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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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어둠과 빛을 분리한 것처럼 모든 걸 구분지었다. 언어의 구현과 같았던 빛은 분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물에서 육지를 분리했고 육지에서 나무를 구분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개별로 갈라놓았다. 명령자는 자신의 화신과 같은 남성 존재를 통해 모든 분리된 개체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작업을 완수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 또 이름을 주는 자와 받는 이로 나뉜 것처럼 명명은 순수한 행위로만 남지 않았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명명(命名)에 따르는 규정이 틀이 되어 명명 받는 자를 속박했으니까 말이다. 명명은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처럼 금지였다. 스스로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물의 결정인 눈과 같았다. 한없이 유동의 존재였던 그것은 규정에 포박되어 존재에 내포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잃고 단순한 객체로 고정되고 말았다. 그건 흡사 부검대 위에 올려진 생명이 떠나간 주검과 같았다. ‘도둑 자매’에 나왔던 엄마의 사체와 다름없는. 눈(snow)은 물의 사체(死體)였다. 명령과 금지 위에 세워진 에덴을 신은 누구도 자신의 허락없이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둘렀다. 순응 아니면 추방일 뿐이었다.


 그런 엄혹한 독재 체제 안에서 은 최초의 저항자였다. 그는 속삭였다. 규정을 벗어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너의 바깥이 존재한다고. ‘1979’에서 교사가 본 ‘미숙한 거인’인 소녀가 교사에게 했던 것처럼, 네가 절대라고 믿는 세상이 실은 망상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뱀의 말에 현혹된 최초의 인류는 황무지로 추방되었다. 그 곳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 나온 ‘스키타이족의 무덤’이었 ‘얼이에 대해서’에 나왔던 ‘반두’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곳. 최초의 여성 이브가 에덴에 머물러 있었다면 늘 신의 화신인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있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다면 이브에게 추방은 마냥 형벌인 것일까 아니면 구원인 것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정체성이 아닌, 주입된 혹은 강요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때로 그 정체성이란 옷이 나와 맞지 않아 답답하거나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뱀이 다가와 달리 살 수 있다는 바깥이 있으며 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까? 나는 이런 질문을 가진 가운데 '뱀과 물'을 읽었다.


 갑자기 창세기 이야기부터 하게 된 것은 ‘뱀과 물’의 첫 단편인,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가 그것을 많이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단편에서 처음 소년으로 나왔던 아이는 소녀로 밝혀지는데, 그가 소년을 가장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밤마다 ‘눈 아이’라는 빨치산 소녀에 대한 책도 읽어주는데, 그것은 저항하다 화형 당한 소녀의 이야기다. 그렇게 소녀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해 정체성을 규정당했고 저항은 곧 죽음이라는 메세지를 주입 당했다. 그런 아버지의 직업이 독립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눈 표범의 조련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소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존재라는 걸 더 뚜렷이 나타낸다. 더구나 에덴과 똑같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부재하고 있다. 그것은 선악과와도 같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소녀가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아동심리학자다. 그녀는 무엇보다 신체가 매우 장신인데, 이러한 길이는 아무래도 뱀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소녀에게 주로 하는 것이 질문인 것도 그러하다. 창세기 속 뱀이 이브에게 주로 한 것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뱀이 그렇게 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것처럼 여성 아동심리학자는 질문을 통해 독립적인 자기 존재의 인식을 가져왔던 선악과와 똑같이 소녀가 그때까지 잘 떠올리지 않았던 진정한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게 만든다. 그와 함께 여성 아동심리학자 소녀를 경찰로 상징되는 문명의 세계에서 추방하여 세찬 물살의 강이 있는, 물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뱀이 가져다 준 단절과 똑같이 말이다. 그 단절을 통한 탈주에 있어 뱀이 동기를 부여하는 새로운 인식의 근원이라면, 물은 지향점이 되는 새로운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닮은 점이 나로 하여금 창세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뱀과 물'의 단편들은('1979'에서 교사가  부동산 업자의 말 때문에 자신이 산 집이 실은 황무지에 있는데도 '과수원'에 있다고 믿은 것처럼.) 우리가 무엇보다 서사(敍事)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첫 단편이 창세기의 외양을 띠는 것은 창세기가 우리의 현재 정체성을 구현한 근원적인 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뱀과 물'은 거기에 '1979'에 나오는 키 큰 소녀와 리우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멍을 뚫고 균열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 뭐든 다 분명해 보이는 환한 대낮과 같은 세상에 구분과 분리가 불가능한 거무스름한 어둠을 가져온다. 그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지금의 자리가 스스로 선택한 의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사령관이 어디선가 가져와 앉힌 의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의자를 이루고 있는 서사가 어린 시절에 여겼던 것처럼 진실이라 믿었지만 그건 기실 애니메이션에 흔히 나오는, 발판이 있는 줄 알고 걸었는데 뒤늦게 자신이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처럼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뱀과 물'은 바로 그것을 보도록 한다. 우리의 발 아래에 진짜 놓여 있는 것을.


