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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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필립스의 '밤의 동물원'은 감히 올해의 발견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소설입니다. 작년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가 최고의 범죄소설로 꼽았다는 얘길 듣긴 했었어도 생소한 작가라 그리 큰 기대는 없이 읽었는데 과연 그런 평가를 얻을만한 작품이더군요. 작가의 이름은 진 필립스. 찾아보니 미국 작가더군요. 2009년에 'The Well and The Mine'로 데뷔했고 '밤의 동물원'은 2017년에 다섯 번째로 발표한 소설입니다. 일단 필력이 대단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몰아가는 힘이 있고 등장인물의 심리 또한 아주 세심하게 묘사하는데다 문장도 정말 좋더군요. 뭐라고 할까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재미를 모조리 다 채워주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밤의 동물원'은 그런 소설입니다. 그러니 주저없이 올해의 발견으로 꼽을 수밖에요.


 '밤의 동물원'의 원제는 'Fierce Kingdom'입니다. 번역하자면 '치열한 왕국'이라고 할까요? 사실 동물원에 어울리는 제목은 아닙니다. 동물원은 야생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벗어난 동물들이 살아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왜 한국 제목은 '밤의 동물원'일까요? 그것은 소설의 무대가 정말로 밤의 동물원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왜 영어 제목에 'Fierce'가 들어갔을까요? 그건 세 명의 남자가 중화기로 무장하고 동물원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동물원에서 일어났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학살이 벌어진 하룻밤 동안이 일을 그립니다. 링컨이라는 아주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동물원에 놀러온 엄마 조앤을 주인공으로 해서 말이죠. 이야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조앤과 링컨이 동물원에서 마구잡이로 사람과 동물을 살상하는 세 명의 학살자에게서 살아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오후 4시 55분부터 오후 8시 5분까지 시간 별로 진행되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단 한 순간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살자 눈에 조금이라도 들켰다간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마저 빼앗길테니까요. 소설은 그러한 위기적인 상황과 어떻게든 아들은 구하고픈 엄마의 절박한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 소설은 정말 재밌습니다만 재미가 다가 아니라서 더욱 올해의 발견으로 꼽게 만듭니다. 뭐랄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해 참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랬습니다만, 중간과 마지막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까지 있었습니다. 엄마의 입장에서 소설이 진행되기에 현재 아이를 키우시고 계시다면 가슴에 와닿는 부분이 정말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한 이런 부분이 잠깐 잠깐 드러나는 조앤의 과거 회상을 통해(주로 조앤의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조앤이 링컨에게 했던 것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되고 있기도 하구요. 어쩌면 바로 그래서 제목이 'Fierce Kingdom'이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한 여성이 엄마가 되어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이 험한 세상에 치열하게 살아남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말이죠. 우리는 얼른 과연 그럴까 생각하지만 작가는 잘 보여주죠.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다면 그건 대낮의 동물원을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이죠.


 대낮의 동물원은 우리 속의 동물들마저 한가로이 보일만큼 평화로워 보입니다. 우린 어쩌면 그런 평화를 잠시나마 맛보기 위해 동물원을 찾는지도 모르겠어요. 소설의 처음에서 링컨과 조앤이 함께 벌이는 히어로 놀이처럼. 소설은 그 세계를 명백하게 신화와 영웅의 세계로 설정합니다. 링컨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만드는 이야기 속에는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지요. 신화와 영웅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대로 흐르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우리가 가진 믿음과 상식이 전혀 배반받을 일이 없지요. 악은 응징되고 정의는 실현되고 선함과 희생은 보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조앤과 링컨이 그 세계에서 벗어나 동물원의 출구 가까이 다가간 순간, 현실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정의나 선함의 보상 따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함과 살상이 넘치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이. 세상은 '밤의 동물원'이며 바로 그런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학살된 우리 속의 동물은 바로 그러한, 조앤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허상이 깨어진 것의 비유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선, 학살이 벌어지는 동물원은 조앤이 세상에 가지는 두려움이 반영된 공간으로도 보입니다. 아무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세상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매일 벌어지는 범죄와 사고 소식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전쟁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신자유주의를 보다보면, 내가 과연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지 않을 수 없죠. 그 두려움과 근심이 조앤이 처한 동물원의 위기 상황으로 비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조앤이 동물원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초반의, 그저 불안에 떨며 어떻게든 링컨만 살리고 보자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후반엔 위협과 위기에 당당하게 맞서고 아들이 아닌 남을 위해 자신마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결국 자신이 보다 강하고 이타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불안에서 헤어날 길은 없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안을 이기는 힘은 바로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것은 특히나 초반에 조앤이 핸드폰을 통해 남편에게 의지했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녀는 성장하기 전, 계속 숨어 있으면서 핸드폰을 통해 남편이 어서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바라는데요, 끝까지 남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깥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죠.


