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외부의 감각으로 충만합니다.

 일본은 늘 단일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말해왔습니다. 바깥에 눈을 돌리지도, 외부에 있는 타자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는, 고인 물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일본이라고 말이죠. 그 풍경을 찟는 것. 그 틈으로 외부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 하스미 시게히코, 아즈마 히로키등 현재 일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풍경만을 유지한다면 일본에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고인 물의 미래가 썩은 물로 정해져있듯이 말이죠.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일까요?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많은 부분 외부에서 무언가가 엄습해 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얼른 기억나는 것은 2000년에 나온 '달의 뒷면'이군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를 독특하게 패러디한 이 소설은 곳곳에 뻗어있는 수로로 유명한 야나쿠로를 무대로 사람을 똑같이 복제하는 물 안의 무언가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는데 결국 두려워하던 타자로 '내'가 변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뒤에 나온 2004년 작, 'Q&A'도 그랬습니다. 쇼핑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하고 그러다 발에 밟히거나 떠밀려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아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원인은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고 그 여파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들로 점점 변해갑니다.


 이와 같이 온다 리쿠는 잊을만하면 느닷없이 출현한 정체불명의 타자와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변해버리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던 것 같습니다. 외부에 내가 노출되는 일이 나의 파괴가 아닌, 나의 구원이 되는 이야기를. 거기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2011년에 나온, '몽위'입니다.



 '몽위'는 '꿈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그 많은 관음보살 중에는 '몽위관음'이라는 보살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불길한 꿈을 꾸었을 때 이 관음보살에게 빌면 좋은 꿈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라는 군요. '몽위'는 바로 그 '몽위관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목대로 '몽위'는 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해 두죠. 소설은 꿈을 기계 장치를 이용해 타인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꿈이 깨고 나면 망각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 꿈을 녹화해두고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것을 '몽찰'이라 부릅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꿈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꿈의 해석.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가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꿈 자체를 영상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꿈'을 보고 진짜로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P. 28)


 '몽위'의 주인공인 히로아키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여성 때문이었습니다. 고토 유이키. 형의 약혼자지만 히로아키 자신도 정말 사랑했던 여자. 그녀는 일본인 최초로 예지몽을 꿀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는 늘 하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을 바꾸는 것. 늘 남의 불행을 예언하는 꿈을 더이상 꾸지 않는 것이었죠. 그 꿈으로 인해 삶이 너무 힘겨웠으니까요. '몽위'는 그녀의 절실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죽어버렸습니다. 10년 전, 예지몽으로 꾸었던 화재 사고를 막으려다 그만 자신도 그 화마에 휩싸여 버린 것이죠. 히로아키는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꿈해석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몽위'를 바랐던 그녀의 소망을 그런 식으로 뒤늦게나마 이뤄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 우연히 히로아키는 도서관에서 스치듯이 고토 유이키를 봅니다. 마지막에 목격된 모습 그대로 도서관의 복도에 문득 나타난 것입니다. 히로아키는 얼른 쫓지만 모퉁이를 돌자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히로아키는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한 학교에서 같은 아이들 모두가 동일한 꿈을 꾸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건 교실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는데 거기 있었던 반 아이들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걱정된 부모들이 의뢰를 해왔고 결국 아이들 모두의 꿈을 몽찰하기로 결정납니다. 바로 그 일을 히로아키가 맡게 됩니다. 몽찰을 해보니 그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통의 인물이 있었고 결국 그 인물이 바로 죽은 고토 유이키라는 게 밝혀집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의 꿈과 고토 유이키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이 이번엔 아예 학교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라지는 사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 무리의 운전자들 역시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몽위'는 이런 이야기 입니다. 후반까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몽찰이 가능해진 시대에 대한 묘사도 꽤나 디테일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욱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 자체에 몰입시키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여기서도 한껏 발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결국 히로아키는 '달의 뒷면'과 'Q&A'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단일한 자기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꾸는 꿈처럼 한결 같았던 풍경이 찢어지고 그 틈새로 바깥의 타자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죽은 고토 유이키의 유령을. 그렇게 완전 바깥의 타자를.