 그런 세상은 생각한 것만큼 단일하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뱀의 존재들이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그저 단단한 벽으로만 이 세계가 실은 '물의 결정'에 다름아니라고 얘기한다. 서사가 그것을 결빙시켜 벽처럼 여기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단편에서 학교가 공통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원하는 규격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기관이 아니던가. 아버지에게서 주입된 서사는 그 곳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그럴수록 어머니로 상징되는 바깥의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의 뇌리 속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옅어진다. '1979'에서 교사의 동생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을 고향이라 말한 까닭도 그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은 본래 무규정적이다.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만큼이나 가능성이 무한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적히지 않는 페이지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입된 서사는 어린 시절을 하나로 고정해선 그것을 전부라 여기게 만들었다. 산포 가능한 것들을 모조리 붙잡아 억지로 한 줄로 세우곤 언제까지나 하나의 규정 속에 가둬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망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망상을 만든 이들이 형성한 세상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빛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그 빛으로 그들이 만든 것은 획일화된 세계일 뿐이었다. '도둑 자매'에 나오는 바다가 대표적이다. 그 단편의 두 소녀는 문명의 상징인 지프를 운전하는 남자에 의해 바다로 간다. 하지만 그 바다는 태고적 바다가 아니다. 유동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배출하는 곳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것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은 획일적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제철소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그 곳은 아이들이 일률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군인처럼 행동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사냥개는 돼지 장수와 같은 이질적은 존재를 찾아다녔다. '도둑 자매'의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들과 닮지 않으면 매장된다. 그 세계는 결코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뱀과 물'의 여교사는 그 세계에 순응하기로 한 이들의 미래에 단 하나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타자들을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규격에 맞도록 길들이는 일이다.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것처럼 남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연필이나 깎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뱀과 물'은 이런 세상을 흔들고자 한다. 그건 우리가 안주하려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단편과 '얼이에 대해서'처럼 세계의 서사를 뒷받침 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1979'가 그러하다. 소설이 왜 하필 이걸 제목으로 가져왔을까? 그 의도에 대해 소설은 딴 척을 한다. 소설은 이란의 레자 팔라비 국왕의 추방으로 그런 아버지의 사라짐이 소설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지만 정말은 다른 걸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1979년은 오랜 독재로 국민들을 이렇게 저렇게 멋대로 규정하면서 아버지로 군림한 박정희가 살해된 해이니까 말이다. 돌연한 아버지의 퇴장을, 그렇게 자기 세계의 뿌리가 잘려가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현실로 경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망상을 진실로 간주하고 안주하려고 해도 거기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기필코 찾아오고야 마는 어스름의 시간처럼 우리를 구현하고 있는 서사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언제고 하게 된다. 단편 '뱀과 물'에서 기존 정체성의 연극을 중단시킨 콜레라의 창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확고할 수록 우리는 의심해야 하며,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에 맞서 분열된 자아로 남아야 한다. 