 아들이 이름이 하필이면 링컨인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소설에도 흑인 노예 해방을 시켰던 대통령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밝히고 있더군요. 링컨이란 이름은 해방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초반에 보여주는 조앤과 링컨의 관계는, 링컨의 입장에서 해방 보다는 속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십대 흑인 소녀 케일린에 대해 조앤이 짜증내는 것(이 케일린은 링컨의 미래 모습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께 숨어 있었던, 교사였다가 은퇴한 파월과 로비(학살자 중 하나)의 관계로 암시됩니다. 조앤은 물론 자기 엄마의 경험도 있어서 링컨을 아낌없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링컨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늘 자신이 직접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에서 사실 조앤은 링컨을 속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조앤이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진정으로 눈 뜨는 순간, 링컨 역시 엄마와 떨어져 홀로 공포와 맞서는 것으로 연출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밤의 동물원'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후반의 감동과 함께 부모가 된다는 것과 사람을 믿는다는 것을 아주 깊이 있게 헤아려 보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뭔가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을 바란다면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추천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무더운 여름 밤, 밤의 무더위를 잊게 해 줄 뭔가를 찾으신다면 어떨까요? '밤의 동물원'을 한 번 방문해 보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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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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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래빗. 참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습도 아주 낯익네요.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봤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 작품을 실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 익숙하면 읽지 않았는데도 왠지 다 아는 것 같아서 안 읽게 되는 거. 피터 래빗이 제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나온 전집이 참 반갑네요. 네, 나왔답니다. 피터 래빗 전집이. 애니메이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이번에 피터 래빗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개봉되지 않았다면 이 전집을 만나보지 못했을테니까 말이죠. 오래된 작품입니다. 1902년에 나왔으니 백 년도 더 넘은 작품이죠. 어쨌든 저처럼 이름도, 모습도 익숙한데 정작 얘기는 읽어보지 못한 분이라면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책이 참 예쁘게 나왔어요. 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민음사 판입니다. 빨간 표지의 양장본인데, 빈티지 느낌이 나게 잘 만들었네요. 피터 래빗하면 역시 삽화죠. 베아트릭스 포터의 예쁘고 정겨운 동물 그림이야말로 피터 래빗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민음사도 이 작품의 매력이 삽화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고맙게도 대부분 컬러로 실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색깔도 정말 잘 쓰기 때문에 이건 정말 잘한 일로 봅니다. 덕분에 포터의 일러스트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맛보게 되네요. 일러스트가 너무 좋아서 그것만 봐도 될 것 같아요. 잠시 작가에 대해 말해보도록 할까요? 베아트릭스 포터는 1866년에 영국의 상류층 가정의 외동딸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방적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없었으나 자식이라고는 베아트릭스 포터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외로움을 동물과 책을 통해 해소했습니다. 그렇게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과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로 자라나게 되었죠. 그녀는 많은 동물을 길렀으나 토끼 두 마리를 유난히 귀여워했는데, 그것이 바로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좋아하는 벤저민과 장기를 많이 부리는 피터(p. 715)'였습니다. 네, 피터 래빗 이야기에 나오는 피터와 벤저민은 모두 베아트릭스 포터가 기르는 토끼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죠. 피터 래빗 이야기는 원래 출판으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녀가 스코틀랜드 여행 중에 우연히 만들어졌습니다. 하루는 같이 다니던 가정교사의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아픈 아이를 위로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 같이 데리고 다니던 피터를 가지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피터 래빗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잊게해주고자 하는 상냥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죠.




