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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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다.

 나는 정녕 그렇게 여긴다. '저스티스맨'이란 제목과 모두 10명의 희생자가 나오는 연쇄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 소설을 얼른 스릴러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이다. 물론 피칠갑 된 살인이나 토막 사체 같은 것이 나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설 속 살인 장면 묘사는 그닥 무서울 게 없다. 연쇄살인범은 언제나 이마에 두 개의 탄흔만 깔끔하게 남긴다. 물론 빠져나온 탄환이 머리 뒤로 피의 무늬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만들어놓긴 하나 그건 범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다. 이야기 자체에 무서운 것은 전혀 없다. 거기다 독자에게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두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소설을 공포 소설로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바깥 현실에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소설의 언어와 재현을 통해 비로소 구체화 되고 명확해지는 것에서 오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아, 내가 느끼고 있던 무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오는 소름 같은 것 말이다. 소름은 불현듯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 몸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의 소름을 가져다 준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공포, 정체 불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체 확인에서 비롯되는 공포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글의 초장부터 공포 운운하느냐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당신을 위해 얼른 말하자면 그건 바로 악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한 학자의 말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윤리철학자 수잔 니먼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근대 사상의 악'이란 책에서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신에 대해 변론하게 만들었던 재난이기도 한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이 근대철학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근대 철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구별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 재해엔 의도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악 보다 자연 재해를 근대철학자들은 더 두려워했다.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 사전 예방이 가능한(그리하여 포이에르바흐는 예방에 기초하여 독일 형법을 최초로 정립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자연재해는 원인과 이유가 불명확하고 예측도 어려워서 예방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재해를 막는 것에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이제는 인간의 악 역시도 자연 재해만큼인 모호함과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의 계시였다. 여기에 대해 니먼은 이렇게 정리했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인류는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 놓인 심연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졌다. 처음엔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또 이민자이든지 간에 낙인이 찍히고 그에 따라 온갖 차별과 위해를 받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집단과 연계되어 이뤄졌을 뿐, 한 개인에 대한 심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이제는 제자리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마저 언제 어디서든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은 범죄처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지 않았다. 사소한 도덕적인 잘못이나 우연히 저지르게 된 실수마저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은 모든 사람이 예기치 않게 심판의 무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핸드폰으로 다른 이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것을 각종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아무런 규칙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이처럼 사생활의 보호막이 허약해진 우리들은 껍질 없는 갑각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조그만 악의로도 우리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이 행해지면 인격 살인마저 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잘 느끼고 있다. 인간의 악이라는 게 자연 재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실은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며 운이 좋아서 자연 재해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이 단지 불운과 아직 만나지 아니하여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 나를 익사시키는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아직은 내게 닥쳐오지 않아서 실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당사자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누군가 멋대로 찍어 올린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적인 명칭이 붙은 것을 보노라면 막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말이다. 다만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스티스 맨'이 바로 그것에 언어를 찾아주고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무차별이고 몰인정하며 예측 불허로 넘치는 인간의 악을, 거기서는 누구도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막연하게 두려워만 하고 있던 것을 이토록 확실한 형태로 섬세하게 세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열 개의 살인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아홉 개의 살인들은 실은 최초 희생자에게서 파생된 살인들이다. 그 최초 희생자란 사회가 정한 옷에 맞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맞추느라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만 만인에게 '오물충이 되어버린 '보험 설계사'와 우연한 일탈이 그만 치명적인 동영상으로 남게 되어버린 여고생 그리고 엄마와 단 둘이 잘 살아 보겠다는 사소한 욕망이 파멸의 굴레가 되어버린 펜션 여주인, 이렇게 셋이다. 이 세 명의 최초 희생자에서 파생되어 각각 세 건의 살인이 이뤄진다. 그렇게 아홉 개의 살인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최초의 희생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즉 '파생된 살인'의 피해자야 말로 연쇄 살인범이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최초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 또 때로는 별 것 아닌 흥미가, 또 때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이 일으킨 결과일 뿐이었다. 공포는 바로 여기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누구든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파생된 살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러한 악의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와 무차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세 사람에게 각각 얽힌 세 개의 살인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의 보험설계사는 자신과 불화 중인 '잿빛 무지개'와 같은 사회에서 비록 위태로울 망정 그래도 간신히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오물충'이 되기 바로 전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희생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경로를 걷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적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벗어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주체화의 경로는 죽음의 심판이 예정된 길이었다. 어째서?