 아마도 히로아키를 꿈해석자로 만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일이니까요. 진정한 해석은 언제나 해석하려는 대상 안으로 최대한 들어갔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그 내부로 들어가 타자의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참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죠. 정신분석에 있어 꿈의 해석이 그렇지 않던가요? 분석가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피분석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던가요? 공교롭데고 히로아키의 해석은 '꿈을 읽는다'는 점에서 독서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온다 리쿠는 굉장한 독서가로 유명하지요. 반드시 1년에 200권은 꼭 읽는다고 하던가요? 아무튼 그녀의 작품엔 사실 왕성한 독서가로서의 그녀의 경험이 밑받침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에 외부의 감각이 충만한 것도 그 때문이죠. 무엇보다 읽기란 포르투칼의 시인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했듯이 '타인의 손을 통해 꾸는 꿈'이니까요. 들뢰즈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타자-되기'의 과정이라고.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일입니다. 독서가 여전히 유용독하다면 쾌락이 아니라 경험의 폭을 한껏 넓혀주기 때문이겠죠. 수많은 '타자-되기'의 경험들을 통해서 말이죠. 이해의 깊이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섰을 때 가장 깊어지는 법입니다. 독서를 하게 되면 세계와 타인에 대한 헤아림의 수심이 깊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테죠.  과연 히로아키와 같은 꿈해석자들은 '몽찰 멀미'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몽찰 멀미'가 뭔고 하면 몽찰을 너무 많이 해서 꿈과 타인의 몽찰 혹은 현실과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죠. '몽찰 멀미'는 꿈과 현실을 뒤섞어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절대적인 경계로 나뉘어 있던 것들을 말이죠. 들뢰즈가 읽기를 정의했던 것, 즉 '타자-되기'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꿈과 현실이 뒤섞이듯, 나와 타자가 뒤섞이게 됩니다. 소설에서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이 자주 나오는 것도 바로 이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죠. 그 덕분에 결국 히로아키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저 너머의 진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온다 리쿠는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과도 같았던 '몽위'는 진정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 것인가를 아주 제대로 보여줍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꿈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꿈을 바라보는 나를 바꾸는 데 있음을. 똑같이 보는 대상인 타자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타자를 바라보는 나를 변화시키는 게 나를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진정한 '몽위'임을 말이죠.


 온다 리쿠의 '몽위'는 문득 다가온 부드러운 기척처럼 그 홀연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정입니다. 여정이라고 한 것은 이 소설이 결말의 재미를 향하여 치닫는 소설이 아니라 과정에 더욱 집중하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향의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늘 그랬죠. '달의 뒷면'도 'Q&A'도. 결말에서 플롯의 긴장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나아가는 그 단계 자체에 독자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사실 변화라는 게 다 그렇죠. 어디까지나 '시간의 체험'이니까요. 세잔느가 그토록 많은 정물화를 그렸던 것은 시시각각 이뤄지는 사물 표면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 시간 속에 나를 내어주고 참여하기 위함이었죠. 히로아키가 꿈해석자라면 모든 미스터리를 낳는 존재인 고토 유이키는 '꿈참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예지몽 또한 단순한 꿈이 아닌 미래의 그 시간을 뚝 떼어다 현재화시킨 것이었죠. 그렇게 고토 유이키는 세잔느처럼 그 시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그녀가 경계 저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변화가 무엇보다 '시간의 체험'이라는 것을 온다 리쿠 스스로도 나타내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즉 그녀 스스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도 그러한 참여가 되도록 원하고 있음이 뒷받침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몽위'는 하나의 부름입니다. 저 창 밖에서 부르는.

 아마도 읽고나면 스스로 창문을 열고 그 부름에 화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한 편, '몽위'로 더욱 깨달았습니다. 온다 리쿠는 미스터리로만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작가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공동체를 두고 이것저것 실험하고 헤아려 보는.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3년에 나온 '밤의 밑은 부드러운 환상'도 빨리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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