 피터 래빗 전집이라고 하지만 피터 래빗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다람쥐나 고양이등, 다른 동물들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그래도 피터 래빗 전집이니까, 피터 래빗을 잠깐 소개해 본다면, 피터는 막내 토끼입니다. 래빗네 근처엔 맥그리거 씨네 농장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안 됩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줘요. 래빗네 아버지가 거기 갔다가 잡혀 파이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터는 엄마의 경고를 잊고 맥그리거 씨네 농장에 들어가고 맙니다. 맛있는 상추와 강낭콩, 순무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죠. 그러다 맥그리거 씨에게 들켜 혼비백산 달아납니다. 결국 입고 갔던 옷을 모조리 거기에 벗어둔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죠. 거기서 첫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 이야기가 좀 나왔다가 다시 사촌 벤저민이 등장하여 그 뒷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사촌은 붉은 손수건으로 몸을 둘러싸고 있는 피터를 보고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피터는 맥그리거 씨네 농장에서 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감한 벤저민은 자기가 그 옷을 되찾아주겠다고 하면서 피터와 함께 맥그리거 씨네 농장으로 갑니다. 일전의 경험으로 겁을 잔뜩 먹고 있는 피터와 달리 벤저민은 여유롭습니다. 자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추 먹으로 자주 온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죠. 마침내 맥그리거 씨가 허수아비에 걸쳐 놓은 피터의 옷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를 만납니다. 벤저민과 피터는 고양이를 피해 엎어진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 숨는데, 고양이가 그 위에 배를 깔고 앉는 바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벤저민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다 그 곳까지 와 사정을 알고는 벤저민과 피터를 구해줍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구한 벤저민의 아버지는 다시는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해 회초리를 듭니다. 회초리에 맞아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려 벤저민과 피터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나오니 단순한데도 정말 재밌더군요. 왜 피터 래빗 이야기가 이토록 유명해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집에 걸친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과 그들을 그린 모습을 보니 베아트릭스 포터가 왜 환경운동가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겠더군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으니까요. 저는 어른이 되어 이 책을 만났지만 아이일 때 만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아이를 위해 만들어졌기도 했으니까요. 거의 그림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도 많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적으니 아이들이 읽기에도 전혀 부담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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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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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일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집에 오셨다가 아파트가 갑갑하다며 이틀만에 부리나케 내려가셨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계시는 동안 어딘가 안절부절해 보였다. 평생 마당 있는 집에서만  당신은 오로지 안과 밖만 있는 아파트에 적응이 되었던 거다. ‘이거 , 중간이 없으니 어정쩡 하네.’ 그렇게 말씀하신 기억난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 김진영의 데뷔작마당이 있는 집' 읽고서였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주란이 마당 있는 집을 원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에서 어렵게 살아온 그녀는 자신보다 살은 많지만 능력 있고 많은 남편을 만나 마침내 꿈을 이룬다. 그러나 그토록 바랐던 마당에서 어느 악취가 심하게 난다는 알게 된다. 기분 탓이라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당을 파헤친 주란은 묻힌 사람의 손가락을 발견하고는 혹시 남편의 짓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주란의 삶에 균열이 일어난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의심이 오로지 바깥 사실이 불러일으킨 것일까 독자가 의심하도록 연출한다. 작가가 주란이 전부터 남편 때문에 가정에서 계속 소외 당하고 있음을 내면의 고백으로 계속 기워넣는 것이다그녀는 자신을 자꾸만 종속적으로 만드는 남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의심은 바로 그러한 불만이 지핀 것인지도 모른다. 내심엔 자신을 계속 우리 인형으로만 만드는 남편이 파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가진 진짜 형상은 남편이라는 얼레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때문에 작가는 마당을 제목에 넣으면서까지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마당이 바로 주체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당은 주인의 영토. 주인만이 마당을 자유롭게 활보할 있다. 이처럼 마당을 주체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당을 갖는다는 , 이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이끌고 가는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란과 대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하나의 여성인 상은에겐 마당이 없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제약 회사 영업 일을 하는 남편과 산다. 가구 판매장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상은은 하루라도 빨리 이런 삶과 남편의 폭력과 무시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녀 역시 주란만큼이나 마당을 원하는 것이다. 마당을 위해 상은은 교묘한 수법으로 남편을 살해한다. 이는 주란이 남편의 파멸을 원하는 것과 이어진다. 주란과 상은은 결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상은은 과거의 주란이기도 하다. 소설은 마치 그것을 강조하듯, 살인으로 주란과 상은을 서로 만나게 한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주란의 남편에게 같이 대적하도록 뭉치게 한다. 상은은 마당을 갖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주란은 가짜에 불과한 마당을 진짜로 만들려면 오염원인 남편을 지워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마당이 있는 마당으로 상징되는 삶의 주체성을 획득 또는 회복하려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전선(戰線) 뚜렷하기에 구조가 단조롭게 느껴질 있다. 작가가 주란의 바로 옆에 여성만의 게토까지 넣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게토가 주란의 집과는 달리 너무나 주체적이며 안정적이기에 조금은 주제를 위해 너무 과도한 설정을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이야기를 읽다보면 금새 휘발되고 만다. 이야기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범인과 사건의 진실을 마지막까지 숨기면서 끝까지 서스펜스를 끌고 나가는 작가의 능력이 뛰어나다. 심리 묘사도 좋아서 자기 삶에서 주체적이 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갈망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소설은 결말에서 그토록 바랐던 마당이 정말은 어디에 있는가를 은근히 보여주면서 거기까지 끌고 주제를 매조지한다주란과 상은은 마당이 자기 바깥에만 있다고 여겼지만 실은 자기 내부에 있었다는 것으로 말이다. 마당은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었고 그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함으로 가능하다는 .