 이 의문의 답은 조금 미루고 두 번째의 여고생을 일단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날로 쌓여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더위를 피해 냇물로 뛰어들듯 일탈을 감행했다. 냇물 속 수영이 실은 다시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듯, 그녀의 일탈도 본래는 자신의 삶을 더 잘 지속하기 위해 잠깐 뛰어든 '아른아른한 물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일탈이자 그 일탈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것과 똑같은 별 것 없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펜션 여주인도 다르지 않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에 스스로 취했던 '연보랏빛 안개'와 같은 소박한 욕망이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악행의 수위는 그녀와 많은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행한 이유 그대로 당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 것도 너무 엇나간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어떤 유형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유형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런 유형들은 알고 보면 과거 우리가 한 때 취했거나 현재 우리가 취한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보험설계사처럼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와 맞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 살아가며 또한 여행사에서 날아오는 팜플렛을 보며 여기 한 번 갖다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일탈을 꿈꾸고 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이기에 소설 속 희생자들이 결코 나와 별개로 여겨지지 않고 그런 자들에게 가차 없이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 소설이 한층 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다.

 왜 이런 우리의 경향과 사소한 동경 그리고 욕망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처음의 경우엔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 하려다 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게 아닌가? 작가의 전작 '스파링'은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저스티스맨'의 심판은 모순이 아닌가? 마치 그런 반론을 작가가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작가는 하나의 살인을 더 부가한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열 번째의 살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누가 희생되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 이유만 말하겠다. 그것은 오직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살인의 진실과 그 이유는 소설 거의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데, 거기서 다시 아홉 개의 살인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모든 상황마다 바로 이런 욕망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추동시킨 기저에는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 욕망을 바로 '권력 욕망'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욕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저스티스맨 카페'에 몰려든 수많은 누리꾼들처럼 날로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과가 바로 '불꽃'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같은 인간의 악이 메가 쓰나미처럼 일어난, 한 마디로 지옥도이다.


 잭슨 폴록의 '불꽃'


 사실 이 '불꽃' 장은 뜬금 없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분명 누군가의 상상일 터이나 그 주체가 특정되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이 '불꽃' 장 때문에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의 골격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작가가 그런 약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장을 구태여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의 묘사가 아홉 개의 살인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욕망의 최종적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의도란 분명 그러한 비극적 결과를 막기 위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대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로 열 번째 살인의 이유가 된 권력 욕망, 즉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적어도 자제하거나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첫 유형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심판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희생자 기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동안의 성공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순간(그렇게 자신의 삶에 온전히 주체가 된 순간)에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작 '스파링'과 완전히 모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자가 처형되는 것은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결심했으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향점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가고자 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으므로 단죄의 총알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주체로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저스티스 맨'은 '스파링'과 비교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파링'에서 삶의 주체가 되는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면, '저스티스 맨'에선 단순히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달리 더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력 욕망의 배제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 살인자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의한 바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p. 242)


 이처럼 모든 잣대가 사라진 시대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남을 이용해 나를 높이라는 권력 욕망이다. 어쩌면 그 명령이 너무가 강고하기에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잣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 또한 결국엔 유태인 말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자신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인간의 악 또한 권력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욕망의 근절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더욱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모든 악행이 끝내 똑같은 형태로 부머랭이 되어 돌아온 것에 있어서도 작가가 거기에 뒤집어 놓은 형태로 결부시킨 또 다른 해법 하나를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악행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의 선행 역시 그러하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대할 때, 나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이런 가운데 우리의 불안과 공포 역시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득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


 '저스티스 맨'은 피해자로 자임하고 있지만, 그래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바깥만 탓하고 있지만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우리 책임은 없는지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듯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궁극엔 왜 이 모든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첫 발자국을 바로 나부터 내딛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한.


 소설의 마지막은 비행으로 대지의 중력을 곧 벗어날 공항(그것은 곧 규격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해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의문과 사유에 빠져 있는 살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타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전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만들어 나간 존재가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듭 되돌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 이 모습을 마침표로 찍었을까 궁금했다. 분명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 게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말마따나 '결계처럼 제한된 규범의 세계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보는 일(p. 9)'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작가의 제안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저스티스 맨'은 토템과 부적이 되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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