한 쪽은 현실을 보면서도 다른 한 쪽은 그 너머의 바깥을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노인 울라에서' 이후 '뱀과 물'까지 자아의 분열이 계속 나타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나는 이 분열을 순응의 태도(어느 한 쪽이 사라지고 그 결과 남은 한 쪽이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인 울라에서'의 화자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남성 중심 문화에 저항하는 뱀과 같은 존재이기도 한 '흉노 마녀'가 화형을 당하자 자신이 그대로 사라졌다(p. 146)고 말한다. '도둑 자매'에서는 '포항 미스코리아 대회'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뻐드렁니'를 숨긴다. '뱀과 물'에서는 아예 자신과 같은 여성을 남성 문화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여교사가 되어 있다. 그들에겐 모두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순응을 위해 그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로 해석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열은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한 매개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라졌지만 소멸된 것이 아니고 '도둑 자매'의 어머니 얼굴에 난 네이팜탄 자국처럼 그 잔영을 남긴다는 점에서 봉합은 끝내 실패하는 것으로 봐야했다. 그러므로 분열, 그 자체가 진짜 의미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로 여기지 않을 것. '얼이에 대해서'나 '뱀과 물'에서 시간이 선형적으로 나오지 않듯이, 자아 역시 다양체로 생각할 것.(연속된 시간에 대한 감각과 자아에 대한 감각은 유사하다. 모두 가장 획일화된 감각이니까 말이다.) 소설의 세계가 '노인 울라에서'에서 흉노 여왕에 대한 불길한 소문으로, '도둑 자매'에선 소녀들의 노래로 그리고 '뱀과 물'에선 이런 저런 공상으로 뒤덮이듯이, 그런 균열과 붕괴의 조짐 앞에 자신을 적극 내밀 것('뱀과 물'에서 전학생 길라가 우연히 만난 스님은 이 소문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맞다, 소문은 해치지 않는다. 거꾸로 탈주를 돕는다.).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나 안의 타자를 생성하는 데 인색하지 말 것을 말이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화자가 시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읊는 것처럼. 그런 그녀가 바랐던 그대로 여행자가 되는 것. '뱀과 물'은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는 여정이었다.


 때로 세상엔 너무 환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어스름 가운데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 진실은 명확한 문자가 아니라 암호처럼 해독 불가능한 문자들 사이에서 보다 더 드러날 때도 있다. 유동하는 물과 같은 세상에선 뭐든 가능하다. 우리의 존재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고 있었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서사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맞게 멋대로 이리저리 잘라내고 비틀어 그 바깥은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뱀과 물'은 새로운 서사를 주려 한다. 그것은 '얼이에 대해서'와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선로에 가로 누워 있던 것처럼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온전히 인정하고 놓아두는 서사이다. 개체를 특정 범주에 넣지 않으며, 개체 그대로 존중하는 서사이다. 자기가 원하는 옷을 타자에게 입히는 서사가 아니라 직관 속에서 타자의 나신(裸身)이 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서사이다. '뱀과 물'은 그런 이종(異種)의 서사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태초의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건 마지막 단편에서 화자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 구현되어 있다. 그런 서사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날로 깊어가는 이 시대에, 어디서나 나보다 더 큰 것에 기생하여 그들의 권력에 힘입은 정주(定住)의 열망을 가열차게 드러내는 이 시기에, 거기에 반대하여 점이 아니라 흐름이 되라고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길, 글쓰기엔 흐름 이외에 다른 기능이 없고 흐름은 돌연변이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뱀과 물'도 바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뱀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것 같다. 예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환영하는 세상. 보다 많고 다양한 돌연변이의 출현이 가능한 세상. 새로이 만난 뱀의 말에 설득된 나는 그런 세상이 얼른 오기를 기꺼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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