 주체가 되는 것엔 매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 도리어 자신이 바라던 모습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마당이 있는 그런 것을 넌지시 일러준다.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다면 발을 옥죄고 있는 사슬은 절대 풀어지지 않을 거라고.


 이런 때문에 남자와 여자를 떠나 지금도 내가 거할 마당이 없다며 서성이는 분들에게 소설로의 초대장을 널리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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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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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 날, 환한 아침 속에 드러난 눈밭의 나신(裸身)은 황홀한 꿈 같다.

 그것은 마치 범접(犯接)이 금지된 아름다움 같아서 어쩐지 발 하나 올리는 것조차 망설여질 지경이다.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일 뿐. 하루의 밥벌이를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상 앞에서 삶이 가진 다른 모습을 조금 엿본 것 같은 순간은 오래된 잠자리의 날개처럼 쉬 바스러지고 만다. 오후의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고된 몸을 벽에 기댈 때, 공허한 눈으로 담게 되는 하늘에 언뜻 그려질지언정. 그렇게 아련한 꿈이 된다. 여기에 '겨울의 환(幻)'이란 이름을 붙여본다. 찰라(刹那)로만 존재하고 그렇기에 서글픈 아름다움을.


 그런 겨울의 환(幻)에 어울리는 소설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일본 소설 중에서도 상위에 손꼽히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니키타 현의 애치고 유자와 온천을 배경으로 겨울마다 잠깐 이뤄지는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사랑을 담는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절절하지 않고, 늘 기약없이 만났다 무심히 헤어지는 것으로 꽤나 담백하다. 바로 그 담백함, 선뜻 초연해질 수 있는 관계이기에 시마무라는 겨울이 될 때마다 불현듯 잊지 않고 고마코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과 흰눈의 대비처럼 전혀 현실 같지 않은 그 곳에서 문득 무책임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 고마코로 향하는 발길은 계속되는 것이리라. 휴가 때 단골로 찾아가는 여행지처럼.




 시마무라에게 그것은 모든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비현실의 향유요, 무중력의 탐닉이지만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고마코의 삶은 시마무라로 하여금 점점 더 향유와 탐닉을 못하게 만든다. 발길이 거듭될수록 설국의 몽환은 꿈이 아니라 질척한 현실이 되고 시마무라 역시 그저 잠깐 머물다 훌쩍 떠나는 여행자에서 소작인과 같은 책임을 가지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마코가 그랬고, 요코가 그랬듯이.


 시마무라에게 설국은 결국 녹아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기에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설국의 눈은 녹지 않는다. 겨울은 언제까지나 이어지고 허무에서 생의 의미를 찾았던 시마무라를 계속해서 배반한다. 그의 발은 그 곳에서 끝내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p. 134)


 그 예감은 맞아 떨어진다. 끝내 설국은 시마무라에게 커다란 화염으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요코의 죽음과 고마코의 절규와 함께.


