말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