 동시에 우리도 알게 된다. 겨울의 환(幻)은 찰라(刹那)이기에 동경과 그리움을 낳는다는 것을. 순간의 향유만이 환(幻)을 미()로 남게 한다는 것을. 그것에 탐닉하여 집착하는 순간, 환(幻)은 사라지고 동경 속에 솟아난 우리들의 날개는 여지없이 꺾이며 그 빛 또한 이제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렇게 되는 것은 시마무라가 잘 보여주었듯 환(幻)에 취하고자 하는 마음엔 자기 본위의 욕망 또한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순수는 때묻기 쉽다고 한다. 분명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책임보다 강한 게 없듯이, 방기보다 연약한 것도 또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작가는 설국 내에서의 동선(動線)을 자주 지워버리는 지도 모른다. 시마무라와 고타로. 모두 많이 움직이지만 그 과정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움직이기 보다는 출몰한다. 유령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질 때는 오직 시마무라가 설국에서 떠나올 때 뿐이다. 현실이라는 책임의 장소로 다가갈 때라야 시마무라는 실존의 무게를 얻는 것이다. 얼른 이러한 문장이 떠오른다. 책임이 실존을 부여한다.


 시마무라는 언젠가 고마코와 헤어져 홀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다 연인인 줄 알았던 한 늙은이와 젊은 여인이 그저 같은 열차에 탔기 때문에 말을 나눈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릴뻔 한 일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하여도 더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을 실감한 탓이다. 그는 허무에 절망한다. 너무 절망하기에 허무에 탐닉한다. 그러나 그 허무가 정작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건 알지 못한다. 그 안에 자신만 있기 때문이란 걸.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함께 밤하늘의 은하수를 본 적이 있다. 시마무라 눈에는 그저 예쁜 은하수였지만, 고마코의 눈에는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는 아름다움이었다.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고마코가 유코의 시체를 껴안고 절규할 때, 그 은하수가 자신에게로 육박하고 있음을 느낀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 나나, 분명 나는 시마무라가 왜 고마코가 별 거 아닌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으리라 본다. 고마코의 심미안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자신밖에 없는 시마무라의 심미안은 표면의 현상만 보지만,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삶을 거쳐온 고마코의 심미안은 그 내부에 깃든 것을 보고 그것을 형성한 전체를 헤아린다는 것을. 그렇게 그는 절감했을 것이다. 진짜 아름다움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처럼 설국은 환(幻)을 얘기하지만 그것의 중독을 슬쩍 경고하는 소설이다.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을 추스리고 생을 다시 짊어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환(幻)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환(幻)은 시선으로 대상을 착취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대상과 내가 더불어 함께 한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삶에는 출근 길에 밟아야 하는 나신(裸身)의 눈 같은 것들이 있다. 무심코 흥얼거리는 노래 한 소절이나 기울이는 한 잔의 술에서 문득 떠올리게 되는 아름다운 추억들 말이다. 짧고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그런 추억 역시 겨울의 환(幻)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삶의 둔중한 타격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때로 그런 추억들이 절망하는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다시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우뚝 서게 해주었던 일이.

 '설국'에 한껏 배인 유려함은 바로 그러한 경험의 진짜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관통과 축적이 참된 아름다움을 만들고 그렇기에 삶에서 그냥 버려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설국이라 여기는 것. 이것이 정녕 작가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눈(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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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메카 2018-06-2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해준 작품이라는 것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죠.
소설의 배경이 니가타 현이라는데, 그 곳의 유자와 온천에 머물면서 쓴 소설이라 겨울에 여행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카페에 ˝설국˝을 소재로 한 모임도 있고 그 외에도 영화나 독서모임에 대한 여러 정보가 있어요. 관심있으시면 한 번 들려보세요.

˝설국˝ 선정모임
https://cafe.naver.com/moimmecca/3327

모임메카 카페
http://cafe.naver.com/moimmecca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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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다.

 나는 정녕 그렇게 여긴다. '저스티스맨'이란 제목과 모두 10명의 희생자가 나오는 연쇄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 소설을 얼른 스릴러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이다. 물론 피칠갑 된 살인이나 토막 사체 같은 것이 나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설 속 살인 장면 묘사는 그닥 무서울 게 없다. 연쇄살인범은 언제나 이마에 두 개의 탄흔만 깔끔하게 남긴다. 물론 빠져나온 탄환이 머리 뒤로 피의 무늬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만들어놓긴 하나 그건 범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다. 이야기 자체에 무서운 것은 전혀 없다. 거기다 독자에게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두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소설을 공포 소설로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바깥 현실에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소설의 언어와 재현을 통해 비로소 구체화 되고 명확해지는 것에서 오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아, 내가 느끼고 있던 무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오는 소름 같은 것 말이다. 소름은 불현듯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 몸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의 소름을 가져다 준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공포, 정체 불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체 확인에서 비롯되는 공포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글의 초장부터 공포 운운하느냐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당신을 위해 얼른 말하자면 그건 바로 악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한 학자의 말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윤리철학자 수잔 니먼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근대 사상의 악'이란 책에서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신에 대해 변론하게 만들었던 재난이기도 한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이 근대철학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근대 철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구별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 재해엔 의도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악 보다 자연 재해를 근대철학자들은 더 두려워했다.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 사전 예방이 가능한(그리하여 포이에르바흐는 예방에 기초하여 독일 형법을 최초로 정립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자연재해는 원인과 이유가 불명확하고 예측도 어려워서 예방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재해를 막는 것에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이제는 인간의 악 역시도 자연 재해만큼인 모호함과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의 계시였다. 여기에 대해 니먼은 이렇게 정리했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인류는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 놓인 심연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졌다. 처음엔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또 이민자이든지 간에 낙인이 찍히고 그에 따라 온갖 차별과 위해를 받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집단과 연계되어 이뤄졌을 뿐, 한 개인에 대한 심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이제는 제자리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마저 언제 어디서든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은 범죄처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지 않았다. 사소한 도덕적인 잘못이나 우연히 저지르게 된 실수마저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은 모든 사람이 예기치 않게 심판의 무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핸드폰으로 다른 이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것을 각종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아무런 규칙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이처럼 사생활의 보호막이 허약해진 우리들은 껍질 없는 갑각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조그만 악의로도 우리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이 행해지면 인격 살인마저 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잘 느끼고 있다. 인간의 악이라는 게 자연 재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실은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며 운이 좋아서 자연 재해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이 단지 불운과 아직 만나지 아니하여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 나를 익사시키는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아직은 내게 닥쳐오지 않아서 실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당사자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누군가 멋대로 찍어 올린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적인 명칭이 붙은 것을 보노라면 막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말이다. 다만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스티스 맨'이 바로 그것에 언어를 찾아주고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무차별이고 몰인정하며 예측 불허로 넘치는 인간의 악을, 거기서는 누구도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막연하게 두려워만 하고 있던 것을 이토록 확실한 형태로 섬세하게 세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열 개의 살인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아홉 개의 살인들은 실은 최초 희생자에게서 파생된 살인들이다. 그 최초 희생자란 사회가 정한 옷에 맞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맞추느라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만 만인에게 '오물충이 되어버린 '보험 설계사'와 우연한 일탈이 그만 치명적인 동영상으로 남게 되어버린 여고생 그리고 엄마와 단 둘이 잘 살아 보겠다는 사소한 욕망이 파멸의 굴레가 되어버린 펜션 여주인, 이렇게 셋이다. 이 세 명의 최초 희생자에서 파생되어 각각 세 건의 살인이 이뤄진다. 그렇게 아홉 개의 살인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최초의 희생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즉 '파생된 살인'의 피해자야 말로 연쇄 살인범이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최초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 또 때로는 별 것 아닌 흥미가, 또 때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이 일으킨 결과일 뿐이었다. 공포는 바로 여기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누구든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파생된 살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러한 악의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와 무차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세 사람에게 각각 얽힌 세 개의 살인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의 보험설계사는 자신과 불화 중인 '잿빛 무지개'와 같은 사회에서 비록 위태로울 망정 그래도 간신히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오물충'이 되기 바로 전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희생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경로를 걷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적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벗어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주체화의 경로는 죽음의 심판이 예정된 길이었다. 어째서?


 이 의문의 답은 조금 미루고 두 번째의 여고생을 일단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날로 쌓여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더위를 피해 냇물로 뛰어들듯 일탈을 감행했다. 냇물 속 수영이 실은 다시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듯, 그녀의 일탈도 본래는 자신의 삶을 더 잘 지속하기 위해 잠깐 뛰어든 '아른아른한 물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일탈이자 그 일탈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것과 똑같은 별 것 없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펜션 여주인도 다르지 않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에 스스로 취했던 '연보랏빛 안개'와 같은 소박한 욕망이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악행의 수위는 그녀와 많은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행한 이유 그대로 당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 것도 너무 엇나간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어떤 유형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유형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런 유형들은 알고 보면 과거 우리가 한 때 취했거나 현재 우리가 취한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보험설계사처럼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와 맞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 살아가며 또한 여행사에서 날아오는 팜플렛을 보며 여기 한 번 갖다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일탈을 꿈꾸고 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이기에 소설 속 희생자들이 결코 나와 별개로 여겨지지 않고 그런 자들에게 가차 없이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 소설이 한층 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다.

 왜 이런 우리의 경향과 사소한 동경 그리고 욕망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처음의 경우엔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 하려다 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게 아닌가? 작가의 전작 '스파링'은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저스티스맨'의 심판은 모순이 아닌가? 마치 그런 반론을 작가가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작가는 하나의 살인을 더 부가한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열 번째의 살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누가 희생되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 이유만 말하겠다. 그것은 오직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살인의 진실과 그 이유는 소설 거의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데, 거기서 다시 아홉 개의 살인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모든 상황마다 바로 이런 욕망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추동시킨 기저에는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 욕망을 바로 '권력 욕망'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욕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저스티스맨 카페'에 몰려든 수많은 누리꾼들처럼 날로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과가 바로 '불꽃'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같은 인간의 악이 메가 쓰나미처럼 일어난, 한 마디로 지옥도이다.


 잭슨 폴록의 '불꽃'


 사실 이 '불꽃' 장은 뜬금 없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분명 누군가의 상상일 터이나 그 주체가 특정되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이 '불꽃' 장 때문에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의 골격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작가가 그런 약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장을 구태여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의 묘사가 아홉 개의 살인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욕망의 최종적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의도란 분명 그러한 비극적 결과를 막기 위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대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로 열 번째 살인의 이유가 된 권력 욕망, 즉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적어도 자제하거나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첫 유형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심판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희생자 기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동안의 성공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순간(그렇게 자신의 삶에 온전히 주체가 된 순간)에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작 '스파링'과 완전히 모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자가 처형되는 것은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결심했으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향점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가고자 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으므로 단죄의 총알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주체로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저스티스 맨'은 '스파링'과 비교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파링'에서 삶의 주체가 되는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면, '저스티스 맨'에선 단순히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달리 더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력 욕망의 배제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 살인자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의한 바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p. 242)


 이처럼 모든 잣대가 사라진 시대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남을 이용해 나를 높이라는 권력 욕망이다. 어쩌면 그 명령이 너무가 강고하기에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잣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 또한 결국엔 유태인 말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자신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인간의 악 또한 권력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욕망의 근절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더욱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모든 악행이 끝내 똑같은 형태로 부머랭이 되어 돌아온 것에 있어서도 작가가 거기에 뒤집어 놓은 형태로 결부시킨 또 다른 해법 하나를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악행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의 선행 역시 그러하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대할 때, 나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이런 가운데 우리의 불안과 공포 역시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득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


 '저스티스 맨'은 피해자로 자임하고 있지만, 그래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바깥만 탓하고 있지만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우리 책임은 없는지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듯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궁극엔 왜 이 모든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첫 발자국을 바로 나부터 내딛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한.


 소설의 마지막은 비행으로 대지의 중력을 곧 벗어날 공항(그것은 곧 규격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해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의문과 사유에 빠져 있는 살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타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전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만들어 나간 존재가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듭 되돌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 이 모습을 마침표로 찍었을까 궁금했다. 분명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 게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말마따나 '결계처럼 제한된 규범의 세계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보는 일(p. 9)'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작가의 제안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저스티스 맨'은 토템과 부적이 되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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